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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개혁을 위한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논제로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박문을 걸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타락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곧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이것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도전과 위협이 루터를 향해 쏟아졌습니다. 때론 동료들의 비난도 가세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당했던 루터도 한때는 깊은 실의에 빠져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상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던 루터 앞에 수녀였던 그의 아내 폰 보라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 죽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예, 당신의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절망 속에 계속 빠져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의 말에 루터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루터의 이런 개혁정신과 용기가 잘 드러난 찬송가가 있습니다. 루터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 방패와 병기 되시니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이 찬양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이 불렀습니다. 또 후에 멘델스존은 교향곡 5번 제4악장에 이 곡을 주선율로 담아 ‘종교개혁’이라는 곡을 쓰게 됩니다.
루터는 음악을 참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이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영을 고치고, 소생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 음악에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여러분은 찬양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거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개혁의 핵심은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는 세 가지 표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sola scriptura(only scripture) ‘오직 성경으로’, 두 번째 sola gratia(only grace) ‘오직 은혜로’, 세 번째 sola fide(only faith) ‘오직 믿음으로’가 그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만’은 가톨릭의 교훈과 전승을 넘어서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만’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만’은 믿음 이외에 행위와 업적들을 더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루터의 핵심은 믿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선포였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깨달음은 그가 처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천년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지시한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오직 믿음’, 이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믿음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는지, 내 신앙이 미신이나 우상과 유사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습니다.
미신과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믿지 않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내 마음을 쏟는 것이 미신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에 절하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즉 인간이 만든 것에 몰입하는 것이 미신이고, 우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한 모든 시도이기도 합니다. 사라질 것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 매우 근접한 곳에서 우리의 신앙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올 때, 교회 탑에 쓰인 ‘예수소망’이라는 글씨를 늘 봅니다. 다른 쪽에서 오시는 분들은 ‘예수생명’, 또 다른 쪽에서 오시는 분들은 ‘예수구원’이라는 글씨를 보실 것입니다. 이른 아침, 참 기분 좋아지는 장면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강대상 위에 십자가 표시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그 십자가를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예쁜 십자가 목걸이를 하기도 합니다. 제 방에도 몇 가지 십자가 모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서 저 나무가, 저 구리조각이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차 안에 성경책이 있다고 해서 그 차가 안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니까, 십일조를 내니까, 내가 목사니까 내 인생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이고, 십일조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서이지 그것들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과 미신은 함께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보이는 것을 붙잡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마치 나는 안전판 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들, 이단들을 보면 교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이런 미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사람을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사라질 인간을 향해서 맹목적으로 숭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가 그랬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신천지도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업적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렇듯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악한 것입니다.
저는 제 신앙이 신념과 어떻게 다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내 생각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성숙한 표시입니까? 이것은 배우고, 성숙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와 신념은 신앙과는 다릅니다. 내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신념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하늘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신념이란 자기 확신이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념의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를 의지하는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붙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 저도 죄인입니다. 저 사람도 죄인이기에 내가 넉넉한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가겠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바로 들음에서입니다.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 결단, 내 생각, 내 판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들어서 믿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결단하고, 신뢰한다는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셔야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입니다. 내 결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5)
내게 믿음이 생긴 것, 내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내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향한 간절함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저 또한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참된 신앙을 형식주의로 몰아가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신앙생활도 반복되기 시작하면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익숙함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나갈 때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늘 확인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나와 전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 앞에 서면 두렵고 떨리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형식화되어 습관에 멈춰 서게 됩니다. 영적인 신비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 같아도 떨리는 마음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계시와 신비적인 초월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기록된 문자로만 다가옵니다. 그리고 말씀이 문자화가 되면 교리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당대 루터가 몸담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신앙은 교리화되었고, 교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처럼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을 억눌렀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것을 교회가 좌지우지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1∼2)
여기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기만, 외식,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갓난아기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like newborn babie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 막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가 무엇부터 찾습니까? 엄마 젖부터 찾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면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교회 나온 지 50년이 되고 30년이 되면 나는 충분히 성숙한 사람일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래야만 우리가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형식주의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신앙의 성숙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선주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당대에 학식이 풍부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며 꾸중하셨을까요?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이처럼 사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 됐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시며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 막고 있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인들을 미혹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형식주의입니다. 이것을 넘어가지 않으면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잘못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 하다 보면 사유화의 못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만 높임을 받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듯이 지구촌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유화하기 시작하니까 모든 것을 보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요나서를 읽어보셨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민족주의적인 배타성에 가두어 버립니다. 선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하나님을 믿고, 나만 구원을 받겠다는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가 요나서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싫어하십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렇게 신앙을 사유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것을 사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습니다. 또 언어가 다른 히브리어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기면서 초대교회는 갈라지게 됩니다. 교회를 자기의 것으로 사유화하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할레 받은 그리스도인이고, 너는 할례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며 서로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 받은 자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할례 받지 못한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너희가 어찌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교회를 보아도 신앙의 사유화가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은사와 능력이 고린도교회에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열방주의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받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것들을 사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은사를 받은 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고린도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게바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게바파, 나는 바나바에게 전해 들은 바나바파, 나는 바울에게 전해 들은 바울파라며 자신을 구분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다른 한 파가 나타나서 “우리는 그리스도파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린도교회는 엄청난 위기 속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옛 교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오늘 우리에게는 없는 모습일까요? 교회를 오랫동안 나온 분들이 교회의 일에 주인의식을 갖고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새로운 교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시간을 쏟았는지 아는가? 내가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정성을 쏟은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이 교회는 내 것이야!’ 이것은 우상숭배이고, 잘못된 사유화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안수를 주면서 많은 분들이 교회의 직책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내 것이야!’하는 마음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교회 되지 못하고, 목회자는 목회자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목사 세습 문제와 사유화 문제가 나오는 그 모든 배경에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영적지도자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사유화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모든 것을 사유하고 독점하느냐?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기보다는 백성들을 종처럼 휘두르려고 하느냐?” 바로 그것이 종교개혁이 이끈 새로운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유대인도 이방인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도 없는 자들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라는 성별에 상관없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 지식과 재물,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것을 벌거벗고 믿음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고, 답답할 만큼 큰 짐을 지고 있고, 가슴에는 멍이 들고,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도 주님 앞에 나올 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믿음만을 붙잡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은혜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와라. 그리고 나를 향해서 다 터트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모두들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먼저 나부터 변화되고 개혁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소망교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한국교회를 변화되고 개혁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미신을 향해서 가는 것은 아닌가? 내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신념으로써의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형식화 속에서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유화하고 있지 않은가? 늘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의 진리가 나에게 적용되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3: 3 ~ 9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신앙의 개혁을 위한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논제로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박문을 걸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타락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곧 50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이것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도전과 위협이 루터를 향해 쏟아졌습니다. 때론 동료들의 비난도 가세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당했던 루터도 한때는 깊은 실의에 빠져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상심하며 두려워하고 있던 루터 앞에 수녀였던 그의 아내 폰 보라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 죽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예, 당신의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렇게 절망 속에 계속 빠져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내의 말에 루터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루터의 이런 개혁정신과 용기가 잘 드러난 찬송가가 있습니다. 루터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 방패와 병기 되시니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이 찬양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좋아했던 많은 사람들이 불렀습니다. 또 후에 멘델스존은 교향곡 5번 제4악장에 이 곡을 주선율로 담아 ‘종교개혁’이라는 곡을 쓰게 됩니다.
루터는 음악을 참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이 가장 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영을 고치고, 소생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 음악에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습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여러분은 찬양을 좋아하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거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개혁의 핵심은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는 세 가지 표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sola scriptura(only scripture) ‘오직 성경으로’, 두 번째 sola gratia(only grace) ‘오직 은혜로’, 세 번째 sola fide(only faith) ‘오직 믿음으로’가 그것입니다.
‘오직 성경으로만’은 가톨릭의 교훈과 전승을 넘어서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만’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오직 믿음으로만’은 믿음 이외에 행위와 업적들을 더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루터의 핵심은 믿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선포였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깨달음은 그가 처음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천년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지시한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오직 믿음’, 이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믿음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들이 있는지, 내 신앙이 미신이나 우상과 유사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습니다.
미신과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믿지 않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내 마음을 쏟는 것이 미신입니다. 인간이 만든 것에 절하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 우상입니다. 즉 인간이 만든 것에 몰입하는 것이 미신이고, 우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기 위한 모든 시도이기도 합니다. 사라질 것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 매우 근접한 곳에서 우리의 신앙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올 때, 교회 탑에 쓰인 ‘예수소망’이라는 글씨를 늘 봅니다. 다른 쪽에서 오시는 분들은 ‘예수생명’, 또 다른 쪽에서 오시는 분들은 ‘예수구원’이라는 글씨를 보실 것입니다. 이른 아침, 참 기분 좋아지는 장면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 강대상 위에 십자가 표시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그 십자가를 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예쁜 십자가 목걸이를 하기도 합니다. 제 방에도 몇 가지 십자가 모형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하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해서 저 나무가, 저 구리조각이 나를 구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차 안에 성경책이 있다고 해서 그 차가 안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를 하니까, 십일조를 내니까, 내가 목사니까 내 인생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이고, 십일조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서이지 그것들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과 미신은 함께 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잘못 생각하면 보이는 것을 붙잡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마치 나는 안전판 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들, 이단들을 보면 교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이런 미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사람을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하기도 하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사라질 인간을 향해서 맹목적으로 숭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가 그랬고,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신천지도 똑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업적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렇듯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악한 것입니다.
저는 제 신앙이 신념과 어떻게 다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내 생각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성숙한 표시입니까? 이것은 배우고, 성숙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와 신념은 신앙과는 다릅니다. 내 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신념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하늘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신념이란 자기 확신이고,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념의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나를 의지하는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붙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 저도 죄인입니다. 저 사람도 죄인이기에 내가 넉넉한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함께 나가겠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서부터 올까요? 바로 들음에서입니다.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 결단, 내 생각, 내 판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들어서 믿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결단하고, 신뢰한다는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움직이셔야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입니다. 내 결단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5)
내게 믿음이 생긴 것, 내가 성령을 받고,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것이 내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향한 간절함과 감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저 또한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참된 신앙을 형식주의로 몰아가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신앙생활도 반복되기 시작하면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익숙함에 젖어서 습관적으로 나갈 때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늘 확인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나와 전적으로 다른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 앞에 서면 두렵고 떨리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형식화되어 습관에 멈춰 서게 됩니다. 영적인 신비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는 것 같아도 떨리는 마음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계시와 신비적인 초월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기록된 문자로만 다가옵니다. 그리고 말씀이 문자화가 되면 교리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당대 루터가 몸담고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신앙은 교리화되었고, 교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처럼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을 억눌렀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것을 교회가 좌지우지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억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1∼2)
여기 몇 가지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기만, 외식,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갓난아기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like newborn babie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 막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가 무엇부터 찾습니까? 엄마 젖부터 찾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면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교회 나온 지 50년이 되고 30년이 되면 나는 충분히 성숙한 사람일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갓난아이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래야만 우리가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형식주의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신앙의 성숙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선주의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당대에 학식이 풍부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며 꾸중하셨을까요? 자라나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갓난아이처럼 사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 됐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시며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 막고 있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구나!”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인들을 미혹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형식주의입니다. 이것을 넘어가지 않으면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잘못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생활 하다 보면 사유화의 못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만 높임을 받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듯이 지구촌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유화하기 시작하니까 모든 것을 보는 것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요나서를 읽어보셨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민족주의적인 배타성에 가두어 버립니다. 선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하나님을 믿고, 나만 구원을 받겠다는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가 요나서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싫어하십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에도 이렇게 신앙을 사유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것을 사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습니다. 또 언어가 다른 히브리어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생기면서 초대교회는 갈라지게 됩니다. 교회를 자기의 것으로 사유화하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나는 할레 받은 그리스도인이고, 너는 할례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어서 우리는 서로가 다르다’고 생각하며 서로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계속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례 받은 자의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할례 받지 못한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너희가 어찌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교회를 보아도 신앙의 사유화가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은사와 능력이 고린도교회에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열방주의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많이 받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것들을 사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고 조롱했습니다. ‘나는 은사를 받은 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고린도교회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게바에게 복음을 전해 들은 게바파, 나는 바나바에게 전해 들은 바나바파, 나는 바울에게 전해 들은 바울파라며 자신을 구분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다른 한 파가 나타나서 “우리는 그리스도파다!”라고 말할 정도로 고린도교회는 엄청난 위기 속에 빠져 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옛 교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까요? 오늘 우리에게는 없는 모습일까요? 교회를 오랫동안 나온 분들이 교회의 일에 주인의식을 갖고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새로운 교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시간을 쏟았는지 아는가? 내가 교회에 바치는 헌금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정성을 쏟은 게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이 교회는 내 것이야!’ 이것은 우상숭배이고, 잘못된 사유화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안수를 주면서 많은 분들이 교회의 직책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내 것이야!’하는 마음이 나타나면 그때부터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교회 되지 못하고, 목회자는 목회자 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목사 세습 문제와 사유화 문제가 나오는 그 모든 배경에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영적지도자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사유화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모든 것을 사유하고 독점하느냐?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기보다는 백성들을 종처럼 휘두르려고 하느냐?” 바로 그것이 종교개혁이 이끈 새로운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유대인도 이방인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도 없는 자들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남자, 여자라는 성별에 상관없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 지식과 재물,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것을 벌거벗고 믿음만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비록 아무것도 없고, 답답할 만큼 큰 짐을 지고 있고, 가슴에는 멍이 들고,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도 주님 앞에 나올 때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믿음만을 붙잡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은혜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와라. 그리고 나를 향해서 다 터트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모두들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먼저 나부터 변화되고 개혁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소망교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한국교회를 변화되고 개혁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미신을 향해서 가는 것은 아닌가? 내가 신앙이 아니라 자기 신념으로써의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형식화 속에서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사유화하고 있지 않은가? 늘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의 진리가 나에게 적용되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