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리더십의 그림자(1), 오만함

사무엘하 24: 1 ~ 10

김지철 목사

2018.07.29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의 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교만하다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인 콤플렉스입니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어 하는 ‘열등 콤플렉스’입니다. 이 콤플렉스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나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우월 콤플렉스’입니다. 이는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소위 ‘갑질’이라는 게 그런 형태입니다. 이러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항상 동행합니다. 열등감은 우월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고, 우월감 역시 열등감의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외적인 허세입니다.
그렇다면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EBS 방송에서 흥미로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10대 청소년과 30대, 그리고 60대끼리 모이게 해서 어느 때 각각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는지 조사한 것입니다.
먼저 10대 청소년들은 ‘권력’이 있으면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스포츠 ‘특기’ 같은 요소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재력 있는 부모’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 했고, 네 번째는 ‘학력’, 다섯 번째는 ‘외모’를 꼽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60대 어르신들에게도 던졌더니, 첫 번째로 ‘건강’을 꼽았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화목한 집안 분위기’, 세 번째는 ‘부모님의 사랑’, 네 번째는 ‘진정한 친구’, 다섯 번째는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회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30대는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외모’입니다. 타고난 외모가 잘 생기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외모를 가꾸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야 인간관계가 잘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세 번째는 힘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인맥’을, 네 번째는 ‘안정된 직업’을, 다섯 번째는 ‘단란한 집안 분위기’를 꼽았습니다. 이런 것이 뒷받침될 때 우월감을 느낀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또 무엇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이 ‘리더십의 그림자’인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로 ‘오만함’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찾는 사람입니다.

오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열등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자존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오만함과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존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먼저 자존감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을 인정하는 것이 자부심이요, 자존감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자존감과 조금 다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 나타나는 자기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키가 큰데…. 나는 너보다 얼굴이 잘생겼는데…. 나는 너보다 가진 게 많잖아. 내 사회적인 명예나 지위도 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교만한 자들의 특성입니다. 물론 상담자 같은 분들은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으로 교만에 대처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비교의 잣대를 갖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누구나 그것을 피해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또 다시 일어서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자부심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신앙의 사람들은 훨씬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나 소유물로 자존감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시며 그분에게 내가 아들이요, 딸이 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죄가 용서되고 영생을 허락 받았다는 것, 바로 이러한 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자존감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감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교만은 다릅니다. 오만함은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높이며, 때로는 신처럼 자신을 떠받치는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교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 지금도 우리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까?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과 같은 실체라는 뜻입니다. 만족을 잃게 하고, 사랑을 잃게 하며, 참된 기쁨과 감사마저 잃게 하는 것이 교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 말년에 다윗은 오만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윗에게 나타난 오만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다윗에 대한 칭찬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다윗의 모습이 이중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에게서 다중적인 모습까지 포착됩니다.
다윗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은 참 괜찮았습니다. 소년기와 청년기 때 다윗은 용감하고 멋졌습니다. 블레셋의 거대 장군 골리앗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대담하고 멋진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으로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아갔고, 원하시지 않으면 멈출 줄 아는 절도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왕위에 올라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이, 삶이 안정되자 조금씩 느슨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앙적으로도 불분명한 선택을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 곧 말년에 그는 추락하고 맙니다. 그때 다윗의 모습을 보면 아주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혀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너무나 교활했습니다.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결국 그 죄악이 다윗 가문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를 겁탈했고, 결국 그 역시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란 걸출한 아들도 있었으나, 바로 그가 아버지 다윗에게 항거합니다. 정치적 반역 행위를 도모하며 다윗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 했습니다. 결국 압살롬도 살해당하지만, 그 역시 다윗에게는 크나큰 슬픔과 아픔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다윗 가문의 몰락 과정을 보면, 참으로 애통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외면한 죄가 얼마나 크나큰 결과로 맺어지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다윗의 말년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건도 다윗 생애 중 말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때도 그는 오만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죄악을 범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돌아보니 너무나 미련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여기서부터 오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큰 죄라고 고백합니다. 또 자신이 매우 어리석고 미련하게 행동했다고 자복합니다. ‘큰’, ‘심히’ 등과 같은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토로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 말년에 오만함 때문에 실패의 길로 치달은 다윗을 봅니다.
시작은 멋진데 마지막이 구부러지면 모든 게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토록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인생 말년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오만해지니 다윗 또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게 복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엔 오만하고 젊을 때 교만했으나,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서 겸손해지고 인생의 깊이가 깊어가는 것입니다. 탐욕적인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인생만큼 멋지고 축복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 말년에 다윗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윗은 본래 용사였습니다. 멋진 말로 표현하면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도 잘하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목동 생활을 할 때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나운 짐승들과도 맞붙었습니다. 사자나 곰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무엘상 17:34~36)

누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까? 거대한 장수 골리앗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나아가면서 물맷돌을 날렸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그 내용이 사무엘상 17장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45)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간다.”라고 하며 담대히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입니다. 사울 왕의 신하였을 때도,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담대했고, 이후 블레셋과 전투할 때마다, 또 이웃 국가들과 전쟁할 때마다 혁혁한 승리를 거둔 다윗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잘한다는 바로 그 전투 전략이 그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인생 말년이 되었을 때, 다윗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평안한 나라가 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중에 신앙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왕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다윗이 한 생각은 군대를 더 양성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을 통해 나라를 더 든든히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군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인구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의 다른 본문인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이 일이 마치 사탄이 행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역대상 21:1)

하나님이 사탄의 유혹을 수용하심으로써 다윗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나오는지, 자신의 야욕과 야망을 성취하려는지를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인구 조사라는 것은 모든 인구를 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전투할 수 있는 남성들의 숫자를 조사하기 위한 인구 조사입니다. 실제로 인구 조사를 하는 게 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도 하나님은 인구 조사를 시행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누가 했을까요? 제사장들이 주관해서 진행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반 세겔 속전을 내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구 조사는 달랐습니다. 그는 제사장 대신 군대장관인 요압과 사령관들을 통해 인구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군대 징용을 할지, 또 어떻게 세금을 징수하게 할지에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즉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유사 시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미약한 군사력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주변 열강을 무찌른 사실을 다윗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한계를 자백하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그때 다윗의 욕심과 오만을 지켜보던 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요압 장군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간언합니다. “다윗 왕이여, 당신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사무엘하 24:3)

요압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능력을 더 기대하려고 하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오만한 욕망을 그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간언을 거부합니다. 그리곤 적극적으로 인구 조사를 시행시키는데, 약 10달이 걸립니다. 그런 뒤 요압이 보고를 하는데, 약 130만 명이 칼을 들고 전투할 수 있는 숫자로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다윗이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구나. 하나님께 묻지 않았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병거를 신뢰하고, 군사 숫자를 신뢰하고 있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즉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해 승리하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거머쥐려 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자백을 하게 됩니다.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후에 잘못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참 미련한 일입니다. 진정한 지혜자는 잘못된 것을 미리 예견하고 멈춰설 줄 아는 자입니다. 파멸의 자리에 가서야 멈춰서는 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이후 다윗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데, 전염병으로 무려 7만 명의 백성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백성 전체가 큰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다윗은 인생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을 평가할 때, 하나님은 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서 하나님이 왜 사울은 거절하시고, 다윗은 끝까지 붙드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사울이 다윗보다 악한 왕인가?’ 하고 되물으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사울에게는 몇 번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못된 짓을 행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불찰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모두 오만함이 있습니다. 문제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간적인 탐욕과 죄악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좋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풍성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아우를 줄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의 복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지식이 풍성해질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오만함과 교만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젊을 때는 보이는 것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 잡은 것들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한 것, 내가 소유한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며,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을 가져야 지도자도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이전의 낡은 삶을 단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용기가 회개입니다. 내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토해낼 줄 아는 용기가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tn_switch

사무엘하 24: 1 ~ 10

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누구에게나 열등감과 우월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의 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교만하다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인 콤플렉스입니다. 누구에게나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어 하는 ‘열등 콤플렉스’입니다. 이 콤플렉스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억누르는 나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우월 콤플렉스’입니다. 이는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소위 ‘갑질’이라는 게 그런 형태입니다. 이러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항상 동행합니다. 열등감은 우월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고, 우월감 역시 열등감의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월감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외적인 허세입니다.
그렇다면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EBS 방송에서 흥미로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10대 청소년과 30대, 그리고 60대끼리 모이게 해서 어느 때 각각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는지 조사한 것입니다.
먼저 10대 청소년들은 ‘권력’이 있으면 우월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특히 정치적 권력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스포츠 ‘특기’ 같은 요소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세 번째로는 ‘재력 있는 부모’가 있으면 우월감을 느낄 것이라 했고, 네 번째는 ‘학력’, 다섯 번째는 ‘외모’를 꼽았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60대 어르신들에게도 던졌더니, 첫 번째로 ‘건강’을 꼽았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화목한 집안 분위기’, 세 번째는 ‘부모님의 사랑’, 네 번째는 ‘진정한 친구’, 다섯 번째는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럼 사회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는 30대는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외모’입니다. 타고난 외모가 잘 생기면 더 좋고, 그렇지 못하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외모를 가꾸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래야 인간관계가 잘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부동산과 같은 ‘재산’을, 세 번째는 힘 있는 주변 사람들과의 ‘인맥’을, 네 번째는 ‘안정된 직업’을, 다섯 번째는 ‘단란한 집안 분위기’를 꼽았습니다. 이런 것이 뒷받침될 때 우월감을 느낀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또 무엇을 통해 우월감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이 ‘리더십의 그림자’인데, 그 가운데서 첫 번째로 ‘오만함’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안에서 자존감을 찾는 사람입니다.

오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열등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겸손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것은 자존감의 뒷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하는 오만함과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존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먼저 자존감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을 인정하는 것이 자부심이요, 자존감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자존감과 조금 다릅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 나타나는 자기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키가 큰데…. 나는 너보다 얼굴이 잘생겼는데…. 나는 너보다 가진 게 많잖아. 내 사회적인 명예나 지위도 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교만한 자들의 특성입니다. 물론 상담자 같은 분들은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으로 교만에 대처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비교의 잣대를 갖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누구나 그것을 피해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또 다시 일어서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자부심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신앙의 사람들은 훨씬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환경이나 소유물로 자존감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시며 그분에게 내가 아들이요, 딸이 되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죄가 용서되고 영생을 허락 받았다는 것, 바로 이러한 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자존감의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존감은 일종의 축복입니다. 하지만 교만은 다릅니다. 오만함은 일종의 우상숭배입니다. 자기를 높이며, 때로는 신처럼 자신을 떠받치는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교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 지금도 우리가 암에 걸렸다고 하면, 무엇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까?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만은 영적인 죽음으로 몰아가는 암과 같은 실체라는 뜻입니다. 만족을 잃게 하고, 사랑을 잃게 하며, 참된 기쁨과 감사마저 잃게 하는 것이 교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 말년에 다윗은 오만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윗에게 나타난 오만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입니까? 우리는 어려서부터 다윗에 대한 칭찬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다윗의 모습이 이중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에게서 다중적인 모습까지 포착됩니다.
다윗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은 참 괜찮았습니다. 소년기와 청년기 때 다윗은 용감하고 멋졌습니다. 블레셋의 거대 장군 골리앗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대담하고 멋진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으로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아갔고, 원하시지 않으면 멈출 줄 아는 절도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또한 왕위에 올라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다윗이, 삶이 안정되자 조금씩 느슨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앙적으로도 불분명한 선택을 합니다. 인생의 후반전, 곧 말년에 그는 추락하고 맙니다. 그때 다윗의 모습을 보면 아주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혀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릅니다.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너무나 교활했습니다. 자기 죄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결국 그 죄악이 다윗 가문에 치명타를 가합니다.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를 겁탈했고, 결국 그 역시 이복형제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란 걸출한 아들도 있었으나, 바로 그가 아버지 다윗에게 항거합니다. 정치적 반역 행위를 도모하며 다윗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 했습니다. 결국 압살롬도 살해당하지만, 그 역시 다윗에게는 크나큰 슬픔과 아픔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다윗 가문의 몰락 과정을 보면, 참으로 애통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외면한 죄가 얼마나 크나큰 결과로 맺어지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다윗의 말년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건도 다윗 생애 중 말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때도 그는 오만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 죄악을 범하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돌아보니 너무나 미련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여기서부터 오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다윗은 자신의 죄악이 큰 죄라고 고백합니다. 또 자신이 매우 어리석고 미련하게 행동했다고 자복합니다. ‘큰’, ‘심히’ 등과 같은 형용사와 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토로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 말년에 오만함 때문에 실패의 길로 치달은 다윗을 봅니다.
시작은 멋진데 마지막이 구부러지면 모든 게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토록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인생 말년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오만해지니 다윗 또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가는 게 복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엔 오만하고 젊을 때 교만했으나,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서 겸손해지고 인생의 깊이가 깊어가는 것입니다. 탐욕적인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인생만큼 멋지고 축복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인생 말년에 다윗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윗은 본래 용사였습니다. 멋진 말로 표현하면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싸움도 잘하고 용기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목동 생활을 할 때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나운 짐승들과도 맞붙었습니다. 사자나 곰이라 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무엘상 17:34~36)

누구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까? 거대한 장수 골리앗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나아가면서 물맷돌을 날렸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그 내용이 사무엘상 17장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45)

“너는 칼과 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간다.”라고 하며 담대히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입니다. 사울 왕의 신하였을 때도, 왕으로 등극한 후에도 담대했고, 이후 블레셋과 전투할 때마다, 또 이웃 국가들과 전쟁할 때마다 혁혁한 승리를 거둔 다윗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잘한다는 바로 그 전투 전략이 그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인생 말년이 되었을 때, 다윗은 어떻게 이스라엘이 평안한 나라가 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중에 신앙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왕이 그런 모습을 보이니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다윗이 한 생각은 군대를 더 양성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을 통해 나라를 더 든든히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군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인구 조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이 다윗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라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의 다른 본문인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이 일이 마치 사탄이 행한 것처럼 묘사됩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역대상 21:1)

하나님이 사탄의 유혹을 수용하심으로써 다윗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나오는지, 자신의 야욕과 야망을 성취하려는지를 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여기서 인구 조사라는 것은 모든 인구를 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전투할 수 있는 남성들의 숫자를 조사하기 위한 인구 조사입니다. 실제로 인구 조사를 하는 게 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도 하나님은 인구 조사를 시행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누가 했을까요? 제사장들이 주관해서 진행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반 세겔 속전을 내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인구 조사는 달랐습니다. 그는 제사장 대신 군대장관인 요압과 사령관들을 통해 인구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군대 징용을 할지, 또 어떻게 세금을 징수하게 할지에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즉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유사 시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를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미약한 군사력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주변 열강을 무찌른 사실을 다윗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한계를 자백하는 자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그때 다윗의 욕심과 오만을 지켜보던 한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요압 장군입니다. 그가 다윗에게 간언합니다. “다윗 왕이여, 당신께서 지금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사무엘하 24:3)

요압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능력을 더 기대하려고 하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오만한 욕망을 그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간언을 거부합니다. 그리곤 적극적으로 인구 조사를 시행시키는데, 약 10달이 걸립니다. 그런 뒤 요압이 보고를 하는데, 약 130만 명이 칼을 들고 전투할 수 있는 숫자로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다윗이 깨닫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구나. 하나님께 묻지 않았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구나.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병거를 신뢰하고, 군사 숫자를 신뢰하고 있었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즉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지해 승리하려 한 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거머쥐려 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자백을 하게 됩니다.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후에 잘못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참 미련한 일입니다. 진정한 지혜자는 잘못된 것을 미리 예견하고 멈춰설 줄 아는 자입니다. 파멸의 자리에 가서야 멈춰서는 자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여러분, 이후 다윗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데, 전염병으로 무려 7만 명의 백성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백성 전체가 큰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다윗은 인생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을 평가할 때, 하나님은 왜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서 하나님이 왜 사울은 거절하시고, 다윗은 끝까지 붙드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실 ‘사울이 다윗보다 악한 왕인가?’ 하고 되물으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사울에게는 몇 번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후회만 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못된 짓을 행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불찰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모두 오만함이 있습니다. 문제도 많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인간적인 탐욕과 죄악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전반전보다 후반전이 좋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풍성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아우를 줄도 알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인생의 복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지식이 풍성해질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히려 오만함과 교만을 내려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젊을 때는 보이는 것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면 잡은 것들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한 것, 내가 소유한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며,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이것을 가져야 지도자도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이전의 낡은 삶을 단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비판할 줄 아는 용기가 회개입니다. 내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토해낼 줄 아는 용기가 회개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7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리더십의 그림자(1), 오만함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장, 30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삼하24:1~4, 9~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인간은 누구나 교만합니다교만하다는 것을 일종의 콤플렉스(complex)입니다콤플렉스는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은 열등 콤플렉스와 자기가 얼마나 잘만 인간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우월 콤플렉스가 있습니다이러한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여러분은 어떤 열등감 혹은 우월감을 지니고 있습니까?

설교의 요약

어떤 것이 우리를 열등감 혹은 우월감의 마음을 갖게 할까오늘은 리더십의 그림자’ 중에 첫 번째로 오만함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인간의 오만함이란 사실 열등감의 뒷면이며겸손이란 자존감의 뒷면입니다그렇다면 오만함과 자존감의 치이는 무엇일까자존감은 나의 나됨에 대한 자부심입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최고의 자부심(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존감은 축복이지만오만함(교만)은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자기를 높여서 신처럼 자기를 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할 수 있다고 신뢰를 불어넣습니다. C.S. 루이스는 교만은 영적인 암이다고 하는데교만은 참된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일까그는 인간이 갖고 있는 다중적인 인격을 지녔습니다소년/청년으로서의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함으로 자기 분수를 알고 겸손했습니다사울 왕에게 끊임없이 쫓김을 당하면서도 결코 겸손의 위기를 잘 넘겼습니다왕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그러나 다윗은 한편으로 아주 이기적이었습니다육체의 정욕에 붙잡혀서 인생의 최대의 실수를 범했습니다다윗의 생애에 나타난 오만함의 죄악이었습니다그러나 자기가 행한 잘못을 철저하게 고백하였습니다(10).

다윗은 싸움꾼으로 멋진 말로는 전쟁의 영웅이었으며전사였습니다목동시절에는 사나운 짐승(사자)도 물리쳤고(삼상17:34), 골리앗은 돌팔매(삼상17:45), 사울 왕의 신하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블레셋과 이웃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다윗은 전투전쟁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하지만 내가 잘 하는 것내가 가진 좋은 것이 때로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욕망이 내재해 있었습니다그 욕망을 사탄이 불러일으킴으로 군대의 수효에 관한 관심으로 인구 조사를 결정하였습니다다윗의 인구조사는 요압을 주관자로 삼으렴칼을 뺄 수 있는 군사만을 조사하였습니다전투인을 조사하는 것은 군대 징용과 세금의 목적이었습니다여호와를 의지하기 보다는 유사시에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스스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 한 것입니다다윗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주변 열강들을 무찔렀던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오만함이란 일종의 자기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배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구 조사 이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10). 다윗이 사울 왕가 다른 이유는 딱 한 가지 ?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한 것입니다회개란 옛 건의 단절이지만동시에 새로운 것에 대한 시작입니다다윗은 하나님을 망각했음을 고백합니다인구조사 명령을 한지 10개월이 지난 후에 깨달았지만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다윗과 사울의 차이는 바로 회개하는 다윗과 뻔뻔한 사울의 모습입니다교만과 오만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버리지 못한 나의 교만한 모습은 무엇입니까함께 나눠보세요.

2. 사울은 후회하였지만다윗은 철저하게 회개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할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서로 격려하고 축복하며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잘못된 것을 믿고 신뢰하는 오만함에서 벗어나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며이웃들을 향해서 베풀 줄 아는 삶을 살게 하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