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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부르고 싶은 이름, 어머니

요한복음 19: 25 ~ 27

김지철 목사

2012.05.13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참 많은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아버지, 어머니..’ 하고 대뇌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당신이 제 부모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받은 것이 많아서 제게는 모든 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하고 감사의 고백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만 불러도 화가 치밀지도 모릅니다. 미운 감정이 올라오고, 가슴이 냉랭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기억나서 그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게 사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감정들, 사랑과 미움, 연민이 서로 엉켜 마음 속에 흘러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 부모님을 떠올릴 때 확실히 달라지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용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이 땅을 떠나신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지기도 하고, 멀리 계신 부모님이 몹시 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도 많이 불렀던 엄마, 아빠인데 그 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의 모습이 있습니까?

마리아도 어머니였습니다.

그간에 어버이 주일이 되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픔과 슬픔이 나타납니다. 여인의 생애는, 처녀 때와 아내가 된 때, 그리고 어머니가 된 때의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마리아를 매우 절제된 판단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분명 마리아는 첫 여인 하와와는 다른 여인이었습니다. 하와는 유혹에 빠진 여인이었지만 마리아는 유혹을 이긴 여인이었고, 고난과 슬픔을 참아내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이것보다 조금 더 특별한 존재, 즉 성인으로 부각시켜서 추앙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록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을 보면, 마리아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원죄가 없는 사람이다. 둘째,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출산하고, 마지막까지도 동정녀로 살았다. 셋째, 마리아는 죽은 후 하나님에 의해서 승천함을 받았다.’ 이러한 성모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 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톨릭에서 말하는 이 세 가지 특징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아들이 죽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슬픔을 가졌던 여인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하나님께 더 잘 받아드려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그저 보통의 여성이었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인간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고,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갈등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위대한 것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신실한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그 믿음의 크기만큼 충격과 고통들이 늘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때마다 그것들을 견디며 이겨나갔습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녀가 받은 충격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첫 번째 충격은, 처녀가 임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약혼 상태에 있었을 때,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요, 복을 받은 자요.” 라면서 “네가 곧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10대 처녀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장 34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렇게 천사를 향해 묻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 1:34)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약혼한 남자에게 파혼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파혼이 아닙니다. 음란한 여자가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돌로 여인을 쳐서 죽여도 마땅한 매우 악하고 중한 범죄를 저지른 일입니다.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매우 특이한 말을 이어갑니다. “성령으로 네가 임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귀한 아이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임신을 하다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두렵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천사가 전하는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최대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제가 다 알지 못합니다. 사실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모든 신앙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자신의 생을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길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마리아가 겪은 충격은 남편을 일찍 잃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나이가 12살이 넘어가면서 요셉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소식으로 갖게 된 첫 번째 아들인 예수님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채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미 12살 때부터 아들 예수는 자기 방식으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예수님은 자기의 길을 서서히 가기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가족을 떠나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공생애 생활을 하는 동안은 아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조차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공생애 초기,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 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하루, 마리아가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기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예수님에게 누군가가 가족들이 왔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들도 왔습니다.” 모처럼의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본다는 마음에 벌써부터 기뻐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은 다정하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냉정해보이리만큼 반응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3~35)

찾아온 가족들이 아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고 자매고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 마리아는 속으로 탄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가장 큰 충격과 슬픔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들이 벌거벗기는 것을, 가슴에 창이 찔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손에 못이 박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어떤 고통이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비통함, 참담함?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어느 어머니가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이 사실을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한복음 19:25)

이 담담한 몇 자 안에는 마리아의 통곡이 들어있습니다. ‘내 아들이 뭘 잘못했기에, 내 아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봐야 되는가’ 하고 가슴을 치며 울었을 것입니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아픔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가 저절로 이만큼 자랐나요? 아니 우리 자녀들을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이런 어른이었나요? 아프고, 낙심하고, 실수와 실패를 겪는 그 세월동안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계셨던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이 우리를 이만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로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갓 스무 살에 결혼해서 결혼한 지 3년 만에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전쟁 중에 어머니는 만삭이셨고, 제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여동생이었는데, 전쟁 중에 경기가 들려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때는 여인에게 있어 남편이 먼저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낳은 자식을 먼저 흙 속에 묻는 아픔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저도 자녀들을 키우다보니 그 때는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픔이 가슴에 박히고, 사무치는 듯한 통곡의 소리가 이제는 들려옵니다. 남편이 죽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요?
목사님들이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이번에 청년이 죽었어요. 어머니가 통곡하고 힘들어하셔서 목회자인 저도 같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 분들의 슬픔을 사람이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바로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 길을 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는 통곡하면서 그 십자가 밑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아마 서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어머니의 사랑에는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없이 키워진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탄식하면서 대신 아파하지 않았던 자녀들이 이 땅위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이 메고,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는 그 자리 곁에서 어머니가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곁에 서 있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여기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아라, 이분이 네 어머니다.” 그 때부터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어머니가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말해보십시오.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입니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고마워요. 엄마, 아빠가 내 부모님인 것이 참 감사해요.”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은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십니다. 이 쉬운 일을 우리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어린이 주일에는 부모님들께 자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자녀분들께 부탁하겠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다면, 부모님께 데이트 신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뭐가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뭐가 가장 슬픈 일이었어요? 삶의 지혜를 받고 싶어요.” 라고 어머니께, 아버지께 물어보세요. 내가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함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중한 가정의 축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특별한 문자 선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말이 아닌 문자로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문자를 받으시면, 우리 부모님이 핸드폰 들고 어디로 가시는 줄 아세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셔서는, “야, 봐라. 우리 아들이 말이지 나 보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너 이런 것 받아봤냐?” 하고 자랑하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사랑을 확인하게 하고, 사랑을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모님이라는 축복, 그리고 그 분들이 내게 주신 사랑을 깨닫고 자랑스럽게 고백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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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 25 ~ 27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참 많은 감정이 담겨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아버지, 어머니..’ 하고 대뇌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당신이 제 부모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받은 것이 많아서 제게는 모든 것이 큰 은혜였습니다” 하고 감사의 고백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만 불러도 화가 치밀지도 모릅니다. 미운 감정이 올라오고, 가슴이 냉랭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기억나서 그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게 사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메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감정들, 사랑과 미움, 연민이 서로 엉켜 마음 속에 흘러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면 부모님을 떠올릴 때 확실히 달라지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용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이 땅을 떠나신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지기도 하고, 멀리 계신 부모님이 몹시 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도 많이 불렀던 엄마, 아빠인데 그 마음을 이해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의 모습이 있습니까?

마리아도 어머니였습니다.

그간에 어버이 주일이 되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픔과 슬픔이 나타납니다. 여인의 생애는, 처녀 때와 아내가 된 때, 그리고 어머니가 된 때의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마리아를 매우 절제된 판단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분명 마리아는 첫 여인 하와와는 다른 여인이었습니다. 하와는 유혹에 빠진 여인이었지만 마리아는 유혹을 이긴 여인이었고, 고난과 슬픔을 참아내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이것보다 조금 더 특별한 존재, 즉 성인으로 부각시켜서 추앙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기록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을 보면, 마리아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마리아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원죄가 없는 사람이다. 둘째, 동정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출산하고, 마지막까지도 동정녀로 살았다. 셋째, 마리아는 죽은 후 하나님에 의해서 승천함을 받았다.’ 이러한 성모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 교회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톨릭에서 말하는 이 세 가지 특징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이고, 아들이 죽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슬픔을 가졌던 여인이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하나님께 더 잘 받아드려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그저 보통의 여성이었고 한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인간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고, 인간적으로 고뇌하고 갈등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위대한 것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신실한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그 믿음의 크기만큼 충격과 고통들이 늘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때마다 그것들을 견디며 이겨나갔습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녀가 받은 충격은 어떤 것들이었을까요?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만난 첫 번째 충격은, 처녀가 임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약혼 상태에 있었을 때,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요, 복을 받은 자요.” 라면서 “네가 곧 임신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10대 처녀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장 34절에 보면 마리아가 이렇게 천사를 향해 묻습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 1:34)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약혼한 남자에게 파혼을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파혼이 아닙니다. 음란한 여자가 되는 것이며, 사람들이 돌로 여인을 쳐서 죽여도 마땅한 매우 악하고 중한 범죄를 저지른 일입니다.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매우 특이한 말을 이어갑니다. “성령으로 네가 임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귀한 아이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는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임신을 하다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두렵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천사가 전하는 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최대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누가복음 1:38)

“제가 다 알지 못합니다. 사실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질 것을 믿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신앙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모든 신앙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자신의 생을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이었고,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길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마리아가 겪은 충격은 남편을 일찍 잃은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나이가 12살이 넘어가면서 요셉이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는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소식으로 갖게 된 첫 번째 아들인 예수님에게 많은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어머니의 기대를 채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미 12살 때부터 아들 예수는 자기 방식으로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때부터 예수님은 자기의 길을 서서히 가기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가족을 떠나시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이 공생애 생활을 하는 동안은 아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지조차 못했던 것 같습니다. 공생애 초기,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 후에는 마리아가 예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하루, 마리아가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기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예수님에게 누군가가 가족들이 왔음을 전해주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들도 왔습니다.” 모처럼의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본다는 마음에 벌써부터 기뻐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은 다정하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냉정해보이리만큼 반응하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가복음 3:33~35)

찾아온 가족들이 아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고 자매고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어머니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들을 보면서 어머니 마리아는 속으로 탄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그녀가 겪은 가장 큰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가장 큰 충격과 슬픔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들이 벌거벗기는 것을, 가슴에 창이 찔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의 손에 못이 박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어떤 고통이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비통함, 참담함?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녀가 먼저 죽는 것을 어느 어머니가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이 사실을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한복음 19:25)

이 담담한 몇 자 안에는 마리아의 통곡이 들어있습니다. ‘내 아들이 뭘 잘못했기에, 내 아들이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봐야 되는가’ 하고 가슴을 치며 울었을 것입니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아픔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가 저절로 이만큼 자랐나요? 아니 우리 자녀들을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이런 어른이었나요? 아프고, 낙심하고, 실수와 실패를 겪는 그 세월동안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계셨던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이 우리를 이만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로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갓 스무 살에 결혼해서 결혼한 지 3년 만에 6.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전쟁 중에 어머니는 만삭이셨고, 제 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여동생이었는데, 전쟁 중에 경기가 들려 병원도 가보지 못하고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도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 때는 여인에게 있어 남편이 먼저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낳은 자식을 먼저 흙 속에 묻는 아픔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고 저도 자녀들을 키우다보니 그 때는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슬픔이 가슴에 박히고, 사무치는 듯한 통곡의 소리가 이제는 들려옵니다. 남편이 죽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까요?
목사님들이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이번에 청년이 죽었어요. 어머니가 통곡하고 힘들어하셔서 목회자인 저도 같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옵니다. 그 분들의 슬픔을 사람이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바로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 길을 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는 통곡하면서 그 십자가 밑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아마 서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어머니의 사랑에는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 없이 키워진 자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머니가 탄식하면서 대신 아파하지 않았던 자녀들이 이 땅위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목이 메고,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는 그 자리 곁에서 어머니가 슬피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곁에 서 있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여기 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자 보아라, 이분이 네 어머니다.” 그 때부터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머니를 위로하시고, 어머니가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머니께 사랑한다고 말해보십시오.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입니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고마워요. 엄마, 아빠가 내 부모님인 것이 참 감사해요.” 이 말 한마디만으로도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은 기뻐하시고 만족해하십니다. 이 쉬운 일을 우리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어린이 주일에는 부모님들께 자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시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자녀분들께 부탁하겠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다면, 부모님께 데이트 신청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뭐가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요? 뭐가 가장 슬픈 일이었어요? 삶의 지혜를 받고 싶어요.” 라고 어머니께, 아버지께 물어보세요. 내가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함께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소중한 가정의 축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특별한 문자 선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일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말이 아닌 문자로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문자를 받으시면, 우리 부모님이 핸드폰 들고 어디로 가시는 줄 아세요?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셔서는, “야, 봐라. 우리 아들이 말이지 나 보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너 이런 것 받아봤냐?” 하고 자랑하십니다. 이게 바로 우리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사랑을 확인하게 하고, 사랑을 더욱 깊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모님이라는 축복, 그리고 그 분들이 내게 주신 사랑을 깨닫고 자랑스럽게 고백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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