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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의 그림자(5), 정욕

사무엘하 11: 2 ~ 5

김지철 목사

2018.08.26

부부 관계의 핵심은 공감과 교감입니다.

오늘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주제로 전하는 마지막 말씀으로, ‘정욕’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욕이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가장 꺼내기가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10년? 20년? 혹은 50년 되신 분도 계십니까? 그렇다면 결혼생활을 하며 부부싸움을 했던 적은 얼마나 됩니까?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습니까? 아마 싸우지 않은 부부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묻겠습니다. 왜 사랑하는데 싸울까요? 그렇게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도 했는데, 왜 싸움을 피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가까운 부부라도 대화의 언어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몸의 언어도 다릅니다. 성적인 언어도 다르기 때문에 다툼이 빚어질 때도 있습니다. 서로 원하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방식대로 사랑해 달라고 서로에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조차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고 못마땅해 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부부란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존재입니다. 살을 맞대고 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감정과 정서가 우리 마음속에 쌓여 갑니다. 이 감정의 통장에는 플러스 감정도 있고 마이너스 감정도 있습니다. 만약 마음의 통장이 마이너스가 된 채로 싸운다면, 그 싸움이 어떻게 번질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플러스 감정이 우리 마음의 통장에 가득하다면, 다툼 후에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회복 가능성이 있다면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 중 아파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게 있습니다. 아프더라도, 몸살을 앓더라도 회복 가능하다면 괜찮습니다. 잠시 아팠다가 치유되는 질병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복 불가능한 질병에 걸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정서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부부간 감정의 건강도 비슷합니다. 마이너스 감정보다 플러스 감정이 더 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마음에 마이너스 감정보다 플러스 감정이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은 플러스 감정이 적을지라도 천천히 노력하고 연습해 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름진 배우자의 얼굴을 볼 때도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청년 시절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지라도 더 멋있고, 더 예쁘다고 칭찬하며 상대의 마음에 플러스 감정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서로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핵심은 비슷합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비난합니다. 비난과 방어가 치열하게 번져 가면서 마치 전투가 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조롱과 경멸로 비난이 확대되고, 상대의 존재 가치마저 무시합니다. 심지어 배우자의 부모나 가족 이야기까지 연관시키며 공격합니다. 더는 용납하기 힘든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문이 닫힙니다. 거대한 담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과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혼을 결심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부부싸움의 결말이기도 합니다.
부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정서적인 교감에 목말라 배우자 대신 다른 이성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적인 불륜 관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혼심리상담가들은 끊임없이 충고합니다. 무관심한 부부 관계가 되면 마지막이라고…. 오히려 관심을 갖고 싸움이라도 하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다투는 부부가 오히려 건강한 부부가 될 확률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성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물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적인 욕망, 곧 정욕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성’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성은 즐거운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이자 서로의 생기를 북돋우며, 마치 높은 산을 등정하는 것처럼 흥분이 동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히 부부의 성이란 육체적 결합인 동시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성은 사랑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친밀감을 전해 주는데, 먼저 감각적인 친밀감을 형성시킵니다. 동시에 전인격적인 인간성의 친밀감을 형성해 주는 것이 성입니다. 그렇게 상호 만족을 향해 나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내 것이다.’라는 경험의 자리입니다. 이로써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 놓을 수 있는 헌신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이것이 부부 관계의 축복이자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6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아가 6:3 중)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쏟을 때 분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서 성은 불편한 자리가 아닌, 소중하고 평안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자리여야 합니다. 성을 단순히 동물적 행위로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의 성이 아닙니다. 만약 성을 대할 때 동물적 행위로만 생각하면, 긴장하게 되고 마치 의무방어전을 하는 것처럼 경직됩니다.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가서 4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아가 4:1 중)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여인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예찬합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육체적 결합인 동시에 정신적인 관계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도 허락하셨고, 정신도 허락하셨습니다. 성을 즐거워하도록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잠언 5장 18~19절에 보면, 결혼한 남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잠언 5:18~19 중)

아내의 품에 만족하며 아내를 사랑스럽게 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부분을 성경이 제시한 전제라고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게으름이 정욕을, 정욕이 간음죄를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각종 권력과 수많은 후궁을 지닌 명실상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힘과 능력을 지닌 존재였는데, 순식간에 그의 삶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 다음에 다가온 안일함에서 빚어졌습니다. 풍요 다음에 찾아오는 방심, 그 유혹을 다윗은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절제를 잃습니다. 심지어 권력을 남용하며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악을 자행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유혹과 미혹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넘어서라고….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우리가 서 있다고, 뭔가 되었다고, 혹은 가졌다고 여길 그 때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오히려 그 때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도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수없이 미혹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계입니다.
오늘 다윗이 당한 유혹은 정욕입니다. 이로 인해 그간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자랑이 순식간에 날아갔습니다. 정욕에 사로잡힌 다윗이 보인 행태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몇 가지 특징이 기술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그의 게으름에서 정욕이 불타올랐습니다. 전쟁 승리를 경험한 후에 그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의 안에 있던 육체적 욕망이 그를 붙잡습니다. 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사무엘하 11:1 중)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건 우기가 지나고 건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봄이 되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전쟁터에 나가야 할 대장은 당연히 왕입니다. 그런데 당시 다윗은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장병, 군사들만 전쟁터에 내보냅니다. 그리곤 자기 혼자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다윗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몸이 쇠약해졌거나 어디가 아팠던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게 귀찮아졌던 것일까요?
그 원인을 두 번째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 구절인 2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2절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저녁 때’ 일어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낮잠을 잔 것인지, 게으름을 피운 것인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어서는 다윗입니다. 바로 이러한 게으름 가운데 다윗의 정욕이 발발합니다. 그 저녁, 다윗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당시 정황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다윗이 게으름 가운데 있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정욕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양심이 마비된 다윗은 권력마저 남용합니다.

남성이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자리는 시각적인 장면입니다. 거기서 호기심을 갖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자가점검시스템이 무너졌습니다. 즉 다윗의 양심,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됩니다. 하인을 시켜 목욕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합니다. 당시 하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사무엘하 11:3)

여기서 신하의 놀라운 면모가 관찰됩니다. 사실 그는 그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만 전하면 되었습니다. 마침표를 찍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부분을 의문문으로 바꿉니다. ‘그렇습니다’가 아니라 ‘아닙니까?’라고 묻는 표현입니다.
사실 신하는 왕에게 질문하는 자가 아닙니다. 더욱이 당시는 감히 왕에게 어떤 질문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다윗의 양심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인이라고, 그러니 여기서 그치라는 의도가 담긴 완곡한 의문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다윗은 호기심과 욕정을 그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내달립니다. 그의 브레이크는 이미 고장났습니다. 그저 한 여인을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다윗입니다.
더욱이 그는 여기서 권력을 남용합니다.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속이고, 심지어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밧세바를 취했고, 육체적 쾌락을 만끽합니다. 과연 그가 사랑 때문에 밧세바를 취했을까요? 아무리 성경을 들여다보아도 밧세바를 취한 다윗의 마음엔 사랑이 없습니다. 그저 여인을 도구화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대화도 없고, 그저 욕정에 의한 행위만 도드라질 뿐입니다.

정욕의 그림자를 넘어 가정의 사랑과 평화를 회복합시다.

육체적인 쾌락 추구는 모든 도덕과 양심에 불을 지릅니다. 그 찰나의 쾌락을 얻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남자들의 욕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토록 칭찬 받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다윗조차 치명적인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의 강력한 침투가 이처럼 교묘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다음과 같이 평가됩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입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1:27 중)

하나님이 다윗이 행위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시 다윗의 모습은 악의 화신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남의 여자를 빼앗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임신하자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 최전선으로 보내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우리아를 속였으며, 자신마저 속이려 한 다윗의 이런 모습은 그의 일대기에서도 치명적인 죄악이자 아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남성분들에게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아내가 아닌 여자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멈추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만두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리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자들입니다. 이제 그 모든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또한 두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게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적절한 관계는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내가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가치관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다윗 가문 역시 이후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녀들 관계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멈춰 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지혜요, 참다운 회개입니다.
세 번째로, 다시 아내 품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해 주었던 아내를 위로하며, 인격적으로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아내에게 만족해야 합니다. 내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인격적인 즐거움과 성적인 즐거움도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능력만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보듬고 사랑하며,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동지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요즘 얼마나 수많은 지도자의 몰락을 목도합니까? 그들의 그림자에 붙어 있는 것이 이 정욕의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를 잘 넘어서며,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회복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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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 2 ~ 5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부부 관계의 핵심은 공감과 교감입니다.

오늘은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주제로 전하는 마지막 말씀으로, ‘정욕’에 관한 내용입니다. 정욕이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가장 꺼내기가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10년? 20년? 혹은 50년 되신 분도 계십니까? 그렇다면 결혼생활을 하며 부부싸움을 했던 적은 얼마나 됩니까?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습니까? 아마 싸우지 않은 부부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묻겠습니다. 왜 사랑하는데 싸울까요? 그렇게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도 했는데, 왜 싸움을 피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가까운 부부라도 대화의 언어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몸의 언어도 다릅니다. 성적인 언어도 다르기 때문에 다툼이 빚어질 때도 있습니다. 서로 원하는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더욱이 자기 방식대로 사랑해 달라고 서로에게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조차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고 못마땅해 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부부란 함께 살을 맞대고 사는 존재입니다. 살을 맞대고 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감정과 정서가 우리 마음속에 쌓여 갑니다. 이 감정의 통장에는 플러스 감정도 있고 마이너스 감정도 있습니다. 만약 마음의 통장이 마이너스가 된 채로 싸운다면, 그 싸움이 어떻게 번질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플러스 감정이 우리 마음의 통장에 가득하다면, 다툼 후에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회복 가능성이 있다면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 중 아파본 적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게 있습니다. 아프더라도, 몸살을 앓더라도 회복 가능하다면 괜찮습니다. 잠시 아팠다가 치유되는 질병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회복 불가능한 질병에 걸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정서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부부간 감정의 건강도 비슷합니다. 마이너스 감정보다 플러스 감정이 더 크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마음에 마이너스 감정보다 플러스 감정이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직은 플러스 감정이 적을지라도 천천히 노력하고 연습해 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주름진 배우자의 얼굴을 볼 때도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청년 시절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을지라도 더 멋있고, 더 예쁘다고 칭찬하며 상대의 마음에 플러스 감정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서로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핵심은 비슷합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를 비난합니다. 비난과 방어가 치열하게 번져 가면서 마치 전투가 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조롱과 경멸로 비난이 확대되고, 상대의 존재 가치마저 무시합니다. 심지어 배우자의 부모나 가족 이야기까지 연관시키며 공격합니다. 더는 용납하기 힘든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문이 닫힙니다. 거대한 담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과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혼을 결심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부부싸움의 결말이기도 합니다.
부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정서적인 교감에 목말라 배우자 대신 다른 이성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적인 불륜 관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결혼심리상담가들은 끊임없이 충고합니다. 무관심한 부부 관계가 되면 마지막이라고…. 오히려 관심을 갖고 싸움이라도 하면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다투는 부부가 오히려 건강한 부부가 될 확률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부부에게 성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물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적인 욕망, 곧 정욕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성’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성은 즐거운 것이며 신비스러운 것이자 서로의 생기를 북돋우며, 마치 높은 산을 등정하는 것처럼 흥분이 동반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별히 부부의 성이란 육체적 결합인 동시에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성은 사랑의 하나 됨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친밀감을 전해 주는데, 먼저 감각적인 친밀감을 형성시킵니다. 동시에 전인격적인 인간성의 친밀감을 형성해 주는 것이 성입니다. 그렇게 상호 만족을 향해 나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성이라는 것입니다.
성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내 것이다.’라는 경험의 자리입니다. 이로써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 놓을 수 있는 헌신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이것이 부부 관계의 축복이자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6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아가 6:3 중)

둘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쏟을 때 분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서 성은 불편한 자리가 아닌, 소중하고 평안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상대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자리여야 합니다. 성을 단순히 동물적 행위로 폄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의 성이 아닙니다. 만약 성을 대할 때 동물적 행위로만 생각하면, 긴장하게 되고 마치 의무방어전을 하는 것처럼 경직됩니다.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가서 4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아가 4:1 중)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여인도 사랑하는 남자의 아름다움을 예찬합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육체적 결합인 동시에 정신적인 관계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도 허락하셨고, 정신도 허락하셨습니다. 성을 즐거워하도록 우리에게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잠언 5장 18~19절에 보면, 결혼한 남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잠언 5:18~19 중)

아내의 품에 만족하며 아내를 사랑스럽게 대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부분을 성경이 제시한 전제라고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게으름이 정욕을, 정욕이 간음죄를 낳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그는 각종 권력과 수많은 후궁을 지닌 명실상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힘과 능력을 지닌 존재였는데, 순식간에 그의 삶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 다음에 다가온 안일함에서 빚어졌습니다. 풍요 다음에 찾아오는 방심, 그 유혹을 다윗은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절제를 잃습니다. 심지어 권력을 남용하며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악을 자행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유혹과 미혹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넘어서라고….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우리가 서 있다고, 뭔가 되었다고, 혹은 가졌다고 여길 그 때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오히려 그 때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도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수없이 미혹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계입니다.
오늘 다윗이 당한 유혹은 정욕입니다. 이로 인해 그간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자랑이 순식간에 날아갔습니다. 정욕에 사로잡힌 다윗이 보인 행태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몇 가지 특징이 기술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그의 게으름에서 정욕이 불타올랐습니다. 전쟁 승리를 경험한 후에 그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의 안에 있던 육체적 욕망이 그를 붙잡습니다. 1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사무엘하 11:1 중)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건 우기가 지나고 건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봄이 되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전쟁터에 나가야 할 대장은 당연히 왕입니다. 그런데 당시 다윗은 자신의 부하 장수들과 장병, 군사들만 전쟁터에 내보냅니다. 그리곤 자기 혼자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다윗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요? 몸이 쇠약해졌거나 어디가 아팠던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게 귀찮아졌던 것일까요?
그 원인을 두 번째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 구절인 2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2절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사무엘하 11:2)

‘저녁 때’ 일어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낮잠을 잔 것인지, 게으름을 피운 것인지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일어서는 다윗입니다. 바로 이러한 게으름 가운데 다윗의 정욕이 발발합니다. 그 저녁, 다윗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당시 정황이 어떠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다윗이 게으름 가운데 있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정욕에 사로잡혔다는 것입니다.

이성과 양심이 마비된 다윗은 권력마저 남용합니다.

남성이 유혹을 받는 첫 번째 자리는 시각적인 장면입니다. 거기서 호기심을 갖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깁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다윗의 자가점검시스템이 무너졌습니다. 즉 다윗의 양심,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됩니다. 하인을 시켜 목욕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게 합니다. 당시 하인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3절입니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사무엘하 11:3)

여기서 신하의 놀라운 면모가 관찰됩니다. 사실 그는 그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사실만 전하면 되었습니다. 마침표를 찍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부분을 의문문으로 바꿉니다. ‘그렇습니다’가 아니라 ‘아닙니까?’라고 묻는 표현입니다.
사실 신하는 왕에게 질문하는 자가 아닙니다. 더욱이 당시는 감히 왕에게 어떤 질문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다윗의 양심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인이라고, 그러니 여기서 그치라는 의도가 담긴 완곡한 의문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다윗은 호기심과 욕정을 그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내달립니다. 그의 브레이크는 이미 고장났습니다. 그저 한 여인을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다윗입니다.
더욱이 그는 여기서 권력을 남용합니다.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속이고, 심지어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밧세바를 취했고, 육체적 쾌락을 만끽합니다. 과연 그가 사랑 때문에 밧세바를 취했을까요? 아무리 성경을 들여다보아도 밧세바를 취한 다윗의 마음엔 사랑이 없습니다. 그저 여인을 도구화하는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대화도 없고, 그저 욕정에 의한 행위만 도드라질 뿐입니다.

정욕의 그림자를 넘어 가정의 사랑과 평화를 회복합시다.

육체적인 쾌락 추구는 모든 도덕과 양심에 불을 지릅니다. 그 찰나의 쾌락을 얻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남자들의 욕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토록 칭찬 받고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다윗조차 치명적인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의 강력한 침투가 이처럼 교묘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다음과 같이 평가됩니다. 사무엘하 11장 27절입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1:27 중)

하나님이 다윗이 행위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시 다윗의 모습은 악의 화신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남의 여자를 빼앗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더욱이 그녀가 임신하자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 최전선으로 보내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살인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우리아를 속였으며, 자신마저 속이려 한 다윗의 이런 모습은 그의 일대기에서도 치명적인 죄악이자 아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특별히 남성분들에게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지금 아내가 아닌 여자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멈추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만두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리이까!”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자들입니다. 이제 그 모든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또한 두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게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마지막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적절한 관계는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내가 쌓아왔던 모든 명예와 가치관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다윗 가문 역시 이후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녀들 관계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멈춰 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지혜요, 참다운 회개입니다.
세 번째로, 다시 아내 품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해 주었던 아내를 위로하며, 인격적으로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아내에게 만족해야 합니다. 내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며, 인격적인 즐거움과 성적인 즐거움도 회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능력만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보듬고 사랑하며, 인생의 길을 함께 가는 동지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 요즘 얼마나 수많은 지도자의 몰락을 목도합니까? 그들의 그림자에 붙어 있는 것이 이 정욕의 그림자입니다. 이 그림자를 잘 넘어서며,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회복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8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리더십의 그림자(5), 정욕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270, 45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삼하 11:2~5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2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 인간의 내면 가장 가까이 있는 욕망이면서동시에 가장 말하기가 쉽지 않는 그런 주제정욕입니다사랑하여 결혼했는데왜 싸울까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대화의 언어가 다르며몸의 언어성적인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부부싸움을 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핵심은 동일합니다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행한 상대방을 비난하고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싸움)를 합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은 성적인 욕망정욕에 대한 말씀입니다성은 아름다운 것이며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즐기는 것이며신비스럽고 생기를 복돋는 것으로 마치 산정을 등반하는 흥분이 동반되는 것입니다부부의 성은 육체적인 결합이면서그 것 이상의 행위입니다나는 당신 것이고당신은 내 것임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6:3). 성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소중하고 평안한 자리입니다(4:1). 결국 결혼이란 부부사이에 육체적인 관계정신적인 관계의 총합입니다육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성도 하님이 주신 창조의 선물입니다그러므로 성을 즐기도록 하나님이 부부에게 주신 축복입니다(5:18~19).

   본문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그는 모든 것을 갖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왕이었습니다그런데 전쟁의 승리 다음에 찾아오는 안일함에 방심하였습니다다윗은 육체적인 눈의 욕망에 빠져 자기 절제가 방전되고권력남용에 빠졌습니다성경에 나타난 반복적인 충고는 우리가 유혹과 미혹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입니다(고전10:12, 벧전5:8). 남자로서의 다윗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인간의 욕망그것도 정욕에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욕에 의해 다윗이 움직인 그 과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게으름에서 정욕이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본문 1절에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지만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그리고 아침이 아니라저녁 때에 다윗은 일어났습니다. 2.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습니다(2). 남자의 유혹의 첫 번째 자리는 눈에 보는 것입니다보고서 호기심을 갖고자꾸만 생각하다가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3. 다윗에게 자가 체크시스템이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여인이 누구인가 알아보라는 다윗에 명령에 신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신하의 대답은 그만 멈추도록 요구하는 대답이었습니다하지만 다윗은 자기 이성과 양심을 작동시키지 못했습니다결국 권력의 남용으로 강제로 자기에게 데려오게 했고이 여인과 동침했습니다사랑 때문이 아니라육체적인 쾌락 때문이었습니다육체적인 쾌락은 모든 도덕을 다 불질러 사라지게 합니다성경은 다윗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공개하는데바로 죄의 강력한 침투입니다(삼하12: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특별히 남성 여러분우리에게 행하신 말씀입니다내 아내 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멈추고정리해야만 합니다마지막 결과를 생각하고다시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내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면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누기

1. 아내 혹은 남편의 사랑스런 장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함께 나눠보세요.

2. 아내 혹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함께 나눠보세요.

3.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드릴 때에 사랑은 깊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서로를 축복하며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우리에게 주신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회복하며내 아내를 사랑하고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가정의 축복부부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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