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동역자의 복 – 모세 이야기 11 –

출애굽기 6:28-7:7:

김지철 목사

2017.01.22

나는 어떤 동역자입니까?

이제 모세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동역자의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장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정받고 사랑 받으며 살아가길 원하지만,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절망을 경험합니다.
요새 신입사원들이 겪는 애환이 있습니다. 입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퇴사를 외치는 신입사원이 자꾸만 늘어간다고 합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신입사원 이직 현황 통계를 살펴보니, 신입사원 중 63%가 1년 3개월 내에 첫 번째 직장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유는 비슷했습니다. 일도 일이지만 사람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퇴직하는 이유요, 퇴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혹시 한 직장을 꾸준히 다녔습니까? 아니면, 이리저리 이직했습니까? 성공을 위해 이직했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 이직했습니까?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 상사와 부하의 궁합표라는 것이 나와 있는데, 화면에서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상사와 부하를 구분합니다. 첫째 ‘멍청한가, 똑똑한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입니다. 결론적으로 상사 중에서는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최악의 상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하를 들들 볶으면서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일 좋은 상사는 똑똑하지만 조금 게으른 상사라고 합니다. 똑똑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상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하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부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부하는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한 부하라고 합니다. 상사들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부하를 원하고 있습니다. 반면, 부하들은 지혜롭긴 하지만 넉넉하고 여유 있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상사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자발적으로 업무에 매진하며 창의적인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때는 부하였고, 상사였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어떤 자세로 인간관계를 꾸려 왔는지, 우리 옆에 있는 동역자들과 어떻게 지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모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지도자로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한 모세를 내치지 않으시고, 왜 끝까지 붙들고 계셨던 걸까요? 오늘 본문에 모세의 거절이 또다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6장 30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출애굽기 6:30)

모세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한지 아십니까? 무려 세 번째입니다. 입이 둔해서 바로에게 갈 수가 없다고 세 번이나 연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출4:10; 6:12; 6:30).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자기 같은 사람을 사용하지 말라고 거절에 거절을 연속한 것입니다.
입술이 둔하다는 것은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뜻도 있지만, 거룩히 구별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혀는 주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싫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려워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의미 있는 일, 위대한 꿈과 비전을 지닌 일이라도 본인이 하기 싫다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얼마나 많이 경험했습니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얘야, 이 일은 너무 좋은 일이란다. 한번 해 보거라.”라고 권유해도, 아이가 “싫어요. 하기 싫어요. 그건 엄마, 아빠의 생각이지 내 뜻이 아니에요. 내 인생은 내가 살 거예요!”라고 하면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로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께 질문을 해 봅니다. 모세가 세 번씩이나 사양하고 거절하는데, 하나님은 왜 모세를 물리치지 않으셨을까요? 새로운 사람을 세우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왜 모세여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 없어서였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더 자세히 읽으며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모세의 거절을 긍정적으로 보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적어도 자신의 일,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까닭입니다. 한 번 결단하기까지는 어렵지만, 결단하고 나면 지속성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 모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모세를 알아보셨습니다. 무엇엔가 올인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결단한 사람이 끝까지 달려갈 수도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아도, 처음부터 하나님께 자신을 보내 달라고,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니 사용하면 손해 볼 것 없다고 말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자고 하시는데, 자신은 부족하고 무능력하다고, 자신은 연약한 죄인이어서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참 신비롭고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출애굽 역사의 중심에는 모세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또, 끝까지 모세가 못하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꺼내신 카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역자’입니다. “너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믿음의 친구,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를 네 옆에 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동역자를 선물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7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애굽기 7:1)

모세가 바로 앞에 가면 신처럼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도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데, 그에 뒤지지 않게 모세를 세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바로도 모세 앞에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형 아론을 옆에 붙여서 대변인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예언자처럼 모세가 말하면, 아론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선언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것은 팀 사역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팀을 이루어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팀 사역을 얼마나 많이 해 봤습니까? 팀 사역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소위 케미(‘chemistry’의 준말: 보통 ‘화학’이라는 뜻이지만 ‘사람 사이의 화학 반응’으로도 쓰임)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팀 사역이 원활해집니다. 이렇게 소통이 잘 되면 상승효과가 일어나면서 서로 윈윈(win-win: 상황이 모두에게 유리한 것을 뜻함)하게 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고 탓하면서 싸우게 되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팀으로 묶으셨을 때, 출애굽 사역에서도 훌륭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세에게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현장에 나가 전투를 했고,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현장을 지켜보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궁지로 몰렸습니다. 하지만 손을 계속 들고 있기는 어려웠습니다. 자꾸만 손이 아래로 처집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론과 훌이 모세에게 이야기합니다. “모세, 큰 돌을 갖다 놓을 테니 거기 앉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팔을 함께 들겠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동역자가 되어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받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한 데는 이와 같은 동역자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론과 훌을 동역자로 붙여 주셨고, 여호수아라는 젊은 동역자를 보내 주시면서 모세를 통한 거대한 출애굽 역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동역을 위해서는 공동 목표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팀 사역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 때도 그렇고, 영적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원칙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공동 목표와 비전’이 뚜렷해야 합니다. 공동 비전이 공동체에 있어야 팀 사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만 출애굽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론이라는 인물에게도 출애굽에 함께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 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출애굽기 6:26)
아론과 모세,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아론도 소명을 받고 모세도 소명을 받았는데, 아론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 구절인 27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출애굽기 6:27)

이번엔 순서가 좀 다릅니다. 앞 구절에선 아론과 모세의 순서였는데, 이제 모세와 아론이라고 순서가 바뀝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표도 하나입니다. 팀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표가 하나, 곧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 비전을 그들이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동역하면서 언제 문제가 발생합니까? 자기 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생길 때입니다. 그때 동역자 관계도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일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공동체, 기업, 교회공동체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적인 감정, 사적인 소유욕과 탐욕이 그 안에 들어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국가가 왜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까? 사적인 소유욕과 탐욕이 공동체를 장악하니,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게 회사의 대표든 임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왜 교회공동체에도 분란과 분파가 일어납니까? 거기에 소유욕과 탐욕, 사유화의 욕심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공동 비전과 목표라는 건 입에 발린 소리로 끝나고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행태가 난무하게 되면, 생명의 공동체를 꿈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를 동시에 부르셔서 그들에게 공동의 목표와 비전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 둘에게 같은 사명을 주니, 둘이 합하여라. 목표는 하나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 내는 것이다.”라고….

동역자 사이에도 각자의 권위와 책임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권위와 책임의 할당’에 관한 것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26절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27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라고 바꿔 부르십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왜 만드셨을까요? 족보상으로는 아론이 형입니다. 그는 당시 83세였습니다. 모세는 80세로 동생입니다. 그러나 직분 상으로는 모세가 지도자고, 아론이 협력자이자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권위와 최종적인 책임은 누가 갖게 되는 것입니까? 모세가 져야 합니다. 아론이 무너져도 모세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무너지면, 아론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책임을 져야 할 자와 그 다음 책임을 져야 할 자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구분해 놓으신 것입니다.
모세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 견실해졌습니다.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신의 야망보다 하나님의 비전을 우선시했습니다. 자신이 누릴 평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투신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온유함은 쉽게 무너지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인하면서도 포용력을 지닌 성품입니다. 모세가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연약함과 슬픔, 고통을 가슴으로 품을 줄 아는 지도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아론은 어땠을까요? 아론은 자기 앞에 누군가 책임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앞장서 나가면, 아론이 협력하면서 뒷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든 책임과 권위가 모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게 그에게 맞는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즉, 아론 혼자 남았을 때 그는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니, 백성의 목소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자는 그들의 요청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이처럼 모세에게는 모세의 직분과 책임이, 아론에게는 아론의 직분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동역자의 복을 누립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팀워크는 무엇일까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팀워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사랑과 배려와 친밀감으로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구약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건으로, 신약을 아들 하나님의 사건으로, 사도행전과 교회를 성령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함께 움직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혼자 살아가는 그런 시간이나 공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동역하며 살게 돼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사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공동 목표입니다. 가끔 의견이 달라 삐걱댈 수도 있고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한 배에 탄 믿음의 동지요 우리의 목표가 명백하다면, 결국엔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내 이기심과 사욕을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멋진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이 삶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이 아침에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옆에서 수고하고 애쓰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만나 기쁨을 누리고, 우리 주위에서 애쓰시는 분들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 줄 수 있는 것, 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동역자의 복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깊이 경험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btn_switch

출애굽기 6:28-7:7:

나는 어떤 동역자입니까?

이제 모세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동역자의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장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장 무서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정받고 사랑 받으며 살아가길 원하지만,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절망을 경험합니다.
요새 신입사원들이 겪는 애환이 있습니다. 입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퇴사를 외치는 신입사원이 자꾸만 늘어간다고 합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신입사원 이직 현황 통계를 살펴보니, 신입사원 중 63%가 1년 3개월 내에 첫 번째 직장을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유는 비슷했습니다. 일도 일이지만 사람 관계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퇴직하는 이유요, 퇴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혹시 한 직장을 꾸준히 다녔습니까? 아니면, 이리저리 이직했습니까? 성공을 위해 이직했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 이직했습니까?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 상사와 부하의 궁합표라는 것이 나와 있는데, 화면에서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상사와 부하를 구분합니다. 첫째 ‘멍청한가, 똑똑한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입니다. 결론적으로 상사 중에서는 멍청하고 부지런한 상사가 최악의 상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하를 들들 볶으면서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일 좋은 상사는 똑똑하지만 조금 게으른 상사라고 합니다. 똑똑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상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안 드는 부하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부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부하는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한 부하라고 합니다. 상사들은 지혜롭고 부지런한 부하를 원하고 있습니다. 반면, 부하들은 지혜롭긴 하지만 넉넉하고 여유 있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상사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자발적으로 업무에 매진하며 창의적인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때는 부하였고, 상사였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어떤 자세로 인간관계를 꾸려 왔는지, 우리 옆에 있는 동역자들과 어떻게 지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모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지도자로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한 모세를 내치지 않으시고, 왜 끝까지 붙들고 계셨던 걸까요? 오늘 본문에 모세의 거절이 또다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6장 30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출애굽기 6:30)

모세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한지 아십니까? 무려 세 번째입니다. 입이 둔해서 바로에게 갈 수가 없다고 세 번이나 연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출4:10; 6:12; 6:30).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다고, 자기 같은 사람을 사용하지 말라고 거절에 거절을 연속한 것입니다.
입술이 둔하다는 것은 할례 받지 못한 입술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뜻도 있지만, 거룩히 구별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혀는 주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싫다는 뜻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두려워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의미 있는 일, 위대한 꿈과 비전을 지닌 일이라도 본인이 하기 싫다면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얼마나 많이 경험했습니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얘야, 이 일은 너무 좋은 일이란다. 한번 해 보거라.”라고 권유해도, 아이가 “싫어요. 하기 싫어요. 그건 엄마, 아빠의 생각이지 내 뜻이 아니에요. 내 인생은 내가 살 거예요!”라고 하면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로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께 질문을 해 봅니다. 모세가 세 번씩이나 사양하고 거절하는데, 하나님은 왜 모세를 물리치지 않으셨을까요? 새로운 사람을 세우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왜 모세여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 없어서였을까요?
우리가 성경을 더 자세히 읽으며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모세의 거절을 긍정적으로 보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적어도 자신의 일,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까닭입니다. 한 번 결단하기까지는 어렵지만, 결단하고 나면 지속성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 모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모세를 알아보셨습니다. 무엇엔가 올인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하다가 결단한 사람이 끝까지 달려갈 수도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택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아도, 처음부터 하나님께 자신을 보내 달라고,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니 사용하면 손해 볼 것 없다고 말한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자고 하시는데, 자신은 부족하고 무능력하다고, 자신은 연약한 죄인이어서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참 신비롭고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출애굽 역사의 중심에는 모세의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또, 끝까지 모세가 못하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꺼내신 카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역자’입니다. “너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믿음의 친구,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자를 네 옆에 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그에게 동역자를 선물해 주십니다. 출애굽기 7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애굽기 7:1)

모세가 바로 앞에 가면 신처럼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도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데, 그에 뒤지지 않게 모세를 세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하의 바로도 모세 앞에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형 아론을 옆에 붙여서 대변인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예언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예언자처럼 모세가 말하면, 아론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선언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한 것은 팀 사역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팀을 이루어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팀 사역을 얼마나 많이 해 봤습니까? 팀 사역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소위 케미(‘chemistry’의 준말: 보통 ‘화학’이라는 뜻이지만 ‘사람 사이의 화학 반응’으로도 쓰임)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팀 사역이 원활해집니다. 이렇게 소통이 잘 되면 상승효과가 일어나면서 서로 윈윈(win-win: 상황이 모두에게 유리한 것을 뜻함)하게 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고 탓하면서 싸우게 되면,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팀으로 묶으셨을 때, 출애굽 사역에서도 훌륭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모세에게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현장에 나가 전투를 했고,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는 현장을 지켜보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궁지로 몰렸습니다. 하지만 손을 계속 들고 있기는 어려웠습니다. 자꾸만 손이 아래로 처집니다. 그때, 옆에 있던 아론과 훌이 모세에게 이야기합니다. “모세, 큰 돌을 갖다 놓을 테니 거기 앉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의 팔을 함께 들겠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동역자가 되어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받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한 데는 이와 같은 동역자의 도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론과 훌을 동역자로 붙여 주셨고, 여호수아라는 젊은 동역자를 보내 주시면서 모세를 통한 거대한 출애굽 역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동역을 위해서는 공동 목표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팀 사역을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 때도 그렇고, 영적인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원칙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공동 목표와 비전’이 뚜렷해야 합니다. 공동 비전이 공동체에 있어야 팀 사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에게만 출애굽을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론이라는 인물에게도 출애굽에 함께해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장 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출애굽기 6:26)
아론과 모세, 두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아론도 소명을 받고 모세도 소명을 받았는데, 아론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그 다음 구절인 27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보내라 말한 사람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출애굽기 6:27)

이번엔 순서가 좀 다릅니다. 앞 구절에선 아론과 모세의 순서였는데, 이제 모세와 아론이라고 순서가 바뀝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표도 하나입니다. 팀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목표가 하나, 곧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 비전을 그들이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동역하면서 언제 문제가 발생합니까? 자기 것을 먼저 챙기는 사람이 생길 때입니다. 그때 동역자 관계도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일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 공동체, 기업, 교회공동체에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적인 감정, 사적인 소유욕과 탐욕이 그 안에 들어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국가가 왜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까? 사적인 소유욕과 탐욕이 공동체를 장악하니,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게 회사의 대표든 임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왜 교회공동체에도 분란과 분파가 일어납니까? 거기에 소유욕과 탐욕, 사유화의 욕심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공동 비전과 목표라는 건 입에 발린 소리로 끝나고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행태가 난무하게 되면, 생명의 공동체를 꿈꿀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를 동시에 부르셔서 그들에게 공동의 목표와 비전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 둘에게 같은 사명을 주니, 둘이 합하여라. 목표는 하나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 내는 것이다.”라고….

동역자 사이에도 각자의 권위와 책임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권위와 책임의 할당’에 관한 것입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26절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27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이라고 바꿔 부르십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왜 만드셨을까요? 족보상으로는 아론이 형입니다. 그는 당시 83세였습니다. 모세는 80세로 동생입니다. 그러나 직분 상으로는 모세가 지도자고, 아론이 협력자이자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권위와 최종적인 책임은 누가 갖게 되는 것입니까? 모세가 져야 합니다. 아론이 무너져도 모세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무너지면, 아론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첫 번째 책임을 져야 할 자와 그 다음 책임을 져야 할 자를 하나님께서 분명히 구분해 놓으신 것입니다.
모세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모세는 어려움을 겪을수록 더 견실해졌습니다.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자신의 야망보다 하나님의 비전을 우선시했습니다. 자신이 누릴 평안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투신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는 모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온유함은 쉽게 무너지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인하면서도 포용력을 지닌 성품입니다. 모세가 그런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기 민족의 연약함과 슬픔, 고통을 가슴으로 품을 줄 아는 지도자가 바로 모세입니다.
아론은 어땠을까요? 아론은 자기 앞에 누군가 책임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앞장서 나가면, 아론이 협력하면서 뒷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든 책임과 권위가 모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게 그에게 맞는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즉, 아론 혼자 남았을 때 그는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니, 백성의 목소리가 부담스러웠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자는 그들의 요청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이처럼 모세에게는 모세의 직분과 책임이, 아론에게는 아론의 직분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동역자의 복을 누립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최고의 팀워크는 무엇일까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팀워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사랑과 배려와 친밀감으로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구약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건으로, 신약을 아들 하나님의 사건으로, 사도행전과 교회를 성령 하나님의 사건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함께 움직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혼자 살아가는 그런 시간이나 공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동역하며 살게 돼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사는 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공동 목표입니다. 가끔 의견이 달라 삐걱댈 수도 있고 언성이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한 배에 탄 믿음의 동지요 우리의 목표가 명백하다면, 결국엔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내 이기심과 사욕을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멋진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이 삶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이 아침에 이렇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옆에서 수고하고 애쓰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만나 기쁨을 누리고, 우리 주위에서 애쓰시는 분들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 줄 수 있는 것, 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동역자의 복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깊이 경험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