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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오늘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주제 아래 두 번째로 ‘외로움’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외로움은 영어로는 보통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먼저 ‘Lonelines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관계가 단절된 외로움을 뜻합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는 공허한 상태의 외로움이자 때때로 삶을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교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Solitude’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박 당하지 않고 “나는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독자적인 홀로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감정을 일상에서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떤 감정이 더 큰지는 삶의 자리마다 달라질 것입니다. 일이 많을수록, 맡겨진 사역이 클수록, 이러한 외로움의 감정이 우리에게 몰려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매우 바쁩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쁘다’는 말을 한자어로 살펴보면, ‘바쁠 망(忙)’자가 있습니다.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을 붙여 놓았습니다. 풀어 이해하면, ‘마음이 망했다’, ‘마음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바쁜 상태가 그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들어가면, 그때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롭습니다. 또한 혼자 있으면 더욱 무력해지고 외로워지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물론 인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외로움을 타는 존재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외로움이란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니 더 외롭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시인이 전합니다.
1865년 4월 14일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입니다. 그가 입고 있던 옷 주머니에는 몇 가지 소지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링컨’이라고 수놓아진 손수건이 있었습니다. 또 시골 소년들이 사용하는 주머니칼이 있었고, 실로 수선한 안경 케이스, 5달러짜리 어음이 들어 있는 지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물건이 눈에 띠는 것이었는데, 가위로 오려낸 낡고 오래된 신문 기사 조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는 영국의 정치가였던 존 브라이트가 아브라함의 행적을 칭찬하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링컨이 겪고 있던 상황은 남북 전쟁 막바지였습니다. 그는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치 적대자들이 그를 비판하고 비난했으며, 조롱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너무나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칭찬이 그로 하여금 외로움을 견디게 했고 격려와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하나님께 외로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지도자는 어땠을까요? 혹시 그들은 외로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모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외로운 지도자의 길에 나섰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순종은 했지만, 참으로 힘겹고 버거운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곁에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도 있었지만, 그들이 모세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 애굽을 떠나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인 모세를 향해 불평을 쏟아냅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왔잖아. 당신이 지도자 아냐?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줘야지! 애굽에서는 부추도 먹고 파와 마늘, 참외도 먹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도 못 먹는 것 아냐?” 이렇게 구체적으로 호소하며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모세는 지도자로서 괴로웠습니다.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며 부르짖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모세가 된 심정으로, 그가 하나님께 어떻게 부르짖었는지 민수기 11장 11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민수기 11:11,14)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모든 길이 막혀 있습니다. 이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혼자서는 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엄청난 무력감과 외로움에 맞서며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엘리야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예언자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여호와의 예언자들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쫓겨나고 자신 홀로 남았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는 백성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2절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열왕기상 18:22)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있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 혼자다.” 무력감을 느끼는 엘리야의 한탄입니다. 그렇게 그는 갈멜산에 올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투쟁을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이 과정이 열왕기상 18장과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분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했고, 이 소식을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듣게 됩니다. 이세벨은 바알 선지자들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잡으라. 그리고 그를 죽여라!” 이에 엘리야는 더욱 용기를 잃습니다. 겁이 나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몰골을 보고 하나님께 한탄합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는 엘리야의 심정이 되어 열왕기상 19장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열왕기상 19:4 중)
이제 다 되었다고, 성공했다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 위협이 닥쳐오면서 그는 겁을 먹고 비참한 자기 실존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무력감에 빠지며 자살 충동마저 느낍니다.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며 애원하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자기 혼자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게 너무나 부담스럽고 외로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예수님도 외로움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복음을 증거하다 외로움을 느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투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때의 외로움을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5절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1:15)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하며 자신을 떠난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자신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고, 그렇게 자신의 외로움을 전하며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아마 세 종류의 사람이 그분 주위에 머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오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한 자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영역이 침해 받는 것에 분개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협박까지 한 인물들입니다. 즉 그들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이 바로 그 인물들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행하신 병 치유, 귀신 축출과 같은 기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셨다고 하니 몰려든 자들입니다. 또 예수님이 귀신 쫓는 것을 보자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했을 때는 그분을 따랐지만, 그 길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느 순간 떠나버린 이들입니다. 즉 그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입니다. 민중들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면 그 뒤를 따르지만, 그것이 보이지만 않으면 언제든 그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직업도, 가족도 내려놓고 예수님을 뒤따라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는 동행할 수가 없었음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끝까지는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홀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예수님 홀로 십자가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외로움의 극치는 십자가에 달려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절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외면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처절하게 외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중)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외로움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고난 과정에서 궁극적인 외로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외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몇 가지 해결책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때때로 혹은 자주 번잡하고 분주한 삶의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소통이 되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마가복음 3:7)
여기서 두 가지가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바다로 물러가시는데, ‘무리’가 그분을 따라옵니다. 여기서 ‘물러갔다’라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피정(retreat)’이라고 표현하며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물러가셨습니다.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그분만의 공간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쉼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 깊이 빠져들다가도 때로는 단절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일에 매몰되어 나를 잃어버리려 할 때, 잠시 멈춰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가족과 친구와 함께 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얘들아, 잠시 쉬자. 산으로 가자. 우리가 바다로 가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이렇게 함께한 제자들도 예수님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아득한 외로움이 가득한 질문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6장 67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7)
무슨 뜻입니까? 당시는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생명수다.” 이렇게 영적인 말씀을 이어가시니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싶어서, 얻어갈 게 있을까 싶어서 따라왔는데, 그것은 더 이어지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만 들리니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참 섭섭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러한 예수님의 외로움은 수난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베드로에게 던졌던 말씀에서 더욱 또렷해집니다. 마가복음 14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가복음 14:30)
“네가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지? 나와 함께 살며 내게 말씀도 듣고 내 모든 모습을 보았지? 하지만 네가 이 마지막 길에서 나를 부인할 것이다. 고난의 길에 네가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은 너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은 어떻게 이 외로움을 극복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요한복음 16:32 중)
예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자신이 홀로 가야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홀로 가야 한다는 사실, 내 인생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내가 고난당할 때 누군가 함께한다면 정말 축복이지만, 그럼에도 그 길은 나 혼자 가야 한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32절 후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한복음 16:32 중)
이것이 예수님을 견디게 한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홀로인 것 같으나,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이 확신이 예수님을 위로했고, 날마다 새 힘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해결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우리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롭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내가 결정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 나아가 그 외로움을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다른 누가 해소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작은 자아를 넘어서게 하는 큰 자아, 우주적 자아, 근원 되는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축복이자 삶의 축복입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 내 삶의 의미를 알려주신 분, 내 인생이 축복된 삶이라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함께 있겠다.” 이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세상은 흔들리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샬롬(shalom)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너희가 이 땅에서는 외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지만, 나를 기억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만, 부활의 아침, 생명의 아침을 너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실존입니다. 우리 삶을 스스로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권세를 파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탄을 세력을 파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부활의 약속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우리가 모든 외로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잃어버리면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홀로 있으면 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6: 28 ~ 33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인간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오늘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주제 아래 두 번째로 ‘외로움’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외로움은 영어로는 보통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먼저 ‘Lonelines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관계가 단절된 외로움을 뜻합니다. 무언가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는 공허한 상태의 외로움이자 때때로 삶을 위축시키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교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Solitude’입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박 당하지 않고 “나는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독자적인 홀로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감정을 일상에서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떤 감정이 더 큰지는 삶의 자리마다 달라질 것입니다. 일이 많을수록, 맡겨진 사역이 클수록, 이러한 외로움의 감정이 우리에게 몰려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매우 바쁩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쁘다’는 말을 한자어로 살펴보면, ‘바쁠 망(忙)’자가 있습니다. ‘마음 심(心)’자에 ‘망할 망(亡)’을 붙여 놓았습니다. 풀어 이해하면, ‘마음이 망했다’, ‘마음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바쁜 상태가 그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들어가면, 그때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롭습니다. 또한 혼자 있으면 더욱 무력해지고 외로워지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물론 인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외로움을 타는 존재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외로움이란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니 더 외롭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시인이 전합니다.
1865년 4월 14일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입니다. 그가 입고 있던 옷 주머니에는 몇 가지 소지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 링컨’이라고 수놓아진 손수건이 있었습니다. 또 시골 소년들이 사용하는 주머니칼이 있었고, 실로 수선한 안경 케이스, 5달러짜리 어음이 들어 있는 지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물건이 눈에 띠는 것이었는데, 가위로 오려낸 낡고 오래된 신문 기사 조각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는 영국의 정치가였던 존 브라이트가 아브라함의 행적을 칭찬하는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링컨이 겪고 있던 상황은 남북 전쟁 막바지였습니다. 그는 여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치 적대자들이 그를 비판하고 비난했으며, 조롱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는 너무나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런 칭찬이 그로 하여금 외로움을 견디게 했고 격려와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하나님께 외로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지도자는 어땠을까요? 혹시 그들은 외로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모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외로운 지도자의 길에 나섰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순종은 했지만, 참으로 힘겹고 버거운 여정이었습니다. 그의 곁에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도 있었지만, 그들이 모세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 애굽을 떠나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인 모세를 향해 불평을 쏟아냅니다.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왔잖아. 당신이 지도자 아냐? 우리에게 먹을 것을 줘야지! 애굽에서는 부추도 먹고 파와 마늘, 참외도 먹었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도 못 먹는 것 아냐?” 이렇게 구체적으로 호소하며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모세는 지도자로서 괴로웠습니다.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외로움 속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며 부르짖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모세가 된 심정으로, 그가 하나님께 어떻게 부르짖었는지 민수기 11장 11절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민수기 11:11,14)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힙니까?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모든 길이 막혀 있습니다. 이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혼자서는 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엄청난 무력감과 외로움에 맞서며 하나님께 토로했습니다.
엘리야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예언자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여호와의 예언자들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쫓겨나고 자신 홀로 남았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는 백성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열왕기상 18장 22절입니다.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열왕기상 18:22)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있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 혼자다.” 무력감을 느끼는 엘리야의 한탄입니다. 그렇게 그는 갈멜산에 올라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영적 투쟁을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이 과정이 열왕기상 18장과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분도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했고, 이 소식을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듣게 됩니다. 이세벨은 바알 선지자들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합니다. “선지자 엘리야를 잡으라. 그리고 그를 죽여라!” 이에 엘리야는 더욱 용기를 잃습니다. 겁이 나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서 자기 몰골을 보고 하나님께 한탄합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번에는 엘리야의 심정이 되어 열왕기상 19장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열왕기상 19:4 중)
이제 다 되었다고, 성공했다고 여겼는데, 어느 순간 위협이 닥쳐오면서 그는 겁을 먹고 비참한 자기 실존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무력감에 빠지며 자살 충동마저 느낍니다. 하나님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며 애원하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자기 혼자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게 너무나 부담스럽고 외로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예수님도 외로움의 길을 걸었습니다.
신약의 사도 바울도 복음을 증거하다 외로움을 느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아시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투신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때의 외로움을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 15절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1:15)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하며 자신을 떠난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자신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위로를 받고 싶다고, 그렇게 자신의 외로움을 전하며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아마 세 종류의 사람이 그분 주위에 머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오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한 자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며 시기하고 질투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영역이 침해 받는 것에 분개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협박까지 한 인물들입니다. 즉 그들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이 바로 그 인물들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행하신 병 치유, 귀신 축출과 같은 기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셨다고 하니 몰려든 자들입니다. 또 예수님이 귀신 쫓는 것을 보자고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에는 깊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했을 때는 그분을 따랐지만, 그 길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느 순간 떠나버린 이들입니다. 즉 그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입니다. 민중들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면 그 뒤를 따르지만, 그것이 보이지만 않으면 언제든 그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직업도, 가족도 내려놓고 예수님을 뒤따라간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는 동행할 수가 없었음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끝까지는 고난의 길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홀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예수님 홀로 십자가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외로움의 극치는 십자가에 달려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절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마저 외면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처절하게 외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중)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돌아보면, 외로움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고난 과정에서 궁극적인 외로움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외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몇 가지 해결책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때때로 혹은 자주 번잡하고 분주한 삶의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소통이 되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마가복음 3:7)
여기서 두 가지가 대비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바다로 물러가시는데, ‘무리’가 그분을 따라옵니다. 여기서 ‘물러갔다’라는 것을 가톨릭에서는 ‘피정(retreat)’이라고 표현하며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물러가셨습니다.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그분만의 공간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쉼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에 깊이 빠져들다가도 때로는 단절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일에 매몰되어 나를 잃어버리려 할 때, 잠시 멈춰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가족과 친구와 함께 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얘들아, 잠시 쉬자. 산으로 가자. 우리가 바다로 가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이렇게 함께한 제자들도 예수님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아득한 외로움이 가득한 질문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6장 67절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7)
무슨 뜻입니까? 당시는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생명수다.” 이렇게 영적인 말씀을 이어가시니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뭔가 먹을 게 있을까 싶어서, 얻어갈 게 있을까 싶어서 따라왔는데, 그것은 더 이어지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만 들리니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참 섭섭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러한 예수님의 외로움은 수난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베드로에게 던졌던 말씀에서 더욱 또렷해집니다. 마가복음 14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가복음 14:30)
“네가 3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지? 나와 함께 살며 내게 말씀도 듣고 내 모든 모습을 보았지? 하지만 네가 이 마지막 길에서 나를 부인할 것이다. 고난의 길에 네가 동참할 수 없을 것이다.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다.” 이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은 너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비결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은 어떻게 이 외로움을 극복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입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요한복음 16:32 중)
예수님은 ‘미리’ 아셨습니다. 자신이 홀로 가야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홀로 가야 한다는 사실, 내 인생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 내가 고난당할 때 누군가 함께한다면 정말 축복이지만, 그럼에도 그 길은 나 혼자 가야 한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32절 후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요한복음 16:32 중)
이것이 예수님을 견디게 한 확신이었습니다. “내가 홀로인 것 같으나,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이 확신이 예수님을 위로했고, 날마다 새 힘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해결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외롭지 않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우리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롭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내가 결정해 가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외로움을 느끼면서, 나아가 그 외로움을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다른 누가 해소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내 작은 자아를 넘어서게 하는 큰 자아, 우주적 자아, 근원 되는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러므로 그분을 만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축복이자 삶의 축복입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 내 삶의 의미를 알려주신 분, 내 인생이 축복된 삶이라고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성령으로 함께 있겠다.” 이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세상은 흔들리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샬롬(shalom)을 너희에게 줄 것이다. 너희가 이 땅에서는 외로울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지만, 나를 기억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만, 부활의 아침, 생명의 아침을 너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그러므로 담대하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격려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실존입니다. 우리 삶을 스스로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권세를 파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탄을 세력을 파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부활의 약속을 선사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우리가 모든 외로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잃어버리면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롭고, 홀로 있으면 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 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며 나아가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