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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 16 ~ 21

김지철 목사

2012.04.22

세계 금융대란의 중심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세계 금융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비이성적인 탐욕이 시장의 과열을 만들었고, 결국 금융대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금융 전문기자인 존 어서스(John Authers)는『비이성적 과열의 시장』이라는 책에서, 현재의 세계 금융시장의 위기를 고전경제학이 이야기한 공급과 수요의 관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요소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상호관계입니다. 돈을 가진 경제 주체들이 탐욕으로 가득차서 두려움을 상실할 때에 비이성적인 과열 거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가 거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서로를 불신하고 결국 시장이 갑작스럽게 폭락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간의 탐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마음이 커지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유산 분배 문제로 자기의 형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산이 잘 분배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보시고 그를 꾸짖으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4)

최근에, ‘돈은 피보다 진하다’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결코 돈에 부족함이 없을 재벌가에서 재산 분배 문제로 소송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기자가 뽑은 제목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한 부자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부자는 소출이 많았습니다. 곳간에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벌어 놓았는데, 이것을 쌓아두기에 창고가 너무 낡고 작구나. 더 많이 쌓을 수 있게 더 크고, 더 넓은 새 곳간을 만들어야겠다. 남은 날들 동안 이 모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부족함없이 살아보자.’ 부자는 큰 창고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너는.”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단정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이었습니다. 부자가 지닌 탐욕을 우리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첫째 이 탐욕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기대나 미래적인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이 탐욕은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이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를 보면, 이 짧은 구절 안에 ‘나’라고 하는 말이 무려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누가복음 12:17-19)

탐욕이 ‘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내게 유익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지구도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하고, 가족과 친구도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님도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나 중심의, 나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하는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질병입니다.
여러분, ‘나’는 분명 소중한 존재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내가 왜 소중한 존재인지를 잃어버리고, 무작정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집착하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관계, 재물과의 관계,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도 닫히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탐욕, 자기자랑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디모데후서 3:2)

이것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바르게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가지면 가질수록 뻔뻔해지고, 더 욕심을 부리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간의 탐욕이 건강한 가치관이라고 믿는다. 내가 나를 위해서 탐욕을 부리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경제 위기도 투자가들의 이러한 잘못된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두려움을 상실한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흔히 ‘유물론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자들은 다를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유물론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을 이야기하며 유토피아를 이 땅 위에 건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오래지 않아 무너졌습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등사회를 이야기하면서 계급사회를 만들었습니다. 함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자신들과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은 끊임없이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일면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욕망의 동물인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둘째, 부자의 탐욕은 만족함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욕망의 확장이 부자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누구나 재물을 얻게 되면,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재물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세계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이 생길 뿐입니다. 비교의식이 가슴을 조여오기 시작하고, 더 많이 갖겠다는 경쟁의식으로 묘한 긴장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한 긴장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의 평안을 빼앗는 영혼의 조바심입니다.
부자는 더 큰 창고를 만들어서, 더 많은 것들을 쌓아두자고 생각합니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탄의 속임수가 들어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자’라는 목적이 생기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자기만을 위한 향락주의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부자는 만족함이 없기에 쌓는 것에 집중합니다. 쌓아 둘 곳이 없어서 염려하고, 쌓기 위해 새 곳간을 짓고,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안심하며 살자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부자는 평생을 쌓는 일을 생각하며 보낼지도 모릅니다. 이런 만족함이 없는 탐욕은 우리의 올바른 사고와 판단력을 흐려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탐욕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돈 자체는,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돈이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돈이 가진 힘, 마력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점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돈에 집착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탐내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믿음에서도 떠나 근심과 걱정으로 인생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곡식을 많이 쌓아두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노후가 걱정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곡식 값이 올랐을 때 비싸게 팔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부자에게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질의 풍요가 영혼의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착각이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물질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가 가진 탐욕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망각한 탐욕입니다.

두려움을 잃은 욕심은 삶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관차는 충돌할 뿐입니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뿐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평안이 살 수 있다는 착각, 경제적 풍요가 삶을 쉽게 만들어준다는 오해들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생각한 참된 만족과 참된 평안은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누가복음 12:19)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기쁘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거기에만 두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껏 즐기려고 하는데 누가 나를 건드려? 누가 나를 막아? 나를 방해할 자가 누가 있어?’ 그렇게 큰 소리 칠 때에 예수님은 너를 멈추게 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부자를 만드신 분, 부자를 부자 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누가복음 12:20)

부자는 자기의 건강이 마냥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전혀 나이가 들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니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창고에 가득 쌓아 두려고만 하는 그 인생에 문제가 있다고 말입니다. ‘뼈 빠지게 수고하면서 많은 것들을 쌓아 두었지만 오늘 네 인생을 데려가면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쌓아 두고 있느냐?’ 인생의 우선권을 알지 못하는 부자를, 삶의 축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는 탐욕의 마음을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14장 24절 말씀은 하나님의 선물인 재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 14:24)

지혜가 있어야 그 재물이 지혜로운 것이 됩니다. 미련한 자가 가진 것은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 있음을 깨닫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것은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련한 자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 나라를 위함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아무리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얻게 하는 능력 그 자체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8)

여러분, 재물이 있으십니까? 돈을 벌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보이고, 그 물질로 이웃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잊고 다른 것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재물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세 가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적인 탐욕은 아닌가? 만족함이 없는 탐욕은 아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욕은 아닌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해 오늘 부자와 같은 마음으로 대답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추셔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라는 감사의 고백이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온다면 수고함으로 재물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멋지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과 내 소유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내 자신이 평안을 누리게 되고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 공동체가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모두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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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 16 ~ 21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계 금융대란의 중심에는 탐욕이 있습니다.

세계 금융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비이성적인 탐욕이 시장의 과열을 만들었고, 결국 금융대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금융 전문기자인 존 어서스(John Authers)는『비이성적 과열의 시장』이라는 책에서, 현재의 세계 금융시장의 위기를 고전경제학이 이야기한 공급과 수요의 관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요소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상호관계입니다. 돈을 가진 경제 주체들이 탐욕으로 가득차서 두려움을 상실할 때에 비이성적인 과열 거품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체가 거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서로를 불신하고 결국 시장이 갑작스럽게 폭락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간의 탐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마음이 커지면, 하나님을 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결국은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유산 분배 문제로 자기의 형과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산이 잘 분배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탐욕을 보시고 그를 꾸짖으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누가복음 12:14)

최근에, ‘돈은 피보다 진하다’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결코 돈에 부족함이 없을 재벌가에서 재산 분배 문제로 소송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기자가 뽑은 제목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한 부자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부자는 소출이 많았습니다. 곳간에 더 이상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벌어 놓았는데, 이것을 쌓아두기에 창고가 너무 낡고 작구나. 더 많이 쌓을 수 있게 더 크고, 더 넓은 새 곳간을 만들어야겠다. 남은 날들 동안 이 모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부족함없이 살아보자.’ 부자는 큰 창고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자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너는.”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다고 단정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비유 속에 등장하는 부자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탐욕’이었습니다. 부자가 지닌 탐욕을 우리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첫째 이 탐욕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기대나 미래적인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이 탐욕은 자기중심적이고 자아도취적이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를 보면, 이 짧은 구절 안에 ‘나’라고 하는 말이 무려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누가복음 12:17-19)

탐욕이 ‘나’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내게 유익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지구도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하고, 가족과 친구도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어쩌면 하나님도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나 중심의, 나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려고 하는 이것은 일종의 정신적 질병입니다.
여러분, ‘나’는 분명 소중한 존재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내가 왜 소중한 존재인지를 잃어버리고, 무작정 자기 자신을 향해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집착하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관계, 재물과의 관계,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도 닫히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시대의 특징을 이러한 자아중심적인 탐욕, 자기자랑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디모데후서 3:2)

이것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바르게 존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가지면 가질수록 뻔뻔해지고, 더 욕심을 부리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인간의 탐욕이 건강한 가치관이라고 믿는다. 내가 나를 위해서 탐욕을 부리는데 뭐가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 월 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금융경제 위기도 투자가들의 이러한 잘못된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두려움을 상실한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흔히 ‘유물론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자들은 다를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유물론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을 이야기하며 유토피아를 이 땅 위에 건설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오래지 않아 무너졌습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평등사회를 이야기하면서 계급사회를 만들었습니다. 함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자신들과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은 끊임없이 제거하였습니다.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일면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욕망의 동물인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둘째, 부자의 탐욕은 만족함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욕망의 확장이 부자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누구나 재물을 얻게 되면,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재물에 몰입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평안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의 세계에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이 생길 뿐입니다. 비교의식이 가슴을 조여오기 시작하고, 더 많이 갖겠다는 경쟁의식으로 묘한 긴장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한 긴장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의 평안을 빼앗는 영혼의 조바심입니다.
부자는 더 큰 창고를 만들어서, 더 많은 것들을 쌓아두자고 생각합니다.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탄의 속임수가 들어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자’라는 목적이 생기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나중에는 자기만을 위한 향락주의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부자는 만족함이 없기에 쌓는 것에 집중합니다. 쌓아 둘 곳이 없어서 염려하고, 쌓기 위해 새 곳간을 짓고,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안심하며 살자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부자는 평생을 쌓는 일을 생각하며 보낼지도 모릅니다. 이런 만족함이 없는 탐욕은 우리의 올바른 사고와 판단력을 흐려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탐욕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10)

돈 자체는,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돈이 결코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돈이 가진 힘, 마력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점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돈에 집착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탐내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믿음에서도 떠나 근심과 걱정으로 인생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곡식을 많이 쌓아두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노후가 걱정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곡식 값이 올랐을 때 비싸게 팔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부자에게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질의 풍요가 영혼의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착각이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물질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가 가진 탐욕의 세 번째 특징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망각한 탐욕입니다.

두려움을 잃은 욕심은 삶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관차는 충돌할 뿐입니다.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뿐입니다. 물질이 있으면 평안이 살 수 있다는 착각, 경제적 풍요가 삶을 쉽게 만들어준다는 오해들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부자가 생각한 참된 만족과 참된 평안은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누가복음 12:19)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가 기쁘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거기에만 두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껏 즐기려고 하는데 누가 나를 건드려? 누가 나를 막아? 나를 방해할 자가 누가 있어?’ 그렇게 큰 소리 칠 때에 예수님은 너를 멈추게 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부자를 만드신 분, 부자를 부자 되게 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누가복음 12:20)

부자는 자기의 건강이 마냥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전혀 나이가 들지 않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니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창고에 가득 쌓아 두려고만 하는 그 인생에 문제가 있다고 말입니다. ‘뼈 빠지게 수고하면서 많은 것들을 쌓아 두었지만 오늘 네 인생을 데려가면 그것은 네 것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쌓아 두고 있느냐?’ 인생의 우선권을 알지 못하는 부자를, 삶의 축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는 탐욕의 마음을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우리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서 14장 24절 말씀은 하나님의 선물인 재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잠언 14:24)

지혜가 있어야 그 재물이 지혜로운 것이 됩니다. 미련한 자가 가진 것은 미련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이 있음을 깨닫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것은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련한 자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하나님 나라를 위함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아무리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얻게 하는 능력 그 자체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8)

여러분, 재물이 있으십니까? 돈을 벌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보이고, 그 물질로 이웃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잊고 다른 것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재물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세 가지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기적인 탐욕은 아닌가? 만족함이 없는 탐욕은 아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욕은 아닌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해 오늘 부자와 같은 마음으로 대답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멈추셔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라는 감사의 고백이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온다면 수고함으로 재물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멋지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과 내 소유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내 자신이 평안을 누리게 되고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 공동체가 축복받게 될 것입니다. 모두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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