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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 성경주제 13 : 사랑 –

신명기 7: 6 ~ 11

김지철 목사

2013.12.01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화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깊이 사랑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는 맛있는 풀을 열심히 모아 사자에게 날마다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사자도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는 괴로웠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러나 그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은 서로에게 불평하기 시작했고 결국 심하게 다투다가 마침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면서도 둘은 할 말이 있었습니다. “난 지금까지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둘 사이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방식대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분명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자꾸만 화가 났습니다.
부부가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합니까?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아내를 대합니까?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자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녀를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아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You are OK, but I am not Ok. 당신은 좋겠지만 나는 싫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방식대로 사랑하지 말고, 내 방식대로 사랑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많은 갈등의 현장에는 바로 이 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치관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가치관은 비슷해도 소통의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 소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요새 여야 정치인들을 보면, 전부 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서 앞장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가치관이 다른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방식도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 정당이나 정권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라이고, 국민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저 전쟁이 멈춰 설지, 국민 모두의 마음은 그저 안타깝고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소통의 길을 인간에게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이 땅에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듣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얼만큼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죄인된 모습으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게 하셨고, 귀로 듣게 하셨고, 손으로 만지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우리의 모습처럼 오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 특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심리학자들은 사랑 안에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맨 위에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사랑은 친밀감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열정과 정열이 있고, 오른쪽에는 헌신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야 참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밀감이란 무엇일까요? 가까운 것입니다. 따뜻한 유대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나누는 것이고, 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친밀감이 있어야 사랑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정서적인 친밀감에서 성적인 친밀감으로 발전하는 것이 열정,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열입니다. 서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에로스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합니다. 스킨십을 합니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까지 발전이 됩니다.
사랑의 절정이란 남녀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예수님도 ‘너희들의 육체가 따로따로 있지만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 것이 결혼이요, 그것이 사랑의 핵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정서적인 친밀감에서 돌보고 섬기는 친밀감으로 발전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즉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뛰어넘어서 상대방을 위해 내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내 시간과 정성, 에너지, 심지어 내 삶 전체를 상대방을 위해서 쏟아붓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즐거움을 넘어서 상대방을 위한 즐거움에 내 삶을 쏟는 것입니다.
사랑의 종류는 참 많지 않습니까? 우정이라는 사랑의 감정에도 친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인 열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마음이 멋진 우정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열정과 정열도 있습니다. 그런데 헌신이 없습니다.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공허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해보면, 그 시절 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남편하고도 친밀감이 없습니다. 열정도 없습니다. 오직 헌신만 있을 뿐입니다. 뼈 빠지게 수고하고, 애쓴 것만 있습니다. 존중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공허한 사랑을 자녀와 남편에게 쏟아부었던 세대들이 있습니다.
또 정욕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친밀감도 없습니다. 헌신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에로스적 열정과 정열뿐입니다. 불순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내 욕망의 대상으로만 삼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친밀감도 있고, 사랑의 열정도 있고, 상대방을 위한 헌신도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일 때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아내에 대한, 남편에 대한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이 아름다운 사랑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이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당신을 ‘남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신을 ‘아버지’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아가서를 보면, 남녀 간의 에로스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우리의 신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께 우리를 드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시기 위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친히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와 더불어 친밀감을 쌓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열과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사야 49장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여인이 자기가 낳은 아들과 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혹여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애인끼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쓰는 언어를 우리에게 사용하십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사랑하는 남녀가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면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 사탄이라도 너를 어떻게 해 볼 엄두조차 못 낸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내놓으셨습니다. 헌신하셨습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모습으로, 죄인된 모습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아들까지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요?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고, 그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면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싼 값을 주고 사신 존재가 바로 나이고,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왜 사랑하는지 말씀하시면서, ‘나’같은 자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본래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존재입니까? 너무나도 부족하여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너희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능력이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실수를 안 해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사람이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성품이 좋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뛰어남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난 면을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못난 면도 수용하십니다. 우리의 밝은 면을 기뻐하시지만, 우리의 어두운 그늘도 받아주십니다.
율리히 샤퍼(Ulrich Schaffer)의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이 떠오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십니다. 내 모습 그대로,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망가지고, 부끄럽고, 자랑할 것이 하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게 자유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한 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자존감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이 자부심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자부심과 자존감이 없어지면 우리의 삶은 무너집니다. 이 시대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냥 슬퍼하며 수치심을 느낍니다. 죄책감에 불안해합니다.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곧 힘입니다.

우울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낍니다. 우리도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바깥세상을 무의미하게 여깁니다. 보이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절망적으로 봅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가끔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별다를까요? 신앙인들에게는 약점이 없을까요? 신앙인은 무능함과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신앙인도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실수했고, 실패했고, 절망의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흔들리는 터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내 반석과 내 구원의 산성’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치료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중년, 즉 35세 이상의 환자들이 지닌 문제는 결과적으로 인생에 대한 종교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제각기 모든 시대에 살아있는 종교가 그들에게 베풀어 온 것을 잃었기 때문에 병이 생겼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기독교 신앙입니다. 즉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잃어버리니까, 그 신앙을 잃어버리니까 병이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종교관을 되찾지 않고서는 온전히 치료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이 왜 중요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수없는 장애 속에서 넘어지고, 실수하고, 좌절하는 이 흔들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존귀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나는 무너지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산성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랍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로부터 사랑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내 사랑에 응답해다오.” 라며 우리의 응답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신명기 7:9)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주기도 하시지만 받기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뷰크너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모든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무력하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최후이자 최고의 난공불락 요새를 정복할 수 있으므로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그토록 강력한 사랑도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력한 하나님도 사랑의 손을 내미시지만,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함께 가자고 부탁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내 꼬락서니를 보고, 우리의 불의함과 죄악과 완악함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내쳐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또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또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내게 와서 나의 사랑 가운데 거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도 우리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의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자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 받을 존재인가, 또 받고 있는 존재인가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늘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지명해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해야 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즐거움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오늘도, 아니 평생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것이다.” 말씀하실 때,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사랑이십니다.”라고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사랑 충만한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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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7: 6 ~ 11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 상대를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화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깊이 사랑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는 맛있는 풀을 열심히 모아 사자에게 날마다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었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사자도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는 괴로웠지만 그래도 참았습니다. 그러나 그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은 서로에게 불평하기 시작했고 결국 심하게 다투다가 마침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헤어지면서도 둘은 할 말이 있었습니다. “난 지금까지 너에게 최선을 다했어!”
둘 사이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상대방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 방식대로,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분명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자꾸만 화가 났습니다.
부부가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합니까?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아내를 대합니까?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자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자녀를 사랑합니까? 그렇지 않아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You are OK, but I am not Ok. 당신은 좋겠지만 나는 싫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방식대로 사랑하지 말고, 내 방식대로 사랑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발생하는 많은 갈등의 현장에는 바로 이 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치관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가치관은 비슷해도 소통의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 소통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요새 여야 정치인들을 보면, 전부 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서 앞장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가치관이 다른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방식도 다른 것 같습니다. 자기 정당이나 정권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나라이고, 국민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언제쯤이면 저 전쟁이 멈춰 설지, 국민 모두의 마음은 그저 안타깝고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온전한 사랑 안에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소통의 길을 인간에게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죄 많은 이 땅에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듣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얼만큼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죄인된 모습으로, 우리의 연약한 모습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게 하셨고, 귀로 듣게 하셨고, 손으로 만지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우리의 모습처럼 오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모습은,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에 특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심리학자들은 사랑 안에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맨 위에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사랑은 친밀감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열정과 정열이 있고, 오른쪽에는 헌신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어울려야 참된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밀감이란 무엇일까요? 가까운 것입니다. 따뜻한 유대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나누는 것이고, 소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친밀감이 있어야 사랑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정서적인 친밀감에서 성적인 친밀감으로 발전하는 것이 열정,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열입니다. 서로 한 몸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에로스적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합니다. 스킨십을 합니다. 그리고 성적인 행위까지 발전이 됩니다.
사랑의 절정이란 남녀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신약의 예수님도 ‘너희들의 육체가 따로따로 있지만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 것이 결혼이요, 그것이 사랑의 핵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정서적인 친밀감에서 돌보고 섬기는 친밀감으로 발전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즉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뛰어넘어서 상대방을 위해 내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내 시간과 정성, 에너지, 심지어 내 삶 전체를 상대방을 위해서 쏟아붓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즐거움을 넘어서 상대방을 위한 즐거움에 내 삶을 쏟는 것입니다.
사랑의 종류는 참 많지 않습니까? 우정이라는 사랑의 감정에도 친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인 열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마음이 멋진 우정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거기에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열정과 정열도 있습니다. 그런데 헌신이 없습니다.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공허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해보면, 그 시절 참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남편하고도 친밀감이 없습니다. 열정도 없습니다. 오직 헌신만 있을 뿐입니다. 뼈 빠지게 수고하고, 애쓴 것만 있습니다. 존중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공허한 사랑을 자녀와 남편에게 쏟아부었던 세대들이 있습니다.
또 정욕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친밀감도 없습니다. 헌신도 없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에로스적 열정과 정열뿐입니다. 불순한 사랑입니다. 상대방을 내 욕망의 대상으로만 삼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친밀감도 있고, 사랑의 열정도 있고, 상대방을 위한 헌신도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일 때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아내에 대한, 남편에 대한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이 아름다운 사랑의 기쁨을 나누고 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이 세 가지 특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당신을 ‘남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신을 ‘아버지’라고도 표현하셨습니다. 아가서를 보면, 남녀 간의 에로스적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우리의 신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주님께 우리를 드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밀감을 주시기 위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친히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는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와 더불어 친밀감을 쌓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열과 열정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사야 49장 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여인이 자기가 낳은 아들과 딸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혹여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애인끼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쓰는 언어를 우리에게 사용하십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사랑하는 남녀가 가까워지고, 하나가 되면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 사탄이라도 너를 어떻게 해 볼 엄두조차 못 낸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열정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내놓으셨습니다. 헌신하셨습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우리의 모습으로, 죄인된 모습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아들까지 포기하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까요?
이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고, 그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했다면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싼 값을 주고 사신 존재가 바로 나이고,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왜 사랑하는지 말씀하시면서, ‘나’같은 자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본래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존재입니까? 너무나도 부족하여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너희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능력이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실수를 안 해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사람이 많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성품이 좋아서 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뛰어남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난 면을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못난 면도 수용하십니다. 우리의 밝은 면을 기뻐하시지만, 우리의 어두운 그늘도 받아주십니다.
율리히 샤퍼(Ulrich Schaffer)의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이 떠오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십니다. 내 모습 그대로, 부족하고, 연약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망가지고, 부끄럽고, 자랑할 것이 하나 없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게 자유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한 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던 자존감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이 자부심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자부심과 자존감이 없어지면 우리의 삶은 무너집니다. 이 시대가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냥 슬퍼하며 수치심을 느낍니다. 죄책감에 불안해합니다. 쉽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곧 힘입니다.

우울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낍니다. 우리도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바깥세상을 무의미하게 여깁니다. 보이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게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절망적으로 봅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무가치하게 여겨져서 가끔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인이라고 별다를까요? 신앙인들에게는 약점이 없을까요? 신앙인은 무능함과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신앙인도 수많은 인생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실수했고, 실패했고, 절망의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흔들리는 터전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내 반석과 내 구원의 산성’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치료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중년, 즉 35세 이상의 환자들이 지닌 문제는 결과적으로 인생에 대한 종교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제각기 모든 시대에 살아있는 종교가 그들에게 베풀어 온 것을 잃었기 때문에 병이 생겼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란, 기독교 신앙입니다. 즉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잃어버리니까, 그 신앙을 잃어버리니까 병이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의 종교관을 되찾지 않고서는 온전히 치료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이 왜 중요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수없는 장애 속에서 넘어지고, 실수하고, 좌절하는 이 흔들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존귀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흔들리지만 하나님은 반석이십니다. 나는 무너지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산성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놀랍고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로부터 사랑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얘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내 사랑에 응답해다오.” 라며 우리의 응답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 (신명기 7:9)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주기도 하시지만 받기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에 목말라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십시오.

뷰크너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모든 능력 가운데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무력하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최후이자 최고의 난공불락 요새를 정복할 수 있으므로 가장 강력하다. 그러나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그토록 강력한 사랑도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력한 하나님도 사랑의 손을 내미시지만,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십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함께 가자고 부탁하십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만약 내가 하나님이라면 내 꼬락서니를 보고, 우리의 불의함과 죄악과 완악함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내쳐버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또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또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내게 와서 나의 사랑 가운데 거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도 우리가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의인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존귀한 자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 받을 존재인가, 또 받고 있는 존재인가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늘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지명해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고백해야 됩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즐거움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오늘도, 아니 평생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것이다.” 말씀하실 때,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사랑이십니다.”라고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사랑 충만한 삶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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