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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 사랑의 언약

창세기 9: 7 ~ 13

김지철 목사

2018.04.15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입니다.

최근 무지개를 본 적 있으십니까? 서울에 살다보면 빌딩에 가려 비가 온 후에도 무지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색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떠오른 무지개를 보면 참 아름답고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면을 보시면, 쌍 무지개가 보입니다. 또 들판에 멋지게 등장한 무지개도 있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왠지 따뜻하고 반가운 기분이 듭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도 ‘무지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무지개를 보며 찬탄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은 뛰누나! A rainbow in the sky
내 어렸을 적에도 그러하였고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So is it now I am a man
늙어진 뒤에도 그러하리라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아니라면 죽음만도 못하리 Or let me die!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원컨대 내 생의 하루하루가 And I cloud wish my days to be
자연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를….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어렸을 적 무지개를 보며 감동 받았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가 들어서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표현돼 있습니다. 생을 사는 내내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며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에 대한 감동과 경외심, 감격을 여전히 지니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언젠가부터 이러한 경외심과 감격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지개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먼저 무지개는 ‘물지게’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물’과 ‘지게’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지게’란 ‘호(戶)’나 ‘문(門)’을 뜻하는 것으로, 모양이 타원형으로 된 문을 가리킵니다. 즉 물지게란 ‘물로 된 문’이란 뜻이며, 이 ‘물지게’에서 ‘ㄹ’이 탈락하고 후대로 오면서 음이 변해 오늘날의 ‘무지개’가 된 것입니다. 영어 ‘rainbow’도 ‘rain’과 ‘활’을 뜻하는 ‘bow’가 합성돼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비가 온 후 활처럼 둥글게 휜 모양으로 뜬 무지개를 보며 붙여진 명칭입니다.
혹시 소망교회 로고를 기억하십니까? 로고 맨 아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노아의 홍수 이후 등장한 비둘기가 있습니다. 또 그 위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가 있습니다. 교회 로고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상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저는 이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미소를 떠올립니다. 둥근 타원형으로 그려진 무지개가 마치 우리를 향해 웃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 같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가 이 무지개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노아를 통해 인류의 새 역사를 쓰십니다.

하지만 노아의 이야기에는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노아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악을 한탄하신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더욱이 산 위에서 배를 만드는 노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엘리티즘은 사유화와 독점화의 위험성이 있지만, 기독교에서 사람을 뽑는 것은 공동체를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축복을 이웃과 세상에 나누기 위해 지도자를 뽑고 사람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온 세계 만민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것을 잘못 해석해 특권의식과 엘리트주의로 몰고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에서도 지양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인류의 새 역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었습니다. 흠이 없는 자였다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환경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긴 노아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건설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합니다.
그 기간이 도대체 얼마나 걸렸을까요? 혹자는 12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어쨌든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노아는 누가 뭐라 해도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내와 참음으로 모든 것을 견뎌 나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노아가 순종했고, 끝까지 그 일을 준행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마침내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홍수가 터집니다. 무려 40주야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고 땅에서는 지하수가 터졌습니다. 150일 동안이나 물이 땅에 가득했고, 물이 빠지는 기간만 해도 150일이나 걸렸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은 1년이나 물 위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노아의 심정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정말 막막했을 것입니다. 모든 숨 쉬는 것들과 동료들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노아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가슴 깊이 정신적 고통이 새겨져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토록 두려운 것이구나. 그분을 통해 살아 숨 쉰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큰 축복이구나. 이렇게 호흡하며 뛰놀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이러한 깨달음이 그가 방주에 있으면서 얻게 된 교훈입니다.
때문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을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셨기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고백을 드린 예배입니다. 창세기 8장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동물을 죽인 뒤 그의 피와 몸 전체를 태워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이는 생명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과 함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노아가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어서 21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21)

여기서 두 가지 눈에 띄는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자 선물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는,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어려서부터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바꾸기로 작정하십니다. 구원 방식의 변경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죄에는 교집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고 결단하십니다. 죄는 싫어하시지만,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선언의 증거가 무지개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생명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보다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더 크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을 위해 예배드릴 수 있게 허락하셨으며,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피를 대신 드리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아의 무지개 언약입니다.
나아가 노아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으로 확대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믿음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니, 우리는 희망을 놓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향해 축복하십니다. 놀라운 건 첫 창조 때 하신 말씀을 반복하신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9장 7절입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창세기 9:7 중)

이는 첫 인간과 생물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성장과 성숙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축복을 허락하시며, 다시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창세기 9:9 중)

여기에 ‘세우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노아를 보며 더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노아를 축복하며 하나님의 파트너로 삼겠다고 결단하신 것입니다. 이제 노아와 그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 땅에 편만하게 펼치게 하시겠단 의미입니다. 창세기 9장 14~15절입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창세기 9:14~15 중)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은 구름이 땅을 덮을 때마다 겁을 냈을 것입니다. 또 홍수가 나는 건 아닐지, 또다시 하나님의 심판에 선 것은 아닌지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다시는 홍수로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 보면, ‘기억하다’라는 말씀이 계속 등장합니다. 기억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억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들도 끊임없이 그 자녀를 머리에 떠올립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의미며,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자손과 생물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며 관심 갖고 소중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이자 약속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검은 구름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겁을 먹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아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한 홍수를 만난 것처럼 고난과 시련 가운데 낙담합니다. 삶이란 수많은 검은 구름을 만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며 이별의 아픔을 겪는 분도 있습니다. 새롭게 도전했다가 큰 실패를 겪고 넘어진 분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배신당하고 마음에 멍든 분도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거대한 먹구름이 우리를 뒤덮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대한 구름 앞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오히려 기대하며 무지개를 바라보라고! 질퍽질퍽하고 물이 가득한 곳을 보지 말고, 무지개가 떠 있는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구름 속에 이미 무지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한, 우리가 호흡하는 한,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생이 끝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생명의 희망,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 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고통과 외로움을 향해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너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슬픔과 낙심, 절망을 거절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에 무릎 꿇지 않는 이유는, 아침이 되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무지개 언약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 삶이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언약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의 존재가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던지면 깨지고 때리면 부서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합니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고린도후서 4장 8~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그는 엄청난 공격과 위협 속에 놓인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화가 담겨 있는 까닭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깨지면 깨질수록 그 보화가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연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무능함을 자랑하겠다. 나의 연약함이 오히려 강함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 그분을 통해 나의 연약함은 강함이 된다.” 그가 이렇게 담대히 선언할 수 있었던 건,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다가오는 많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든든한 방주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넘어지고 상처 나고 피폐한 상태로 굴복될지라도 주님 앞에 예배드리면, 주께서 다시 그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와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나는 앞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 인생의 전 필름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시며 내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리며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예배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이 생겨도 낙심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용기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버림받은 자들, 힘없는 자들의 스토리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한편으론 실패자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넘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땅만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 위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믿음과 용기를 허락하셨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미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의지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또한 앞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으로, 그분의 언약을 믿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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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 7 ~ 13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입니다.

최근 무지개를 본 적 있으십니까? 서울에 살다보면 빌딩에 가려 비가 온 후에도 무지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 색들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떠오른 무지개를 보면 참 아름답고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면을 보시면, 쌍 무지개가 보입니다. 또 들판에 멋지게 등장한 무지개도 있습니다. 무지개를 보면 왠지 따뜻하고 반가운 기분이 듭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도 ‘무지개’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무지개를 보며 찬탄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내 가슴은 뛰누나! A rainbow in the sky
내 어렸을 적에도 그러하였고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니 So is it now I am a man
늙어진 뒤에도 그러하리라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아니라면 죽음만도 못하리 Or let me die!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원컨대 내 생의 하루하루가 And I cloud wish my days to be
자연에 대한 경애로 이어지기를….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어렸을 적 무지개를 보며 감동 받았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가 들어서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표현돼 있습니다. 생을 사는 내내 자연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며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에 대한 감동과 경외심, 감격을 여전히 지니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언젠가부터 이러한 경외심과 감격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지개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먼저 무지개는 ‘물지게’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물’과 ‘지게’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지게’란 ‘호(戶)’나 ‘문(門)’을 뜻하는 것으로, 모양이 타원형으로 된 문을 가리킵니다. 즉 물지게란 ‘물로 된 문’이란 뜻이며, 이 ‘물지게’에서 ‘ㄹ’이 탈락하고 후대로 오면서 음이 변해 오늘날의 ‘무지개’가 된 것입니다. 영어 ‘rainbow’도 ‘rain’과 ‘활’을 뜻하는 ‘bow’가 합성돼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비가 온 후 활처럼 둥글게 휜 모양으로 뜬 무지개를 보며 붙여진 명칭입니다.
혹시 소망교회 로고를 기억하십니까? 로고 맨 아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노아의 홍수 이후 등장한 비둘기가 있습니다. 또 그 위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가 있습니다. 교회 로고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상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저는 이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미소를 떠올립니다. 둥근 타원형으로 그려진 무지개가 마치 우리를 향해 웃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 같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가 이 무지개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노아를 통해 인류의 새 역사를 쓰십니다.

하지만 노아의 이야기에는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노아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악을 한탄하신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더욱이 산 위에서 배를 만드는 노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엘리티즘은 사유화와 독점화의 위험성이 있지만, 기독교에서 사람을 뽑는 것은 공동체를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축복을 이웃과 세상에 나누기 위해 지도자를 뽑고 사람을 선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온 세계 만민의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것을 잘못 해석해 특권의식과 엘리트주의로 몰고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에서도 지양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인류의 새 역사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었습니다. 흠이 없는 자였다고 일컬음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환경이나 이성적인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긴 노아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건설하라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순종합니다.
그 기간이 도대체 얼마나 걸렸을까요? 혹자는 12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어쨌든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노아는 누가 뭐라 해도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인내와 참음으로 모든 것을 견뎌 나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노아가 순종했고, 끝까지 그 일을 준행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마침내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홍수가 터집니다. 무려 40주야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고 땅에서는 지하수가 터졌습니다. 150일 동안이나 물이 땅에 가득했고, 물이 빠지는 기간만 해도 150일이나 걸렸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은 1년이나 물 위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노아의 심정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정말 막막했을 것입니다. 모든 숨 쉬는 것들과 동료들이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노아의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가슴 깊이 정신적 고통이 새겨져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토록 두려운 것이구나. 그분을 통해 살아 숨 쉰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큰 축복이구나. 이렇게 호흡하며 뛰놀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 이러한 깨달음이 그가 방주에 있으면서 얻게 된 교훈입니다.
때문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을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셨기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고백을 드린 예배입니다. 창세기 8장 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세기 8:20)

동물을 죽인 뒤 그의 피와 몸 전체를 태워 드리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이는 생명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과 함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노아가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어서 21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21)

여기서 두 가지 눈에 띄는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자 선물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는,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음에도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어려서부터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악하다고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을 바꾸기로 작정하십니다. 구원 방식의 변경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죄에는 교집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고 결단하십니다. 죄는 싫어하시지만, 죄인은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선언의 증거가 무지개입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생명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보다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더 크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셨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삶을 위해 예배드릴 수 있게 허락하셨으며, 구약 시대에는 동물의 피를 대신 드리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게 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아의 무지개 언약입니다.
나아가 노아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언약으로 확대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믿음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통해 완성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시니, 우리는 희망을 놓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향해 축복하십니다. 놀라운 건 첫 창조 때 하신 말씀을 반복하신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9장 7절입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창세기 9:7 중)

이는 첫 인간과 생물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성장과 성숙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축복을 허락하시며, 다시 구원 역사를 시작하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9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창세기 9:9 중)

여기에 ‘세우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노아를 보며 더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노아를 축복하며 하나님의 파트너로 삼겠다고 결단하신 것입니다. 이제 노아와 그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 땅에 편만하게 펼치게 하시겠단 의미입니다. 창세기 9장 14~15절입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창세기 9:14~15 중)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은 구름이 땅을 덮을 때마다 겁을 냈을 것입니다. 또 홍수가 나는 건 아닐지, 또다시 하나님의 심판에 선 것은 아닌지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다시는 홍수로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 보면, ‘기억하다’라는 말씀이 계속 등장합니다. 기억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억합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들도 끊임없이 그 자녀를 머리에 떠올립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의미며,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자손과 생물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며 관심 갖고 소중히 여기시겠다는 말씀이자 약속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검은 구름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겁을 먹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아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한 홍수를 만난 것처럼 고난과 시련 가운데 낙담합니다. 삶이란 수많은 검은 구름을 만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며 이별의 아픔을 겪는 분도 있습니다. 새롭게 도전했다가 큰 실패를 겪고 넘어진 분도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배신당하고 마음에 멍든 분도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거대한 먹구름이 우리를 뒤덮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대한 구름 앞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오히려 기대하며 무지개를 바라보라고! 질퍽질퍽하고 물이 가득한 곳을 보지 말고, 무지개가 떠 있는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구름 속에 이미 무지개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한, 우리가 호흡하는 한,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생이 끝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생명의 희망,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 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고통과 외로움을 향해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너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슬픔과 낙심, 절망을 거절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에 무릎 꿇지 않는 이유는, 아침이 되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Never, Never, Never give up!” 무지개 언약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우리 삶이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언약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인간이기에, 자신의 존재가 질그릇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던지면 깨지고 때리면 부서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백합니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고린도후서 4장 8~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그는 엄청난 공격과 위협 속에 놓인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지만, 그 질그릇 안에 보화가 담겨 있는 까닭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깨지면 깨질수록 그 보화가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연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무능함을 자랑하겠다. 나의 연약함이 오히려 강함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 그분을 통해 나의 연약함은 강함이 된다.” 그가 이렇게 담대히 선언할 수 있었던 건,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다가오는 많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든든한 방주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넘어지고 상처 나고 피폐한 상태로 굴복될지라도 주님 앞에 예배드리면, 주께서 다시 그 상처를 싸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와 평안을 허락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나는 앞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 인생의 전 필름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시며 내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고백을 드리며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예배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이 생겨도 낙심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고, 용기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버림받은 자들, 힘없는 자들의 스토리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한편으론 실패자들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넘어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땅만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 위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믿음과 용기를 허락하셨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선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미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에 의지해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오히려 그것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또한 앞서 나아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다시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으로, 그분의 언약을 믿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2018년 4월 1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무지개 사랑의 언약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270, 30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창 9:7~1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무지개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원래 과 지개(작은 문)’의 합성어로 「하늘에 떠 있는 물의 문」이라는 뜻입니다소망교회 로고를 살펴보면 무지개(하나님의 언약) + 비둘기(홍수가 끝난 것을 알린 새) + 성경(언약의 말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런데 무지개가 두 개가 연속 있다면 웃는 모습처럼 보이지 않습니까마치 우리 죄인들절망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따뜻한 미소처럼 보입니다.

설교의 요약

   노아 이야기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한 사람노아를 택하였습니다그리고 노아에게 거대한 배인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비도 내리지 않는데왜 배를 만들라고 하셨을까사람들은 비웃었지만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첫째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주위 환경 혹은 이성적인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둘째 그는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수많은 질문을 내려놓고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마지막으로 그는 긴 세월을 일관성 있게 인내와 참으로 기다렸습니다(6:22).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큰 홍수가 일어났습니다하나님의 은혜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살아났지만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동시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은혜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그래서 방주에 나온 후에 노아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8:20).

   홍수로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인간의 죄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하나님께서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셨지만죄인과는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죄는 미워하셨지만죄인은 사랑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결국 하나님께서는 징계하고 심판하시기보다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쪽을 택하셨습니다그 분은 진노의 하나님이시며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진노보다 사랑이 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이에 새롭게 은혜의 언약을 열어주셨는데바로 무지개입니다노아와의 무지개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확대되고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피 흘리는 새 언약으로 완성됩니다.

   예배하는 노아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눈높이를 인간에게 맞추시고인간을 하나님과의 파트너로 삼겠다고 선언하십니다하나님의 기억의 대상에 우리 인간을 세우셨습니다(9:14~15). 하나님께서는 기억한다고 2번 반복하시는데하나님의 기억이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우리 인생에도 반드시 구름이 있습니다하지만 그런 거대한 구름을 보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기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왜냐하면 구름 속에 무지개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무지개란 우리에게 새로 시작하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질그릇처럼 연약하여 쉽게 깨어질 위험이 있지만우리가 깨어짐으로 질그릇 안에 보화(예수 그리스도)는 드러날 것입니다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바로 예배입니다어느 누구에게도 실패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인생에서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문제는 다시 시도하고다시 일어서야만 합니다그리고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바로 그 때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 미소를 보이시며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나누기

1.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노아의 모습과 나의 모습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2.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가장 먼저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가장 먼저 행한 일 혹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무엇입니까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3. 고난과 시련아픔과 실패 같은 구름 속에는 용기와 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이 숨겨져 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과 함께하는 용기를 갖고 일어서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고통과 아픔의 이유들이 있습니다구름 속에 숨겨진 무지개를 바라보듯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다시금 일어나는 믿음의 사람들말씀의 사람들약속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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