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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때문에 불붙는 마음

예레미야 20: 7 ~ 13

김지철 목사

2008.06.22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한 영성 신학자가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영성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 원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소음이요, 다른 하나는 분주함이요, 마지막이 군중이다.” 이것들이 바로 영성을 막는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너무 시끄러운 소음 속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 되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입에 바쁘다는 소리를 달고 다니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때로는 수많은 대중 속에 파묻혀 살기도 합니다. 숨어서 이름 없이 익명성을 가지고 자신을 감추며 사는 것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심경이 있습니다. 외로워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것은 열등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이 결여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홀로 있으면서 묵상하기 보다는 대중에 포함되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잘못된 모습도 있습니다.

외로움은 감정적인 아픔이지만 홀로 있음은 영적인 결단입니다.

우리는 외로움과 홀로 있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로움이란 사람들의 시선에 매이는 감정을 뜻합니다. 외로우면 사람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며 사람들을 찾아가고 함께 수다를 떨면서 지내려 합니다. 하지만 홀로 있음이란 스스로 고독함을 견디겠다는 결단입니다. 외로움은 감정적인 아픔이라고 하면 홀로 있음이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실존이 그대로 서 있는 영적인 고독을 뜻합니다. 홀로 서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자,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도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홀로 있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 천 명이 예배를 드려도 예배드리는 순간 내 옆에 누가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예배드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입니다. 대표기도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홀로 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대중 속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귀를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사람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때로는 대중이 가는 길을 두고 나만 홀로 갈 때는 너무나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예레미야는 인기 있는 설교자 바스훌과 달리 혼자였습니다.

본문 앞에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당시 대단한 예루살렘의 설교자로 예레미야와 바스훌이라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홀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스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대중의 지지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스훌은 명망 있는 선포자였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시드기야의 총애를 받았던 성전의 우두머리였고, 설교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라는 책에서 바스훌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그(바스훌)가 팔을 뻗어 축복하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의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복의 대상이 되는 것같이 느꼈다. 모든 이가 그의 메시지를 좋아했다. 그는 긍정적인데다가 적극적이었으며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모든 것에서 최상의 것을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바스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그러나 그의 설교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그 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분은 우리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복 주실 것이다.”
그가 외친 것은 평화와 평강입니다. 놀랍게도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틀리고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때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매국노라고 비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민족에게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잘못된 선포자라고 하면서 그를 가두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스훌에게 감동받지 않은 예루살렘의 백성은 단 한 사람 예레미야 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으며 그가 선포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는 당시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예언을 했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예언자와 제사장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8;11)

바스훌은 백성의 상처가 곪아 터져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되었는데 그것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평강이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강이요 회개하지 않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그대로 둔 가짜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 때문에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이름이 눈물의 선지자로 통할 만큼 그는 통곡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한 감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멸망과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과 멸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죄악과 민족의 죄악이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홀로 있는 법을 배울 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대통령은“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라는 말로 사과를 했습니다. 국가의 안전, 국민의 편안을 책임지는 자리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절대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든 자리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영감의 사색」이라는 책에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고독한 순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고된 직업을 가졌다. 대통령 집무실은 가장 외로운 장소이다. 그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자기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앞서간 모든 대통령들도 이러한 자기와의 투쟁을 경험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그러한 고독에의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고독한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진정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국민들과 멀리 동떨어져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부로 뒤로 물러나 있거나 은둔해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도자가 공동체에서 진정으로 존경을 획득하는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홀로 있는 법을 배울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

지도자가 홀로 있음의 자리를 감내할 때,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어 새로운 삶의 영역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소홀히 취급당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목회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한 기업의 CEO일 때는 지도자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성과가 없는 직원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기에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국민들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정신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국민을 향한 자유의 보장과 절대적인 책임의식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 때 산화된 미군의 유해를 찾기 위해 한강을 뒤지고 북한까지 가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열정입니다. 그들에게 자국 국민을 존중하고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의지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미국 시민들에게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마음껏 누리라는 태도와 열정은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우리 정부와 위정자들 그리고 이 나라 백성들도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 자랑스럽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지녀야 할 참된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아픔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의 아픔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자기 고뇌와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예레미야 20:8)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 할수록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왜 예레미야라고 다른 말씀을 증거 할 기대가 마음속에 없었겠습니까? 가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칭찬하며 인정해주고 싶고 소망을 주며 의욕을 북돋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꿈과 용기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백성인가를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틀렸다.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있으니 이제는 망한다. 이제는 포로로 붙잡혀 갈 것이다. 왜 회개하지 않는가? 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가? 왜 죄악과 허물 속에 그대로 묻혀 있는가?”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갖고 있던 아픔이었습니다. 때로는 아파하는 마음이란 축복받은 마음입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의 역사가 바뀝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의 고통이 경감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아파하는 마음이 있으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세상이 불의와 거짓에서 타락해 갈 때 내 마음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으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에 내 문제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의 불행한 문제는 나 자신의 불행이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와 약점이 나의 문제와 약점이기 때문에 함께 고통 받으며 탄식하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심정은 예수님의 심정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네 자녀를 모으려고 했는데 수없이 거절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통곡하시던 마음으로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을 보면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으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증거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고뇌하는 것이라는 다른 측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아파합니다.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고통스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파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악과 불의 속에 있는 인간, 거짓과 미움과 타락 속에 있는 인간, 우상 숭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고 고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거짓 평안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누리자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회개하기는커녕 예레미야에게 적대하는 감정을 갖고 있어서 그는 핍박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속에 탄식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왜 내가 이 백성들에게 멸망을 증거 해야 합니까? 백성을 사랑하는데 왜 내가 심판을 증거 해야 합니까?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침묵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속에서 말씀이 불붙는 것 같아서 너무나 답답하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예레미야는 선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맡긴 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십니다. 소망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바라보시며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서야 합니다. 국민 모두가 우리의 바른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새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평안을 약속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평안과 축복을 주신 것을 다시 기억하며 우리 속에 무언가 가졌다고 자랑하고 부패와 불의와 거짓이 있다면 주님 앞에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 번 이 민족에게 기회를 주시고 대통령으로부터 국민 모두에 이르기까지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위에 세워가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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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 7 ~ 13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한 영성 신학자가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영성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세 가지 원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소음이요, 다른 하나는 분주함이요, 마지막이 군중이다.” 이것들이 바로 영성을 막는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너무 시끄러운 소음 속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 되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입에 바쁘다는 소리를 달고 다니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때로는 수많은 대중 속에 파묻혀 살기도 합니다. 숨어서 이름 없이 익명성을 가지고 자신을 감추며 사는 것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심경이 있습니다. 외로워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것은 열등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이 결여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홀로 있으면서 묵상하기 보다는 대중에 포함되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잘못된 모습도 있습니다.

외로움은 감정적인 아픔이지만 홀로 있음은 영적인 결단입니다.

우리는 외로움과 홀로 있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로움이란 사람들의 시선에 매이는 감정을 뜻합니다. 외로우면 사람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며 사람들을 찾아가고 함께 수다를 떨면서 지내려 합니다. 하지만 홀로 있음이란 스스로 고독함을 견디겠다는 결단입니다. 외로움은 감정적인 아픔이라고 하면 홀로 있음이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 실존이 그대로 서 있는 영적인 고독을 뜻합니다. 홀로 서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자, 예배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도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홀로 있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 천 명이 예배를 드려도 예배드리는 순간 내 옆에 누가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예배드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입니다. 대표기도를 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홀로 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대중 속에 파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귀를 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사람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때로는 대중이 가는 길을 두고 나만 홀로 갈 때는 너무나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예레미야는 인기 있는 설교자 바스훌과 달리 혼자였습니다.

본문 앞에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당시 대단한 예루살렘의 설교자로 예레미야와 바스훌이라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홀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스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대중의 지지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스훌은 명망 있는 선포자였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시드기야의 총애를 받았던 성전의 우두머리였고, 설교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라는 책에서 바스훌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그(바스훌)가 팔을 뻗어 축복하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의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 복의 대상이 되는 것같이 느꼈다. 모든 이가 그의 메시지를 좋아했다. 그는 긍정적인데다가 적극적이었으며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모든 것에서 최상의 것을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바스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입니까? 그러나 그의 설교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그 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분은 우리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민족을 복 주실 것이다.”
그가 외친 것은 평화와 평강입니다. 놀랍게도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틀리고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때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매국노라고 비난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민족에게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잘못된 선포자라고 하면서 그를 가두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스훌에게 감동받지 않은 예루살렘의 백성은 단 한 사람 예레미야 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 예레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으며 그가 선포하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레미야는 당시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예언을 했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예언자와 제사장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8;11)

바스훌은 백성의 상처가 곪아 터져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되었는데 그것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평강이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평강이요 회개하지 않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를 그대로 둔 가짜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 때문에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조롱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이름이 눈물의 선지자로 통할 만큼 그는 통곡하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한 감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예언 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의 멸망과 슬픔 속에서 자기의 슬픔과 멸망을 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 자기의 죄악과 민족의 죄악이 있었습니다.

지도자가 홀로 있는 법을 배울 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대통령은“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라는 말로 사과를 했습니다. 국가의 안전, 국민의 편안을 책임지는 자리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절대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든 자리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영감의 사색」이라는 책에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고독한 순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고된 직업을 가졌다. 대통령 집무실은 가장 외로운 장소이다. 그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자기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앞서간 모든 대통령들도 이러한 자기와의 투쟁을 경험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그러한 고독에의 모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고독한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진정한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국민들과 멀리 동떨어져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일부로 뒤로 물러나 있거나 은둔해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도자가 공동체에서 진정으로 존경을 획득하는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홀로 있는 법을 배울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 46:10)

지도자가 홀로 있음의 자리를 감내할 때,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닫게 되어 새로운 삶의 영역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소홀히 취급당할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목회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한 기업의 CEO일 때는 지도자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성과가 없는 직원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기에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국민들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닌 정신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국민을 향한 자유의 보장과 절대적인 책임의식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 때 산화된 미군의 유해를 찾기 위해 한강을 뒤지고 북한까지 가서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미국의 열정입니다. 그들에게 자국 국민을 존중하고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의지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미국 시민들에게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마음껏 누리라는 태도와 열정은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우리 정부와 위정자들 그리고 이 나라 백성들도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하고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 자랑스럽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지녀야 할 참된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아픔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의 아픔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항복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자기 고뇌와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예레미야 20:8)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 할수록 고통 속에 빠졌습니다. 왜 예레미야라고 다른 말씀을 증거 할 기대가 마음속에 없었겠습니까? 가능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칭찬하며 인정해주고 싶고 소망을 주며 의욕을 북돋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꿈과 용기도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백성인가를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너희가 틀렸다.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있으니 이제는 망한다. 이제는 포로로 붙잡혀 갈 것이다. 왜 회개하지 않는가? 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가? 왜 죄악과 허물 속에 그대로 묻혀 있는가?”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갖고 있던 아픔이었습니다. 때로는 아파하는 마음이란 축복받은 마음입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있기에 세상의 역사가 바뀝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의 고통이 경감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아파하는 마음이 있으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세상이 불의와 거짓에서 타락해 갈 때 내 마음에 애통하는 마음이 있으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에 내 문제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의 불행한 문제는 나 자신의 불행이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와 약점이 나의 문제와 약점이기 때문에 함께 고통 받으며 탄식하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심정은 예수님의 심정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초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네 자녀를 모으려고 했는데 수없이 거절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통곡하시던 마음으로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을 보면서 통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으로 인한 고통을 가지고 증거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고뇌하는 것이라는 다른 측면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아파합니다.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고통스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파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죄악과 불의 속에 있는 인간, 거짓과 미움과 타락 속에 있는 인간, 우상 숭배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고 고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거짓 평안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누리자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회개하기는커녕 예레미야에게 적대하는 감정을 갖고 있어서 그는 핍박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속에 탄식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왜 내가 이 백성들에게 멸망을 증거 해야 합니까? 백성을 사랑하는데 왜 내가 심판을 증거 해야 합니까? 내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예레미야는 침묵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속에서 말씀이 불붙는 것 같아서 너무나 답답하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예레미야는 선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맡긴 자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십니다. 소망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바라보시며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서야 합니다. 국민 모두가 우리의 바른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새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평안을 약속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평안과 축복을 주신 것을 다시 기억하며 우리 속에 무언가 가졌다고 자랑하고 부패와 불의와 거짓이 있다면 주님 앞에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 번 이 민족에게 기회를 주시고 대통령으로부터 국민 모두에 이르기까지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며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위에 세워가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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