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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질문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교육의 방법은 비슷합니다. 바로 질의응답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질문을 퍼부으며 대화하는 산파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공자도 계몽적인 질문 교육법을 통해서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교육법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해주면서 새로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 바로 질의문답법입니다.
질문이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람이 묻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에 올바른 대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마치 땅에 심은 씨앗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땅 속에 심겨진 씨앗에게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 말라비틀어지고 썩어버리게 됩니다. 물을 주어야 땅을 뚫고 새 생명의 싹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질문이 있어야 생각하게 되고, 삶을 변화시키며,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질문하지 않고 대답부터 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그 대답이 왜 소중한지, 왜 중요한지 결코 알 수 없게 됩니다.
질문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의 힘이란 아주 막강한 것입니다. 질문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높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이 없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질문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호기심은 창의적인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키울 때를 되돌아보면 아이들이 수많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엄마, 왜 하늘은 파랗지?”, “왜 아침이 되면 해가 동쪽에서 떠?”, “왜 산에서 흐른 물이 저 바다까지 흘러가는 거야?” 등 때로는 부모들이 다 대답할 수 없는 아주 난해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들을 통해 아이들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입니다. 질문이란 닫혀진 세계를 열어놓는 비밀의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사고는 새로운 성숙의 세계로 열리게 됩니다.
좋은 질문이란 또 어떤 힘을 갖고 있을까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코 안전한 지대가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그동안 누리고 있었던 것, 기존적인 선입관, 그리고 신념 체계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새롭게 도전하게도 하고, 이미 포기했던 마음에 용기를 심어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질문은 주저앉지 말고 새롭게 일어나라는 요청입니다.
사람들은 질문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질문하기를 싫어하고 질문받기를 두려워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도전하기 겁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에 진정한 변화를 주고 싶다면 혹은 지금 살고 있는 자리에서 무엇인가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한다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좋은 질문 하나만 던져져도 우리의 인생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질문 하나만 바꾸어도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을 질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떠한 것일까요? 신앙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 앞에 벌거벗은 채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질문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기를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요한복음 1:38)
예수님께서는 뒤따라오는 제자들에게로 몸을 돌려 물으셨습니다. “너는 도대체 왜 나를 따라오느냐? 너는 나에게 구하는 게 무엇이냐? 네가 찾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우리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교회에 나왔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왜 예배드리는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으려고 주일 아침에 주님 앞에 나왔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은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놀랄만한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36)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세례요한의 말입니다. 바로 저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선 29절에서는 더 명백하게 표현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며 죄 용서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정말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아인가? 그리스도인가? 저분이 정말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분인가? 저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따뜻한 인간관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어디서부터 생깁니까? 신앙은 면벽을 하고 도를 닦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들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려옵니까?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누구인지 먼저 깨달은 사람들에게로 부터입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할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 존경했던 사람이 “내가 예수 믿는다. 그러니 우리 함께 예수님 믿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그 사람이 때로는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이거나 스승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가 되었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이런 따뜻한 인간관계를 통해 신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는 인간관계가 매우 소중합니다. 여러분, 전도하고 싶으십니까? 전도의 대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그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인데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귀히 여긴다면 가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그 안에 진리가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 너도 예수를 함께 믿으면 좋겠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준 것은 내게 깊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스승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제자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원해서 나를 따라오느냐?”라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디 계시던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애타게 구하는 마음, 찾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구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찾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구하고 찾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라 할지라도 구하고 찾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무슨 뜻입니까? 구해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찾아야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에 관한 것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따라오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요한복음 1:39)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니까 단 세 마디로 되어있습니다. come and see. “오라. 네 눈으로 봐라. 그리고 경험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저 머릿속에서 멈추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분석하는 신앙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신앙,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함께 뒹굴며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신앙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바라시고 사랑하시는 신앙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 파고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직접 와서 보고 경험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현장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뿌리 내려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하려면 신앙의 현장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베트남과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는 캄보디아에 다녀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곳, 힘든 곳, 가난한 곳을 갔다 오고 나면 우리 학생들이 부모님에게 더욱 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참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새삼 감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의 현장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선교현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나 하나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결코 혼자 있을 때 성장하지 않습니다. 가끔 ‘난 그냥 혼자 성경공부하지 뭐. 혼자 읽고 혼자 공부하지. 혼자 기도해 봐야지. 요즘 텔레비전 켜니까 예배도 잘 나오던데 스크린으로 예배드리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있어서는 신앙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신앙이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입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의 역사가 깊어지고 삶의 현장성이 신앙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여하라고 하신 삶의 현장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품성, 예수님의 삶, 그 전체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품성을 맛보고 경험해야 참된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세례요한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자들입니다.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인격이 잘 드러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 말씀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30)
참 놀라운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것을 결코 막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져야 되고, 나는 낮아지고 사라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한복음 1:40)
베드로 보다 동생 안드레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예수님의 인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형인 베드로를 향해서 “같이 가자. 저기에 예수님이 계시고 메시아가 계신다.”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도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너는 왜 예배드리느냐? 네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우리를 향해서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분주함,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가로막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가 참 진리입니까? 예수가 참 생명입니까? 내 인생 전체를 예수님께 드려도 괜찮은 분이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인생을 책임지시는 예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간절한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수도원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라. 너는 어떤 동기로 여기에 와 있는가를!’
기독교는 질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들이 던진 그 모든 질문들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대답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질문들을 뛰어 넘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에 뒤따르는 자잘한 질문들을 침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 모든 질문을 침묵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하나님의 질문 앞에 먼저 서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진리요, 나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 명절에 주님 앞에 먼저 나아와 예배드리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수많은 질문들을 침묵시키면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 35 ~ 40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사람은 질문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교육의 방법은 비슷합니다. 바로 질의응답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질문을 퍼부으며 대화하는 산파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공자도 계몽적인 질문 교육법을 통해서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교육법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스스로 얼마나 무지한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해주면서 새로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방식이 바로 질의문답법입니다.
질문이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람이 묻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삶에 올바른 대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질문이란 마치 땅에 심은 씨앗에 물을 붓는 것과도 같습니다. 땅 속에 심겨진 씨앗에게 물을 주지 않으면 금방 말라비틀어지고 썩어버리게 됩니다. 물을 주어야 땅을 뚫고 새 생명의 싹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질문이 있어야 생각하게 되고, 삶을 변화시키며, 성숙하게 됩니다. 그런데 질문하지 않고 대답부터 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그 대답이 왜 소중한지, 왜 중요한지 결코 알 수 없게 됩니다.
질문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질문의 힘이란 아주 막강한 것입니다. 질문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더 높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질문이 없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없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성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질문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호기심은 창의적인 세계를 향해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키울 때를 되돌아보면 아이들이 수많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던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엄마, 왜 하늘은 파랗지?”, “왜 아침이 되면 해가 동쪽에서 떠?”, “왜 산에서 흐른 물이 저 바다까지 흘러가는 거야?” 등 때로는 부모들이 다 대답할 수 없는 아주 난해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질문들을 통해 아이들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입니다. 질문이란 닫혀진 세계를 열어놓는 비밀의 열쇠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의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사고는 새로운 성숙의 세계로 열리게 됩니다.
좋은 질문이란 또 어떤 힘을 갖고 있을까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코 안전한 지대가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그동안 누리고 있었던 것, 기존적인 선입관, 그리고 신념 체계를 뒤흔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새롭게 도전하게도 하고, 이미 포기했던 마음에 용기를 심어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질문은 주저앉지 말고 새롭게 일어나라는 요청입니다.
사람들은 질문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질문하기를 싫어하고 질문받기를 두려워합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도전하기 겁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에 진정한 변화를 주고 싶다면 혹은 지금 살고 있는 자리에서 무엇인가 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되기를 원한다면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의 삶에 좋은 질문 하나만 던져져도 우리의 인생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질문 하나만 바꾸어도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은 하나의 삶의 양식이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신앙을 질문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떠한 것일까요? 신앙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 앞에 벌거벗은 채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란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질문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질문 앞에 서기를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요한복음 1:38)
예수님께서는 뒤따라오는 제자들에게로 몸을 돌려 물으셨습니다. “너는 도대체 왜 나를 따라오느냐? 너는 나에게 구하는 게 무엇이냐? 네가 찾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우리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교회에 나왔는가? 왜 예수님을 믿는가? 왜 예배드리는가?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으려고 주일 아침에 주님 앞에 나왔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은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놀랄만한 말씀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한복음 1:36)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세례요한의 말입니다. 바로 저 사람,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앞선 29절에서는 더 명백하게 표현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성전에서 어린양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며 죄 용서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저분이 정말 수백 년 동안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아인가? 그리스도인가? 저분이 정말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는 분인가? 저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인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따뜻한 인간관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어디서부터 생깁니까? 신앙은 면벽을 하고 도를 닦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들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려옵니까? 예수를 먼저 믿은 사람들, 예수님을 먼저 사랑한 사람들, 예수님이 누구인지 먼저 깨달은 사람들에게로 부터입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전할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 존경했던 사람이 “내가 예수 믿는다. 그러니 우리 함께 예수님 믿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그 사람이 때로는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이거나 스승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가 되었던 간에 중요한 것은 이런 따뜻한 인간관계를 통해 신앙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는 인간관계가 매우 소중합니다. 여러분, 전도하고 싶으십니까? 전도의 대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그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인데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귀히 여긴다면 가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그 안에 진리가 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 너도 예수를 함께 믿으면 좋겠다.”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준 것은 내게 깊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스승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제자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증거한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무엇을 원해서 나를 따라오느냐?”라고 말입니다. 그 질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디 계시던지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애타게 구하는 마음, 찾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구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십니다. 찾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구하고 찾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라 할지라도 구하고 찾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무슨 뜻입니까? 구해야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찾아야 찾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에 관한 것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따라오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요한복음 1:39)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보니까 단 세 마디로 되어있습니다. come and see. “오라. 네 눈으로 봐라. 그리고 경험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저 머릿속에서 멈추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분석하는 신앙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신앙,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함께 뒹굴며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신앙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바라시고 사랑하시는 신앙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 파고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직접 와서 보고 경험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현장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의 현장에서 뿌리 내려야 합니다.
신앙이 성숙하려면 신앙의 현장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베트남과 필리핀에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는 캄보디아에 다녀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곳, 힘든 곳, 가난한 곳을 갔다 오고 나면 우리 학생들이 부모님에게 더욱 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엄마가 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참 소중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새삼 감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신앙의 현장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선교현장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나 하나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결코 혼자 있을 때 성장하지 않습니다. 가끔 ‘난 그냥 혼자 성경공부하지 뭐. 혼자 읽고 혼자 공부하지. 혼자 기도해 봐야지. 요즘 텔레비전 켜니까 예배도 잘 나오던데 스크린으로 예배드리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있어서는 신앙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신앙이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입니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의 역사가 깊어지고 삶의 현장성이 신앙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여하라고 하신 삶의 현장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품성, 예수님의 삶, 그 전체를 맛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품성을 맛보고 경험해야 참된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세례요한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자들입니다.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인격이 잘 드러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 말씀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30)
참 놀라운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선포하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는 것을 결코 막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높아져야 되고, 나는 낮아지고 사라져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한복음 1:40)
베드로 보다 동생 안드레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예수님의 인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사랑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형인 베드로를 향해서 “같이 가자. 저기에 예수님이 계시고 메시아가 계신다.”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질문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도 예수님의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너는 왜 예배드리느냐? 네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우리를 향해서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분주함,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가로막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가 참 진리입니까? 예수가 참 생명입니까? 내 인생 전체를 예수님께 드려도 괜찮은 분이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인생을 책임지시는 예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간절한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수도원에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말하라. 너는 어떤 동기로 여기에 와 있는가를!’
기독교는 질문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들이 던진 그 모든 질문들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대답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질문들을 뛰어 넘는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에 뒤따르는 자잘한 질문들을 침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면 모든 질문을 침묵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하나님의 질문 앞에 먼저 서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요, 나의 생명이요, 나의 진리요, 나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이 명절에 주님 앞에 먼저 나아와 예배드리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수많은 질문들을 침묵시키면서 세상을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