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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과 듣는 것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종교가 있습니다. 첫 번째 형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자극시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자극시킵니다. 보게 하는 종교는 예식과 형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위엄과 하늘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때로는 신비스러운 예식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 마지막 단계로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절하게 합니다. 반면 듣게 하는 종교는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경전을 읽고 듣고 묵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함께 나눕니다.
제가 언젠가 회교모스크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금방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메카를 향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 서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머리를 앞뒤로 끄덕이면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구약의 토라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종교성의 차이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종교성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내가 믿고 있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태의 것일까?’
보는 것은 굉장히 탁월한 것입니다. 듣는 것의 100배 정도의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부터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빨리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식론에서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식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눈을 바르게 뜨고 보는 것은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인식할 때에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만 보아도 그 사람의 상당부분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가지기 위해서는 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듣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에게서부터 나오는 말이 어떤 말인가를 들어야 그 사람이 인격과 성품을 체험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옛 어른들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여성을 고를 때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즐겁게 하는 여인을 택하지 말고 귀를 즐겁게 하는 여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잠깐이지만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마음의 즐거움이자 계속적인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의 치장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치장이 결여되면 몸의 치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기독교는 보는 종교라기보다는 듣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신앙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서 듣지 않으면 더 이상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인격과 그분이 하신 일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전도와 선교입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내가 듣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늘의 계시적인 내용을 내 가슴에 안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와 선교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고통소리를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아파하고 왜 신음하는지 그들의 소리를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요 선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듣는 신앙입니다. 들음이 없으면 신앙은 멈춰섭니다. 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핵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쉐마”라는 말입니다. 명령형으로서 “들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알아라! 올바른 지식을 가져라! 깨달아라! 순종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6절에서는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명기 6:6)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새겨 넣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새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듣는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소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 자연의 소리, 그리고 새소리 등 우리는 들리지 않는 장소에 갈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소리를 만드신 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이 세계의 모든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배는 세상의 소리를 멈추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동안 우리가 소리 내어 지껄였던 모든 말들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소리,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를 향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예배란 지금까지 들었던 세상의 소리를 멈추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닌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내 속에 있는 허무와 어두움, 공허가 빛으로 바뀝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선포하셨을 때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빛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빛이 있으라” 선언하실 때,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 빛의 역사, 질서의 역사, 조화와 아름다움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 5)
이 말씀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라고 하는 숫자는 가장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에 가장 거대하고 큰 숫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다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온갖 피조물들,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역사, 인간의 삶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한 분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6)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모든 만물은 그 분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외에는 경배와 찬양을 받을 그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된 우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에도 거룩한 신성을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조된 세계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사람이 만든 거대한 우상덩어리든, 인간이 만든 생각과 이데올로기든, 거기에 절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듣는 것에 연연해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을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삶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붙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역사도 그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아야 자기를 변화시키고 갱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겸손히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사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내가 그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며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사랑 앞에 감히 비교될 것이 없다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내는 두 번째입니다. 남편도 두 번째입니다. 자식도 두 번째입니다. 나의 재산도 두 번째입니다. 이 부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이 모든 자연만물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리고, 내게 주신 공간을 누리고, 내 삶의 관계를 누리고, 모든 자연만물을 누리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듣지를 않으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세상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에 우쭐대며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에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와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시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하나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강론하라는 것입니다. 강론이란 영어성경을 보니 “talk about” 즉,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너희들이 집에 있든지, 밖에 나가서 걷는지, 누워있든지, 앉아있든지, 서있든지 자녀와 함께 작은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큰 사랑의 이야기를 던져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거대한 사랑이야기를 던져주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어디서든지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자랍니다.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인지를 잘 압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나보다도 더 사랑하시는구나.’ 이 한 가지만 가르쳐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신앙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부딪혀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나의 전부를 걸어야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명기 6: 4 ~ 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보는 것과 듣는 것
세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종교가 있습니다. 첫 번째 형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우리의 눈을 끊임없이 자극시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자극시킵니다. 보게 하는 종교는 예식과 형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경건한 위엄과 하늘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때로는 신비스러운 예식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 마지막 단계로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절하게 합니다. 반면 듣게 하는 종교는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경전을 읽고 듣고 묵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고 함께 나눕니다.
제가 언젠가 회교모스크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금방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메카를 향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앞에 서본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머리를 앞뒤로 끄덕이면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구약의 토라 말씀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종교성의 차이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 것일까?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종교성이 더 중요한 것일까? 내가 믿고 있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태의 것일까?’
보는 것은 굉장히 탁월한 것입니다. 듣는 것의 100배 정도의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부터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빨리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식론에서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식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눈을 바르게 뜨고 보는 것은 사물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척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인식할 때에도 보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만 보아도 그 사람의 상당부분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떠한 인생을 살았는지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가지기 위해서는 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듣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그 사람에게서부터 나오는 말이 어떤 말인가를 들어야 그 사람이 인격과 성품을 체험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옛 어른들께서 자신의 아들에게 여성을 고를 때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즐겁게 하는 여인을 택하지 말고 귀를 즐겁게 하는 여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잠깐이지만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마음의 즐거움이자 계속적인 즐거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의 치장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치장이 결여되면 몸의 치장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들음의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종교일까요? 기독교는 보는 종교라기보다는 듣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신앙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닫고서 듣지 않으면 더 이상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더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인격과 그분이 하신 일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전도와 선교입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내가 듣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늘의 계시적인 내용을 내 가슴에 안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와 선교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고통소리를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아파하고 왜 신음하는지 그들의 소리를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요 선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듣는 신앙입니다. 들음이 없으면 신앙은 멈춰섭니다. 4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고자하는 말씀의 핵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쉐마”라는 말입니다. 명령형으로서 “들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알아라! 올바른 지식을 가져라! 깨달아라! 순종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6절에서는 또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명기 6:6)
듣는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새겨 넣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새길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듣는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소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소리, 자연의 소리, 그리고 새소리 등 우리는 들리지 않는 장소에 갈수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소리를 만드신 분,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온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이 세계의 모든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예배는 세상의 소리를 멈추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동안 우리가 소리 내어 지껄였던 모든 말들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소리,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를 향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예배란 지금까지 들었던 세상의 소리를 멈추게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닌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내 속에 있는 허무와 어두움, 공허가 빛으로 바뀝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선포하셨을 때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빛의 역사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빛이 있으라” 선언하실 때,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 빛의 역사, 질서의 역사, 조화와 아름다움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긴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 5)
이 말씀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라고 하는 숫자는 가장 작은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에 가장 거대하고 큰 숫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다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 온갖 피조물들,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역사, 인간의 삶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한 분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6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6)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위에 있는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생겨났고 모든 만물은 그 분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외에는 경배와 찬양을 받을 그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된 우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에도 거룩한 신성을 부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조된 세계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사람이든, 사람이 만든 거대한 우상덩어리든, 인간이 만든 생각과 이데올로기든, 거기에 절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듣는 것에 연연해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을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삶을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붙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누리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역사도 그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목숨을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보이는 이 세계가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줄 알아야 자기를 변화시키고 갱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겸손히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사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내가 그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며 다른 어떤 존재도 이 사랑 앞에 감히 비교될 것이 없다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내는 두 번째입니다. 남편도 두 번째입니다. 자식도 두 번째입니다. 나의 재산도 두 번째입니다. 이 부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이 모든 자연만물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리고, 내게 주신 공간을 누리고, 내 삶의 관계를 누리고, 모든 자연만물을 누리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듣지를 않으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세상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에 우쭐대며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에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와 네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십시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하나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강론하라는 것입니다. 강론이란 영어성경을 보니 “talk about” 즉,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너희들이 집에 있든지, 밖에 나가서 걷는지, 누워있든지, 앉아있든지, 서있든지 자녀와 함께 작은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큰 사랑의 이야기를 던져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거대한 사랑이야기를 던져주었습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어디서든지 말씀을 통해서 만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녀들은 자랍니다.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인지를 잘 압니다.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나보다도 더 사랑하시는구나.’ 이 한 가지만 가르쳐주면 됩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신앙은 자라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부딪혀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나의 전부를 걸어야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김으로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