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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을 믿으십니까?
언젠가 한글날을 맞이해 MBC에서 ‘재미있는 말의 힘’이라는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아보는 방송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새로 지은 밥을 유리병 두 개에 담고 하나에는 ‘고맙습니다’라고 쓰고, 다른 하나에는 ‘짜증나’라고 썼습니다. 아나운서들에게 이것을 나누어 주고, 볼 때마다 각 병에 쓰인 대로 병을 향해 반복해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양쪽 모두에 곰팡이가 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곰팡이가 낀 반면, ‘짜증나’라고 말한 밥에는 썩은 냄새가 나는 시퍼런 곰팡이가 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고맙다’라는 말을, 또 누군가에게는 ‘짜증나’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결국 말이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짜증나’라는 말 속에는 ‘당신은 필요 없어. 당신이 내 앞에서 좀 사라졌으면 좋겠어.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까?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까? 아내나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짜증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에 힘을 넣으셨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에게 말을 주시고, 인간이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의 힘에 대한 글들이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6:24)
말 하나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말’은 무엇일까요? 친절한 말입니다. 기쁘게 하는 말입니다. 진실이 담긴 말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한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자존감뿐만 아니라 내 자존심도 높아집니다. 이처럼 인간의 말은 참으로 강력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21)
혀로 하는 말 때문에 사람을 높여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이 이 세 치 혀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손찌검이나 폭력적이고 혐오스러운 행동에 의해서 받기도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바로 언어폭력입니다. 지나가듯이 한 말 한마디가 비수같이 꽂힙니다. 그것도 내가 신뢰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비난과 조롱의 말은 견딜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도 인간의 말에 의해 기뻐하시고, 때로는 그 말 때문에 상처를 받으십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도 참 외로우시겠다’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순종의 말을 하는 자들을 만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좋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대로 떠났습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며 별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지고 땅의 모래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질 거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자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받겠습니다. 믿음으로 받겠습니다.” 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은 좋아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내 가슴으로 받겠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흡수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했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축복의 사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신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하는 말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께 큰 상처와 실망을 안겨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가나안 정탐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애굽 땅을 떠나 2∼3개월 만에 가나안 접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2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현장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이 본 것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보고합니다. 열두 명 중에 열 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거대한 아낙 자손의 후손들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형편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메뚜기와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백성들은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 (민수기 14:2∼3)
“아예 애굽에서 죽이시지, 아예 이 광야에서 죽이시지, 왜 그들과 싸움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만드시는가!”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는 소리도 들으시고, 우리가 원망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들으시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원망에 하나님은 반응하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27∼28)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 대로 우리에게 시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아서 인생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일어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시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2∼3개월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을 앞에 두고 40년을 헤맸습니다. 방황하고 또 방황했습니다. 결국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그곳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들 중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굽니까?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대체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가 달랐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지역에 들어갔을 때, 거대한 장수처럼 보이는 아낙 자손을 보지 못했을까요? 아니요.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문제점을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치열하고 어려운지를 외면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분석하고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만 본 것이 아니라, 아낙 자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하나님은 보지 않고 오직 아낙 자손만 보아서 무너진 것이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낙 자손의 거대함은 보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으로 받았기에 그 문제를 ‘넘어갈 수 있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바라보면 화나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평할 만한 일도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한마디로 꼴불견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분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보이는데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결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와 그 말씀이 이 세계와 우리 삶의 현장에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더니 빛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중심축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한 축은 공의와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해 이 땅을 선하고 아름답게, 조화롭고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또 다른 축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을 통해 연약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세우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충만하도록 이 땅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선언하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교만했고, 탐욕스러웠고, 죄악 속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그리고 인자하심을 적대하며 무너뜨리는 세력이 바로 인간들, 소위 힘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는 10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시편 33:10)
힘 있는 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기의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다 철폐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인간의 불의와 거짓과 끊임없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의 욕심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인간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에 끊임없이 충돌하며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공의와 정의가 어디로 갔을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인자하심이 왜 사라졌을까?’ 물을 수밖에 없는 위기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인자하심을 도대체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보여주시는 자리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와 정의, 인자하심을 우리가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무너져야 내가 세워진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삶의 현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좌절합니다. 실망합니다. 결국 분노를 분노로, 미움을 미움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조차 미움과 싸움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사랑하여 부부가 된 이들이 어느덧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미운 말을 하고, 분노를 분노로 마주하며, “더 이상 너하고 살 수 없다!”고 갈라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목격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어떻습니까? 부모의 말에 자녀들은 대듭니다. “왜 내 인생을 간섭해요?” 더욱 심하게는 부모와 자녀 간에 아예 대화가 끊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조차 이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위기입니다. 여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목격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 즉 불신앙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바라보기보다는, 인자하심과 긍휼로 사람을 대하기보다는, 탐욕과 미움으로 인간을 대하며 삶의 자리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선생님을 통해서 배움을 얻지만, 인생에는 좋은 선생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칼릴 지부란(Kahlil Gibran)이라는 사람이 이런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나는 수다쟁이로부터 침묵을 배웠다. 나는 편협한 이로부터 관용을 배운다. 나는 불친절한 이로부터 친절을 배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스승들에게는 전혀 고맙지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계를 아름답고 선하게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이것들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은 더 큰 탐욕을 원합니다. 교만과 또 다른 교만이 충돌합니다. 그러다보니, 미움과 적대감이 가득한 현장에서 우리 모두가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격자면서 모두가 피해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리에 말씀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다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방관자였습니다. ‘그 사건들은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관계가 없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방관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방관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어둠이 있는지, 어디에 빛이 있는지, 어디에 미움이 있고, 어디에 사랑이 있는지, 어디에 부정과 부패가 있는지, 어디에 정의와 공의가 있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관찰만 하고 있으면 마음에 분노만 생깁니다. 그래서 관찰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바로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갖고 참여자로 나아가야 됩니다. 악과 부패가 도처에 있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 내 것도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아파하고, 고쳐야 하고, 변화시켜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중독, 술 중독, 그리고 성 중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상실된 자리 아닙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 인생이 얼마나 공허하기에, 얼마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영원한 즐거움 대신 일시적인 쾌락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인생의 슬픔이 그들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을 볼 수 있고, 또 이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인간의 악함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저런 방식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은 시인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서 ‘그’라고 표현된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편 33:9)
다시 세울 수 있는 것, 다시 이룰 수 있는 것은 말씀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데,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 땅에 인자하심이 풍성해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훼손시키고 있었군요. 이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연약한 것, 아픈 것, 힘든 것, 탄식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나 자신부터 말씀으로 변화 받고, 가정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편 33: 4 ~ 12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말의 힘을 믿으십니까?
언젠가 한글날을 맞이해 MBC에서 ‘재미있는 말의 힘’이라는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알아보는 방송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새로 지은 밥을 유리병 두 개에 담고 하나에는 ‘고맙습니다’라고 쓰고, 다른 하나에는 ‘짜증나’라고 썼습니다. 아나운서들에게 이것을 나누어 주고, 볼 때마다 각 병에 쓰인 대로 병을 향해 반복해서 말하라고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양쪽 모두에 곰팡이가 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밥에는 구수한 냄새가 나는 하얗고 부드러운 곰팡이가 낀 반면, ‘짜증나’라고 말한 밥에는 썩은 냄새가 나는 시퍼런 곰팡이가 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고맙다’라는 말을, 또 누군가에게는 ‘짜증나’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결국 말이 가진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당신은 내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짜증나’라는 말 속에는 ‘당신은 필요 없어. 당신이 내 앞에서 좀 사라졌으면 좋겠어.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까?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옵니까? 아내나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짜증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에 힘을 넣으셨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에게 말을 주시고, 인간이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그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의 힘에 대한 글들이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언 16:24)
말 하나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말’은 무엇일까요? 친절한 말입니다. 기쁘게 하는 말입니다. 진실이 담긴 말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한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자존감뿐만 아니라 내 자존심도 높아집니다. 이처럼 인간의 말은 참으로 강력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21)
혀로 하는 말 때문에 사람을 높여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을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이 이 세 치 혀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손찌검이나 폭력적이고 혐오스러운 행동에 의해서 받기도 하지만, 이것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바로 언어폭력입니다. 지나가듯이 한 말 한마디가 비수같이 꽂힙니다. 그것도 내가 신뢰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비난과 조롱의 말은 견딜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도 인간의 말에 의해 기뻐하시고, 때로는 그 말 때문에 상처를 받으십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도 참 외로우시겠다’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순종의 말을 하는 자들을 만나기가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좋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대로 떠났습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시며 별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지고 땅의 모래처럼 너의 자손이 많아질 거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자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받겠습니다. 믿음으로 받겠습니다.” 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을 하나님은 좋아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으로, 내 가슴으로 받겠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흡수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했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축복의 사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신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하는 말을 계속 하면서 하나님께 큰 상처와 실망을 안겨 줍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가나안 정탐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애굽 땅을 떠나 2∼3개월 만에 가나안 접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2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 가나안 현장을 보고 온 후 자신들이 본 것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보고합니다. 열두 명 중에 열 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거대한 아낙 자손의 후손들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형편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메뚜기와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백성들은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 (민수기 14:2∼3)
“아예 애굽에서 죽이시지, 아예 이 광야에서 죽이시지, 왜 그들과 싸움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만드시는가!” 그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는 소리도 들으시고, 우리가 원망하는 소리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들으시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원망에 하나님은 반응하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27∼28)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말 대로 우리에게 시행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대로 주저앉아서 인생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일어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시행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2∼3개월이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을 앞에 두고 40년을 헤맸습니다. 방황하고 또 방황했습니다. 결국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그곳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들 중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누굽니까?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대체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가 달랐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지역에 들어갔을 때, 거대한 장수처럼 보이는 아낙 자손을 보지 못했을까요? 아니요.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문제점을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치열하고 어려운지를 외면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내 상황을 더욱 정확하게 분석하고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아낙 자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만 본 것이 아니라, 아낙 자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하나님은 보지 않고 오직 아낙 자손만 보아서 무너진 것이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낙 자손의 거대함은 보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가슴으로 받았기에 그 문제를 ‘넘어갈 수 있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바라보면 화나는 일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평할 만한 일도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한마디로 꼴불견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게 되고 낙심하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분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는 보이는데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결코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오늘도 우리가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와 그 말씀이 이 세계와 우리 삶의 현장에 어떻게 숨어있는지를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더니 빛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중심축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5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한 축은 공의와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해 이 땅을 선하고 아름답게, 조화롭고 질서 있게 만드셨습니다. 또 다른 축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을 통해 연약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세우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충만하도록 이 땅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선언하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바르게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교만했고, 탐욕스러웠고, 죄악 속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그리고 인자하심을 적대하며 무너뜨리는 세력이 바로 인간들, 소위 힘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는 10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시편 33:10)
힘 있는 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고, 자기의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다 철폐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인간의 불의와 거짓과 끊임없이 대결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의 욕심들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인간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에 끊임없이 충돌하며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공의와 정의가 어디로 갔을까?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과 인자하심이 왜 사라졌을까?’ 물을 수밖에 없는 위기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인자하심을 도대체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보여주시는 자리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와 정의, 인자하심을 우리가 어려움 없이 찾을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무너져야 내가 세워진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삶의 현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좌절합니다. 실망합니다. 결국 분노를 분노로, 미움을 미움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조차 미움과 싸움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사랑하여 부부가 된 이들이 어느덧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미운 말을 하고, 분노를 분노로 마주하며, “더 이상 너하고 살 수 없다!”고 갈라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목격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어떻습니까? 부모의 말에 자녀들은 대듭니다. “왜 내 인생을 간섭해요?” 더욱 심하게는 부모와 자녀 간에 아예 대화가 끊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조차 이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위기입니다. 여기에는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목격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 즉 불신앙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바라보기보다는, 인자하심과 긍휼로 사람을 대하기보다는, 탐욕과 미움으로 인간을 대하며 삶의 자리를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선생님을 통해서 배움을 얻지만, 인생에는 좋은 선생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칼릴 지부란(Kahlil Gibran)이라는 사람이 이런 흥미로운 말을 합니다. “나는 수다쟁이로부터 침묵을 배웠다. 나는 편협한 이로부터 관용을 배운다. 나는 불친절한 이로부터 친절을 배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스승들에게는 전혀 고맙지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세계를 아름답고 선하게 만드시고 우리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긍휼과 인자하심을 가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이것들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은 더 큰 탐욕을 원합니다. 교만과 또 다른 교만이 충돌합니다. 그러다보니, 미움과 적대감이 가득한 현장에서 우리 모두가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격자면서 모두가 피해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리에 말씀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다시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방관자였습니다. ‘그 사건들은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관계가 없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방관자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방관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어둠이 있는지, 어디에 빛이 있는지, 어디에 미움이 있고, 어디에 사랑이 있는지, 어디에 부정과 부패가 있는지, 어디에 정의와 공의가 있는지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관찰만 하고 있으면 마음에 분노만 생깁니다. 그래서 관찰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바로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갖고 참여자로 나아가야 됩니다. 악과 부패가 도처에 있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 내 것도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아파하고, 고쳐야 하고, 변화시켜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나도 함께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중독, 술 중독, 그리고 성 중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상실된 자리 아닙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 인생이 얼마나 공허하기에, 얼마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영원한 즐거움 대신 일시적인 쾌락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가…’ 우리가 불쌍히 여기고 긍휼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인생의 슬픔이 그들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을 볼 수 있고, 또 이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인간의 악함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 저런 방식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은 시인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서 ‘그’라고 표현된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편 33:9)
다시 세울 수 있는 것, 다시 이룰 수 있는 것은 말씀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데,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 땅에 인자하심이 풍성해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훼손시키고 있었군요. 이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연약한 것, 아픈 것, 힘든 것, 탄식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다시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나 자신부터 말씀으로 변화 받고, 가정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