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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바른 판단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구두쇠 영감이 재산을 팔아 큰 금덩이를 샀습니다. 그리곤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금덩이를 넣어 두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금덩이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이 몰래 금덩이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뒤늦게 금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구두쇠 영감은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때 이 영감을 바라보던 한 나그네가 다와가 상심하지 말라며 이렇게 위로합니다. “차라리 그 땅 깊은 구멍에 바위 하나를 갖다 넣으면 어떻소? 그것을 금덩이라 여기고 만족하면 되지 않겠소? 어떻든 당신은 금을 팔아서 사용할 건 아니니 말이오.”
여러분, 돈이란 무엇입니까? 돈이란 많이 소유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 돈을 사용하느냐에 돈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각각 종에게 주고 주인이 떠났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굉장히 큰 액수입니다. 대략 6,000데나리온이므로 무려 20년 치 월급을 종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곤 주인이 돌아오자 받았던 돈을 그대로 돌려줍니다. 그때 주인이 이렇게 질책합니다. “악한 종아, 게으른 종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 다른 이에게 주겠다!” 수고하고 땀 흘려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했다면, 그 돈을 잘 활용하고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돈과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꼭 필요하고 귀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돈이 인생을 부정부패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청빈하게 사는 게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하루 세끼가 필요하고, 거주할 집도 필요하며,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는 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청빈은 돈이 지닌 긍정적 요소를 무시하게 합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돈의 이해와도 다릅니다. 물론 현대 경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돈이란 비인격적인 것이므로 중립적이다. 돈이란 단순히 재화를 교환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므로 돈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도 돈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돈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며 사로잡습니까? 돈 때문에 인격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즉 돈이 가진 악마적인 힘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돈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갖게 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돈이 없는 가난은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을 낳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복을 달라고 하는 데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개인적 번영을 지향하는 것으로 왜곡됩니다. 신앙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부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을까요? 재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돈의 마력과 위험성을 인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 중 일부입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은 돈이 가진 문제와 돈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전달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그 전 구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중)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좀먹고 결국 부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돈에 대한 결정적인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여기서 재물은 맘몬입니다. 보이는 물질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까지도 내포된 표현입니다. 왜 이 맘몬이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길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21)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돈은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자가 되고, 축적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에 따라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큰 맘몬을 향해 달려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이란 한 번 가져서 만족되지 않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소용돌이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면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마력을 지닌 것이 돈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과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그 사이에서 결정해야 돈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돈 속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마적 특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청빈을 예찬한 프란체스코 역시 탐욕의 죄성을 알고 청빈한 삶을 추구한 것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면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흔들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부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라고! ‘부요한 자’라고 하니 쉽게 와 닿지 않지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자들아!”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도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돈이 가진 위험성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모든 악의 근원에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재물에 집착하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고, 그 때문에 근심, 또 근심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떠난 삶을 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자 선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이해를 기본으로 합니까? 특히 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인간이 자기 노력과 헌신으로 재물을 얻었다 해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이해합니다. 돈은 내 노력과 수고를 통해 왔지만, 내게 건강을 주시고 수고할 마음과 헌신할 뜻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청교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근면과 성실, 노동의 기쁨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상점 안이다.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면서 대가를 얻는 그 상점이 곧 하나님의 현존과 축복이 임하는 자리다.”
때문에 단순한 금욕주의적 청빈주의도 거절합니다. 단순한 일 중독주의도 거절합니다. 게으름이 아니라 근면을 강조하며, 일중독이 아니라 조화된 절제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직업 현장에서 소명을 깨닫습니다. 내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소명이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소명의 자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은 게으름을 죄악으로 보며,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중)
이렇게 돈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돈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양자택일은 결코 근면과 노력에 대한 거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눔이 결여되고, 부정직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돈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뽐내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이 성경이 끊임없이 지적하는 죄악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중)
우리가 먹고 마시며, 재물을 얻고 부하게 살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해 주시고, 꿈도 주시고, 능력과 마음, 생명도 허락해 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에서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리며 기뻐 뛰노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역대상 29:14)
이 모든 게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선물 가운데 일부를 주님께 드린다며 자발적으로, 또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모든 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자발적인 헌금도 가능해집니다. 저는 그동안 헌금에 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앞두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십일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십일조를 내면서 아까워합니다. 마치 세금을 내는 것처럼, 혹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처럼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간혹 드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십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게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중 단 하나를 하나님이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게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고 싶으신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십 중에 구는 우리를 위해 마음껏 쓰라고 허락해 주십니다. 그게 십일조입니다. 십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는데, 그중 하나만 하나님께 드려서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고 고백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재물을 선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남의 것만을 빼앗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 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시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할 때, 부유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돕자 그것도 기쁨으로 허용하셨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 비유를 살펴보면, 나사로를 외면했던 부자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재물을 쓰지 않으니, 그 돈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는 뜻입니다.
돈에는 마성적인 힘이 있지만, 이를 선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바르게 이용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가지 회심을 요청했습니다.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회심이 있는가? 생각의 회심이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네가 가지고 있는 돈 지갑이 회심하고 있는가?” 감리교 목사 요한 웨슬레(John Wesley)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벌 수 있는 만큼 벌라.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라. 남에게 줄 수 있을 만큼 주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에 인색하면, 리더십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재벌이라 해도 인색하고 베풀지 않는다면, 주위에 좋은 사람이 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웃을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듯 이웃에게도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 아까운 사람이 어떻게 이웃에게 십의 일을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길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이웃에게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의 팔은 자신을 위해 쓰면 됩니다. 하나님께 십의 일, 이웃에게 십의 일, 그리고 나와 가족을 위해 십의 팔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연세 있으신 분들께도 부탁합니다. 남은 인생을 베풀면서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그렇게 모으지 않았습니까? 이제 남은 재산을 자녀들에게만 유산으로 남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남기는 유산은 재산의 절반을 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머지 절반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웃에게 베풀면서 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는 삶이 됩니다.
혹시 이 가운데 부모의 유산을 기다리는 자녀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의 재산을 다 물려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 주셔도 고마운 것입니다. 이미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사는 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할 줄 알게 하셨고,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할 분이며, 돈은 이용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거꾸로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신앙이 몰락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차립니다.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한국 교회에 타락이 있다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은 이용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칫 돈이 우리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맘몬입니다. 이 맘몬은 자꾸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의 욕망에 부채질합니다. 부자라고 돈에 갈급함이 없을까요? 오히려 돈에 더욱 배고파합니다. 내가 돈을 소유한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까닭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돈을 쓸 준비를 하십시오. 무엇보다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느냐? 아니다. 주는 자가 진정한 복이 있노라.”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수고하고 땀 흘린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결단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6: 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돈에 대한 바른 판단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구두쇠 영감이 재산을 팔아 큰 금덩이를 샀습니다. 그리곤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금덩이를 넣어 두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금덩이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이 몰래 금덩이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뒤늦게 금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구두쇠 영감은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때 이 영감을 바라보던 한 나그네가 다와가 상심하지 말라며 이렇게 위로합니다. “차라리 그 땅 깊은 구멍에 바위 하나를 갖다 넣으면 어떻소? 그것을 금덩이라 여기고 만족하면 되지 않겠소? 어떻든 당신은 금을 팔아서 사용할 건 아니니 말이오.”
여러분, 돈이란 무엇입니까? 돈이란 많이 소유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그 돈을 사용하느냐에 돈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각각 종에게 주고 주인이 떠났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굉장히 큰 액수입니다. 대략 6,000데나리온이므로 무려 20년 치 월급을 종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 달란트를 땅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곤 주인이 돌아오자 받았던 돈을 그대로 돌려줍니다. 그때 주인이 이렇게 질책합니다. “악한 종아, 게으른 종아! 네가 가지고 있는 것마저 빼앗아 다른 이에게 주겠다!” 수고하고 땀 흘려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했다면, 그 돈을 잘 활용하고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돈과 재물은 꼭 필요합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꼭 필요하고 귀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오해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돈이 인생을 부정부패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청빈하게 사는 게 좋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하루 세끼가 필요하고, 거주할 집도 필요하며,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는 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청빈은 돈이 지닌 긍정적 요소를 무시하게 합니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돈의 이해와도 다릅니다. 물론 현대 경제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돈이란 비인격적인 것이므로 중립적이다. 돈이란 단순히 재화를 교환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므로 돈에 대해 왈가왈부(曰可曰否)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도 돈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런데 돈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며 사로잡습니까? 돈 때문에 인격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즉 돈이 가진 악마적인 힘을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돈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갖게 된 부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돈이 없는 가난은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을 낳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복을 달라고 하는 데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개인적 번영을 지향하는 것으로 왜곡됩니다. 신앙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제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부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셨을까요? 재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돈의 마력과 위험성을 인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 중 일부입니다. 아주 짧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은 돈이 가진 문제와 돈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전달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그 전 구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중)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좀먹고 결국 부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돈에 대한 결정적인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여기서 재물은 맘몬입니다. 보이는 물질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까지도 내포된 표현입니다. 왜 이 맘몬이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길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21)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돈은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어떻게 하든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돈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자가 되고, 축적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에 따라 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 큰 맘몬을 향해 달려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이란 한 번 가져서 만족되지 않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소용돌이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면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마력을 지닌 것이 돈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과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그 사이에서 결정해야 돈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돌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돈 속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마적 특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청빈을 예찬한 프란체스코 역시 탐욕의 죄성을 알고 청빈한 삶을 추구한 것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면 인간의 지성과 마음을 흔들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부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라고! ‘부요한 자’라고 하니 쉽게 와 닿지 않지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자들아!”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도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돈이 가진 위험성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10)
모든 악의 근원에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재물에 집착하게 되면 미혹을 받게 되고, 그 때문에 근심, 또 근심하면서 하나님에게서 떠난 삶을 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이자 선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어떤 이해를 기본으로 합니까? 특히 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인간이 자기 노력과 헌신으로 재물을 얻었다 해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이해합니다. 돈은 내 노력과 수고를 통해 왔지만, 내게 건강을 주시고 수고할 마음과 헌신할 뜻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청교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근면과 성실, 노동의 기쁨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현존,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상점 안이다.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면서 대가를 얻는 그 상점이 곧 하나님의 현존과 축복이 임하는 자리다.”
때문에 단순한 금욕주의적 청빈주의도 거절합니다. 단순한 일 중독주의도 거절합니다. 게으름이 아니라 근면을 강조하며, 일중독이 아니라 조화된 절제를 가치 있게 여깁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직업 현장에서 소명을 깨닫습니다. 내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소명이고, 일할 수 있는 곳이 소명의 자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은 게으름을 죄악으로 보며, 사도 바울도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중)
이렇게 돈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돈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양자택일은 결코 근면과 노력에 대한 거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눔이 결여되고, 부정직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돈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뽐내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이 성경이 끊임없이 지적하는 죄악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중)
우리가 먹고 마시며, 재물을 얻고 부하게 살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해 주시고, 꿈도 주시고, 능력과 마음, 생명도 허락해 주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에서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전 건축을 위해 예물을 드리며 기뻐 뛰노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역대상 29:14)
이 모든 게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선물 가운데 일부를 주님께 드린다며 자발적으로, 또 기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모든 게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있을 때, 자발적인 헌금도 가능해집니다. 저는 그동안 헌금에 관한 설교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앞두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십일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십일조를 내면서 아까워합니다. 마치 세금을 내는 것처럼, 혹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것처럼 아까워합니다. 그래서 간혹 드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십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게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중 단 하나를 하나님이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게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받고 싶으신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십 중에 구는 우리를 위해 마음껏 쓰라고 허락해 주십니다. 그게 십일조입니다. 십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는데, 그중 하나만 하나님께 드려서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닫고 고백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재물을 선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남의 것만을 빼앗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자기 재물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 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너무 기뻐하시며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할 때, 부유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돕자 그것도 기쁨으로 허용하셨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 비유를 살펴보면, 나사로를 외면했던 부자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재물을 쓰지 않으니, 그 돈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는 뜻입니다.
돈에는 마성적인 힘이 있지만, 이를 선용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고 바르게 이용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가지 회심을 요청했습니다.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회심이 있는가? 생각의 회심이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는 네가 가지고 있는 돈 지갑이 회심하고 있는가?” 감리교 목사 요한 웨슬레(John Wesley)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벌 수 있는 만큼 벌라.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라. 남에게 줄 수 있을 만큼 주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좋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인색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에 인색하면, 리더십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재벌이라 해도 인색하고 베풀지 않는다면, 주위에 좋은 사람이 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이웃을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듯 이웃에게도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 아까운 사람이 어떻게 이웃에게 십의 일을 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길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이웃에게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의 팔은 자신을 위해 쓰면 됩니다. 하나님께 십의 일, 이웃에게 십의 일, 그리고 나와 가족을 위해 십의 팔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또한 연세 있으신 분들께도 부탁합니다. 남은 인생을 베풀면서 사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그렇게 모으지 않았습니까? 이제 남은 재산을 자녀들에게만 유산으로 남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남기는 유산은 재산의 절반을 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머지 절반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웃에게 베풀면서 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바르게 감당하는 삶이 됩니다.
혹시 이 가운데 부모의 유산을 기다리는 자녀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의 재산을 다 물려받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 주셔도 고마운 것입니다. 이미 생명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사는 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할 줄 알게 하셨고,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할 분이며, 돈은 이용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거꾸로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신앙이 몰락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차립니다.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한국 교회에 타락이 있다면,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은 이용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칫 돈이 우리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맘몬입니다. 이 맘몬은 자꾸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의 욕망에 부채질합니다. 부자라고 돈에 갈급함이 없을까요? 오히려 돈에 더욱 배고파합니다. 내가 돈을 소유한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까닭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돈을 벌고 저축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돈을 쓸 준비를 하십시오. 무엇보다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받는 자가 복이 있느냐? 아니다. 주는 자가 진정한 복이 있노라.”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수고하고 땀 흘린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재물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결단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8월 1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리더십의 그림자(4), 물욕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4장, 44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 6:2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1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돈의 가치는 그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 가운데 책망 받았던 하인은 한 달란트(6,000 데나리온, 20년 정도의 급여)를 땅 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 있는 것도 다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의 요약
인간은 돈(재물)을 필요로 합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돈이란 무엇일까? 먼저 돈(재물)에 대한 오해 ? 1) 무조건적인 청빈 강조 2) 돈과 재물의 중립적인 존재인식 3) 돈은 하나님의 복이며 가난은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이원론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마6: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고 돈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에 붙잡혀 살아갈까?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인간은 돈을 갖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소유하려는 욕망, 부자가 되려는 욕망, 더 많이 축적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더 큰 맘몬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재물)에 대한 성서적 인식은 무엇입니까? 첫째,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는 돈과 하나님을 결정해야 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여기서는 돈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상반됩니다. 둘째, 인간이 자기 노력과 헌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면서, 돈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청지기의 단계입니다. 돈(재물)은 이웃을 섬기고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돈에 대한 바른 이해, 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요청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회심, 생각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고, 요한 웨슬레는 “벌 수 있을만큼 벌고, 저축할 수 있을 만큼 저축하고, 줄 수 있을 만큼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가족, 친구, 이웃)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갖고 싶으십니까? 돈에 너무 인색하지 마십시오. 남에게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맘몬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맘몬을 사랑하고, 맘몬을 더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맘몬은 이용해야할 대상입니다. 돈이 나를 소유하고 나를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도록 열심히 벌고, 그 돈을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아낌없이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을 위해 돈을 사용하는 청지기의 단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함께 나눠보세요.
3. 하나님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며, 돈은 지혜롭게 사용해야할 대상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과 사용해야할 대상을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질에 너무 인색하지 않고, 이웃들에게 베풀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물질을 올바로 이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