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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의 영, 순종의 영? – 성령과 악령 27 –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시작될 때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담의 아내 하와입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여성 중 대표적인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바로 이 두 여성이 인류사를 가름합니다. 하와는 보통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마리아는 순종의 아이콘으로 소개됩니다.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죄악과 거대한 파멸이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또 다른 여인을 통해 인류에 희망이 찾아왔고 바로 그녀의 태에서 위대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리아가 왜 순종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먼저 이 본문 이전에 세례 요한의 출생 사건이 나타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노년에 임신하게 되었고, 바로 그 사이에서 세례 요한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임신했다는 소식이 있은 지 약 6개월 만에 마리아도 임신했다는 내용이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이미 마리아는 요셉이란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장차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를 전합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1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1)
하나님이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당시는 요셉과 결혼한 게 아니고 약혼한 때였습니다. 약혼이란 혼인을 약속한 것이지만 아직 신방을 꾸린 건 아닙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누가복음 1:34)
이런 임신은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정말 임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면 돌로 쳐 죽임 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처녀가 아니라고 판명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2장 20~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신명기 22:20~21 중)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35)
성령이 임하고,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로써 창세기의 한 장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놀랍게도 그때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마리아를 덮으니 생명의 역사,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천사는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7)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마리아는 놀라며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는 유대 전통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란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던 여인입니다. 이러한 신앙 전통 아래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결국 그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믿음은 어디에 근거할까요? 우리는 믿음과 신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신념이란 내 생각의 총합입니다. 내 생각, 내 확신이 깊어지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신념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보다 신념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판단, 내 확신보다 늘 앞서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그 말씀이 내 생각과 신념보다 앞서야 신앙도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 확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에 있고, 또 그 말씀보다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신뢰이면서, 보다 궁극적으로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건넵니다. 그때 부모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청종하는 자녀를 보면, 부모 된 입장에서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의 마음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화가 납니다. 왜입니까? 부모의 말을 거부한 것을 넘어 부모를 거부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곧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던 여인 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모습은 인류의 첫 번째 여인이었던 하와와도 대조가 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순간 피조물임에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마리아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38절을 보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란 고백을 하기 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누가복음 1:38 중)
자신은 주님의 여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종’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마치 하와가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 여겼던 것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피조물인 것을 잠시 잊어라. 네 안에 신성이 있다. 그 신성을 계발해 봐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자유자가 될 것이다.”
정말 자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할 때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고 어떤 것도 내 인생에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진정한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선배들이 끊임없이 하는 선언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내가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나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대로 될 것이란 고백을 한 마리아의 본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이런 고백이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와는 사탄이 다가와서 유혹할 때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한 열매를 보고 넘어갔습니다.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그 말씀이 자신의 이성과 배치된다고 느끼면서도 순종을 결정했습니다. 감성적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고 이성적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비이성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감성적이란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내 이성과 감성에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계시가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이 하늘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이며, 이를 통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와와 마리아라는 두 여인을 통해 가정사가 달라졌습니다. 인류 사회의 역사도 달라졌습니다. 첫 여인 하와의 실패는 남편의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남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주며 공범을 저지르게 했습니다. 같이 악으로, 불순종의 자리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했고, 그녀의 남편 역시 순종의 길로 가게 됩니다. 더욱이 그 또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성령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하와가 낳은 아들은 가인입니다. 그는 동생을 시기해 죽인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안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자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와에서 마리아처럼 변화될 수 있을까요? 제가 종종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100% 신앙 혹은 100% 불신앙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이 언제나 공존합니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의심과 신뢰가 우리 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선택하는 삶입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 역시 선택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결단할 때, 불순종의 %를 신앙과 순종의 %로 옮겨가야 합니다.
어쩌면 성품마다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도 신앙 쪽으로 기울었다가 불신앙 쪽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또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신앙과 불신앙이 50 대 50에서 매일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결정해야 합니다. 불순종 중 1%를 순종의 50%에 넣어야 합니다. 고뇌하지만 결정의 순간에 순종을 51%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순종 대 불순종이 60% 대 40%가 됩니다. 그러다 점점 70% 대 30%, 80% 대 20%로 변화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자신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후 사모하게 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신앙과 생각, 내 판단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 있던 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일 뿐입니다. 더욱이 나 같은 자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며 수난의 길을 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 하나님이 사랑으로 말씀을 내게 주셨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구나.’ 하면서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말씀이 창세기 1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또한 창조하실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되니라.” 이후 다시 복음서의 예수님의 생애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사건화 됩니다. 귀신을 향해 “나가라!” 명하시면 귀신들이 쫓겨납니다. 바다에게 “잔잔하라!” 말씀하시면 흉흉하던 바닷가 잔잔해집니다.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 “너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하면 그 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게도 이런 믿음을 주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강단에 올라서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고, 사죄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하시며,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다 토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의 사건을 베풀어 주옵소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평안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더는 세상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성령께서 축복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말씀의 사건을 우리 성도님들이 매일의 삶에서 늘 경험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성경책을 닫아놓았다면 다시 그 성경을 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다짐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펴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동행하셨는지를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또한 그 말씀보다 더 앞서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 앞에 우리의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내 상상력이고 내 확신이며 내 신념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악을 용서할 테니 더는 죄악 속에 묻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다 버리게 할 테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친히 내 몸을 내놓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과 기쁨으로 영접합시다. 우리의 가슴을 열고 하나님께 말씀의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합시다.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 36 ~ 38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시작될 때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담의 아내 하와입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여성 중 대표적인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바로 이 두 여성이 인류사를 가름합니다. 하와는 보통 불순종의 아이콘으로, 마리아는 순종의 아이콘으로 소개됩니다. 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죄악과 거대한 파멸이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또 다른 여인을 통해 인류에 희망이 찾아왔고 바로 그녀의 태에서 위대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리아가 왜 순종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가 나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먼저 이 본문 이전에 세례 요한의 출생 사건이 나타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노년에 임신하게 되었고, 바로 그 사이에서 세례 요한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을 임신했다는 소식이 있은 지 약 6개월 만에 마리아도 임신했다는 내용이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이미 마리아는 요셉이란 사람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장차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감추어진 계시를 전합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1장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누가복음 1:31)
하나님이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까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당시는 요셉과 결혼한 게 아니고 약혼한 때였습니다. 약혼이란 혼인을 약속한 것이지만 아직 신방을 꾸린 건 아닙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누가복음 1:34)
이런 임신은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정말 임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처녀인 마리아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하면 돌로 쳐 죽임 당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처녀가 아니라고 판명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22장 20~2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신명기 22:20~21 중)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때 천사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 1:35)
성령이 임하고,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로써 창세기의 한 장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놀랍게도 그때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마리아를 덮으니 생명의 역사,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천사는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7)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때 마리아는 놀라며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는 유대 전통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란 기대와 신앙을 갖고 있던 여인입니다. 이러한 신앙 전통 아래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결국 그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믿음은 어디에 근거할까요? 우리는 믿음과 신념을 구별해야 합니다. 신념이란 내 생각의 총합입니다. 내 생각, 내 확신이 깊어지는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신념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신앙보다 신념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판단, 내 확신보다 늘 앞서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그 말씀이 내 생각과 신념보다 앞서야 신앙도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 확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에 있고, 또 그 말씀보다 하나님이 앞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신뢰이면서, 보다 궁극적으로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자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을 건넵니다. 그때 부모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청종하는 자녀를 보면, 부모 된 입장에서 마음이 흡족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의 마음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화가 납니다. 왜입니까? 부모의 말을 거부한 것을 넘어 부모를 거부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곧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던 여인 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모습은 인류의 첫 번째 여인이었던 하와와도 대조가 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순간 피조물임에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마리아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38절을 보면, 마리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란 고백을 하기 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누가복음 1:38 중)
자신은 주님의 여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종’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마치 하와가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 여겼던 것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피조물인 것을 잠시 잊어라. 네 안에 신성이 있다. 그 신성을 계발해 봐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자유자가 될 것이다.”
정말 자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자유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할 때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주님이시고 어떤 것도 내 인생에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할 때, 진정한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선배들이 끊임없이 하는 선언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내가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나를 억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대로 될 것이란 고백을 한 마리아의 본심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십니다.’ 이런 고백이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와는 사탄이 다가와서 유혹할 때 탐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한 열매를 보고 넘어갔습니다. 시각적이고 감성적인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을 때, 그 말씀이 자신의 이성과 배치된다고 느끼면서도 순종을 결정했습니다. 감성적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고 이성적으로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신앙이 비이성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감성적이란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내 이성과 감성에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는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계시가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이 하늘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이며, 이를 통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와와 마리아라는 두 여인을 통해 가정사가 달라졌습니다. 인류 사회의 역사도 달라졌습니다. 첫 여인 하와의 실패는 남편의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남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주며 공범을 저지르게 했습니다. 같이 악으로, 불순종의 자리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했고, 그녀의 남편 역시 순종의 길로 가게 됩니다. 더욱이 그 또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성령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하와가 낳은 아들은 가인입니다. 그는 동생을 시기해 죽인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안의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자유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와에서 마리아처럼 변화될 수 있을까요? 제가 종종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100% 신앙 혹은 100% 불신앙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이 언제나 공존합니다.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의심과 신뢰가 우리 안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선택하는 삶입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 역시 선택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결단할 때, 불순종의 %를 신앙과 순종의 %로 옮겨가야 합니다.
어쩌면 성품마다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도 신앙 쪽으로 기울었다가 불신앙 쪽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또 신앙에서 불신앙으로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신앙과 불신앙이 50 대 50에서 매일 흔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결정해야 합니다. 불순종 중 1%를 순종의 50%에 넣어야 합니다. 고뇌하지만 결정의 순간에 순종을 51%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순종 대 불순종이 60% 대 40%가 됩니다. 그러다 점점 70% 대 30%, 80% 대 20%로 변화하고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 자신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후 사모하게 된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신앙과 생각, 내 판단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 있던 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일 뿐입니다. 더욱이 나 같은 자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며 수난의 길을 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 하나님이 사랑으로 말씀을 내게 주셨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구나.’ 하면서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말씀이 창세기 1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또한 창조하실 때마다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 되니라.” 이후 다시 복음서의 예수님의 생애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사건화 됩니다. 귀신을 향해 “나가라!” 명하시면 귀신들이 쫓겨납니다. 바다에게 “잔잔하라!” 말씀하시면 흉흉하던 바닷가 잔잔해집니다.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 “너의 믿음대로 될 것이다.” 하면 그 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게도 이런 믿음을 주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강단에 올라서면서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고, 사죄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하시며,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다 토해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의 사건을 베풀어 주옵소서.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평안을 허락하옵소서. 그리하여 더는 세상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성령께서 축복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말씀의 사건을 우리 성도님들이 매일의 삶에서 늘 경험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성경책을 닫아놓았다면 다시 그 성경을 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다짐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펴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동행하셨는지를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또한 그 말씀보다 더 앞서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 앞에 우리의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합니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믿음은 내 상상력이고 내 확신이며 내 신념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악을 용서할 테니 더는 죄악 속에 묻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다 버리게 할 테니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친히 내 몸을 내놓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과 기쁨으로 영접합시다. 우리의 가슴을 열고 하나님께 말씀의 사람이 되겠다고 고백합시다.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12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20장, 12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1:36-38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한명의 여인이 인류의 죄악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파멸의 시작입니다. 바로 첫 번째 여인 하와입니다. 또 한명의 여인은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시작, 바로 순종의 사람 마리아입니다.
설교의 요약
마리아는 어떻게 순종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요? 마리아는 처녀로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녀로서 잉태의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31절). 처녀 마리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공포와 충격이었습니다. 놀란 마리아는 천사에게 묻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24절) 남편 없이 임신한 것이 발견되면, 구약 율법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했습니다. 중죄 중에 중죄였습니다(신22:21). 이때 계속해서 천사의 음성이 들립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35절).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실 때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에 대한 마리아의 마지막 대답을 들어 봅시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 신념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확신이라고 한다면, 믿음이란 그 말씀을 주신 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써 말씀과 함께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와와 마리아는 서로 많은 부분에서 대조됩니다. 첫째, 하와는 선악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교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스스로가 피조물인 것을 잊은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주의 여종”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둘째, 하와는 사탄의 감성적이고 시각적인 말에 넘어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에 역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합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교만한 자들을 흩어버리고 겸손한 자를 세우시는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는 새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셋째, 하와는 하나님이 다가오시자 도망갔습니다. 두려움에 숨었습니다. 수치가 드러났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바로 마리아 찬가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완전히 다릅니다. 넷째, 하와의 실패는 남편 아담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아담은 공범자가 되고 함께 실패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남편 요셉의 순종을 이끌어 냅니다. 마지막으로 하와의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살인자가 됩니다. 반면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후에 나의 순종과 믿음이 있을 수 있으며, 그 믿음의 열매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로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이후에 믿고 순종하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의 창조적 사건을 시작하십니다. 말씀을 통한 이 믿음으로,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슴으로 영접하며, 기쁨과 감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결연히 나갔던 내 삶의 순종의 이야기들을 감사함으로 나눠 봅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고, 좌절하였던 2017년의 경험 한 가지를 돌이켜 봅시다. 또다시 그런 일이 있게 된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결단해 봅시다.
3. 마리아는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2017년을 돌아보며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가를 통해 고백합시다. (찬송가 한 곡을 골라 부르며 묵상의 기도드리기)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람으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