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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묵상하는 기쁨

시편 119: 9 ~ 16

김지철 목사

2015.02.01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고 있습니까?

사람이란, 육체를 지닌 동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건강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영혼이 굶주리고 있는지, 아니면 평안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잘 차려진 밥상을 대하면 식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맛있게 먹습니다. 반면, 밥을 먹지 못했을 때 우리는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것은 몸이 아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은 어떨까요?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영혼도 배가 고파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건강한 영혼은, 굶주림을 인식할 줄 압니다. 만약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영혼에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 마당에 예쁜 새가 한 마리 날아왔다면, 그 새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너 참 예쁘구나, 나는 너를 좋아해.” 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갔다고 해봅시다. 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할까요? 아니요. 후다닥 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과 새는 너무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하나님과 내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특별히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에게 임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꼭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도망가지 말라.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네가 도망가면 내가 너를 만날 수가 없지 않느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복을 누렸던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모세가 상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 옆을 잠시 스쳐지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 앞에 누구도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의롭다고 여겨졌던 욥도 고난을 당한 순간에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자 고뇌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가셔도 문제가 발생하고,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일 때도 인간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특별한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엘리야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야.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당신도 죄인이야.”
이처럼 인간을 다루기란 도무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인간을 다루기 위해 고심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로 말입니다.
가톨릭교회나 개신교 기독교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경 읽기 중 하나가 ‘lectio divina’라고 불리는 ‘거룩한 성경 읽기’입니다. 영적인 성경 읽기인데, 이것은 네 가지 읽기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Lectio, 읽기입니다. 성경을 천천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것을 권유합니다. 두 번째는 Meditatio,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내게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Oratio,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본문에 응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Contemplatio, 관상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묵상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체험 자리에 들어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신비 속에 개인적으로 친화되는 것을 거절합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3천 개 이상의 설교를 하고, 오만 페이지 이상의 책을 썼습니다. 그의 핵심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교회가 그동안 가르쳤던 교리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교황도 교회도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당시 아주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로 성경 읽기 방법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 Oratio,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을 때 그냥 읽지 말고 기도하면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내 지성과 감성, 이성과 의지를 그분에게 맡기면서 읽어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존감, 자만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그 자세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편 119:27)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편 119:34)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셔야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Meditatio, 묵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lectio divina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거기에서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초점이었다면, 마틴 루터가 이야기하는 묵상은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이 문자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하나하나를 묵상하고 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면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내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 말씀을 하나하나 문자 그대로 묵상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읊조리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시편 119:15)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편 119:48)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편 119:97)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까? 그 구절 몇 개를 외우고 있다가 위기에 처하여 실망하고 낙담했을 때, 그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읊조려 보십시오.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Meditatio입니다.
세 번째로 Tentatio, 우리말로는 시련 혹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게 되면,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레 삶의 현장에 반영이 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삶의 실존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임을 선포하게 될 때 ‘고난’이라는 것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의 사람은, 사탄에 저항하고 사탄을 넘어서는 길을 말씀을 통해 얻게 됩니다. 최고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국민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옳음과 진실을 위해 투쟁한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71)

기독교의 성경 읽기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조용한 묵상과 신비적인 경험에 멈춰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력과 지혜를 갖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난도 불사하고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도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중심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과 물질을 분석하는 데에는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경험하는 데에는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려는 청년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여자나 남자보다 귀를 즐겁게 하는 남자나 여자를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에 혹해서 처음 만났다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이 사람은 내가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네.’ 하고 결정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네.’ 하며 더욱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단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하나는 보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듣는 종교입니다. 가장 저급한 종교일수록 보이는 것을 요란하게 치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는 것 때문에 압도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모임을 가보면 얼마나 그럴싸하게 차려놓고 있습니까? 교주들은 또 얼마나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습니까? 보이는 것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진정한 종교성, 진정한 신앙이란 듣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미성숙과 성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높이 올라간 뾰족한 탑의 성당과 평범한 예배당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아름다운 사제의 옷과 평범한 목회자의 옷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찬식을 끊임없이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들리는 말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 전통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생긴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비밀은, 들음의 세계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신앙은 커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육체가 하루 세 끼를 요청합니다. 한 끼만 안 먹어도 육체가 안달을 합니다. 그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영혼의 음식을 사모하면 건강한 영혼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안 듣고 읽지 않는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새로워지고 생명을 얻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입니까?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배우기를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찾고 싶은 마음,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스펀지처럼 말씀을 흡수하겠다는 열망과 사모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 (시편 119:10)

…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119:12)

기독교 신앙은 배우는 종교입니다. 그 신앙을 가진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즐거움을 갖고 말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면 즐거울까요? 돈을 가지면 즐겁습니까? 명품 백을 사면 즐겁습니까? 물론 즐겁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 돈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편 119:14)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청년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119:9)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영혼이 청춘처럼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나이가 들면 노화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젊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젊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1편 2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묵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성경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까? 먼지를 털고 다시 펴십시오. 그리고 읽으십시오. 그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됩니다.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서 편지를 써 보내면 부모들은 읽고 또 읽습니다. 고생은 하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마음으로 읽으면 글자 하나하나가 다 좋습니다. 거기다가 아들이 ‘엄마, 보고 싶습니다. 엄마 고맙습니다.’ 한마디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읽기를 ‘뇌가 먹는 비타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읽기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 전체가 필요로 하는 양식이고 비타민입니다.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혼자 읽기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서 새벽 기도회에 초청합니다. 매번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나오셔서 함께 말씀을 읽으세요. 그래서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세요.
독일에 있을 때, 저를 지도해주신 선생님은 제게 성경을 읽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읽으라는 말이 lesen인데, “lesen, lesen und lesen.”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이 사랑의 편지를 여러분의 손으로 펴서 읽으면서,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말씀을 묵상하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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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9: 9 ~ 16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11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2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3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14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15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16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영혼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고 있습니까?

사람이란, 육체를 지닌 동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건강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영혼이 굶주리고 있는지, 아니면 평안과 풍요를 누리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잘 차려진 밥상을 대하면 식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맛있게 먹습니다. 반면, 밥을 먹지 못했을 때 우리는 배고픔을 느낍니다. 그것은 몸이 아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은 어떨까요?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영혼도 배가 고파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건강한 영혼은, 굶주림을 인식할 줄 압니다. 만약 영혼의 양식을 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영혼에 병이 들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는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 마당에 예쁜 새가 한 마리 날아왔다면, 그 새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너 참 예쁘구나, 나는 너를 좋아해.” 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갔다고 해봅시다. 새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할까요? 아니요. 후다닥 하고 날아가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과 새는 너무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하나님과 내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특별히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이 사람에게 임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꼭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도망가지 말라.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네가 도망가면 내가 너를 만날 수가 없지 않느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복을 누렸던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모세가 상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 옆을 잠시 스쳐지나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 앞에 누구도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의롭다고 여겨졌던 욥도 고난을 당한 순간에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자 고뇌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가셔도 문제가 발생하고,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보일 때도 인간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특별한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엘리야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죄인 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이 아니야. 나와 똑같은 인간이야. 당신도 죄인이야.”
이처럼 인간을 다루기란 도무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도, 인간을 다루기 위해 고심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로 말입니다.
가톨릭교회나 개신교 기독교회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성경 읽기 중 하나가 ‘lectio divina’라고 불리는 ‘거룩한 성경 읽기’입니다. 영적인 성경 읽기인데, 이것은 네 가지 읽기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Lectio, 읽기입니다. 성경을 천천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것을 권유합니다. 두 번째는 Meditatio, 묵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내게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Oratio,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본문에 응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Contemplatio, 관상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묵상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체험 자리에 들어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길의 기초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신비 속에 개인적으로 친화되는 것을 거절합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3천 개 이상의 설교를 하고, 오만 페이지 이상의 책을 썼습니다. 그의 핵심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교회가 그동안 가르쳤던 교리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교황도 교회도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당시 아주 놀라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로 성경 읽기 방법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 Oratio,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을 때 그냥 읽지 말고 기도하면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내 지성과 감성, 이성과 의지를 그분에게 맡기면서 읽어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존감, 자만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은 그 자세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편 119:18)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편 119:27)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편 119:34)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셔야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며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Meditatio, 묵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lectio divina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거기에서는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초점이었다면, 마틴 루터가 이야기하는 묵상은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이 문자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하나하나를 묵상하고 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면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내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 말씀을 하나하나 문자 그대로 묵상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읊조리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시편 119:15)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편 119:48)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편 119:97)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까? 그 구절 몇 개를 외우고 있다가 위기에 처하여 실망하고 낙담했을 때, 그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읊조려 보십시오.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Meditatio입니다.
세 번째로 Tentatio, 우리말로는 시련 혹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게 되면,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게 되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연스레 삶의 현장에 반영이 됩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삶의 실존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회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임을 선포하게 될 때 ‘고난’이라는 것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의 사람은, 사탄에 저항하고 사탄을 넘어서는 길을 말씀을 통해 얻게 됩니다. 최고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국민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옳음과 진실을 위해 투쟁한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71)

기독교의 성경 읽기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조용한 묵상과 신비적인 경험에 멈춰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력과 지혜를 갖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난도 불사하고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도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중심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 속에서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과 물질을 분석하는 데에는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경험하는 데에는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려는 청년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여자나 남자보다 귀를 즐겁게 하는 남자나 여자를 만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에 혹해서 처음 만났다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이 사람은 내가 가까이 할 사람이 아니네.’ 하고 결정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네.’ 하며 더욱 새롭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단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하나는 보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듣는 종교입니다. 가장 저급한 종교일수록 보이는 것을 요란하게 치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는 것 때문에 압도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의 모임을 가보면 얼마나 그럴싸하게 차려놓고 있습니까? 교주들은 또 얼마나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습니까? 보이는 것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입니다. 진정한 종교성, 진정한 신앙이란 듣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미성숙과 성숙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높이 올라간 뾰족한 탑의 성당과 평범한 예배당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아름다운 사제의 옷과 평범한 목회자의 옷의 차이도 그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찬식을 끊임없이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보이는 말씀인 성찬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들리는 말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신교 전통의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생긴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비밀은, 들음의 세계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신앙은 커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육체가 하루 세 끼를 요청합니다. 한 끼만 안 먹어도 육체가 안달을 합니다. 그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영혼의 음식을 사모하면 건강한 영혼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안 듣고 읽지 않는데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즉,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새로워지고 생명을 얻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을 것입니까?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배우기를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찾고 싶은 마음,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스펀지처럼 말씀을 흡수하겠다는 열망과 사모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 (시편 119:10)

…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119:12)

기독교 신앙은 배우는 종교입니다. 그 신앙을 가진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즐거움을 갖고 말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면 즐거울까요? 돈을 가지면 즐겁습니까? 명품 백을 사면 즐겁습니까? 물론 즐겁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 돈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시편 119:14)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청년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시편 119:9)

말씀을 따르고 말씀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영혼이 청춘처럼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나이가 들면 노화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60이 되고, 70이 되고, 80이 되어도 젊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젊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시편 1편 2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묵상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성경에 먼지가 쌓여 있습니까? 먼지를 털고 다시 펴십시오. 그리고 읽으십시오. 그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됩니다.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서 편지를 써 보내면 부모들은 읽고 또 읽습니다. 고생은 하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곱씹으며 읽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마음으로 읽으면 글자 하나하나가 다 좋습니다. 거기다가 아들이 ‘엄마, 보고 싶습니다. 엄마 고맙습니다.’ 한마디라도 하면, 어머니는 그냥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읽기를 ‘뇌가 먹는 비타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읽기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영혼, 우리의 삶 전체가 필요로 하는 양식이고 비타민입니다.
성경을 펴서 읽으십시오. 혼자 읽기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서 새벽 기도회에 초청합니다. 매번 나오지는 못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나오셔서 함께 말씀을 읽으세요. 그래서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세요.
독일에 있을 때, 저를 지도해주신 선생님은 제게 성경을 읽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읽으라는 말이 lesen인데, “lesen, lesen und lesen.”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읽고 읽고 또 읽으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이 사랑의 편지를 여러분의 손으로 펴서 읽으면서,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말씀을 묵상하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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