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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망각의 영, 기억의 영? – 성령과 악령 26 –
기억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망각의 영, 기억의 영?’입니다.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는 알 권리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인터넷에 떠도는 나에 관련된 정보와 자료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습니다. 해당 자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잊혀질 권리입니다.
2014년 5월, 유럽 사법 재판소는 정보 검색 기관인 구글(Google)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립니다. “개인정보보호 지침 규정에 의거해 개인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라.” 사법부가 처음으로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는 소식에, 세계 곳곳의 뉴스들이 앞다퉈 이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겠는가? 사생활 보호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알 권리와 잊혀질 권리가 첨예하게 충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입니다. 소위 빅 데이터라 불리는 데이터 집합이 우리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기억을 무한 증폭시켜 보려는 열망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되다 보면, 오히려 개인의 정보가 오용되거나 악용되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방향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빅 데이터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겪어왔던 삶의 경험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도 이런 빅 데이터 덕분입니다. 나의 꿈과 비전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지, 앞으로 다가올 삶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내 안의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지하고 판단하며 실행하는 것입니다. 기억 속에 잠재된 나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축복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시키는 것 역시 기억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치매를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연결이 안 되는 까닭입니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 주변에 어떤 인적 네트워크가 있는지 기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나’라는 존재는 그동안의 나에 대한 기억의 총합입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또한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기억 중 성공하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실패하고 가슴 아팠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이런 과거의 기억과 더불어 미래의 꿈, 미래의 기억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 ‘1년 후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10년 후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라고 기대하면서 지금까지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기억입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러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기억도 있었고, 낭패와 실패의 기억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슬픔과 탄식의 기억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패망했고, 남왕국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게다가 바벨론에 잡혀가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 기간이 무려 7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래에 희망을 걸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백성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셨구나. 우리에게 더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구나. 그래, 사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버렸지. 우리가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 이렇게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며 포기를 자처한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졌습니다. 나아가 새 일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되는 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아프게 했던 삶의 자리에서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18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사야 43:18)
부정적인 기억을 내려놓으라고,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에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부정적인 기억과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을 수없이 붙잡았습니다. 죄인이라는 죄책감, 무능한 존재라는 생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배반한 존재라는 기억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까? 더는 변화와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잊고 싶어 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죄악을 물으시면서 애타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 2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22,24 중)
전능하신 하나님이 ‘괴롭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힘들다. 내 마음도 흔들린다.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찾지 않을 수 있느냐? 왜 창조주인 나를 부르지 않느냐? 너희가 내 백성인 줄을 몰랐느냐?”며 “너희의 죄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하고 괴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너희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나의 공의와 정의를 훼손하지 않았느냐? 이웃에게 함부로 행하며 그들의 것을 빼앗지 않았느냐?”라며 탄식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신 동시에 그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위로’였습니다. 43장 1절입니다.
…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중)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 이외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이외의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면서 기쁨과 감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트라우마를 꺼내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우리를 열등감에 빠지게 만들어서 계속 불안을 일으키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변화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짓된 두려움에서 해방되라고, 실패의 기억과 부정적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강력하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해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지, 다른 무엇도 우리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가 우리고,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임을 기억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닌 것에 우리를 규정하고 살아갑니까? 돈으로 나를 규정하고, 지식으로 규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런 말 저런 말에 의해 규정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나 됨,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망각을 해야 되겠구나. 부정적인 기억을 잊어버려야 되겠구나. 너의 불의, 죄악, 실패, 배반, 아픔들에서 이제 해방되어라. 내가 허락한 은총 안에서 망각의 은혜를 누려라.”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25)
우리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망각의 은혜에 들어가면, 거짓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새롭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두려움과 불안,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이사야 43:15)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그분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자 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부정적인 기억들과 쓰라린 아픔과 흔적들도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시며 광야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구약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뛰어넘으라는 말씀을 오늘 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16~17)
출애굽을 기억하라고 하셨던 그분이 이제는 그 다음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어제의 기억에서 내일의 기억, 곧 미래의 기억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시니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제2의 출애굽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 곧 귀환의 예고입니다. 또 이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결부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과거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사야 43:20)
어제에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전 일을 잊고 하나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다운 위로이자 사랑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억을 회복합시다.
R. Pinches라는 사람이 쓴 시 한편을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그때는 기억해”입니다.
“그때는 기억해”
R. Pinches / 번역 이연우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밀려올 때
모든 일이 틀어지고
친구 한명조차도 곁에 없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을 때
기분이 울적해질 때
아무리 날개를 펼쳐 봐도
날아오를 수 없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너의 힘을 다 해 보지도 못한 채 시간이 다하고
손을 써 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날 때
사소한 일들조차 너를 괴롭히고
도무지 승리가 잡히지 않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고
너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외롭고 힘들 때
고독한 현실이 두려움으로 몰려올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우리 삶에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합니다. 이 기억을 놓아선 안 됩니다.
성령은 기억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동시에 망각하게 하시는 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탄의 영 곧 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망각하게 하고 동시에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영이자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영인 반면, 악령은 우리의 죄악을 들춰내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를 패배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영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자녀의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반면 악령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죄의 종이야. 하나님의 자녀는 너와 상관없어.”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얽어매려고 합니다. 만약 지금도 악령이 우리에게 “너는 패배자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노예야.”라고 속삭인다면, 강력하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용기 있는 모습이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십니까? 우리를 예배자로 만드시며, 우리 입에 노래가 있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는 슬픔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때마다 “No!” 하고 강력히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이미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입에 하나님을 찬양할 노래를 가져다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찬양하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하나님 앞에서 뛰놉니다. 이것이 찬양하는 자의 축복, 예배자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제의 일은 망각 속에 던져야 합니다. 기억도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각 역시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일 중 특히 나를 억압하는 것들은 망각하도록 선언해야 합니다. 어떻게 선언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주님, 이 문제가 나를 억압합니다. 나를 좌절시킵니다. 주께 토해 내오니, 주님께서 해결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수치와 죄악을 씻으시고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기억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술책은 강력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마음을 열고 환대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의 노래가 시작되며 기쁨도 충만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사야 43: 18 ~ 21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억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망각의 영, 기억의 영?’입니다.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는 알 권리와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인터넷에 떠도는 나에 관련된 정보와 자료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일컫습니다. 해당 자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잊혀질 권리입니다.
2014년 5월, 유럽 사법 재판소는 정보 검색 기관인 구글(Google)에게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립니다. “개인정보보호 지침 규정에 의거해 개인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라.” 사법부가 처음으로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는 소식에, 세계 곳곳의 뉴스들이 앞다퉈 이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겠는가? 사생활 보호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알 권리와 잊혀질 권리가 첨예하게 충돌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입니다. 소위 빅 데이터라 불리는 데이터 집합이 우리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기억을 무한 증폭시켜 보려는 열망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되다 보면, 오히려 개인의 정보가 오용되거나 악용되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방향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빅 데이터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겪어왔던 삶의 경험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도 이런 빅 데이터 덕분입니다. 나의 꿈과 비전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을지, 앞으로 다가올 삶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내 안의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지하고 판단하며 실행하는 것입니다. 기억 속에 잠재된 나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축복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시키는 것 역시 기억입니다. 우리가 나이 들면서 치매를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연결이 안 되는 까닭입니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내 주변에 어떤 인적 네트워크가 있는지 기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현재의 ‘나’라는 존재는 그동안의 나에 대한 기억의 총합입니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입니다.
또한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기억입니다. 과거의 기억 중 성공하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실패하고 가슴 아팠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이런 과거의 기억과 더불어 미래의 꿈, 미래의 기억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 ‘1년 후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10년 후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라고 기대하면서 지금까지의 모습을 통해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기억입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과거의 기억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러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자랑스러운 기억도 있었고, 낭패와 실패의 기억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슬픔과 탄식의 기억이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패망했고, 남왕국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습니다. 게다가 바벨론에 잡혀가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 기간이 무려 7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래에 희망을 걸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은 백성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셨구나. 우리에게 더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구나. 그래, 사실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버렸지. 우리가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 이렇게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제는 희망이 없다며 포기를 자처한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사야 43:19)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졌습니다. 나아가 새 일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되는 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아프게 했던 삶의 자리에서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18절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사야 43:18)
부정적인 기억을 내려놓으라고, 과거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이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에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부정적인 기억과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을 수없이 붙잡았습니다. 죄인이라는 죄책감, 무능한 존재라는 생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배반한 존재라는 기억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위기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까? 더는 변화와 탈출구를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잊고 싶어 하셨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죄악을 물으시면서 애타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 2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22,24 중)
전능하신 하나님이 ‘괴롭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힘들다. 내 마음도 흔들린다.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찾지 않을 수 있느냐? 왜 창조주인 나를 부르지 않느냐? 너희가 내 백성인 줄을 몰랐느냐?”며 “너희의 죄 때문에 내 마음이 상하고 괴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너희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나의 공의와 정의를 훼손하지 않았느냐? 이웃에게 함부로 행하며 그들의 것을 빼앗지 않았느냐?”라며 탄식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신 동시에 그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그들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위로’였습니다. 43장 1절입니다.
…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중)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짓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 이외의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이외의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누리면서 기쁨과 감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트라우마를 꺼내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우리를 열등감에 빠지게 만들어서 계속 불안을 일으키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변화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짓된 두려움에서 해방되라고, 실패의 기억과 부정적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강력하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해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지, 다른 무엇도 우리를 함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가 우리고,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임을 기억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닌 것에 우리를 규정하고 살아갑니까? 돈으로 나를 규정하고, 지식으로 규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런 말 저런 말에 의해 규정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나 됨,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망각을 해야 되겠구나. 부정적인 기억을 잊어버려야 되겠구나. 너의 불의, 죄악, 실패, 배반, 아픔들에서 이제 해방되어라. 내가 허락한 은총 안에서 망각의 은혜를 누려라.”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3:25)
우리의 허물과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허락된 축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망각의 은혜에 들어가면, 거짓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정체성도 새롭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나를 억눌렀던 두려움과 불안,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이사야 43:15)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그분이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자 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부정적인 기억들과 쓰라린 아픔과 흔적들도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시며 광야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구약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뛰어넘으라는 말씀을 오늘 하십니다. 16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43:16~17)
출애굽을 기억하라고 하셨던 그분이 이제는 그 다음 일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어제의 기억에서 내일의 기억, 곧 미래의 기억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시니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제2의 출애굽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해방, 곧 귀환의 예고입니다. 또 이는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결부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과거에서 해방시키시며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란 의미입니다. 2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사야 43:20)
어제에 붙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래를 향한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전 일을 잊고 하나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다운 위로이자 사랑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의 기억을 회복합시다.
R. Pinches라는 사람이 쓴 시 한편을 여러분께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그때는 기억해”입니다.
“그때는 기억해”
R. Pinches / 번역 이연우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어둠이 밀려올 때
모든 일이 틀어지고
친구 한명조차도 곁에 없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을 때
기분이 울적해질 때
아무리 날개를 펼쳐 봐도
날아오를 수 없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너의 힘을 다 해 보지도 못한 채 시간이 다하고
손을 써 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날 때
사소한 일들조차 너를 괴롭히고
도무지 승리가 잡히지 않을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고
너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외롭고 힘들 때
고독한 현실이 두려움으로 몰려올 때
그때는 기억해, 너는 사랑받고 있음을….
우리 삶에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합니다. 이 기억을 놓아선 안 됩니다.
성령은 기억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동시에 망각하게 하시는 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탄의 영 곧 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망각하게 하고 동시에 기억하게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시는 영이자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영인 반면, 악령은 우리의 죄악을 들춰내고 그것을 이용해 우리를 패배감과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영입니다. 또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자녀의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반면 악령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죄의 종이야. 하나님의 자녀는 너와 상관없어.”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얽어매려고 합니다. 만약 지금도 악령이 우리에게 “너는 패배자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죄의 노예야.”라고 속삭인다면, 강력하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용기 있는 모습이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십니까? 우리를 예배자로 만드시며, 우리 입에 노래가 있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우리는 슬픔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때마다 “No!” 하고 강력히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이미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입에 하나님을 찬양할 노래를 가져다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찬양하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영혼 역시 하나님 앞에서 뛰놉니다. 이것이 찬양하는 자의 축복, 예배자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제의 일은 망각 속에 던져야 합니다. 기억도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망각 역시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일 중 특히 나를 억압하는 것들은 망각하도록 선언해야 합니다. 어떻게 선언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주님, 이 문제가 나를 억압합니다. 나를 좌절시킵니다. 주께 토해 내오니, 주님께서 해결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수치와 죄악을 씻으시고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이다.”라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기억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술책은 강력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마음을 열고 환대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의 노래가 시작되며 기쁨도 충만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12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망각의 영, 기억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3장, 28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이사야 43:18-21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1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잊혀질 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알권리의 반대말로서,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 나와 관련된 자료들을 삭제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2014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인정되어 지금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알권리와 잊혀 질 권리 사이의 논쟁입니다. 지금 세상은 빅데이터를 통해 인간들의 기억을 무한정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개인의 정보가 오용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우리 각 사람에게도 빅데이터가 있습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우리 자신은 바로 이 기억의 총합으로 정체성이 규정되어 집니다. 기억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과거의 기억들, 성공했던 자랑스러운 기억들과 실패했던 쓰라린 기억들이 있습니다. 또한 미래의 기억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꿈이 있습니다. ‘미래의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기의 기억들입니다. 나라가 망했습니다. 이 기억은 어떤 정서를 남겼을까요? 바로 두려움입니다. 버림받았다는 인식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자책감과 자괴감이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있는 정서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19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려고 합니다. 그보다 먼저 주신 말씀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서 탈출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18절).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을 들어 봅시다. “그러나 야곱아 너는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22절).”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첫 번째 메시지는 그래서 위로였습니다(1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너 자신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망각하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25절).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망각의 완성으로서 진정한 기억이 동반 시켜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우리의 옛 과거의 쓰라리고 아픈 흔적들을 없애는 것입니다.
성령은 기억하게 하는 영이며 동시에 망각하게 하는 영입니다. 마찬가지고 악령도 그렇습니다. 다만, 성령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잊으시려 하시지만 악령은 우리의 죄악을 들추어내고 이용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기억하게 하고, 자녀답게 살도록 용기를 부어 주시지만, 악령은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연신 우겨대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십니다. 노래가 있게 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게 하십니다(21절). 예배하는 자들의 축복이며 찬양하는 사람들이 받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임을 기억하고 내 영혼이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일들을 망각 속에 집어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미래의 약속을 붙잡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망각하지 못하는 나의 어두운 과거를 이제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망각을 선포합시다.
2. 하나님께서 주시는 미래의 기억. 그 놀라운 미래를 꿈꿔 봅시다. 가장 아름다운 나의 미래의 모습을 그려 봅시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3. 예배를 통해 하나님 주시는 망각과 기억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특별히 2018년의 어떤 예배자로 살아갈 것인지 다짐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잊어야 할 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답답하고 우울함으로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옛것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