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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영적 소프트웨어

느헤미야 8: 1 ~ 3

김지철 목사

2010.08.01

소프트웨어가 뒤따르지 못하는 하드웨어만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엊그제 한 경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시대에 촉망 받는 ‘정보기술(IT) 강국, 코리아’로 우뚝 섰다. 초고속 유선 인터넷망 등 인프라는 세계 탑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휴대폰 등 IT기기와 같은 하드웨어 부분에서는 세계 2,3위를 다툴 만큼 급성장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SW) 부분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지난해 말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한 후 한국 IT업계는 메가톤급 충격에 휩싸였다. 국내 IT업체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IT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한국은 IT강국이 아니다.”라는 위기론이 거세지고 있다. 스마트폰 열풍으로 급변하고 있는 세계모바일 시장에서 강력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출시한 애플, 구글 등에 밀리고 있다. 스마트폰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애플과 구글은 IT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제조 기술에서 소프트웨어와 콘센트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소프트웨어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은 고작 1.8%에 불과하다.

IT산업에서 하드웨어와 인터넷망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로 앞서 있지만 소프트웨어에 있어서는 아주 뒤떨어져있다는 위기감이 실려 있는 기사입니다. 소프트웨어가 뒤따르지 못하는 하드웨어만의 성장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생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드웨어는 잘 준비되어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가장 위험스럽고 힘들었던 시기를 꼽는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대체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청소년시절을 꼽을 것입니다. 왜 청소년 시절이 힘들고 어려웠을까요? 우리 몸은 하드웨어입니다. 반면에 우리 정신세계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내 몸이 자란 것 같습니다. 몸은 하루하루 엄청나게 변하며 성장을 하는데 마음의 생각은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고등학생인데 마음은 중학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신의 성숙이 육체성장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할 때 어려움이 생깁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많은데 정신적으로 정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민과 갈등도 많았습니다. 혼자 외롭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와 동행할 사람이 없다고 고통 받으면서 지냈던 청소년 시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20살 쯤 되어서야 정신세계가 몸에 접근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으로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라는 하드웨어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축제를 하고 끝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별 볼일 없던 백성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드웨어 외에 진정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비결, 곧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 되는 비결을 깊이 묵상하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예배,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끌어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소프트웨어로 영혼이 채워져야 이스라엘 백성이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영혼의 기다림, 정신적인 불만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성숙하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정신적인 불만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기다림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이유도 영혼의 목마름 때문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는 불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하고 내 영혼이 기뻐 뛰놀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의 소프트웨어로 영혼이 채워지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신년으로 시작되는 일곱째 달은 첫날부터 나팔을 불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었고 학사였던 에스라에게 부탁합니다. “이제 성벽이 다 건축되었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모세의 율법책을 우리들에게 읽어주시고 가르쳐주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헤미야8:1)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재건이라는 하드웨어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위에 영적인 말씀인 소프트웨어로 성숙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회복을 통해 진정한 회복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드웨어에만 관심 있으면 우리의 신앙이 종교로 바뀝니다. 우리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사라지면 교회는 습관이 됩니다. 교회는 내가 섬기는 봉사활동을 하는 곳으로 멈춰서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좋아하는 몇 사람을 만나서 때로는 수다 떨고 끝나버리는 종교적 행사장에 멈춰서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신앙을 종교로 멈춰 서게 하지 않고 말씀 듣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느헤미야8:5-6)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전한 회복은 성벽이 완성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벽이 완성된 후에 하나님 안에서 백성들이 영적인 회복, 영적인 부흥, 영적인 기쁨, 영적인 만족이 되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참된 예배와 참된 교회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으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란 보이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건물은 그냥 예배당일 뿐입니다. 교회란 모이는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회이고, 적게 모이면 나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레고 기쁨으로 뛰놀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역동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회칠한 무덤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있으나 예배의 내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습은 있으나 예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말씀이 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예배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의 모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예수님이 사데 교회를 향해서 꾸짖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3:1)

모든 것이 있고, 모든 형식이 있습니다. 다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고 그 속에 생명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신처럼 모양은 있지만 차디차게 식어 생명이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꾸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고 사탄과 투쟁하신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사탄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게는 하드웨어, 곧 육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과정에서 바로 이 두 가지 강력한 사상이 부딪힌 것입니다. 사탄은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 곧 인간은 보이는 육체를 만족시키는 입으로 들어가는 빵만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있어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그 영혼이 만족하고 기뻐하며 그 인생이 힘을 얻고 인간답게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 속에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제일 큰 논쟁은 이것입니다. 칼 막스의 유물론적인 사고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야한다는 끊임없는 대립이 역사 속에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보이는 육체보다 영혼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오늘 성경말씀은 다시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헤미야8:8-9)

백성들은 오랜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배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으며 묵상하는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했습니다. 그들의 게으름이 생각났고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범죄행위가 기억났습니다. 영적 각성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모습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무지,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통곡했습니다. 이렇게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게 되었을 때 에스라가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 즐거워해라.’고 선언합니다. 10절 말씀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8:10)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의미일까요? 예배드리는 자의 애통함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눈물, 예배드리는 자의 아픔, 예배드리는 자의 탄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이것을 토해낼 때 하나님께서 내 아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고, 내 탄식을 노래로 바꿔주시고, 내가 갖고 있는 눈물을 위로로 바꿔주시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고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죄악과 허물, 게으름과 완악함, 시기와 질투, 교만함과 이기적인 욕심을 주님께 토해내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합니까? 기도 속에 내 모습이 있음을, 내 부족함이 있음을, 내 완악함이 있음을, 내 못된 성격이 있음을 주님 앞에 토해낼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근심하지 말라, 이제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네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 내가 네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다, 내가 내 아픔을 기쁨으로 바꿔 줄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말씀 없는 기도, 말씀 없는 찬양은 위험합니다. 한참 기도하다보면 때로는 누구한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한참 찬양하다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자기가 좋아서 흥겨워서 노래 부르는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말씀과 더불어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유럽을 가게 되면 우리는 두 번 놀라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놀라는 것이 있겠지만 하나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교회당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기계가 없던 시절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돌로 아름답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며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음 때문에 놀랍니다. 그런데 또 다른 놀람은 예배당의 현실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일에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몇 백 명, 몇 천 명이 들어가는 교회당에 30-40명의 노인들만이 한 구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면서 플래시를 터뜨립니다. 그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가슴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앞으로 10년, 30년, 50년 후에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말씀이 사라지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인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하드웨어는 멋있게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 소프트웨어가 다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사람들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임하여주옵소서. 애통하는 마음과 안타까운 내 마음, 내 속의 영혼의 눈물을 주님께서 말씀으로 닦아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노래하고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힘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믿음의 힘이 아닙니다. 교회 직분을 맡는 것이 믿음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말씀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간직할 때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 가슴 속에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가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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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 1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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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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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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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소프트웨어가 뒤따르지 못하는 하드웨어만의 성장은 한계가 있습니다.

엊그제 한 경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시대에 촉망 받는 ‘정보기술(IT) 강국, 코리아’로 우뚝 섰다. 초고속 유선 인터넷망 등 인프라는 세계 탑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휴대폰 등 IT기기와 같은 하드웨어 부분에서는 세계 2,3위를 다툴 만큼 급성장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SW) 부분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지난해 말 애플의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한 후 한국 IT업계는 메가톤급 충격에 휩싸였다. 국내 IT업체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IT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한국은 IT강국이 아니다.”라는 위기론이 거세지고 있다. 스마트폰 열풍으로 급변하고 있는 세계모바일 시장에서 강력한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출시한 애플, 구글 등에 밀리고 있다. 스마트폰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애플과 구글은 IT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제조 기술에서 소프트웨어와 콘센트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소프트웨어 분야 세계시장 점유율은 고작 1.8%에 불과하다.

IT산업에서 하드웨어와 인터넷망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로 앞서 있지만 소프트웨어에 있어서는 아주 뒤떨어져있다는 위기감이 실려 있는 기사입니다. 소프트웨어가 뒤따르지 못하는 하드웨어만의 성장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생도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드웨어는 잘 준비되어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가장 위험스럽고 힘들었던 시기를 꼽는다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대체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청소년시절을 꼽을 것입니다. 왜 청소년 시절이 힘들고 어려웠을까요? 우리 몸은 하드웨어입니다. 반면에 우리 정신세계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내 몸이 자란 것 같습니다. 몸은 하루하루 엄청나게 변하며 성장을 하는데 마음의 생각은 초등학교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몸은 고등학생인데 마음은 중학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신의 성숙이 육체성장과 함께 이루어지지 못할 때 어려움이 생깁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도 많은데 정신적으로 정돈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고민과 갈등도 많았습니다. 혼자 외롭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아무도 나와 동행할 사람이 없다고 고통 받으면서 지냈던 청소년 시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20살 쯤 되어서야 정신세계가 몸에 접근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으로 성숙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라는 하드웨어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축제를 하고 끝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별 볼일 없던 백성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드웨어 외에 진정한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비결, 곧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도성이 되는 비결을 깊이 묵상하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예배,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끌어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소프트웨어로 영혼이 채워져야 이스라엘 백성이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영혼의 기다림, 정신적인 불만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성숙하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정신적인 불만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의 기다림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이유도 영혼의 목마름 때문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정신적인 세계로는 불만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하고 내 영혼이 기뻐 뛰놀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의 소프트웨어로 영혼이 채워지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신년으로 시작되는 일곱째 달은 첫날부터 나팔을 불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었고 학사였던 에스라에게 부탁합니다. “이제 성벽이 다 건축되었으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모세의 율법책을 우리들에게 읽어주시고 가르쳐주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헤미야8:1)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 재건이라는 하드웨어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위에 영적인 말씀인 소프트웨어로 성숙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회복을 통해 진정한 회복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드웨어에만 관심 있으면 우리의 신앙이 종교로 바뀝니다. 우리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사라지면 교회는 습관이 됩니다. 교회는 내가 섬기는 봉사활동을 하는 곳으로 멈춰서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좋아하는 몇 사람을 만나서 때로는 수다 떨고 끝나버리는 종교적 행사장에 멈춰서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신앙을 종교로 멈춰 서게 하지 않고 말씀 듣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성경은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느헤미야8:5-6)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전한 회복은 성벽이 완성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벽이 완성된 후에 하나님 안에서 백성들이 영적인 회복, 영적인 부흥, 영적인 기쁨, 영적인 만족이 되어져야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참된 예배와 참된 교회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달으며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란 보이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건물은 그냥 예배당일 뿐입니다. 교회란 모이는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이 모이면 좋은 교회이고, 적게 모이면 나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가?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내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레고 기쁨으로 뛰놀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역동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회칠한 무덤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있으나 예배의 내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습은 있으나 예배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말씀이 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예배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의 모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예수님이 사데 교회를 향해서 꾸짖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요한계시록3:1)

모든 것이 있고, 모든 형식이 있습니다. 다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고 그 속에 생명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신처럼 모양은 있지만 차디차게 식어 생명이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꾸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고 사탄과 투쟁하신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사탄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에게는 하드웨어, 곧 육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 사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과정에서 바로 이 두 가지 강력한 사상이 부딪힌 것입니다. 사탄은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 곧 인간은 보이는 육체를 만족시키는 입으로 들어가는 빵만 있으면 된다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있어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고,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그 영혼이 만족하고 기뻐하며 그 인생이 힘을 얻고 인간답게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 속에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제일 큰 논쟁은 이것입니다. 칼 막스의 유물론적인 사고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은혜로 살아가야한다는 끊임없는 대립이 역사 속에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보이는 육체보다 영혼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임을 오늘 성경말씀은 다시 우리에게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헤미야8:8-9)

백성들은 오랜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배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으며 묵상하는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했습니다. 그들의 게으름이 생각났고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범죄행위가 기억났습니다. 영적 각성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모습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무지,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통곡했습니다. 이렇게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게 되었을 때 에스라가 말합니다.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 즐거워해라.’고 선언합니다. 10절 말씀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8:10)

오늘은 기쁜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의미일까요? 예배드리는 자의 애통함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눈물, 예배드리는 자의 아픔, 예배드리는 자의 탄식과 더불어 하나님께 이것을 토해낼 때 하나님께서 내 아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시고, 내 탄식을 노래로 바꿔주시고, 내가 갖고 있는 눈물을 위로로 바꿔주시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고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죄악과 허물, 게으름과 완악함, 시기와 질투, 교만함과 이기적인 욕심을 주님께 토해내면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기도를 합니까? 기도 속에 내 모습이 있음을, 내 부족함이 있음을, 내 완악함이 있음을, 내 못된 성격이 있음을 주님 앞에 토해낼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제 근심하지 말라, 이제 염려하지 말라, 내가 네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 내가 네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다, 내가 내 아픔을 기쁨으로 바꿔 줄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말씀 없는 기도, 말씀 없는 찬양은 위험합니다. 한참 기도하다보면 때로는 누구한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한참 찬양하다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자기가 좋아서 흥겨워서 노래 부르는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말씀과 더불어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우리의 봉사,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기뻐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유럽을 가게 되면 우리는 두 번 놀라게 됩니다. 여러 가지로 놀라는 것이 있겠지만 하나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 교회당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기계가 없던 시절 어떻게 저렇게 거대한 돌로 아름답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며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음 때문에 놀랍니다. 그런데 또 다른 놀람은 예배당의 현실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일에 예배당에 들어가 보면 몇 백 명, 몇 천 명이 들어가는 교회당에 30-40명의 노인들만이 한 구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면서 플래시를 터뜨립니다. 그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가슴의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앞으로 10년, 30년, 50년 후에 이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말씀이 사라지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인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하드웨어는 멋있게 보일지라도 어느 순간 소프트웨어가 다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사람들이 다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임하여주옵소서. 애통하는 마음과 안타까운 내 마음, 내 속의 영혼의 눈물을 주님께서 말씀으로 닦아주시고 내가 하나님을 노래하고 내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힘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믿음의 힘이 아닙니다. 교회 직분을 맡는 것이 믿음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말씀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에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간직할 때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 가슴 속에 영적인 소프트웨어인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가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귀한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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