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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의 아픔을 넘어서

느헤미야 9: 1 ~ 6

김지철 목사

2010.08.08

인생에는 변화가 안 되는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쓴 기도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은 평온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바꿔야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이것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바꿔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변화가 안 되는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사실은 어느 순간에도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남자요 여자라고 하는 사실도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꿀 수 있고 변화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을렀던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목표 없이 이리저리 방황했던 삶을 꿈과 비전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관계 또한 더 멋지고 아름답게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성품 또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면서 이제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새롭게 사용해달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연약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릴 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헤미야 9:3)

낮의 사분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 낮 사분의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은 예배드릴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 일어나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을 때 나 자신의 연약함과 교만함, 이기적인 속성들을 확인하면서 내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못난 나를 불러주시고, 나를 아들과 딸이라고 부르시며 나를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내게 새로운 삶의 자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의 내용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 공동체 속에 말씀을 들으면서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회개란 인간의 부끄러움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면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과 단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단절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이먀 9: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차이가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 하는 것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짓과 불의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웃이 연약할 때는 조롱했고, 이웃이 힘이 있을 때는 비겁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불의와 쉽게 타협하는 적당주의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보는 노예근성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애쓰는 부지런함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일까?’라는 생각에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두렵고 떨림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어떤 분이 자신이 고등학교 다녔을 때의 아팠던 모습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홀어머니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학교 참고서를 살 돈은 고사하고 늘 먹고 사는 것부터 고민해야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참 끔찍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늘 학교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말썽을 피울 때마다 선생님은 제게 반성문만 써오면 퇴학은 면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선생님께 대들었습니다. “선생님, 나를 좀 내버려두세요! 선생님이 나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때 선생님께서는 내 어깨를 움켜잡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 나는 많은 아이들을 봐 왔단다! 너는 결코 이렇게 살 놈이 아니야! 난 알아! 너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자신을 속이지 마!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넌 너의 인생이 있단다! 넌 특별한 존재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랬을까요? 저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만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한참을 엉엉 소리 내면서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이 변화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인간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내 속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내 속에는 못된 것이 많습니다. 내 속에는 거짓이 있습니다. 내 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내 속에는 교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이미 너를 용서하지 않았니?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너를 사용할 수 있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널 좋아한단다. 넌 변화될 수 있어. 네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지 않겠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요? 스바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복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고 기뻐하시며 너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단절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는 단절이 뒤따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내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이방인과 함께 먹고 노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익숙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그렇게 거리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그것이 꺼려지고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것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게 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이방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미래를 바라보며 “와!”하고 탄성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프레드릭 뷰크너가 정의한 회개가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한다기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과거를 돌아보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이렇게 탄성하는 것이다. ‘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구나! 나 혼자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와! 내가 보통존재가 아니었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구나!’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지금까지 누렸던 것, 지금까지 즐겼던 세속적인 쾌락들을 잘라버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면 그들이 회개할 때 두 가지 감정적인 것이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슬픔입니다.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어둠 속에 있었던 세월이 통탄스럽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절이 비통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마음에 평안이 없었던 것이 안타깝기 때문에 통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쁜 마음, 감격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찾아오시고 빛의 세계로 인도해주셨다는 것, 나를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초청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으로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나님은 용서가 가득하신 귀한 존재이시다!”라고 노래하게 하시고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감격의 기쁨을 우리 가슴 속에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을 내게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사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갔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것들을 잘라내십시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지속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것들, 잡다한 것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지 않은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그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세상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누렸던 쾌락이 잠시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돈도 떨어졌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밥통 속에 입을 갖다 댔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기억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되돌아갔습니다. 그 때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와 습관, 가치관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다시 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옛 가치관과 습관을 가지고 산다면 거기에는 참된 평안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기쁨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아직까지 옛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옛 생각과 옛 가치관들, 옛 습관과 삶의 찌꺼기들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앙은 부지런해지는 것입니다. 만성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면 깨뜨려야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 새벽기도를 나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마음속에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을 막는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두렵기보다 사람의 시선과 비난이 더 두려워서 우리의 삶이 멈칫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더 크신,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의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모든 옛 것을 잘라버리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핸드폰이 없으면 하루를 살수 없는 사람들,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한나절, 아니 하루를 핸드폰과 인터넷으로부터 잘라버릴 수 있는 마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옛것이 나를 따라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삶의 내용들은 없습니까? 지금도 사주팔자를 보며 점치는 집을 찾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문을 볼 때 오늘의 운세를 보지 마십시오. 오늘의 운세가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진 인생이지 않습니까? 점치는 것 뒤에는 사탄이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유자라는 축복을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 안에 남의 것을 탈취해서 마치 내 것처럼 사용하며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모습은 없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밀회를 하면서 잠깐의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은 혹 없습니까? 그런 것이 있을 때 잘라버려야 합니다. 자르는 것은 언제나 아픕니다. 그러나 더 큰 자유, 더 큰 기쁨, 더 큰 축복을 위해서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자유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과 단절함으로 참 기쁨을 얻으십시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나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과 단절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집안 걱정, 세상의 유혹,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요 생명인 것을 가슴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은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욕심으로 인생을 바라보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자연 만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유혹하는 이방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었다고 말씀합니다. 때로 나를 유혹하고 어둠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친구와의 관계를 단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참된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와!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하고 가슴으로부터 감격스럽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잘라버리고 하나님의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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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9: 1 ~ 6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인생에는 변화가 안 되는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쓴 기도문입니다.

“주님,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은 평온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바꿔야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옵소서.”

이것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바꿔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변화가 안 되는 것이 있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사실은 어느 순간에도 바뀌지 않습니다. 내가 남자요 여자라고 하는 사실도 바뀌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꿀 수 있고 변화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게을렀던 나의 모습에서 벗어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목표 없이 이리저리 방황했던 삶을 꿈과 비전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관계 또한 더 멋지고 아름답게 바꿔나갈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성품 또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면서 이제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새롭게 사용해달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연약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릴 때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헤미야 9:3)

낮의 사분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 다음 낮 사분의 일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은 예배드릴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때 일어나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을 때 나 자신의 연약함과 교만함, 이기적인 속성들을 확인하면서 내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못난 나를 불러주시고, 나를 아들과 딸이라고 부르시며 나를 사랑한다 말씀하시고, 내게 새로운 삶의 자격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의 내용입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 공동체 속에 말씀을 들으면서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회개란 인간의 부끄러움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면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과 단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단절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이먀 9: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차이가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 하는 것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거짓과 불의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이웃이 연약할 때는 조롱했고, 이웃이 힘이 있을 때는 비겁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복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불의와 쉽게 타협하는 적당주의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보는 노예근성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수고하고 땀 흘리며 애쓰는 부지런함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일까?’라는 생각에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두렵고 떨림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어떤 분이 자신이 고등학교 다녔을 때의 아팠던 모습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홀어머니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학교 참고서를 살 돈은 고사하고 늘 먹고 사는 것부터 고민해야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참 끔찍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공부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늘 학교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말썽을 피울 때마다 선생님은 제게 반성문만 써오면 퇴학은 면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선생님께 대들었습니다. “선생님, 나를 좀 내버려두세요! 선생님이 나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때 선생님께서는 내 어깨를 움켜잡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들어! 나는 많은 아이들을 봐 왔단다! 너는 결코 이렇게 살 놈이 아니야! 난 알아! 너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다는 걸 난 알아! 자신을 속이지 마!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넌 너의 인생이 있단다! 넌 특별한 존재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랬을까요? 저는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만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한참을 엉엉 소리 내면서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내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의 한마디에 인생이 변화되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로도 인간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내 속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내 속에는 못된 것이 많습니다. 내 속에는 거짓이 있습니다. 내 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내 속에는 교만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내가 이미 너를 용서하지 않았니?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너를 사용할 수 있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널 좋아한단다. 넌 변화될 수 있어. 네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지 않겠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요? 스바냐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복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고 기뻐하시며 너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고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단절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는 단절이 뒤따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내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게 하는 것들을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이방인과 함께 먹고 노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익숙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그렇게 거리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 그것이 꺼려지고 불편해졌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것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게 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이방사람들과 교제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미래를 바라보며 “와!”하고 탄성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프레드릭 뷰크너가 정의한 회개가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한다기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과거를 돌아보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보다 미래를 바라보고 이렇게 탄성하는 것이다. ‘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구나! 나 혼자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구나! 와! 내가 보통존재가 아니었구나!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구나!’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지금까지 누렸던 것, 지금까지 즐겼던 세속적인 쾌락들을 잘라버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면 그들이 회개할 때 두 가지 감정적인 것이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슬픔입니다. 아픔이요 고통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동안 어둠 속에 있었던 세월이 통탄스럽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시절이 비통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마음에 평안이 없었던 것이 안타깝기 때문에 통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쁜 마음, 감격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찾아오시고 빛의 세계로 인도해주셨다는 것, 나를 진정한 자유의 세계로 초청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으로는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나님은 용서가 가득하신 귀한 존재이시다!”라고 노래하게 하시고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는 감격의 기쁨을 우리 가슴 속에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평안을 내게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사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갔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 것들을 잘라내십시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지속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것들, 잡다한 것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쁘지 않은 것들을 잘라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그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세상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무너지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누렸던 쾌락이 잠시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돈도 떨어졌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밥통 속에 입을 갖다 댔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기억나 아버지의 집을 향해 되돌아갔습니다. 그 때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고와 습관, 가치관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다시 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옛 가치관과 습관을 가지고 산다면 거기에는 참된 평안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기쁨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아직까지 옛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옛 생각과 옛 가치관들, 옛 습관과 삶의 찌꺼기들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앙은 부지런해지는 것입니다. 만성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면 깨뜨려야 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 새벽기도를 나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며 말씀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마음속에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을 막는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두렵기보다 사람의 시선과 비난이 더 두려워서 우리의 삶이 멈칫거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보다 더 크신,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의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모든 옛 것을 잘라버리려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핸드폰이 없으면 하루를 살수 없는 사람들, 인터넷에 중독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한나절, 아니 하루를 핸드폰과 인터넷으로부터 잘라버릴 수 있는 마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옛것이 나를 따라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삶의 내용들은 없습니까? 지금도 사주팔자를 보며 점치는 집을 찾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문을 볼 때 오늘의 운세를 보지 마십시오. 오늘의 운세가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멋진 인생이지 않습니까? 점치는 것 뒤에는 사탄이 깔려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유자라는 축복을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 안에 남의 것을 탈취해서 마치 내 것처럼 사용하며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는 모습은 없습니까?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밀회를 하면서 잠깐의 쾌락을 즐기려는 마음은 혹 없습니까? 그런 것이 있을 때 잘라버려야 합니다. 자르는 것은 언제나 아픕니다. 그러나 더 큰 자유, 더 큰 기쁨, 더 큰 축복을 위해서 자기를 조절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자유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세상과 단절함으로 참 기쁨을 얻으십시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러 나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과 단절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집안 걱정, 세상의 유혹,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요 생명인 것을 가슴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과 단절하라는 말은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욕심으로 인생을 바라보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자연 만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유혹하는 이방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었다고 말씀합니다. 때로 나를 유혹하고 어둠의 골짜기로 몰고 가는 친구와의 관계를 단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참된 기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와! 그것이 얼마나 좋은가!”하고 가슴으로부터 감격스럽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잘라버리고 하나님의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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