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말씀위에 선 교회

고린도전서 2: 1 ~ 5

김지철 목사

2011.02.06

인간에게는 세 가지 불안의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가장 멋진 일이며 가장 소중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 마음은 참으로 기뻤습니다. 나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제 마음을 설레게 했고, 제 마음속에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제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저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인 성경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 씩 조금 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제 인생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은 내 인생의 문제들을 다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을 적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처럼 저 역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계속해서 제 안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 인생은 가야할 길이 있는 순례자의 길인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나그네와 방랑객의 길인가?’ 저는 이것을 예수님께 물으면서 그 답을 찾아내려했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두 번째 질문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양심의 가책이 나 자신을 무겁게 내려눌렀습니다. 때로는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선을 행하고 올바른 것을 향하여 나아가려할 때마다 내 속에 있는 죄악과 이기적인 탐욕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가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어린 저를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자녀를 다섯을 낳았는데 반타작도 못했단다.” 어렸을 때 저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그 말이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자라면서 질병 때문에 어머니보다 먼저 죽은 아이들을 지켜본 한 어머니의 가슴 아픈 하소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는 예수님이 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줄 분인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 자신의 질문을 보다 철학적인 언어로 가르쳐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폴 틸리히라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나 인간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세 가지 불안의식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론적인 불안입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인생이 허무한 것은 아닐까, 인간은 목적과 사명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불안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존재론적인 불안입니다. ‘내가 지금은 멀쩡히 살아있지만 죽음 앞에 다가서면 한 평도 되지 못하는 구덩이에 눕게 될 텐데, 아니 한줌의 재로 바뀔 텐데…’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존재가 비존재가 되는 두려움이 존재론적인 불안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의 불안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이와 똑같은 불안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답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목적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힘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다! 내가 곧 진리다!” 내 인생에 길과 진리가 열려있음을 아는 사람은 때로 가다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할 때가 있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하는 것은 가야할 길과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헤매지 말라. 방황하지 말라. 인생이 무상하다고 네 인생을 그냥 땅바닥에 버리지 말라.”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만나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그를 마음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5)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기뻤던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가슴 속에 맺혀진 것을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맺힌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셨습니다. 죄의 한, 분노의 한, 질병의 한, 내 속에서 다 풀어낼 수 없는 아픔의 한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는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친히 만지시고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서 이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여인에게는 그의 편이 돼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늘 비난과 멸시와 조롱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로 이 여인에게 다가오셨고 이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맺힌 것, 답답한 것,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려워 떨면서 오열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말씀에서 두 자매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5)

인생의 종착역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역사를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사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무엇이냐!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축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이 너무나 멋졌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님처럼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용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깨닫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읽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서 함께 읽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저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철학자의 말들과도 달랐습니다. 지성적인 내 머릿속의 말들과도 달랐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이 땅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을 때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말씀 속에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씀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창조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네 자녀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은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실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는 늙었습니다. 어디에도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살아있고 힘이 있고 에너지가 있어서 내 삶속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할 때마다 그들은 예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선포하기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게도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내 삶속의 사건으로 만들어주옵소서. 생명의 사건, 사랑의 사건, 치유의 사건으로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어떤 인물입니까? 무식한 인물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히브리 종교에 정통한 바리새인 랍비였습니다. 그는 헬라 도시였던 다소에서 자라면서 헬라 철학을 두루 섭렵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지식과 지성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항하고 거부했습니다. 격렬하게 핍박했습니다. 이단 중에 이단이 기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높이 들고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다가오신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당신이 예수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당신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당신이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때 그는 깨닫습니다. 그것은 역설의 지혜요 역설의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가장 강한 분이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가장 누추한 자리,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장 미련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 지성을 더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은 주님의 지혜와 지식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겸손히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늘의 지혜와 계시의 지식, 성령의 능력을 확인하고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깨달으면서 마음속에 사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을 평생 증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는 것은 이제 다른 모든 지식을 버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는 눈을 달리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과 역사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안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나의 지식과 지혜의 안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안경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시 조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많다고 으쓱대며 교만한 자가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 자신도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3)

본래 바울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으로 서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래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죄가 왜 교만이라고 말합니까? 교만은 우리의 눈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지혜와 지식을 끊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지혜의 계시가 열립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아름다운 말이나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할 때에 말씀자체가 갖고 있는 성령의 능력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믿음을 더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경험하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씀이 사라진 찬양은 노래자랑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사라진 기도는 인간의 넋두리와 자기 독백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사라진 예배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 앞에 서게 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위에 이 교회가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 다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btn_switch

고린도전서 2: 1 ~ 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인간에게는 세 가지 불안의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가장 멋진 일이며 가장 소중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 마음은 참으로 기뻤습니다. 나 자신이 사랑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제 마음을 설레게 했고, 제 마음속에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제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저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인 성경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 씩 조금 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제 인생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은 내 인생의 문제들을 다 해결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을 적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던 것처럼 저 역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계속해서 제 안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 인생은 가야할 길이 있는 순례자의 길인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나그네와 방랑객의 길인가?’ 저는 이것을 예수님께 물으면서 그 답을 찾아내려했습니다.
또한 저에게는 두 번째 질문이 있었습니다. 때때로 양심의 가책이 나 자신을 무겁게 내려눌렀습니다. 때로는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선을 행하고 올바른 것을 향하여 나아가려할 때마다 내 속에 있는 죄악과 이기적인 탐욕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가 있는가?’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어린 저를 보시면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얘야, 내가 자녀를 다섯을 낳았는데 반타작도 못했단다.” 어렸을 때 저는 그 말씀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야 그 말이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자라면서 질병 때문에 어머니보다 먼저 죽은 아이들을 지켜본 한 어머니의 가슴 아픈 하소연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는 예수님이 이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줄 분인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 자신의 질문을 보다 철학적인 언어로 가르쳐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폴 틸리히라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누구나 인간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세 가지 불안의식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적론적인 불안입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인생이 허무한 것은 아닐까, 인간은 목적과 사명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불안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존재론적인 불안입니다. ‘내가 지금은 멀쩡히 살아있지만 죽음 앞에 다가서면 한 평도 되지 못하는 구덩이에 눕게 될 텐데, 아니 한줌의 재로 바뀔 텐데…’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존재가 비존재가 되는 두려움이 존재론적인 불안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의 불안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이와 똑같은 불안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는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정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 자신의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답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목적에 대한 불안과 삶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힘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다! 내가 곧 진리다!” 내 인생에 길과 진리가 열려있음을 아는 사람은 때로 가다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할 때가 있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하는 것은 가야할 길과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헤매지 말라. 방황하지 말라. 인생이 무상하다고 네 인생을 그냥 땅바닥에 버리지 말라.”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만나 육체의 질병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그를 마음의 죄로부터 해방시켜주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2:5)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기뻤던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가슴 속에 맺혀진 것을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맺힌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셨습니다. 죄의 한, 분노의 한, 질병의 한, 내 속에서 다 풀어낼 수 없는 아픔의 한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는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들을 친히 만지시고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서 이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났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여인에게는 그의 편이 돼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늘 비난과 멸시와 조롱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로 이 여인에게 다가오셨고 이 여인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그것이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맺힌 것, 답답한 것,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려워 떨면서 오열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도 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절 이하의 말씀에서 두 자매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5)

인생의 종착역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죽었다가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역사를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소망을 갖고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사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무엇이냐!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축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이 너무나 멋졌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님처럼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길이다. 내가 진리다. 내가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용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깨닫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읽었습니다. 친구들과 모여서 함께 읽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저의 가슴을 벅차게 했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철학자의 말들과도 달랐습니다. 지성적인 내 머릿속의 말들과도 달랐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이 땅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을 때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말씀 속에 에너지가 있습니다. 말씀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창조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네 자녀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아브라함은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현실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는 늙었습니다. 어디에도 자녀를 낳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살아있고 힘이 있고 에너지가 있어서 내 삶속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할 때마다 그들은 예언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계속해서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선포하기가 너무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게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게도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내 삶속의 사건으로 만들어주옵소서. 생명의 사건, 사랑의 사건, 치유의 사건으로 나를 변화시켜주옵소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어떤 인물입니까? 무식한 인물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히브리 종교에 정통한 바리새인 랍비였습니다. 그는 헬라 도시였던 다소에서 자라면서 헬라 철학을 두루 섭렵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지식과 지성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항하고 거부했습니다. 격렬하게 핍박했습니다. 이단 중에 이단이 기독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높이 들고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다가오신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당신이 예수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당신이 십자가에 죽은 것이 당신이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때 그는 깨닫습니다. 그것은 역설의 지혜요 역설의 계시였습니다. 바울은 가장 강한 분이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가장 누추한 자리,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 인간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장 미련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내 지성을 더는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은 주님의 지혜와 지식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겸손히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하늘의 지혜와 계시의 지식, 성령의 능력을 확인하고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깨달으면서 마음속에 사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을 평생 증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했다는 것은 이제 다른 모든 지식을 버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는 눈을 달리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과 역사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안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나의 지식과 지혜의 안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안경으로 내 인생의 모든 것들을 다시 조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지식이 많다고 으쓱대며 교만한 자가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울 자신도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3)

본래 바울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으로 서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래야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드러나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큰 죄가 왜 교만이라고 말합니까? 교만은 우리의 눈을 닫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지혜와 지식을 끊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 자신의 죄악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지혜의 계시가 열립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4~5)

아름다운 말이나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할 때에 말씀자체가 갖고 있는 성령의 능력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믿음을 더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경험하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씀이 사라진 찬양은 노래자랑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사라진 기도는 인간의 넋두리와 자기 독백에 불과합니다. 말씀이 사라진 예배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 앞에 서게 될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위에 이 교회가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 다시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