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들음의 리더십, 솔로몬
솔로몬의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듭니다.
지난 2주 동안 리더십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첫째 주에는 ‘온유함의 리더십’이란 주제 아래 모세의 리더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나쁜 리더십’이란 주제 아래 사울 왕의 리더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주일은 ‘들음의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솔로몬의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열왕기상 3:10)
솔로몬이 무엇을 간구했기에 하나님이 이토록 흡족해 하실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커다란 축복을 더하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원하는 게 뭐니?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허락할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5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열왕기상 3:5 중)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무엇을 구하고 싶습니까? 내가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즘 내가 기도하는 제목을 하나님께 아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라는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열왕기상 3:11 중)
그 부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구하라’ 하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구하는데, 솔로몬은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 기도제목을 내 놓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장수나 부, 승리 등일 것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사법에 “장수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습니다. 또 재물이 많고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자 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이 합니다.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이 하는데, 세상에서 이기며 권력을 추구하는 바람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위와 아래의 소리를 듣는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지도자가 될 만한 이들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대적을 쳐부술 용기가 있는지 시험하셨습니다. 거대한 장군 골리앗이 그의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총명이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을 하시며 하나님이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내가 네가 구하는 모든 것을 줄 텐데, 너는 무엇을 구할래?” 바로 이때 솔로몬은 참으로 놀라운 간구를 주님께 합니다.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3:9 중)
그는 ‘듣는 마음’을 구합니다. 그는 듣는 마음을 통해 백성을 바르게 이끌고, 선악을 분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아주 쉬운 것 같으나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지도자의 최고 덕목 중 하나가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입니다. 지도자는 크게 두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소래이며, 하나는 위로부터의 소리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먼저 공동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가장이 되면 배우자의 목소리, 자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만 갖다 주었다고 좋은 가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 대 주었다고 좋은 가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돈이 좀 부족해도, 좋은 음식을 매일 먹지 않아도, 가족의 소리를 듣는 가장이 좋은 가장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직장의 CEO가 되면 직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국민의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결국 무너지고 지도자도 파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이후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는데, 한 아이가 죽게 됩니다. 아이가 하나가 되자 두 엄마는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며 솔로몬의 재판대 앞에 섰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두 여인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는 지혜로운 판결을 합니다. 아이를 반으로 나눠 각각 나누어 가지란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은 반으로 나눌 수 있지만 사람을 반으로 나누면 어떻게 됩니까?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 판결에서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가 판가름 납니다. 진짜 엄마는 자기가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되니 그 아이를 반으로 나누지 말고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반면 가짜 엄마는 솔로몬의 판결대로 둘로 나누어 갖자고 수락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진짜 엄마가 가려졌고, 솔로몬의 위대한 재판도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기록된 내용이 이렇습니다. 28절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열왕기상 3:28)
이처럼 아래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참 지도자입니다. 나아가 지도자는 위로부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신이 최고인 양, 자기보다 큰 권력자는 없는 양, 자기 잘난 맛에 살면 그 순간부터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내가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큰 권력자가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지혜와 총명,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나보다 연약한 사람의 소리를 듣는 동시에 나보다 크신 하늘의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한 지도자, 이로써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겸손한 예배자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가만히 앉아서 이런 마음을 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 구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예배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말은 천 마리 양을 갖고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매일매일 천 번을 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천 마리의 양으로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내 죄를 사죄 받기 위한다면 한 마리 양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 제물이란 공동체 전체를 대신해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예배자였습니다. 감사하며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전에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배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솔로몬)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열왕기상 3:6 중)
“아버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아들인 나, 솔로몬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위대한 답변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솔로몬은 겸손한 지도자였습니다. 왕이자 지도자였지만,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열왕기상 3:7)
그는 스스로를 ‘작은 아이’로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이 큰 백성을 인도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백성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언제 했습니까? 솔로몬의 시작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나중에는 교만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자기 욕심에 치우칩니다.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며 교만한 행보를 보이고, 결국 그 역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하는데, 이렇게 몰락하는 이유는 무엇이 부족해서겠습니까? 듣는 마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도 목은 뻣뻣하면 안 됩니다.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로부터도 배울 준비가 돼 있어야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들음을 배격하는 지도자는 좋은 지도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경청할 때 상대방이 보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 문제를 넘어서야 합니다. 보수에게도 문제가 있고, 진보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양자 간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진보 쪽에 위치한 사람들 가운데 막혀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보수 쪽에도 막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수는 전통을 붙잡는 자들이요, 진보는 그보다 앞선 단계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만 보수, 말만 진보라고 하면서 이기적인 자아 집착에 갇혀 있으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경청이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청을 요구하는 자는 권력자고, 경청해야 하는 자는 피권력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자는 ‘갑’이고, 듣는 자는 ‘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임에만 가면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경청이란 매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런데 왜 이 경청이 어렵습니까?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틀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들으면서도 방어기제가 작동됩니다. 아무리 들어도 배우려 하지 않고 비판하려고만 합니다. 내 생각은 바꾸지 않고 당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또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까닭에 경청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언 12장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모두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반면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마음을 열고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청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경청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공감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 아들이 대학교에 합격했어요!” 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 그래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와! 정말 잘됐네요!”라고 기쁨에 공감해 줍니다. 어떤 사람하고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요? 함께 공감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과 더 이야기하고 싶고 교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말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컨설턴트인 나는 고객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아무런 조언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객의 말을 하나하나 경청한 후부터 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대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경청하는 자리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경청이란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경청을 습관화 하게 되면 내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내 이야기를 경청하게 됩니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존중하게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떤 존재가 됩니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 나는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청은 진심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겠구나. 경청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듣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그만큼 경청은 어려운 일이자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경청할 때 일어나는 축복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신뢰’입니다.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상담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듣는 일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하는 대부분의 일도 듣는 일입니다. 듣기만 해도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담자가 1시간 동안 이야기만 했는데,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런 차원에서 듣지 않고 서로 말하기만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이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만 이야기하거나 아내만 이야기한다면, 그 가정은 망하는 가정입니다.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하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치유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속한 회사를 치유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 공동체에 경청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공동체 원 모두가 서로 경청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경청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불평하며 한탄을 쏟아냅니까?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 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과 선물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경청합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획 하나만 더 그으면 ‘자랑’이 됩니다.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경청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먼저 떠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새 주변 사람을 하나둘 잃고 맙니다.
모든 지도력의 근원은 경청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입은 하나를 주셨고, 귀는 두 개를 허락하셨습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이상 행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경청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경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3: 4 ~ 13
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솔로몬의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듭니다.
지난 2주 동안 리더십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첫째 주에는 ‘온유함의 리더십’이란 주제 아래 모세의 리더십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나쁜 리더십’이란 주제 아래 사울 왕의 리더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주일은 ‘들음의 리더십’이란 제목으로 솔로몬의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열왕기상 3:10)
솔로몬이 무엇을 간구했기에 하나님이 이토록 흡족해 하실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커다란 축복을 더하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원하는 게 뭐니?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허락할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5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열왕기상 3:5 중)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무엇을 구하고 싶습니까? 내가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즘 내가 기도하는 제목을 하나님께 아뢸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라는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열왕기상 3:11 중)
그 부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구하라’ 하면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구하는데, 솔로몬은 백성과 공동체를 위한 기도제목을 내 놓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장수나 부, 승리 등일 것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사법에 “장수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습니다. 또 재물이 많고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자 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이 합니다. “승리하십시오.”라는 인사도 많이 하는데, 세상에서 이기며 권력을 추구하는 바람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그것들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위와 아래의 소리를 듣는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지도자가 될 만한 이들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대적을 쳐부술 용기가 있는지 시험하셨습니다. 거대한 장군 골리앗이 그의 시험 대상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는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총명이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이 시험을 하시며 하나님이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내가 네가 구하는 모든 것을 줄 텐데, 너는 무엇을 구할래?” 바로 이때 솔로몬은 참으로 놀라운 간구를 주님께 합니다.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3:9 중)
그는 ‘듣는 마음’을 구합니다. 그는 듣는 마음을 통해 백성을 바르게 이끌고, 선악을 분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아주 쉬운 것 같으나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지도자의 최고 덕목 중 하나가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입니다. 지도자는 크게 두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소래이며, 하나는 위로부터의 소리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먼저 공동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집에서 가장이 되면 배우자의 목소리, 자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만 갖다 주었다고 좋은 가장이 되는 게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다 대 주었다고 좋은 가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돈이 좀 부족해도, 좋은 음식을 매일 먹지 않아도, 가족의 소리를 듣는 가장이 좋은 가장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직장의 CEO가 되면 직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으면 국민의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결국 무너지고 지도자도 파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이후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입니다. 두 여인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는데, 한 아이가 죽게 됩니다. 아이가 하나가 되자 두 엄마는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며 솔로몬의 재판대 앞에 섰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두 여인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두 여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는 지혜로운 판결을 합니다. 아이를 반으로 나눠 각각 나누어 가지란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은 반으로 나눌 수 있지만 사람을 반으로 나누면 어떻게 됩니까?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 판결에서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가 판가름 납니다. 진짜 엄마는 자기가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되니 그 아이를 반으로 나누지 말고 다른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반면 가짜 엄마는 솔로몬의 판결대로 둘로 나누어 갖자고 수락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이의 진짜 엄마가 가려졌고, 솔로몬의 위대한 재판도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기록된 내용이 이렇습니다. 28절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열왕기상 3:28)
이처럼 아래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참 지도자입니다. 나아가 지도자는 위로부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자신이 최고인 양, 자기보다 큰 권력자는 없는 양, 자기 잘난 맛에 살면 그 순간부터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내가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큰 권력자가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지혜와 총명, 능력을 갖고 계시는 분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듣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나보다 연약한 사람의 소리를 듣는 동시에 나보다 크신 하늘의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겸손한 지도자, 이로써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겸손한 예배자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가만히 앉아서 이런 마음을 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 구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예배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말은 천 마리 양을 갖고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매일매일 천 번을 드렸다는 뜻이 아니라 천 마리의 양으로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내 죄를 사죄 받기 위한다면 한 마리 양이면 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 제물이란 공동체 전체를 대신해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뜻입니다. 즉 그는 예배자였습니다. 감사하며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기 전에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배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6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솔로몬)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열왕기상 3:6 중)
“아버지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아들인 나, 솔로몬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위대한 답변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솔로몬은 겸손한 지도자였습니다. 왕이자 지도자였지만,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열왕기상 3:7)
그는 스스로를 ‘작은 아이’로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이 큰 백성을 인도할 수 있겠냐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듣는 마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백성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악을 판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언제 했습니까? 솔로몬의 시작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나중에는 교만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자기 욕심에 치우칩니다. 수많은 처첩들을 거느리며 교만한 행보를 보이고, 결국 그 역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좋아야 하는데, 이렇게 몰락하는 이유는 무엇이 부족해서겠습니까? 듣는 마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도 목은 뻣뻣하면 안 됩니다. 들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로부터도 배울 준비가 돼 있어야 존경받는 어른이 됩니다. 들음을 배격하는 지도자는 좋은 지도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경청할 때 상대방이 보입니다.
우리 시대는 이 문제를 넘어서야 합니다. 보수에게도 문제가 있고, 진보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또 양자 간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진보 쪽에 위치한 사람들 가운데 막혀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보수 쪽에도 막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수는 전통을 붙잡는 자들이요, 진보는 그보다 앞선 단계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말만 보수, 말만 진보라고 하면서 이기적인 자아 집착에 갇혀 있으려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경청이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청을 요구하는 자는 권력자고, 경청해야 하는 자는 피권력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말하는 자는 ‘갑’이고, 듣는 자는 ‘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임에만 가면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들을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경청이란 매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경청입니다.
그런데 왜 이 경청이 어렵습니까?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틀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들으면서도 방어기제가 작동됩니다. 아무리 들어도 배우려 하지 않고 비판하려고만 합니다. 내 생각은 바꾸지 않고 당신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또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까닭에 경청이 어렵습니다. 우리는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언 12장 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모두 옳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반면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면 마음을 열고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청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경청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공감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 아들이 대학교에 합격했어요!” 하고 기쁨을 표현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 그래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와! 정말 잘됐네요!”라고 기쁨에 공감해 줍니다. 어떤 사람하고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요? 함께 공감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과 더 이야기하고 싶고 교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청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말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작고하신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컨설턴트인 나는 고객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아무런 조언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객의 말을 하나하나 경청한 후부터 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대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경청하는 자리에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경청이란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경청을 습관화 하게 되면 내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도 내 이야기를 경청하게 됩니다. 내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존중하게 됩니다. 그럼 나는 어떤 존재가 됩니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 나는 소중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경청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경청은 진심으로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겠구나. 경청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듣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그만큼 경청은 어려운 일이자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경청할 때 일어나는 축복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신뢰’입니다.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상담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듣는 일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하는 대부분의 일도 듣는 일입니다. 듣기만 해도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담자가 1시간 동안 이야기만 했는데, 그 안에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런 차원에서 듣지 않고 서로 말하기만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이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만 이야기하거나 아내만 이야기한다면, 그 가정은 망하는 가정입니다. 함께 공감하며 이야기하는 가정이 진정한 가정 공동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치유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속한 회사를 치유하고 싶습니까?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그 공동체에 경청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 공동체 원 모두가 서로 경청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경청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불평하며 한탄을 쏟아냅니까?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어 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과 선물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경청합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획 하나만 더 그으면 ‘자랑’이 됩니다. 나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경청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먼저 떠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새 주변 사람을 하나둘 잃고 맙니다.
모든 지도력의 근원은 경청에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 입은 하나를 주셨고, 귀는 두 개를 허락하셨습니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이상 행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에게는 경청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경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경청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역사와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6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들음의 리더십, 솔로몬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25장, 28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왕상3:4~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1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모세는 온유함의 리더십, 사울왕은 나쁜 리더십의 모델, 솔로몬은 들음의 리더십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고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요구할까?
설교의 요약
하나님의 물음에 세상 사람들은 쉽게 요청합니다(11절).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여’ 요청합니다. 그들의 요구하는 것은 1) 건강의 복입니다. 2) 부자 되는 것입니다. 3) 경쟁사회에서 늘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인가를 시험하십니다. 솔로몬에게 자기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가? 그의 총명을 시험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하였습니다(9절).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을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왕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듣는 마음(Listening Heart)입니다. 왜 이것이 지도자의 마음일까?
지도자가 되면 1) 공동체의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가장은 가족의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직장의 CEO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의 소리를 경청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막히면 그 공동체가 붕괴됩니다. 2)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내가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하늘에 최고 권력자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보다 더 큰 지혜와 총명을 지니신 하늘의 지도자가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듣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솔로몬에게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1)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고 2)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6절) 3) 왕으로서 자기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7절)할 때에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작은 아이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수효가 많아서 지혜와 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듣는 마음, 곧 경청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경청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1) 자존심의 손상 때문입니다. 경청이란 수동적인 태도이며, 그것은 패배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3)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청했을 때에 얻게 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경청을 하면 “상대방이 내가 소중한 사람이구나”하는 복된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순간 내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경청의 순간에 치유와 회복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경청은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가들, 정신과 의사들이 첫 번째 하는 일이 바로 듣는 일입니다. 가정, 회사,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를 진정으로 치유하고 싶다면 진심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는 두 개, 입은 한 개를 허락한 것을 보면 경청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나누기
1.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물으심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함께 나눠보세요.
2. 올바른 경청의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에 경청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들에게도 경청할 줄 아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우리의 삶의 현장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