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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까지 이르러

사도행전 1: 6 ~ 8

김지철 목사

2007.07.29

사회적으로 기독교 선교정책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대학부, 청년부가 강원도, 경상도와 전라도로 전도 봉사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온 젊은이들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아주 빛났습니다. 봉사를 마친 학생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저는 우리가 뭔가를 베풀고 전하러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을 분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사람들이 시골까지 와서 애쓰며 좋은 일을 해준다며 더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사역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게 먼저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씻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은 서울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같이 사역한 조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야 함께하는 동역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태백과 삼척은 우리가 신을 벗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으로부터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더 많은 대학생과 청년들을 우리나라 곳곳과 전 세계에 파송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 붙잡혀 있는 청년들과 이미 살해된 목사님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고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곳곳에서 수많은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기독교를 향한 비판과 비난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기독교 신앙, 기독교 선교 정책에 대한 수많은 질의와 교회를 향한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그 비판의 핵심은 어떻게 기독교 지도자들이 청년들을 그렇게 위험한 사지에 보낼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독선적이다, 기독교는 자기 멋대로 한다, 기독교의 선교 정책은 너무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선교라는 이름만으로 종교적인 환경, 정치사회적 배경, 문화적인 특징을 검토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고 말합니다.

우리 백성은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민족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삶일까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나만 잘 믿고 즐거워하며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 삶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참 이상해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다른 사람도 초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기독교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선교 마인드는 사실 한국을 살린 20세기, 21세기에 한국인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20세기 중엽부터 21세기 초기까지 참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 땅에서 행했습니다. 우리 백성을 다시 되돌아보면 아주 놀라운 민족입니다. 용감하고 부지런한 백성입니다. 서구 사회가 천년 이상 걸렸던 역사적 성숙의 길을 한국사회는 100년의 세월 속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왜 소란합니까? 한국 사회가 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까? 한국 사회가 왜 갈등을 경험합니까? 이것은 엄청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서구 사회가 2천년 동안 겪었던 아픔의 세월을 우리는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민주주의를 배웁니다. 시장경제와 삶의 가장 발달된 성숙한 사상들을 배워나가면서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 마인드를 가진 우리 백성들은 전 세계를 향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백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세계를 향해 흩어졌던 백성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들은 기업가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최근 들어서 NGO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 정규기구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들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은 광야와 같은 험난한 곳으로 재물과는 관계없이 가장 열악한 지역에 자기 목숨을 담보로 붙잡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위에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바로 기업가와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낸 인물들입니다. 지난 세기 60-80년대에 사랑하는 가족을 고국에 두고 아랍권 곳곳에, 아니 전 세계에 흩어져서 수고와 땀을 흘렸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이 잘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이 귀한 일들을 해 낸 우리 선배와 동료들의 수고와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맨발로 뛴 모험가요 도전자들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이뤄낸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우리 선배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도 선교사들의 순교와 헌신 때문에 축복받았습니다.

우리 땅은 120년 전, 선교사들을 적대했습니다. 평양에 온 토마스 선교사는 첫 순교의 재물로 바쳐졌습니다. 당시 우상의 나라였던 우리에게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수고와 눈물, 기도와 정성,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축복받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선교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했던 기도문 중 일부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자신들과 우리 영혼이 하나임을 하늘나라에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옵소서.”

사람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핍박하며 천대하던 땅에서 선교사들은 자기의 삶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위해서 생명을 건 사람으로 자기의 뼈를 선교지에 묻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간 23명 청년들은 사랑의 의료 봉사를 하려고 갔습니다. 그들은 소중하고 복된 청년들입니다. 제 아들과 딸이라도 “너 한번 가봐라. 고통 받는 현장을 직접 봐라. 네가 앞으로 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한번 기도하면서 겪어보라.”고 보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위기를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위험부담은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분당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50대 중반의 한국에서 모범적인 목회자 중 한분입니다. 교회 개척을 스스로 분가해서 하며 교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오래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병원과 유치원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청년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런 모범적인 교회가 위험부담에 노출되면서 국민들의 시선 앞에 선 것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아픔과 고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반성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교사 파송숫자와 업적에 너무 신경을 써서 업적 만들기에 바쁜 선교사들을 만들었습니다. 나쁜 자만심과 우월적인 마음으로 선교지에 가서 우리는 주는 자요, 너희는 받는 자이니 혜택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나가지 않고 잘못된 우월주의로 나간 우리의 못된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지에서 강요와 주입으로 과거 제국주의 정책이 갖고 있던 강제적인 모습의 잔재가 우리들 속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선교지역에 전문가가 없다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들의 정치, 종교, 문화 등을 연구하지 않은 채로 나가는 우리 선교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장기 선교사, 전문 선교사들은 생명을 건 사람들로 그들은 세계 어디나 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단기 선교를 가는 분들은 보다 안전하고 여건이 다 준비된 곳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다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열악한 곳,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곳에 NGO사람들과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끊어지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그 땅을 위해서 축복합니다. 그 땅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들을 우리는 격려하고 깊이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땅 끝을 향한 선교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라. 예루살렘을 떠나라. 세상 끝을 향해 나가라.” 우리는 이것을 선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나만 믿고, 나만 좋고, 나만 기뻐하고, 나만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교라는 말씀에 비전을 주면서 두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먼저, 선교를 국권회복, 정치적인 권력의 확대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시면 메시아 옆에 있는 신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가 언제입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전 세계를 다스리는 민족국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거기에 관심을 갖지 말라. 권력에 관심 갖지 말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지배할까에 관심 갖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에 관심을 가져라. 하나님 나라란 민족주의적인 권력의 쟁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국가회복이 필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이 더 우선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데올로기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관이다.”
과거 교회사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정복주의자의 이데올로기에 동요한 적이 있고,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확대되는 것에 선교가 동행했기 때문에 식민지에 고통 받던 백성들이 참으로 가슴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주의를 거부하면서 기독교를 거부했습니다. 한국이 축복을 받은 이유는 기독교 국가가 우리 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본 제국이 우리 민족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본 제국에 대해서는 거절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던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 민족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사랑, 영적인 회복, 영적인 부흥, 인간의 정신적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바뀌어 질 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민족적인 정치적, 경제적 나라가 세워진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그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고의 변화를 요청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은 우리 민족이 다스리는 때가 되면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몰려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루살렘을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루살렘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때까지만 예루살렘에 모여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예루살렘에 모여서 깨달으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를 깨달으면 예루살렘을 떠나라. 나가라. 흩어져라. 전 세계를 향해서 나가라. 성령과 함께 나가라.”
이것은 정복이나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이기적인 탐욕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자기 해체를 감행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그런 종교입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자기의 전 생애를 드린 분입니다. 성령의 영이란 자기 부정의 영입니다. 자기 해체의 영입니다. 성령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이기적인 탐심을 떠나가는 영입니다. 주님은 이 성령의 영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놀랍게도 항상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 것은 모험이고 도전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기 삶의 투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를 향해서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이곳은 자기 백성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적대지역으로 멸시하고 천대하여 긴장과 갈등과 대결이 있었던 사마리아를 향해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향해서 과감하게 땅 끝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땅 끝이란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낯선 곳입니다. 황제 우상을 섬기고 수많은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가득한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나가서 보고들은 것, 성령으로 마음속에 깨달은 것,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땅 끝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와 주후 1-2세기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받았습니다. 그 수난과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축복, 은혜의 축복이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은 땅 끝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의 아픔에 참여하면서 땅 끝 낯선 곳에 아픔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왜 모범적인 교회에서 보낸 청년들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는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고난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하필이면 목사가 먼저 죽임을 당했는가?
한국 교회와 성도를 대표하여 희생과 순교의 길을 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려운 위기에 우리 스스로 회개와 반성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자기 욕심과 탐심을 채우는데 연연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안에서 과감하게 자기 해체와 부정을 시도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자기 담을 높이 쌓고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안에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고통 받는 외로운 자들의 아픔에 참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야망과 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채우는 교회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참된 성령의 교회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 끝이란 지역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개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땅 끝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욕심쟁이, 놀고먹기를 즐거워하는 게으름뱅이들, 인터넷 중독자들,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 연애에 실패하고, 가정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죽음을 연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목적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땅 끝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에 임재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 유대로 가라, 가기 싫었던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땅 끝을 향해 사랑과 섬김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받고 땅 끝을 향해 나갈 때, 때로는 어렵고 비난과 고난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길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선 땅 끝에 변화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주셔서 120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 나눔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가 있음으로 인해 우리 주위에서 땅 끝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생명과 치유와 구원과 사랑의 사건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지금도 22명의 청년들이 고통을 받고 있사오니 그들이 무사히 이 땅에 돌아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새롭게 일구어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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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 6 ~ 8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회적으로 기독교 선교정책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대학부, 청년부가 강원도, 경상도와 전라도로 전도 봉사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온 젊은이들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아주 빛났습니다. 봉사를 마친 학생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저는 우리가 뭔가를 베풀고 전하러 가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을 분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사람들이 시골까지 와서 애쓰며 좋은 일을 해준다며 더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온 사역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게 먼저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씻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은 서울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같이 사역한 조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야 함께하는 동역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태백과 삼척은 우리가 신을 벗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으로부터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더 많은 대학생과 청년들을 우리나라 곳곳과 전 세계에 파송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 붙잡혀 있는 청년들과 이미 살해된 목사님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고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곳곳에서 수많은 반응이 터져 나왔습니다. 특별히 기독교를 향한 비판과 비난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기독교 신앙, 기독교 선교 정책에 대한 수많은 질의와 교회를 향한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그 비판의 핵심은 어떻게 기독교 지도자들이 청년들을 그렇게 위험한 사지에 보낼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독선적이다, 기독교는 자기 멋대로 한다, 기독교의 선교 정책은 너무 도전적이고 모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선교라는 이름만으로 종교적인 환경, 정치사회적 배경, 문화적인 특징을 검토하지 않고 젊은이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냈다고 말합니다.

우리 백성은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민족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삶일까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나만 잘 믿고 즐거워하며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기독교 삶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참 이상해서 내가 예수를 믿으면 다른 사람도 초청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기독교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선교 마인드는 사실 한국을 살린 20세기, 21세기에 한국인들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은 20세기 중엽부터 21세기 초기까지 참으로 엄청난 역사를 이 땅에서 행했습니다. 우리 백성을 다시 되돌아보면 아주 놀라운 민족입니다. 용감하고 부지런한 백성입니다. 서구 사회가 천년 이상 걸렸던 역사적 성숙의 길을 한국사회는 100년의 세월 속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왜 소란합니까? 한국 사회가 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까? 한국 사회가 왜 갈등을 경험합니까? 이것은 엄청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서구 사회가 2천년 동안 겪었던 아픔의 세월을 우리는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민주주의를 배웁니다. 시장경제와 삶의 가장 발달된 성숙한 사상들을 배워나가면서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교 마인드를 가진 우리 백성들은 전 세계를 향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백성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세계를 향해 흩어졌던 백성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들은 기업가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최근 들어서 NGO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 정규기구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들고 가는 선교사들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은 광야와 같은 험난한 곳으로 재물과는 관계없이 가장 열악한 지역에 자기 목숨을 담보로 붙잡고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위에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바로 기업가와 노동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아낸 인물들입니다. 지난 세기 60-80년대에 사랑하는 가족을 고국에 두고 아랍권 곳곳에, 아니 전 세계에 흩어져서 수고와 땀을 흘렸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이 잘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이 귀한 일들을 해 낸 우리 선배와 동료들의 수고와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맨발로 뛴 모험가요 도전자들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선배들을 통해서 우리는 소중한 역사를 이뤄낸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우리 선배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도 선교사들의 순교와 헌신 때문에 축복받았습니다.

우리 땅은 120년 전, 선교사들을 적대했습니다. 평양에 온 토마스 선교사는 첫 순교의 재물로 바쳐졌습니다. 당시 우상의 나라였던 우리에게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선교사들의 수고와 눈물, 기도와 정성,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축복받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선교하면서 너무 힘들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했던 기도문 중 일부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자신들과 우리 영혼이 하나임을 하늘나라에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옵소서.”

사람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핍박하며 천대하던 땅에서 선교사들은 자기의 삶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를 위해서 생명을 건 사람으로 자기의 뼈를 선교지에 묻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간 23명 청년들은 사랑의 의료 봉사를 하려고 갔습니다. 그들은 소중하고 복된 청년들입니다. 제 아들과 딸이라도 “너 한번 가봐라. 고통 받는 현장을 직접 봐라. 네가 앞으로 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한번 기도하면서 겪어보라.”고 보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위기를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위험부담은 곳곳에 놓여 있습니다. 분당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는 50대 중반의 한국에서 모범적인 목회자 중 한분입니다. 교회 개척을 스스로 분가해서 하며 교회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오래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병원과 유치원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청년들을 보낸 것입니다. 이런 모범적인 교회가 위험부담에 노출되면서 국민들의 시선 앞에 선 것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아픔과 고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반성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교사 파송숫자와 업적에 너무 신경을 써서 업적 만들기에 바쁜 선교사들을 만들었습니다. 나쁜 자만심과 우월적인 마음으로 선교지에 가서 우리는 주는 자요, 너희는 받는 자이니 혜택을 받으라고 외쳤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나가지 않고 잘못된 우월주의로 나간 우리의 못된 모습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지에서 강요와 주입으로 과거 제국주의 정책이 갖고 있던 강제적인 모습의 잔재가 우리들 속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선교지역에 전문가가 없다는 반성도 해봅니다. 그들의 정치, 종교, 문화 등을 연구하지 않은 채로 나가는 우리 선교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장기 선교사, 전문 선교사들은 생명을 건 사람들로 그들은 세계 어디나 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단기 선교를 가는 분들은 보다 안전하고 여건이 다 준비된 곳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들을 다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열악한 곳,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곳에 NGO사람들과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끊어지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그 땅을 위해서 축복합니다. 그 땅 백성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들을 우리는 격려하고 깊이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땅 끝을 향한 선교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증인이 되라. 예루살렘을 떠나라. 세상 끝을 향해 나가라.” 우리는 이것을 선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나만 믿고, 나만 좋고, 나만 기뻐하고, 나만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교라는 말씀에 비전을 주면서 두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셨습니다.
먼저, 선교를 국권회복, 정치적인 권력의 확대로 이해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시면 메시아 옆에 있는 신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가 언제입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전 세계를 다스리는 민족국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와 시간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거기에 관심을 갖지 말라. 권력에 관심 갖지 말라.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지배할까에 관심 갖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에 관심을 가져라. 하나님 나라란 민족주의적인 권력의 쟁취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에 국가회복이 필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이 더 우선적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데올로기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관이다.”
과거 교회사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정복주의자의 이데올로기에 동요한 적이 있고,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확대되는 것에 선교가 동행했기 때문에 식민지에 고통 받던 백성들이 참으로 가슴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주의를 거부하면서 기독교를 거부했습니다. 한국이 축복을 받은 이유는 기독교 국가가 우리 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본 제국이 우리 민족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본 제국에 대해서는 거절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던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 민족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심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사랑, 영적인 회복, 영적인 부흥, 인간의 정신적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바뀌어 질 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민족적인 정치적, 경제적 나라가 세워진다는 사실을 아셨기에 그것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고의 변화를 요청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제자들은 우리 민족이 다스리는 때가 되면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몰려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루살렘을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루살렘이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때까지만 예루살렘에 모여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예루살렘에 모여서 깨달으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임재를 깨달으면 예루살렘을 떠나라. 나가라. 흩어져라. 전 세계를 향해서 나가라. 성령과 함께 나가라.”
이것은 정복이나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이기적인 탐욕을 깨뜨리라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자기 해체를 감행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그런 종교입니다. 성령 충만함이란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데 자기의 전 생애를 드린 분입니다. 성령의 영이란 자기 부정의 영입니다. 자기 해체의 영입니다. 성령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이기적인 탐심을 떠나가는 영입니다. 주님은 이 성령의 영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놀랍게도 항상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한계를 부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 것은 모험이고 도전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자기 삶의 투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유대를 향해서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이곳은 자기 백성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적대지역으로 멸시하고 천대하여 긴장과 갈등과 대결이 있었던 사마리아를 향해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향해서 과감하게 땅 끝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땅 끝이란 로마 제국이 다스리는 낯선 곳입니다. 황제 우상을 섬기고 수많은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가득한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나가서 보고들은 것, 성령으로 마음속에 깨달은 것,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는 땅 끝으로 나아갑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와 주후 1-2세기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받았습니다. 그 수난과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믿음의 축복, 은혜의 축복이 우리들에게까지 전달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은 땅 끝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의 아픔에 참여하면서 땅 끝 낯선 곳에 아픔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왜 모범적인 교회에서 보낸 청년들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이는 한국 교회를 대표해서 고난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하필이면 목사가 먼저 죽임을 당했는가?
한국 교회와 성도를 대표하여 희생과 순교의 길을 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어려운 위기에 우리 스스로 회개와 반성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자기 욕심과 탐심을 채우는데 연연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안에서 과감하게 자기 해체와 부정을 시도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자기 담을 높이 쌓고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 안에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고통 받는 외로운 자들의 아픔에 참여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고 있는가?
한국 교회는 목회자의 야망과 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채우는 교회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참된 성령의 교회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 끝이란 지역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인 개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땅 끝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욕심쟁이, 놀고먹기를 즐거워하는 게으름뱅이들, 인터넷 중독자들,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 연애에 실패하고, 가정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죽음을 연상하는 사람들, 그리고 인생의 목적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땅 끝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에 임재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 유대로 가라, 가기 싫었던 사마리아와 땅 끝을 향해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가 땅 끝을 향해 사랑과 섬김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받고 땅 끝을 향해 나갈 때, 때로는 어렵고 비난과 고난의 역사가 있을지라도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길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선 땅 끝에 변화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주셔서 120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성령의 사람, 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 나눔의 사람으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가 있음으로 인해 우리 주위에서 땅 끝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생명과 치유와 구원과 사랑의 사건이 나타나게 하옵소서. 지금도 22명의 청년들이 고통을 받고 있사오니 그들이 무사히 이 땅에 돌아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역사를 새롭게 일구어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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