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더러움의 영, 거룩함의 영? – 성령과 악령 12 –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이 정결법 논쟁을 벌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더러움의 영, 거룩함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동은 당대 모든 사람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자기 잣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하며 정죄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리새’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아주 높은 종교적 자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모든 것을 준행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민들을 보며 ‘나는 거룩한데 너희는 참으로 불결하구나.’라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마주하십니다. 앞선 본문에서 그들은 음식 먹기 전 손 씻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정결의 기준과 부정의 문제를 거들먹거립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정결예법을 제자들이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것, 그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전통에 불과하다.”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외식하는 자며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하십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사고를 뒤집으셨습니다. 그들이 규정한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율법적 구분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는 정결의 기준이 외적인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부터 기인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 1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마가복음 7:18 중)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손을 닦는다 해서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도, 손을 닦지 않는다 해서 인간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음식 곧 외적인 게 아니란 뜻입니다. 1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마가복음 7:19)
음식이란 입으로 먹어 배에서 소화되고 배설물로 나가면 그뿐입니다. 그러니 음식 때문에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위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깨끗하고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유전보다 본질에 집중하십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네 마음이 정말 정결하냐? 마음속에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가득하냐? 바로 그 악한 생각이 인간을 파멸하는 더러운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1~23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1~23)
인간의 외적 성결 규정이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 마음 상태, 내적인 상태가 얼마나 정결하고 거룩한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거룩이며 성결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 바리새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결법을 당연시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던 이들이었으니, 율법에 반한 예수님의 모습이 불경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심은 생각 좀 하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맞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것을 재고해 보라고 말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마가복음 7:14)
이어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속이 다 썩어 들어가는데 겉만 분칠을 한다고 괜찮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고는 개혁을 넘어 혁명 그 자체입니다. 새로운 사고, 본질적 사고, 창조적 사고, 생산적인 사고, 생명의 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생각을 면제시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분별하고, 더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늘 이렇게 되뇌며 살아가는 게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정결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정결’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그것은 창조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정결을 해석하십니다. 하늘과 땅, 이 땅의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뒤 “보기에 좋구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세상의 모든 것을 먹을거리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는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음식이란, 입을 통해 배에 들어간 뒤 소화되어 배설물로 빠져 나오면 그뿐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게 하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을 물질에 의해 폄하하거나 높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외모에 의해서, 가진 것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그 사람의 높낮이를 결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물질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근거해 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 정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그것은 내면적 정결이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내면적인 정결은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의 정결은 거룩을 결정짓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의 중심입니다. 언어와 행위가 나오는 근거지입니다. 인간의 인격의 중심에 바로 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만약 마음에 악한 것이 있다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마음이자 악한 생각이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더러워지고 악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아주 명백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0)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람 속에 있는 것, 사람 안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상 외면적인 정결에 대해 부탁을 하셨습니다.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면 “얘야, 먼지가 묻었으니 손도 씻고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성숙한 때라 스스로 외면적인 것을 챙기지 못하니 부모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의 단계에 이르면, 부모님은 우리에게 내면적인 정결을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도 여전히 손 닦았는지, 세수했는지를 물어보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아마 그렇게 묻는 부모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 네 꿈이 무엇이냐? 네가 갖고 있는 네 마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평생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정결을 넘어 내면적인 정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내면이 얼마나 요란하게 움직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침에 결정했다가도 점심이면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침에는 말씀을 읽으며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가도 세상에 나가 세속적이고 타락한 모습으로 바뀐 모습을 얼마나 자주 봅니까? 그래서 구약의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렘17:9~10 중)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면 우리를 정결하게 대하시고, 우리 마음속이 불결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이중적이고 간사합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위선과 악독을 그대로 발가벗기십니다.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느냐? 거룩함이 없지 않느냐? 네 속에 죄악과 욕심이 가득 들어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인간 내면의 악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십니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덕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우매함 말입니다. 혹시 이 악덕에서 면제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악한 영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을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악덕에 사로잡히면 우리를 조종하고 죄악을 일삼게 합니다.
사탄이 왜 못된 영입니까? 거짓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마음을 품을 때를 노렸다가 일순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리곤 노예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면, 악한 영은 우리의 영을 사로잡아 악한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악덕이 있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조금만 그것을 붙잡고 있어도 악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중) 내 속에 악한 생각, 못된 생각이 나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생각들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좋은 생각과 옳은 생각이 내 삶의 중심에 오도록 애써야 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물과 비료도 줘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습관이 반복되면 인격적 성품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악이 둥지를 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존 맥스웰의 『생각의 법칙』 중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부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때 그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모든 위대한 인간의 하인이다. 아아, 하지만 모든 낙오한 인간의 하인이기도 하다. 위대한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위대한 것을 만들어 냈다. 실패한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실패한 것을 만들어 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움직일 수도 있고 혹은 파멸을 위해 나를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어느 쪽이든 차이가 없다. 나를 취하라. 나를 훈련시켜라. 내게 단호하라. 그러면 나는 여러분의 발밑에 세상을 대령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우습게 여기면 여러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바로 ‘당신의 습관’이다.”
나의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 행동이 반복되면서 습관을 만들었고, 그것이 인격이 되었으며,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습관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생각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늘 경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못된 사람도 아닙니다. 때로는 악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선한 생각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너무 쉽게 왔다 갔다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악한 생각에는 빨리 사로잡히는데 선한 생각을 할 때는 결단해야 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어야 하는 어려움도 생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쁜 것, 못된 것에는 쉽게 이끌려 갑니다. 반면 선한 것, 옳은 것을 따르려고 할 때는 저절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면서 용기를 내고 선택해야 선이 이루어집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 경계선을 즐길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을 시험합니다. ‘내가 지금 못된 짓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나를 사랑하시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악에서 나를 해방시키시고 돌이켜 주옵소서.’라고…. 과연 이를 배짱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게으르고 나태한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완악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위선적인 태도도 나쁘지만, 그보다 악한 것은 위악적인 태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위악적인 태도란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행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악한 생각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다음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즉 악이 우리 마음속에 둥지를 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마음을 활보하는 것은 막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과제입니다.
경건의 습관이 거룩한 삶을 낳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 중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결정적인 순간 믿음에 실패합니다.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는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묵상하고, 그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실천에 옮깁니다. 그녀가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아를 잔혹한 전쟁터에서 죽게 내버려 두고, 그녀를 아내로 취합니다. 결국 이 사건이 다윗의 가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이후 자식들과 갈등과 전쟁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그는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화를 낳았습니다.
우리 안의 죄악들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낼 때, 우리는 “STOP!”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멈춰! 여기까지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의 현장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영으로 변화되리라’고 결단하지 않으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생각의 열매이자 행동의 열매며 인격과 관련된 열매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더욱이 성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도 성령입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거짓의 영이요, 더러움의 영입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붙들려는 영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거룩의 열망이 우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다시 주님의 거룩함 속으로 들어오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 동행해 달라고 기도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내 안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둠의 영이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단절해야 합니다.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하나님의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7: 18 ~ 23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이 정결법 논쟁을 벌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더러움의 영, 거룩함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동은 당대 모든 사람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자기 잣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하며 정죄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바리새’는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아주 높은 종교적 자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모든 것을 준행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민들을 보며 ‘나는 거룩한데 너희는 참으로 불결하구나.’라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마주하십니다. 앞선 본문에서 그들은 음식 먹기 전 손 씻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정결의 기준과 부정의 문제를 거들먹거립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정결예법을 제자들이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것, 그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전통에 불과하다.”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외식하는 자며 형식주의자라고 비판하십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내용이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사고를 뒤집으셨습니다. 그들이 규정한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율법적 구분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는 정결의 기준이 외적인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부터 기인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중 18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마가복음 7:18 중)
음식이 인간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손을 닦는다 해서 인간이 깨끗해지는 것도, 손을 닦지 않는다 해서 인간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음식 곧 외적인 게 아니란 뜻입니다. 1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마가복음 7:19)
음식이란 입으로 먹어 배에서 소화되고 배설물로 나가면 그뿐입니다. 그러니 음식 때문에 ‘거룩하다, 거룩하지 않다’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욱이 음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위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깨끗하고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유전보다 본질에 집중하십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네 마음이 정말 정결하냐? 마음속에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 가득하냐? 바로 그 악한 생각이 인간을 파멸하는 더러운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1~23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1~23)
인간의 외적 성결 규정이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 마음 상태, 내적인 상태가 얼마나 정결하고 거룩한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거룩이며 성결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 바리새인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결법을 당연시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행위라고 여겼습니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던 이들이었으니, 율법에 반한 예수님의 모습이 불경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심은 생각 좀 하라는 뜻입니다.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맞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것을 재고해 보라고 말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마가복음 7:14)
이어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속이 다 썩어 들어가는데 겉만 분칠을 한다고 괜찮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고는 개혁을 넘어 혁명 그 자체입니다. 새로운 사고, 본질적 사고, 창조적 사고, 생산적인 사고, 생명의 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고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생각을 면제시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깊이 생각하고, 더 깊이 분별하고, 더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늘 이렇게 되뇌며 살아가는 게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정결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정결’은 어디서 비롯될까요? 그것은 창조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정결을 해석하십니다. 하늘과 땅, 이 땅의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뒤 “보기에 좋구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세상의 모든 것을 먹을거리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는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앞서 말씀 드렸듯이 음식이란, 입을 통해 배에 들어간 뒤 소화되어 배설물로 빠져 나오면 그뿐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깨끗하게 하거나 더럽게 하는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을 물질에 의해 폄하하거나 높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외모에 의해서, 가진 것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그 사람의 높낮이를 결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물질보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근거해 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 정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그것은 내면적 정결이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럼 내면적인 정결은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인간의 ‘마음’입니다. 마음의 정결은 거룩을 결정짓는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마음이 무엇입니까? 생각의 중심입니다. 언어와 행위가 나오는 근거지입니다. 인간의 인격의 중심에 바로 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격을 보려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만약 마음에 악한 것이 있다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마음이자 악한 생각이며,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더러워지고 악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아주 명백합니다.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0)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사람 속에 있는 것, 사람 안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항상 외면적인 정결에 대해 부탁을 하셨습니다. 바깥에서 놀다 들어오면 “얘야, 먼지가 묻었으니 손도 씻고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미성숙한 때라 스스로 외면적인 것을 챙기지 못하니 부모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의 단계에 이르면, 부모님은 우리에게 내면적인 정결을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도 여전히 손 닦았는지, 세수했는지를 물어보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아마 그렇게 묻는 부모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 네 꿈이 무엇이냐? 네가 갖고 있는 네 마음의 본질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평생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정결을 넘어 내면적인 정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내면이 얼마나 요란하게 움직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침에 결정했다가도 점심이면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아침에는 말씀을 읽으며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가도 세상에 나가 세속적이고 타락한 모습으로 바뀐 모습을 얼마나 자주 봅니까? 그래서 구약의 예레미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렘17:9~10 중)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면 우리를 정결하게 대하시고, 우리 마음속이 불결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토해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이중적이고 간사합니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위선과 악독을 그대로 발가벗기십니다. “네 안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느냐? 거룩함이 없지 않느냐? 네 속에 죄악과 욕심이 가득 들어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인간 내면의 악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십니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덕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우매함 말입니다. 혹시 이 악덕에서 면제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악한 영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을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악덕에 사로잡히면 우리를 조종하고 죄악을 일삼게 합니다.
사탄이 왜 못된 영입니까? 거짓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마음을 품을 때를 노렸다가 일순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리곤 노예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면, 악한 영은 우리의 영을 사로잡아 악한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악덕이 있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조금만 그것을 붙잡고 있어도 악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중) 내 속에 악한 생각, 못된 생각이 나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생각들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좋은 생각과 옳은 생각이 내 삶의 중심에 오도록 애써야 합니다. 좋은 씨앗을 뿌리고 물과 비료도 줘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이 반복되면, 그것이 습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습관이 반복되면 인격적 성품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악이 둥지를 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존 맥스웰의 『생각의 법칙』 중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부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때 그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는 모든 위대한 인간의 하인이다. 아아, 하지만 모든 낙오한 인간의 하인이기도 하다. 위대한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위대한 것을 만들어 냈다. 실패한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실패한 것을 만들어 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움직일 수도 있고 혹은 파멸을 위해 나를 움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어느 쪽이든 차이가 없다. 나를 취하라. 나를 훈련시켜라. 내게 단호하라. 그러면 나는 여러분의 발밑에 세상을 대령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우습게 여기면 여러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바로 ‘당신의 습관’이다.”
나의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 행동이 반복되면서 습관을 만들었고, 그것이 인격이 되었으며, 내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습관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된 습관과 생각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늘 경계선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못된 사람도 아닙니다. 때로는 악한 생각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선한 생각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너무 쉽게 왔다 갔다 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악한 생각에는 빨리 사로잡히는데 선한 생각을 할 때는 결단해야 하고,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잃어야 하는 어려움도 생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쁜 것, 못된 것에는 쉽게 이끌려 갑니다. 반면 선한 것, 옳은 것을 따르려고 할 때는 저절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면서 용기를 내고 선택해야 선이 이루어집니다. 더구나 우리가 이 경계선을 즐길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분을 시험합니다. ‘내가 지금 못된 짓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나를 사랑하시면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악에서 나를 해방시키시고 돌이켜 주옵소서.’라고…. 과연 이를 배짱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게으르고 나태한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완악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위선적인 태도도 나쁘지만, 그보다 악한 것은 위악적인 태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위악적인 태도란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행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악한 생각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다음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즉 악이 우리 마음속에 둥지를 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마음을 활보하는 것은 막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과제입니다.
경건의 습관이 거룩한 삶을 낳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 중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결정적인 순간 믿음에 실패합니다. 왕궁의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는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묵상하고, 그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실천에 옮깁니다. 그녀가 자신의 충신 우리아의 아내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아를 잔혹한 전쟁터에서 죽게 내버려 두고, 그녀를 아내로 취합니다. 결국 이 사건이 다윗의 가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깁니다. 이후 자식들과 갈등과 전쟁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그는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화를 낳았습니다.
우리 안의 죄악들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낼 때, 우리는 “STOP!”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멈춰! 여기까지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의 현장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을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영으로 변화되리라’고 결단하지 않으면,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는 생각의 열매이자 행동의 열매며 인격과 관련된 열매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이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더욱이 성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도 성령입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거짓의 영이요, 더러움의 영입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붙들려는 영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고 한다면, 거룩의 열망이 우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다시 주님의 거룩함 속으로 들어오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라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 동행해 달라고 기도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내 안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둠의 영이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단절해야 합니다.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하나님의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