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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 – 로마서 강해 8 –

로마서 2: 25 ~ 29

김지철 목사

2015.07.26

우리는 성장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삼 주 전에 외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보며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신비롭고 경이로운 느낌과 감사가 가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런데 금세 걱정이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랄까? 바르고 지혜롭게 자라날까?’ 순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의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에는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는 ‘자라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워지다’입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생각이 성숙하여 분별력이 생긴다는 뜻이고, 키가 자란다는 것은 몸이 성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린아이가 계속 어린 모습 그대로 있게 되면 어떨까요? 그것은 매우 큰 걱정일 것입니다. 인간이란 성숙을 위해 나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청년 중에는 아직도 몸이 자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이 신체의 성장은 멈추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장을 지나 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자란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자라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지혜입니다. 생각하는 능력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들은 계속 자라나야 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 세우면서 종종 “너희는 왜 자라지 못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너희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딱딱한 음식은 못 먹고 매일 젖만 먹고 있구나”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생각이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왜 모자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편을 가르고, 자기 자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자꾸 어지러워졌던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로 마음이 상합니까?

성숙과 미성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볼 때,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나누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따집니다. 옳으면 싫어도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면 옛날이야기를 즐겨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왕년에” 혹은 “한때 내가”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과거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며 현재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둡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것이 좋은 것이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미래를 향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도 마지못해 하다 보니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다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격려하고 해야 될 일 앞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합니다.
오늘 제목은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입니다. 여러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진 돈이 나를 규정합니까? 직업이 나를 규정합니까? 지위가 나를 규정합니까? 어쩌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거기에만 한정시키면 미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지 않고는 성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나를 규정하시게 해야 진정한 성숙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본질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느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굳어진 마음에 할례를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받지 않았느냐? 괜찮은 백성이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느냐? 아주 멋진 백성이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몸에 할례도 받지 않았느냐?”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약속한 것으로 남자가 어릴 때 생식기에 포경수술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즉 바울이 할례를 이야기한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소중한 백성인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소중한 백성’이라는 것이 어느 날 자동적으로 내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가졌지. 나는 진짜 유대인이네. 나는 할례를 받았지. 나는 진정한 유대인이네.’ 스스로 자족하고 거기에 멈춰섰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워지겠다는 변화의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로마서 2:28)

“율법을 가졌다고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려서 부모를 통해 할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처럼 마음의 할례까지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마음의 할례’는 아주 중요한 사실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10:15∼16)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되면 곧아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의 글인데,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는 과정에서 보낸 편지에 “엄마 사랑합니다. 제가 엄마의 아들입니다”라고 적혀 있어 ‘군대 가서 사람 되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후로는 고맙다는 말이 싹 사라졌다는 겁니다. 마음대로 편하게 살다 보니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에 있는 신앙의 동포들은 얼마나 예배드리기를 사모하겠습니까? 좋은 성경책이 얼마나 갖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책은 쌓여 있고, 예배는 언제라도 와서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감사함과 소중함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바울이 다시 언급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몸으로 나온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복 될 일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으로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몸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백과 확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곧 마음의 할례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처음 사랑’입니다.

본질로 돌아갈 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제일 큰 어려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처음 사랑을 지키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당연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고, 주일 성수를 이처럼 잘 지키는 곳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만큼 십의 일조 헌금을 잘 드리는 교회가 없습니다. 전도, 봉사, 선교 등에 한국 교회는 열정적으로 임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가 흔들릴까요? 잘하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 마음의 감동과 설렘이 사라진 것입니다. 첫 사랑의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믿음인데 회개하지 않는 믿음, 자신의 죄악을 아파하지 않는 믿음이 생기고 맙니다. 축복을 받았는데 변화하려 하지 않는 축복이 한국 교회를 붙잡게 됩니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야기합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원에서 아는 데서 그치느냐 행동하며 순종하느냐의 차원으로 말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로마서 2:23)

알고 있는데,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행위와 순종을 요청하는 종교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가야 할 길에서 실제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율법의 종교에서 복음의 종교로 나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에 얽매인 바리새주의적인 종교에서 성령에 개방된 예수님의 정신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로마서 2:29)

‘이면적’이란 내면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과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마음의 사건이 되어야 하고, 신앙이 영의 사건으로 늘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 조문을 외우고 있다고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드(ad)’는 영어로 toward, 즉 ‘∼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폰테스(fontes)’는 fountain, ‘원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ad fontes’는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잘 안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말이 바로 ad fontes입니다. 본질로, 원천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목도 그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판단, 사람의 칭찬, 사람의 조롱 등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판단,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내 인생의 본질로 둘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들릴 때마다 생각합시다. 내가 사람의 시선 속에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나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열망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느 한쪽을 결정하면 분명 해결책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서니라 (로마서 2:29)

사람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나를 맞추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맞추고 살아갈 때, 주도성과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원천,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든 학교든 가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섰어도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여행이 즐거운 것도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빌립보서 3:20)

우리는 두 가지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하늘의 시민권입니다. 그런데 종국적 시민권은 하늘 시민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두신 천국 잔치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안 잠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셈입니다.
며칠 동안의 여행을 위해 냉장고나 세탁기를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사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들을 꽉 붙잡고 이것에 의해 살겠노라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 더 위에서 내 인생이 어떻게 가는가를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 곳, 즉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기억하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넉넉해지겠습니까?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얼마나 집중합니까? 또 돈이 있으면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돈돈돈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힘을 가진 자가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 권력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갈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칭찬은 인간이 그렇게 공들여 쌓은 것들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보이는 것들에 의해 규정받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규정하셔야 진정한 자유와 삶의 진정한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다양한 것들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칭찬은 나의 감춰진 것들이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외모나 내 업적으로 나를 판단합니다. 거기에는 나의 doing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doing보다 나의 being, 나의 존재 자체가 더 소중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면 자랑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내 아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너희의 죄악, 부끄러움, 연약함을 내 아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겠다.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아들인 것을 믿고 나를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주겠다. 너희에게 부끄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복음이고 약속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때로 돈이 없어도 담대해질 수는 없을까요? 세상에서 권력을 갖지 못했어도 당당하게 살 수는 없을까요? 지식인이 아니어도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 앞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운명적인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자기연민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인정하시고, 칭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신 하나님에 의해 내 삶을 규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기가 생기고, 자존감이 생기고, 사명감도 생깁니다. 나는 땅바닥에 버려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중하게 세우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규정하시는 것에 의해 우리가 나아가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 때문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애에 실패했습니까? 다시 시작하세요. 시험에서 떨어졌습니까? 더 담대한 마음을 가지세요. 나의 나 된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를 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되고 규정되었다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을 기억하십시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면서 다시 새롭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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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 25 ~ 29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우리는 성장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삼 주 전에 외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보며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신비롭고 경이로운 느낌과 감사가 가슴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런데 금세 걱정이 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랄까? 바르고 지혜롭게 자라날까?’ 순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의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에는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하나는 ‘자라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워지다’입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생각이 성숙하여 분별력이 생긴다는 뜻이고, 키가 자란다는 것은 몸이 성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람’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모습’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들을 보면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린아이가 계속 어린 모습 그대로 있게 되면 어떨까요? 그것은 매우 큰 걱정일 것입니다. 인간이란 성숙을 위해 나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청년 중에는 아직도 몸이 자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이 신체의 성장은 멈추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성장을 지나 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자란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자라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지혜입니다. 생각하는 능력과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들은 계속 자라나야 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 세우면서 종종 “너희는 왜 자라지 못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은데, 너희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딱딱한 음식은 못 먹고 매일 젖만 먹고 있구나”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생각이 모자라다는 것입니다. 왜 모자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편을 가르고, 자기 자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자꾸 어지러워졌던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로 마음이 상합니까?

성숙과 미성숙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무엇인가를 볼 때, 좋은 것과 싫은 것으로 나누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따집니다. 옳으면 싫어도 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면 옛날이야기를 즐겨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왕년에” 혹은 “한때 내가”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과거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현재가 불만족스럽다는 것이며 현재에 대해서는 닫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둡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기까지 온 것이 좋은 것이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며 미래를 향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도 마지못해 하다 보니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다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격려하고 해야 될 일 앞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합니다.
오늘 제목은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입니다. 여러분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진 돈이 나를 규정합니까? 직업이 나를 규정합니까? 지위가 나를 규정합니까? 어쩌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거기에만 한정시키면 미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지 않고는 성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보이는 세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만드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나를 규정하시게 해야 진정한 성숙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본질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느 경우도 예외가 없습니다.

굳어진 마음에 할례를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받지 않았느냐? 괜찮은 백성이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느냐? 아주 멋진 백성이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몸에 할례도 받지 않았느냐?”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약속한 것으로 남자가 어릴 때 생식기에 포경수술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즉 바울이 할례를 이야기한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소중한 백성인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소중한 백성’이라는 것이 어느 날 자동적으로 내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가졌지. 나는 진짜 유대인이네. 나는 할례를 받았지. 나는 진정한 유대인이네.’ 스스로 자족하고 거기에 멈춰섰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새로워지겠다는 변화의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로마서 2:28)

“율법을 가졌다고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려서 부모를 통해 할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처럼 마음의 할례까지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마음의 할례’는 아주 중요한 사실로 이야기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10:15∼16)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되면 곧아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의 글인데,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에 배치되는 과정에서 보낸 편지에 “엄마 사랑합니다. 제가 엄마의 아들입니다”라고 적혀 있어 ‘군대 가서 사람 되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제대하고 집에 돌아온 후로는 고맙다는 말이 싹 사라졌다는 겁니다. 마음대로 편하게 살다 보니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에 있는 신앙의 동포들은 얼마나 예배드리기를 사모하겠습니까? 좋은 성경책이 얼마나 갖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책은 쌓여 있고, 예배는 언제라도 와서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감사함과 소중함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바울이 다시 언급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몸으로 나온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더 복 될 일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으로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몸만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백과 확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곧 마음의 할례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처음 사랑’입니다.

본질로 돌아갈 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수많은 부부들이 제일 큰 어려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처음 사랑을 지키는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당연해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고, 주일 성수를 이처럼 잘 지키는 곳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만큼 십의 일조 헌금을 잘 드리는 교회가 없습니다. 전도, 봉사, 선교 등에 한국 교회는 열정적으로 임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가 흔들릴까요? 잘하는 것이 습관화가 되어 마음의 감동과 설렘이 사라진 것입니다. 첫 사랑의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믿음인데 회개하지 않는 믿음, 자신의 죄악을 아파하지 않는 믿음이 생기고 맙니다. 축복을 받았는데 변화하려 하지 않는 축복이 한국 교회를 붙잡게 됩니다.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도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야기합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원에서 아는 데서 그치느냐 행동하며 순종하느냐의 차원으로 말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로마서 2:23)

알고 있는데,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행위와 순종을 요청하는 종교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가야 할 길에서 실제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율법의 종교에서 복음의 종교로 나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에 얽매인 바리새주의적인 종교에서 성령에 개방된 예수님의 정신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로마서 2:29)

‘이면적’이란 내면적이라는 뜻입니다. 즉,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과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과 만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마음의 사건이 되어야 하고, 신앙이 영의 사건으로 늘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 조문을 외우고 있다고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서 이것이 가능할까요?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드(ad)’는 영어로 toward, 즉 ‘∼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폰테스(fontes)’는 fountain, ‘원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ad fontes’는 원천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본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잘 안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할 말이 바로 ad fontes입니다. 본질로, 원천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목도 그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판단, 사람의 칭찬, 사람의 조롱 등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판단,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내 인생의 본질로 둘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들릴 때마다 생각합시다. 내가 사람의 시선 속에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나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를 열망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느 한쪽을 결정하면 분명 해결책이 나올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도 동일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멈추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서니라 (로마서 2:29)

사람의 이야기에 이리저리 나를 맞추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맞추고 살아갈 때, 주도성과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지고 인생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원천,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든 학교든 가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섰어도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여행이 즐거운 것도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찬,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곳이 어디일까요?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 (빌립보서 3:20)

우리는 두 가지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하늘의 시민권입니다. 그런데 종국적 시민권은 하늘 시민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 두신 천국 잔치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안 잠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인 셈입니다.
며칠 동안의 여행을 위해 냉장고나 세탁기를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사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들을 꽉 붙잡고 이것에 의해 살겠노라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 더 위에서 내 인생이 어떻게 가는가를 지켜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 곳, 즉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기억하며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넉넉해지겠습니까?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에 얼마나 집중합니까? 또 돈이 있으면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돈돈돈 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힘을 가진 자가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 권력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갈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칭찬은 인간이 그렇게 공들여 쌓은 것들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보이는 것들에 의해 규정받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규정하셔야 진정한 자유와 삶의 진정한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다양한 것들을 누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칭찬은 나의 감춰진 것들이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외모나 내 업적으로 나를 판단합니다. 거기에는 나의 doing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doing보다 나의 being, 나의 존재 자체가 더 소중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면 자랑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이유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내 아들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너희의 죄악, 부끄러움, 연약함을 내 아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겠다.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아들인 것을 믿고 나를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주겠다. 너희에게 부끄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복음이고 약속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계신 하나님이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 주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때로 돈이 없어도 담대해질 수는 없을까요? 세상에서 권력을 갖지 못했어도 당당하게 살 수는 없을까요? 지식인이 아니어도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 앞에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운명적인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라고 말입니다. 자기연민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인정하시고, 칭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시어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신 하나님에 의해 내 삶을 규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기가 생기고, 자존감이 생기고, 사명감도 생깁니다. 나는 땅바닥에 버려진 돌멩이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중하게 세우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규정하시는 것에 의해 우리가 나아가야 합니다. 보이는 세계 때문에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연애에 실패했습니까? 다시 시작하세요. 시험에서 떨어졌습니까? 더 담대한 마음을 가지세요. 나의 나 된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를 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되고 규정되었다는 믿음의 사람들의 특권을 기억하십시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이 놀라운 특권을 누리면서 다시 새롭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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