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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 로마서 강해 11 –

로마서 3: 19 ~ 24

김지철 목사

2015.08.23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심지어 인터넷 댓글 상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난무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스스로 안티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의 모습,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본질까지 비판하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안에는 우리도 한때 가졌던 비판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늘만 바라보는 종교가 아닌가? 그래서 땅의 문제, 현실의 아픔과 슬픔은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 정반대로,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여 적극성을 잃어버리고 수동성에만 멈추어 사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된다고 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는 아닌가?” “천국이라는 미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억눌린 삶에는 굴종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사랑’을 말하면서도 자기와 조금만 다르면 분노하고 미움을 증폭시키는 혐오스러운 종교는 아닌가? 그래서 독선주의적인 양태를 지닌 종교가 아닌가?”
질문들이 나타내는 현상들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조금씩 묻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도 ‘저런 신앙을 가지면 안 될 텐데…’라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신랄하게 철학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혐오주의를 대표하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입니다.

바울은 비뚤어진 인간상을 고발합니다.

니체는 당대의 기독교의 실상 속에 나타난 허상을 보며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을 억누르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는 당대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붕괴되기를 원했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가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신이란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 즉 우상이기 때문에 신을 죽여야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니 무언가 다른 인간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핵심은 ‘너 자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을 되찾자는 운동이 곧 니체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는 책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자신 속에 있는데, 그것이 초인사상의 핵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할 때 자연스레 도래하는 허무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초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초인이 되면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초인이 되면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인간다운 존재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인간상이 진정한, 올바른 인간상인가를 되묻게 됩니다.
니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독교 인간상을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년 전에 유대주의적인 인간상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러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은 우월적 신앙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을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독선적인 인간상을 만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발견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바울의 이 고백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신을 직시하면 인간이 곤고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없는 인간이 허무주의(nihilism)를 피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넘기 위해 니체는 초인을 만들었고, 지금 사도 바울도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안타까운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발을 통해 진정한 인간상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인간을 동일한 범주로 묶어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에 따라서 남자라는 인간과 여자라는 인간을 구분합니다. 피부색으로 유색인종과 백인종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소유에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가에 따라서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인간 구분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죄인 된 인간, 그리고 죄인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 인간. 단 두 종류만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이렇게 나누며 ‘모든 사람’, ‘모든 믿는 자’라고 합니다. 즉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도 율법을 가진 자도 이생에서 선하게 산 자나 악하게 산 자도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다 죄인일 뿐입니다. 엄청난 인간 이해 아닙니까? 이러한 이해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따랐던 유대인도 다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이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멈춰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길, 죄인이 의로워지는 길,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길, 은혜의 길, 믿음의 길이 열렸다고 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2)

여기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동안 다른 길로 가려 했던 인간들의 왜곡된 신앙을 불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편견의 신앙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갈 수 있다는 독선의 신앙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새로운 시대가, 과거가 아니라 ‘이제’, 지금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엄청난 전환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곧 예전과는 다른 극적인 반전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우리말에는 숨겨진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 정확히 번역하자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즉 옛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는 표현입니다. 그 새로운 시대는 무엇입니까? ‘율법 외’의 길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과는 상관없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길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새로운 길은 구약의 율법인 모세 오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신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약속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약속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놀라운 믿음의 길을 통해서 열린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돈 많은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이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들을 철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조건이 됩니다. 남자도 여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자도 적게 가진 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등의 세계를 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신앙의 본질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로마서 1장 17절에 처음 나옵니다. 그리고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이 말은 등장하지 않다가 이제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 의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지를, 또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똑같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길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운 길, 하나님의 의를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처음에 이 말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을까? 부끄러움뿐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설 수 있을까?’ 그러다가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징계하시는 의가 아니라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셔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다는 것을, 즉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새로운 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시고 왜곡된 신앙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만한 유대교의 독선주의를 부수셨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다. 우리만이 율법을 가진 자다. 우리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 일종의 편협한 종교성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마치 중독증 환자처럼 종교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특성을 지닌 것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자랑하는 업적주의적 공로사상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공로사상에 젖어들면 문제가 생깁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문제가 바로 이 공로주의였습니다.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면 차별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헌신했는데, 나는 이만큼 헌금했는데, 나는 이만큼의 직책이 있는데…, 하며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새롭게 여신 길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절망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에게는 너 나름대로의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알라. 연민과 절망 속에 빠져있지 말라’며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누릴 선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이 길이 공짜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길이기 때문에 은혜로, 값없이 받는 선물이며 거저 주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거저 받는 선물을 좋아하십니까? 누구에게나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지난 14일은 임시공휴일이었고 고속도로의 모든 통행료가 면제되었었습니다. 혹시 그날 고속도로를 달려보셨습니까?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고작 천원, 2천원 차이지만 공짜로 달려보고 싶은 것입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 휘발유 값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공짜니까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이 축복을 너에게 주겠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니체의 초인 같은 인간상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오는 일이며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인생 됩시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잘났다고 해서 떵떵거리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조금 못났다 해도 자기연민 속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며 갖게 되는 정서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노래할 수 있고 춤출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밖에 없습니다. 죄인인데 죄인임을 모르는 인생, 죄인임을 알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인생.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예배로 초청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기로 작정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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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 19 ~ 24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 심지어 인터넷 댓글 상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난무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이들은 스스로 안티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의 모습,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비판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본질까지 비판하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안에는 우리도 한때 가졌던 비판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늘만 바라보는 종교가 아닌가? 그래서 땅의 문제, 현실의 아픔과 슬픔은 망각하고 있지 않은가?” 또는 정반대로,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신앙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여 적극성을 잃어버리고 수동성에만 멈추어 사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된다고 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는 아닌가?” “천국이라는 미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억눌린 삶에는 굴종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그토록 ‘사랑’을 말하면서도 자기와 조금만 다르면 분노하고 미움을 증폭시키는 혐오스러운 종교는 아닌가? 그래서 독선주의적인 양태를 지닌 종교가 아닌가?”
질문들이 나타내는 현상들은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현실 속에서 조금씩 묻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도 ‘저런 신앙을 가지면 안 될 텐데…’라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신랄하게 철학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혐오주의를 대표하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니체입니다.

바울은 비뚤어진 인간상을 고발합니다.

니체는 당대의 기독교의 실상 속에 나타난 허상을 보며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을 억누르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는 당대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붕괴되기를 원했습니다. 니체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가 말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신이란 창조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 즉 우상이기 때문에 신을 죽여야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하니 무언가 다른 인간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인(Übermensch)’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핵심은 ‘너 자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을 되찾자는 운동이 곧 니체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는 책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자신 속에 있는데, 그것이 초인사상의 핵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할 때 자연스레 도래하는 허무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초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초인이 되면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을까요? 초인이 되면 정말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인간다운 존재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어떤 인간상이 진정한, 올바른 인간상인가를 되묻게 됩니다.
니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기독교 인간상을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년 전에 유대주의적인 인간상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삶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 그러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은 우월적 신앙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을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정죄하는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독선적인 인간상을 만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발견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4)

바울의 이 고백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신을 직시하면 인간이 곤고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없는 인간이 허무주의(nihilism)를 피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넘기 위해 니체는 초인을 만들었고, 지금 사도 바울도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을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안타까운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발을 통해 진정한 인간상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인간을 동일한 범주로 묶어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별에 따라서 남자라는 인간과 여자라는 인간을 구분합니다. 피부색으로 유색인종과 백인종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또 소유에 따라서 부자와 가난한 자, 학식이 있는가에 따라서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인간 구분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인간은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죄인 된 인간, 그리고 죄인에서 벗어나 의롭게 된 인간. 단 두 종류만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이렇게 나누며 ‘모든 사람’, ‘모든 믿는 자’라고 합니다. 즉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민도 율법을 가진 자도 이생에서 선하게 산 자나 악하게 산 자도 하나님 앞에 서면 그대로 다 죄인일 뿐입니다. 엄청난 인간 이해 아닙니까? 이러한 이해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따랐던 유대인도 다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서면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이기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멈춰서야 한다는 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길, 죄인이 의로워지는 길,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는 길, 은혜의 길, 믿음의 길이 열렸다고 말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2)

여기 보면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범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떠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동안 다른 길로 가려 했던 인간들의 왜곡된 신앙을 불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편견의 신앙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갈 수 있다는 독선의 신앙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새로운 시대가, 과거가 아니라 ‘이제’, 지금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엄청난 전환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곧 예전과는 다른 극적인 반전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우리말에는 숨겨진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앞에 붙어 있습니다. 원어의 의미를 살려 정확히 번역하자면, ‘그러나 이제는’입니다. 즉 옛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는 표현입니다. 그 새로운 시대는 무엇입니까? ‘율법 외’의 길입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과는 상관없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길은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새로운 길은 구약의 율법인 모세 오경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반복적으로 가르쳐 주신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약속은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약속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놀라운 믿음의 길을 통해서 열린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돈 많은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이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들을 철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조건이 됩니다. 남자도 여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자도 적게 가진 자도 상관이 없습니다.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상관없습니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등의 세계를 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의 길이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가르쳐 주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신앙의 본질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로마서 1장 17절에 처음 나옵니다. 그리고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이 말은 등장하지 않다가 이제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 의를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지를, 또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똑같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길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운 길, 하나님의 의를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처음에 이 말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을까? 부끄러움뿐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설 수 있을까?’ 그러다가 로마서를 읽었습니다. 읽고 또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징계하시는 의가 아니라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셔서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워주신다는 것을, 즉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깨달으면서 그는 종교개혁의 핵심, 복음의 핵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새로운 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시고 왜곡된 신앙의 본질을 다시 일깨우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만한 유대교의 독선주의를 부수셨습니다. ‘우리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다. 우리만이 율법을 가진 자다. 우리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셨습니다. 일종의 편협한 종교성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마치 중독증 환자처럼 종교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란 유대인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보편적 특성을 지닌 것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 자랑하는 업적주의적 공로사상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공로사상에 젖어들면 문제가 생깁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문제가 바로 이 공로주의였습니다. 공로주의에 빠지게 되면 차별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만큼 헌신했는데, 나는 이만큼 헌금했는데, 나는 이만큼의 직책이 있는데…, 하며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새롭게 여신 길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절망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에게는 너 나름대로의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알고 스스로를 귀히 여길 줄 알라. 연민과 절망 속에 빠져있지 말라’며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누릴 선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이 길이 공짜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길이기 때문에 은혜로, 값없이 받는 선물이며 거저 주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4)

거저 받는 선물을 좋아하십니까? 누구에게나 공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지난 14일은 임시공휴일이었고 고속도로의 모든 통행료가 면제되었었습니다. 혹시 그날 고속도로를 달려보셨습니까?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고작 천원, 2천원 차이지만 공짜로 달려보고 싶은 것입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 휘발유 값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공짜니까 누리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된다. 네가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이 축복을 너에게 주겠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껏해야 니체의 초인 같은 인간상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오는 일이며 엄청난 지혜가 담겨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선물을 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인생 됩시다.

기독교 복음의 본질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잘났다고 해서 떵떵거리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조금 못났다 해도 자기연민 속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소중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 은혜를 경험하며 갖게 되는 정서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와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노래할 수 있고 춤출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인생밖에 없습니다. 죄인인데 죄인임을 모르는 인생, 죄인임을 알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인생.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를 예배로 초청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기로 작정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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