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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과 같이 소중한 사람 : 안드레 – 예수님의 제자들 6 –

요한복음 1: 35 ~ 42

김지철 목사

2014.08.31

안드레는 마중물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보통 안드레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향은 갈릴리 바다 바로 북쪽에 있는 벳세다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 갈릴리 바다를 보며 자라났고, 그들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화끈하고 다혈질적이며 자기 생각과 의견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안드레는 그런 모든 열정이 내면화되어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를 어떤 이미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마중물이었습니다.
마중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손님이 오면 나가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중물도 비슷합니다. 물은 물인데 마중하는 물입니다. 옛날 수돗물이 귀할 때는 집집에 마치 우물처럼 땅 속에 파이프를 집어넣어 펌프질을 하며 물을 뽑아냈습니다. 이때, 새로운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 바가지 정도의 물, 마중물입니다. 그것을 넣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곳에 있던 새로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마중물이란 아주 적은 양의 물입니다. 고작 한 바가지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것이 있어야 다음에 계속해서 쏟아지는 물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안드레와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중물과도 같은 인물,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간적으로 첫 번째 제자. 그가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참된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안드레의 품성과 신앙, 즉 영적 성격을 4가지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구도자의 영성을 지녔습니다. 구도자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도를 찾는 자입니다. 진리가 무엇일까, 생명이 무엇일까, 어떤 것이 인생의 길일까, 어떻게 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찾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느새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어부 생활을 하다가 잠시 쉬게 될 때, 참된 것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이 안드레의 귀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방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배반이나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지향하는 올바른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형인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안드레를 ‘프로토클레토스(protokletos)’라고 말합니다. 먼저, 원리, 원칙, 먼저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첫 번째 제자’라는 이름을 안드레에게 준 것입니다.
그에게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한 접근이었습니다. 또한 분별력과 결단력, 실천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옳고 바른 것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이 그의 내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넌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안드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여,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과 사모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come and see.”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궁금하면 내게 와라, 그리고 직접 네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가 오후 4시였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 요한이 했던 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를 보았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구도자들에게는 가끔 문제가 있습니다. 질문은 많이 하는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소위 앉은뱅이와 같은 구도자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정신적인 장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지만 그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습니다. 약간 멀리서 봅니다. 우리는 구도자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도자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떠나가려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먼발치에 있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약점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신앙의 기쁨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난 영적 감격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와 보라.” 하실 때 예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 봐야 예수님의 인격과 내 인격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 속에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예수님은 그저 늘 먼발치에 있을 뿐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가끔 말씀도 보지만, 그것이 내 것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냥 어머니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 친구의 신앙, 남편의 신앙, 아내의 신앙으로 멈춰서는 것만큼 신앙이 지루해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나를 누르는 억압이 됩니다. 믿는 것 같은데 안 믿고, 또 안 믿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믿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안드레는 그것을 넘어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좋은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안드레에게는 전도자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간적 네트워킹을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의 영성입니다.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제자였던 안드레를 통해 제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형 베드로입니다. 안드레가 아니었으면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전도자의 영이라는 것은 개방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좋으면 당신도 좋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면 당신도 함께 기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누리면 당신도 평안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안드레가 어떤 모습으로 베드로를 초청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 (요한복음 1:41∼42)

여기서 시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안드레는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남에게 소개하고 남을 인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이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 형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인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게 무엇일까요? 보통 내 아내를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나처럼 예수님을 믿고 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안드레에게 있었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전도를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먼저 예수님을 믿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속으로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괴로워한다면, 늘 마음의 허함을 느낀다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나 자신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때, 전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전도를 할까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도 당신의 아들, 당신의 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받은 축복을 저 사람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랬습니다. 안드레의 이런 모습은 요한복음 1장뿐만 아니라 12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쭈뼛쭈뼛합니다. ‘예수님에게 이 이방사람들을 소개해야 될까?’ 그런데 그때 안드레가 헬라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무슨 마음에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음을 기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초청한 것입니다.
전도자에게 ‘나만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마음이 있으면 전도에 한계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예수님,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것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전도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세 번째 영성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영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쫒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에 몰입하시다가 그만 식사시간도 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받은 그들이 육적인 식사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저들에게 음식을 줄 수 있을까?”
제자들에게 갑자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5천명이 넘고 이들을 먹이려면 2천2백 데나리온, 즉 당시 이백일 치의 임금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해 보면 약 2천만원에서 3천만원 정도의 돈입니다. ‘이 큰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해!’ 제자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안드레는 여기저기 군중 속을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드레의 마음은 두 가지였습니다. 기대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 이 두 마음이 서로 흔들렸지만 결국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성경은 그의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6:8∼9)

우리가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힘듭니다. 어떻게 할까?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 작지 않은가? 여러 가지 생각과 어려움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 속에 어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질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의심이 있습니다. ‘이게 정말 될까? 이 많은 사람에게 이게 합당할까?’ 여러분,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될까요? 너무나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때 의심을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의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의심하지만 의심보다 신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큰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생명의 역사,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안드레가 찾은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불가능처럼 보이는 매우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니 여기에서 생명의 사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물을 볼 때도 인간관계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맞을까?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 믿음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보다 더 큰 신뢰를 가지고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이상의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혜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과 신뢰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아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의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소망이요, 기쁨이요, 능력이요, 평안인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만 하고, 생각만 하고, 의심만 하고,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 번 해 보십시오.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안드레는 큰 축복을 가진 자였습니다. 안드레와 접촉하는 사람과 사물은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가 축복의 근원이 아니고, 안드레가 모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와 접촉을 하는 것으로 축복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드레는 그 사건, 그 사물, 그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능력이 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이 많기 때문에, 안드레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드레가 가졌던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로 사람을 이끌고, 예수님에게로 어렵고 힘든 사건을 이끌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건을 만드신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드레의 네 번째 영성, 진정한 제2인자 의식입니다.

안드레는 오직 예수님만을 1인자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1인자만 알아줍니다. 세상은 1등 기업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이런 말 해본 적 없으십니까? “야, 1등 좀 해 봐라. 네가 1등 하면 내 소원이 없겠다.” 이렇듯 모두가 1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실제로 1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1등인 사람도 2인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등 의식을 갖는 순간, 교만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1등, 우리의 1인자는 누굴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드레는 사실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첫 번째로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부터 나옵니다. 안드레는 두 번째로 머물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번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불평하고 시기하며 그것 때문에 낙담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난 자가 있으면 박수치며 높여 주었고, 자신보다 못난 자가 있으면 끌어안고 예수님에게로 초청했습니다.
1인자가 된 그 순간에도 나보다 더 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누가 평생 1인자겠습니까? 누가 항상 앞에만 설 수 있습니까? 우리의 1인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어디 가서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귀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칭찬하십시오.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격려하고 끌어안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엔가 여러분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빙글빙글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안드레의 좋은 점을 내 것으로 삼으십시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안드레에게는 구도자적인 영성이 있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인생 전체를 내어놓겠다는 열망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단하고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전도자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영적인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기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고 그는 작은 것, 연약한 것, 부족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냇물이 되고, 냇물이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바다까지 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연약한 사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그 공동체가 살아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는 2인자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강한 자에게 비굴해지지 않았고, 약한 자에게 오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삶을 나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베드로와 같은 성격입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의 좋은 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안드레와 같은 성품입니까? 그 좋은 성품을 받아 복음 안에서 자유자가 되십시오. 그러한 축복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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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 35 ~ 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는 마중물과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안드레와 베드로 중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명백하지 않으나, 보통 안드레를 동생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향은 갈릴리 바다 바로 북쪽에 있는 벳세다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거기에서 태어나 갈릴리 바다를 보며 자라났고, 그들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화끈하고 다혈질적이며 자기 생각과 의견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면, 안드레는 그런 모든 열정이 내면화되어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 그를 어떤 이미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마중물이었습니다.
마중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손님이 오면 나가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중물도 비슷합니다. 물은 물인데 마중하는 물입니다. 옛날 수돗물이 귀할 때는 집집에 마치 우물처럼 땅 속에 파이프를 집어넣어 펌프질을 하며 물을 뽑아냈습니다. 이때, 새로운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 바가지 정도의 물, 마중물입니다. 그것을 넣고 펌프질을 하면 깊은 곳에 있던 새로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마중물이란 아주 적은 양의 물입니다. 고작 한 바가지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것이 있어야 다음에 계속해서 쏟아지는 물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안드레와 같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중물과도 같은 인물,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간적으로 첫 번째 제자. 그가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참된 것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안드레의 품성과 신앙, 즉 영적 성격을 4가지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구도자의 영성을 지녔습니다. 구도자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도를 찾는 자입니다. 진리가 무엇일까, 생명이 무엇일까, 어떤 것이 인생의 길일까, 어떻게 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찾는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어느새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어부 생활을 하다가 잠시 쉬게 될 때, 참된 것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말이 안드레의 귀에 확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방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배반이나 반역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지향하는 올바른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형인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안드레를 ‘프로토클레토스(protokletos)’라고 말합니다. 먼저, 원리, 원칙, 먼저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첫 번째 제자’라는 이름을 안드레에게 준 것입니다.
그에게는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한 접근이었습니다. 또한 분별력과 결단력, 실천력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옳고 바른 것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이 그의 내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안드레에게 “넌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안드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여,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과 사모함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come and see.”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궁금하면 내게 와라, 그리고 직접 네 눈으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가 오후 4시였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세례 요한이 했던 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아를 보았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구도자들에게는 가끔 문제가 있습니다. 질문은 많이 하는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소위 앉은뱅이와 같은 구도자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정신적인 장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이 하지만 그렇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습니다. 약간 멀리서 봅니다. 우리는 구도자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도자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습니다.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떠나가려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먼발치에 있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의 약점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신앙의 기쁨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난 영적 감격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와 보라.” 하실 때 예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 봐야 예수님의 인격과 내 인격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 속에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면 예수님은 그저 늘 먼발치에 있을 뿐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가끔 말씀도 보지만, 그것이 내 것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냥 어머니의 신앙, 아버지의 신앙, 친구의 신앙, 남편의 신앙, 아내의 신앙으로 멈춰서는 것만큼 신앙이 지루해지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나를 누르는 억압이 됩니다. 믿는 것 같은데 안 믿고, 또 안 믿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믿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안드레는 그것을 넘어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과 만나고 대화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좋은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안드레에게는 전도자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인간적 네트워킹을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의 영성입니다.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첫 번째 제자였던 안드레를 통해 제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의 형 베드로입니다. 안드레가 아니었으면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전도자의 영이라는 것은 개방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좋으면 당신도 좋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쁘면 당신도 함께 기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누리면 당신도 평안을 누리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안드레가 어떤 모습으로 베드로를 초청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 (요한복음 1:41∼42)

여기서 시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안드레는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남에게 소개하고 남을 인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이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 형제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인도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게 무엇일까요? 보통 내 아내를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나처럼 예수님을 믿고 이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안드레에게 있었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전도를 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먼저 예수님을 믿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속으로 기쁘지 않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괴로워한다면, 늘 마음의 허함을 느낀다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게 된 나 자신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 때, 전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전도를 할까요?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도 당신의 아들, 당신의 딸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받은 축복을 저 사람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랬습니다. 안드레의 이런 모습은 요한복음 1장뿐만 아니라 12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쭈뼛쭈뼛합니다. ‘예수님에게 이 이방사람들을 소개해야 될까?’ 그런데 그때 안드레가 헬라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무슨 마음에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사람이 변화될 수 있음을 기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초청한 것입니다.
전도자에게 ‘나만 보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마음이 있으면 전도에 한계가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예수님,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 그분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것들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전도자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세 번째 영성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영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쫒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에 몰입하시다가 그만 식사시간도 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받은 그들이 육적인 식사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저들에게 음식을 줄 수 있을까?”
제자들에게 갑자기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5천명이 넘고 이들을 먹이려면 2천2백 데나리온, 즉 당시 이백일 치의 임금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해 보면 약 2천만원에서 3천만원 정도의 돈입니다. ‘이 큰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해!’ 제자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민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안드레는 여기저기 군중 속을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러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드레의 마음은 두 가지였습니다. 기대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 이 두 마음이 서로 흔들렸지만 결국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성경은 그의 흔들리는 마음과 갈등을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6:8∼9)

우리가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힘듭니다. 어떻게 할까?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 작지 않은가? 여러 가지 생각과 어려움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 속에 어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질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의심이 있습니다. ‘이게 정말 될까? 이 많은 사람에게 이게 합당할까?’ 여러분,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될까요? 너무나 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때 의심을 버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의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의심하지만 의심보다 신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큰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생명의 역사,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안드레가 찾은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불가능처럼 보이는 매우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맡기니 여기에서 생명의 사건,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물을 볼 때도 인간관계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정말 맞을까? 정말 괜찮은 사람일까?’ 믿음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보다 더 큰 신뢰를 가지고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이상의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혜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과 신뢰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아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의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이 소망이요, 기쁨이요, 능력이요, 평안인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만 하고, 생각만 하고, 의심만 하고,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 번 해 보십시오.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안드레는 큰 축복을 가진 자였습니다. 안드레와 접촉하는 사람과 사물은 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가 축복의 근원이 아니고, 안드레가 모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와 접촉을 하는 것으로 축복을 받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안드레는 그 사건, 그 사물, 그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가 능력이 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이 많기 때문에, 안드레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드레가 가졌던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에게로 사람을 이끌고, 예수님에게로 어렵고 힘든 사건을 이끌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사건을 만드신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드레의 네 번째 영성, 진정한 제2인자 의식입니다.

안드레는 오직 예수님만을 1인자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1인자만 알아줍니다. 세상은 1등 기업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이런 말 해본 적 없으십니까? “야, 1등 좀 해 봐라. 네가 1등 하면 내 소원이 없겠다.” 이렇듯 모두가 1등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실제로 1등일 것입니다. 하지만 1등인 사람도 2인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1등 의식을 갖는 순간, 교만해지고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1등, 우리의 1인자는 누굴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드레는 사실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첫 번째로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부터 나옵니다. 안드레는 두 번째로 머물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번째에 머물러야 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불평하고 시기하며 그것 때문에 낙담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더 잘난 자가 있으면 박수치며 높여 주었고, 자신보다 못난 자가 있으면 끌어안고 예수님에게로 초청했습니다.
1인자가 된 그 순간에도 나보다 더 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누가 평생 1인자겠습니까? 누가 항상 앞에만 설 수 있습니까? 우리의 1인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으면 어디 가서든지 잘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든지 귀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나가는 사람들은 그냥 칭찬하십시오.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격려하고 끌어안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엔가 여러분을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빙글빙글 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안드레의 좋은 점을 내 것으로 삼으십시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안드레에게는 구도자적인 영성이 있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인생 전체를 내어놓겠다는 열망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단하고 순종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전도자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영적인 넉넉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기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고 그는 작은 것, 연약한 것, 부족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습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냇물이 되고, 냇물이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바다까지 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의 연약한 사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그 공동체가 살아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는 2인자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강한 자에게 비굴해지지 않았고, 약한 자에게 오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기의 삶을 나누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베드로와 같은 성격입니까? 그렇다면 베드로의 좋은 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안드레와 같은 성품입니까? 그 좋은 성품을 받아 복음 안에서 자유자가 되십시오. 그러한 축복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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