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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에 내버려두사

로마서 1: 24 ~ 32

김지철 목사

2015.07.05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인간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물인 인간이 파괴됐다.” 이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 만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겠다”고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피조물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인 세상 것을 숭배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모든 인간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든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든지 말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는 쪽으로 자꾸만 몰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상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겉으로는 우상을 경배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주인이고 우상은 내 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상이 나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주도권이 내게서 우상에게로 넘어간 뒤입니다.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우상의 지배를 받는 가치관이나 영역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아니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의 불경건,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을까요? 오늘 본문에 세 번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4절, 26절, 28절에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불경건과 불의 속에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아,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징계를 내릴 수도 있지만 일단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행한 악이 얼마나 더 큰 악을 만들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멈추지 못하여 악이 더 큰 악을 향해 치닫게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가졌던 생각은 아주 뚜렷했습니다. “아버지, 내 몫을 주세요.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겠습니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아버지는 도통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젊을 때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께 저항하는 말을 하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결심한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안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을 나간 인간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셔서 인간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능의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관심의 증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이고,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인간이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경건하지 않음’, 곧 불경건이란 나와 하나님의 수직적인 관계가 어긋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죄입니다. 그리고 ‘불의’라는 것은 나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가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배려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남을 어렵게 하고 남에게 잔인하게 구는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십계명으로 이를 설명한다면, 불경건은 일계명부터 사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고, 불의는 오계명부터 십계명에 나타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불경건과 불의는 결코 우리를 세우지 못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죽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영적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는 무너지고 우리의 육체까지 망가지게 되었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참담합니다.

로마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이 들어있지만,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아직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왜 복음이 필요한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어야 했는지, 우리가 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이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때 얼마나 망가지는 존재인지를 먼저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으면, 피조물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피조물에 집착하며 거기에 모든 것을 걸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상처 나고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또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된 인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삶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비뚤어진 모습 그대로, 즉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8)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도록 가만히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엄청납니다. 무려 21개에 달하는 죄악의 목록들을 바울은 이어서 기록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로마서 1:29~31)

나는 이 목록에서 자유롭습니까? 나는 이 악의 목록과는 관계가 없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죄악과 불의에 빠져 있다고 소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함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며 놀랍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 속에 이런 악들이 있구나.’ 그렇습니다. 악의 목록에 나타난 것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 할 때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래서 우리 또한 경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죄가 가까워집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삶에 굵은 금이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다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고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피조물임을 확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으니, 세상 것에 집착하고 붙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과도한 욕망이 마치 주인이 종을 부리듯 나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게 되었고 어려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됨의 축복을 스스로 손상시켰습니다. 그 첫 번째가 몸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몸을 마구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것은 성적인 쾌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4)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정욕’은 헬라말로 ‘도에 넘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통제되지 않는 욕망입니다. 특히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정욕입니다. 몸을 서로 욕되게 했다는 것은 남녀 간에 성적인 문란과 타락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타락할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유혹이 바로 성적인 유혹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보면 성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의 경험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충동적으로 이끕니다. 쾌락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중독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남녀의 성적인 타락은 부부가 맺은 약속을 파괴하고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매우 소중하지만, 자기 절제와 통제가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성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남녀 간의 성적인 문란이 동성 간의 성적 문란과 타락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 (로마서 1:26~27)

여기에서도 ‘내버려 두다’는 표현이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욕망과 성적인 정욕에 의해 살아갈 때 어떻게 되는지 그냥 두고 보신 것입니다.
성경은 동성애의 탐욕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우선 우정을 예찬합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정이 성적 행위와 결합하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우정을 음욕으로 바꾸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동성애적 경향이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포기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악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처음 남자만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창조의 질서와 섭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 땅에 번성하라. 이 땅에 충만하라’며 창조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자녀를 낳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누리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동성애의 결혼을 헌법으로 용인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된 결정이라고 박수를 쳤고,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며 경악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의 순리를 거절하고 창조의 섭리를 파괴시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법칙을 어깁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32)

악은 악을 조장합니다. 혼자 악을 행하기 싫어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며 부추깁니다. ‘너도 나와 함께 악의 친구가 되자!’며 악을 전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인간관계에 거짓과 시기가 있습니다. 탐욕과 교만이 있습니다. 불륜의 자리를 경험한 존재들입니다. 동성애의 죄악을 범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거짓, 남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마음, 음란의 죄악 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십니다. 주님께 그 모든 죄악들을 토해 놓고 변화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꾸라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교만과 음란의 죄악으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의 자리에 있다면 그곳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망가진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자리가 바로 이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역사, 새 생명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악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고 나부터 변화되는 것, 죄악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주위 사람들을 사랑으로 도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으로 충만하여 우리가 함께 정결하고 깨끗한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죄는 죄이나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정결한 신부처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나의 모습을 토해 내고 용서받고 새롭게 고침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결하게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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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24 ~ 32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인간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인간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물인 인간이 파괴됐다.” 이것이 바울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 만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겠다”고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피조물의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인 세상 것을 숭배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모든 인간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든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든지 말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는 쪽으로 자꾸만 몰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상은, 인간이 필요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겉으로는 우상을 경배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주인이고 우상은 내 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상이 나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는 이미 주도권이 내게서 우상에게로 넘어간 뒤입니다.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우상의 지배를 받는 가치관이나 영역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아니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의 불경건, 인간의 불의에 대해서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을까요? 오늘 본문에 세 번 반복되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4절, 26절, 28절에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불경건과 불의 속에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아,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징계를 내릴 수도 있지만 일단 지켜보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행한 악이 얼마나 더 큰 악을 만들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체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멈추지 못하여 악이 더 큰 악을 향해 치닫게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가졌던 생각은 아주 뚜렷했습니다. “아버지, 내 몫을 주세요.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겠습니다.” 그의 이러한 결심을 아버지는 도통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젊을 때 그렇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께 저항하는 말을 하기도 하고, 내가 무언가를 결심한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안 들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내버려두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을 나간 인간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셔서 인간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무능의 표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관심의 증거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이고,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인간이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리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경건하지 않음’, 곧 불경건이란 나와 하나님의 수직적인 관계가 어긋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죄입니다. 그리고 ‘불의’라는 것은 나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가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결핍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배려하기보다는 이기심으로 남을 어렵게 하고 남에게 잔인하게 구는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십계명으로 이를 설명한다면, 불경건은 일계명부터 사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고, 불의는 오계명부터 십계명에 나타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불경건과 불의는 결코 우리를 세우지 못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죽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영적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는 무너지고 우리의 육체까지 망가지게 되었다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참담합니다.

로마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내용이 들어있지만,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아직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전에 왜 복음이 필요한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셨어야 했는지, 우리가 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이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때 얼마나 망가지는 존재인지를 먼저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으면, 피조물을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피조물에 집착하며 거기에 모든 것을 걸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상처 나고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 또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된 인간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삶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비뚤어진 모습 그대로, 즉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8)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도록 가만히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악은 엄청납니다. 무려 21개에 달하는 죄악의 목록들을 바울은 이어서 기록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로마서 1:29~31)

나는 이 목록에서 자유롭습니까? 나는 이 악의 목록과는 관계가 없다고 쉽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죄악과 불의에 빠져 있다고 소리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악함을 비추는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며 놀랍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 속에 이런 악들이 있구나.’ 그렇습니다. 악의 목록에 나타난 것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 할 때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래서 우리 또한 경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죄가 가까워집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삶에 굵은 금이 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처투성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다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이고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피조물임을 확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으니, 세상 것에 집착하고 붙잡혀 살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과도한 욕망이 마치 주인이 종을 부리듯 나를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게 되었고 어려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됨의 축복을 스스로 손상시켰습니다. 그 첫 번째가 몸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몸을 마구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것은 성적인 쾌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로마서 1:24)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타난 ‘정욕’은 헬라말로 ‘도에 넘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통제되지 않는 욕망입니다. 특히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정욕입니다. 몸을 서로 욕되게 했다는 것은 남녀 간에 성적인 문란과 타락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타락할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유혹이 바로 성적인 유혹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을 보면 성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의 경험은 매우 강력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충동적으로 이끕니다. 쾌락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중독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남녀의 성적인 타락은 부부가 맺은 약속을 파괴하고 가정을 무너뜨립니다. 매우 소중하지만, 자기 절제와 통제가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성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다시 이야기합니다. 남녀 간의 성적인 문란이 동성 간의 성적 문란과 타락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 (로마서 1:26~27)

여기에서도 ‘내버려 두다’는 표현이 또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욕망과 성적인 정욕에 의해 살아갈 때 어떻게 되는지 그냥 두고 보신 것입니다.
성경은 동성애의 탐욕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우선 우정을 예찬합니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정이 성적 행위와 결합하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우정을 음욕으로 바꾸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또한 동성애적 경향이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포기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악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남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처음 남자만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그가 홀로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창조의 질서와 섭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 땅에 번성하라. 이 땅에 충만하라’며 창조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자녀를 낳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누리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 동성애의 결혼을 헌법으로 용인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된 결정이라고 박수를 쳤고,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며 경악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의 순리를 거절하고 창조의 섭리를 파괴시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법칙을 어깁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32)

악은 악을 조장합니다. 혼자 악을 행하기 싫어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며 부추깁니다. ‘너도 나와 함께 악의 친구가 되자!’며 악을 전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인간관계에 거짓과 시기가 있습니다. 탐욕과 교만이 있습니다. 불륜의 자리를 경험한 존재들입니다. 동성애의 죄악을 범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옵니다. 왜일까요?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시기와 거짓, 남을 무너뜨리려는 악한 마음, 음란의 죄악 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십니다. 주님께 그 모든 죄악들을 토해 놓고 변화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꾸라는 것입니다. 죄악의 자리에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교만과 음란의 죄악으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의 자리에 있다면 그곳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망가진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자리가 바로 이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부활의 역사, 새 생명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내 속에 있는 죄악을 하나님 앞에 토해 내고 나부터 변화되는 것, 죄악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주위 사람들을 사랑으로 도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으로 충만하여 우리가 함께 정결하고 깨끗한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를 가르칩니다. 죄는 죄이나 그것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정결한 신부처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나의 모습을 토해 내고 용서받고 새롭게 고침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결하게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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