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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트라우마 – 모세 이야기 3 –

출애굽기 3: 1 ~ 5

김지철 목사

2016.11.06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트라우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뿌리 뽑혀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모세 안에 깊이 박혀있는 쓴 뿌리, 곧 모세의 트라우마입니다. 누가 이 트라우마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모세 스스로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도자로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도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란 ‘정신적 외상’을 뜻하는 것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은 뒤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 혹은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은 기억이 쓴 뿌리가 되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기조차 싫습니다. 그저 여기서 멈추고 싶습니다.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지나가는 개만 봐도 질색합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본 사람은 다시 운전대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입시에서 한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평소 실력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당일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발표하다 실수를 한 사람은 다시는 대중 앞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의 삶을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집단적인 경험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순 넘으신 우리 어른 세대들은 6.25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분들입니다. 그로 인해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공이 삶의 원칙이자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70년의 세월이 넘도록 분단 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가슴이 메어옵니다. 그것이 트마우마처럼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년 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습니다. 온 국민의 가슴에 멍이 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더 이상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어른들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을 때, 부끄럽지만 우리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1년에 일어난 9‧11테러 역시 미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평소 가족과 친구처럼 친근하고 소중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원수로 돌변할 수 있고, 자신을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전 국민이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국가정책과 외교정책이 자국이기주의로 급속하게 경직된 것도 이런 트라우마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국가적으로 온 국민이 트라우마를 함께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손상되었습니다. 국민의 자존감 또한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국가지도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그저 놀랐습니다. 그러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조 섞인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는 소리들이 우리 속에 가득합니다.
특별히 신앙인인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국 평균 5%로 떨어졌다는 소식, 심지어 서울에서는 2%로 추락했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잠재된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국가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가장은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것 또한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일종의 후속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지도자가 국가를 다스리면 국가 폭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권력 기관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국가 권력을 아주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정체성 혼란의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를 한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시고자 합니다. 그를 짓누르고 있던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되어도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트라우마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는 어릴 때 경험했던 트라우마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트라우마입니다. 젖 먹던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 곁에서 사랑 받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젖을 뗀 순간 애굽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마 그의 마음에는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히브리인일까, 애굽인일까? 혹시 버림받은 존재는 아닌가?’라는 생각들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자신이 히브리인이란 사실을 감추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정체성의 혼란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다문화가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혼돈이 있습니다. 탈북민들에게도 이와 같은 아픔과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라고 해서 대한민국으로 탈북해 와 살고 있는데, 쉽게 편입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 국민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20세기 중반 88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우리는 소위 제3세계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 중에 6,70년대에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은 그곳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일본입니까, 중국인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내가 한국인이다.”라고 당당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 더럽고 질병이 많은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인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출애굽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애굽기 2:11)

자기 민족에게로 가 보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노동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하는 노역입니다. 그 비천한 노예들과 자신이 같은 민족이라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자신 안의 노예 냄새, 굴종적인 태도까지도 어떻게든 벗어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젖 먹던 시절, 어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히브리인이란다. 너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는 백성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백성이란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백성이란다.” 아마 이 말씀을 되뇌며, 그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사십 세가 되자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기억합니다.

이 두 정체성 사이에서 모세가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구약의 전통적인 역사를 재해석할 때,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사도행전 7:23)

이 말씀은, 사십 세가 되기 전까지는 모세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애굽 왕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다 누리면서 애굽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되니, ‘아,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는 본래 히브리인이 아니던가? 내가 동족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십 세가 되니 동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이십 세까지 살았으므로 사십 세는 그의 인생의 1/3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백이십 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며, 사십 세는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십 세를 넘긴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인생의 전반전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든 시간과 정성을 나와 가족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사십 세가 넘어가니, ‘인생,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또 이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생기지 않습니까?
모세도 그랬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어 형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봐야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꿈과 사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번째 삶에 들어서려는 순간, 그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이제 막 동족을 위해 헌신하려고 결단했는데, 동족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굽인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해주려고 애굽 사람을 쳐서 죽입니다. 그리곤 땅속에 묻어 감춰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족을 위해 폭력과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히브리인들이 자신에게 환호할 줄 알았습니다. 용기 있고 담대하다고, 지도자로서도 손색없다고 박수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모세를 향한 비난과 고발이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과격한 행위가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이 자신에게 한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출애굽기 2:14)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는 것입니다. 모세, 당신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족간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아마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왕에게도 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고 고자질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구절에 보면,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출애굽기 2:15)라고 기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족이 자신을 배신했습니다. ‘동족을 위한 헌신과 노력이었는데 참으로 무의미하구나. 나는 동족에게 허세만 부리는 가짜 지도자밖에 될 수 없구나.’ 하고 모세는 씁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그는 곧장 광야로 도망칩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 곧 침묵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모세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 없이 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부하긴 했지만,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40년 동안이나 광야 속 침묵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가 오늘 새롭게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십니다.

이제 모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모세가 호렙 산을 거닐고 있는데, 신비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사그라들지 않는 것입니다. 불꽃이 지속되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면서 모세는 그 앞에 다가섭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5)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내가 너를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이미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통해서 나의 뜻을 보여주고 싶구나.’ 바로 이 메시지를,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도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고 인정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 앞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대화적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서 트라우마의 상처들도 회복되어 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이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내 안의 트라우마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여보’, ‘당신’ 하고 불러줄 때, 아내 안의 응어리진 것들이 녹아갑니다. 남편을 위해 아내가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불러줄 때, 밖에서 받은 남편의 수많은 스트레스도 해소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자녀들의 상처도 눈 녹듯 사라집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또,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시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그분께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대면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란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동안 나를 얽어맸던 트라우마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렇게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라본 떨기나무 불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입니다. 이곳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 하나님의 존귀한 자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며 이곳에 불러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내 안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상처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대화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시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나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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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 1 ~ 5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트라우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뿌리 뽑혀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모세 안에 깊이 박혀있는 쓴 뿌리, 곧 모세의 트라우마입니다. 누가 이 트라우마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모세 스스로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셨습니다.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지도자로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도 쓰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란 ‘정신적 외상’을 뜻하는 것으로, 신체적‧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은 뒤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 혹은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은 기억이 쓴 뿌리가 되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트라우마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기조차 싫습니다. 그저 여기서 멈추고 싶습니다. 회피하고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지나가는 개만 봐도 질색합니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본 사람은 다시 운전대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입시에서 한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평소 실력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당일 과도하게 긴장한 탓에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발표하다 실수를 한 사람은 다시는 대중 앞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의 삶을 위축시키기도 합니다.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 집단적인 경험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순 넘으신 우리 어른 세대들은 6.25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분들입니다. 그로 인해 북한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공이 삶의 원칙이자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70년의 세월이 넘도록 분단 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면 가슴이 메어옵니다. 그것이 트마우마처럼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년 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목격했습니다. 온 국민의 가슴에 멍이 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더 이상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어른들의 말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부르짖을 때, 부끄럽지만 우리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1년에 일어난 9‧11테러 역시 미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평소 가족과 친구처럼 친근하고 소중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원수로 돌변할 수 있고, 자신을 공격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전 국민이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국가정책과 외교정책이 자국이기주의로 급속하게 경직된 것도 이런 트라우마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지난 두 주 동안 우리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국가적으로 온 국민이 트라우마를 함께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손상되었습니다. 국민의 자존감 또한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국가지도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우리는 그저 놀랐습니다. 그러다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조 섞인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하는 소리들이 우리 속에 가득합니다.
특별히 신앙인인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국 평균 5%로 떨어졌다는 소식, 심지어 서울에서는 2%로 추락했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내면에 잠재된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않은 채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국가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가장은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것 또한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일종의 후속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 지도자가 국가를 다스리면 국가 폭력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권력 기관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국가 권력을 아주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정체성 혼란의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시는 장면입니다. 모세를 한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시고자 합니다. 그를 짓누르고 있던 트라우마가 해소되지 않으면, 지도자가 되어도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트라우마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는 어릴 때 경험했던 트라우마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트라우마입니다. 젖 먹던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 곁에서 사랑 받는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젖을 뗀 순간 애굽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마 그의 마음에는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히브리인일까, 애굽인일까? 혹시 버림받은 존재는 아닌가?’라는 생각들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자신이 히브리인이란 사실을 감추었던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정체성의 혼란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다문화가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혼돈이 있습니다. 탈북민들에게도 이와 같은 아픔과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라고 해서 대한민국으로 탈북해 와 살고 있는데, 쉽게 편입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 국민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20세기 중반 88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 우리는 소위 제3세계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 중에 6,70년대에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다녀오신 분들은 그곳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일본입니까, 중국인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에 “내가 한국인이다.”라고 당당히 대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 더럽고 질병이 많은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인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출애굽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출애굽기 2:11)

자기 민족에게로 가 보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노동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강제로 하는 노역입니다. 그 비천한 노예들과 자신이 같은 민족이라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자신 안의 노예 냄새, 굴종적인 태도까지도 어떻게든 벗어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다른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젖 먹던 시절, 어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히브리인이란다. 너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는 백성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백성이란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백성이란다.” 아마 이 말씀을 되뇌며, 그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사십 세가 되자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을 기억합니다.

이 두 정체성 사이에서 모세가 혼란스러워 했다는 것을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구약의 전통적인 역사를 재해석할 때,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사도행전 7:23)

이 말씀은, 사십 세가 되기 전까지는 모세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애굽 왕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다 누리면서 애굽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되니, ‘아,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는 본래 히브리인이 아니던가? 내가 동족을 위해서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십 세가 되니 동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이십 세까지 살았으므로 사십 세는 그의 인생의 1/3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백이십 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며, 사십 세는 인생의 전반전이 끝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십 세를 넘긴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인생의 전반전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았습니다. 모든 시간과 정성을 나와 가족을 위해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사십 세가 넘어가니, ‘인생,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또 이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생기지 않습니까?
모세도 그랬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어 형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봐야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꿈과 사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번째 삶에 들어서려는 순간, 그에게 또 다른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이제 막 동족을 위해 헌신하려고 결단했는데, 동족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거부하고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 애굽인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해주려고 애굽 사람을 쳐서 죽입니다. 그리곤 땅속에 묻어 감춰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동족을 위해 폭력과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히브리인들이 자신에게 환호할 줄 알았습니다. 용기 있고 담대하다고, 지도자로서도 손색없다고 박수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모세를 향한 비난과 고발이 이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과격한 행위가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것을 통감했습니다. 그리고 동족이 자신에게 한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출애굽기 2:14)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는 것입니다. 모세, 당신의 지도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동족간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아마 이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왕에게도 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고 고자질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구절에 보면,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출애굽기 2:15)라고 기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족이 자신을 배신했습니다. ‘동족을 위한 헌신과 노력이었는데 참으로 무의미하구나. 나는 동족에게 허세만 부리는 가짜 지도자밖에 될 수 없구나.’ 하고 모세는 씁쓸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으니, 그는 곧장 광야로 도망칩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 곧 침묵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모세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하나님 없이 일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대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부하긴 했지만,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40년 동안이나 광야 속 침묵의 자리에 들어가 있다가 오늘 새롭게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십니다.

이제 모세의 트라우마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모세가 호렙 산을 거닐고 있는데, 신비한 현상을 목격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사그라들지 않는 것입니다. 불꽃이 지속되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면서 모세는 그 앞에 다가섭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5)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내가 너를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너를 이미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통해서 나의 뜻을 보여주고 싶구나.’ 바로 이 메시지를, 모세의 이름을 부르시며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도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고 계셨고 인정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 앞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대화적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서 트라우마의 상처들도 회복되어 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이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내 안의 트라우마가 사라집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여보’, ‘당신’ 하고 불러줄 때, 아내 안의 응어리진 것들이 녹아갑니다. 남편을 위해 아내가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불러줄 때, 밖에서 받은 남편의 수많은 스트레스도 해소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의 이름을 불러줄 때, 자녀들의 상처도 눈 녹듯 사라집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또,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시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가 그분께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대면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이란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동안 나를 얽어맸던 트라우마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렇게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라본 떨기나무 불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장소입니다. 이곳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 하나님의 존귀한 자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아시며 이곳에 불러 주셨습니다. 그 사실이 우리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 내 안의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상처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대화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다시 깨닫습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나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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