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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사랑으로!

마태복음 22: 34 ~ 40

김지철 목사

2018.01.21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원칙을, 예수님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유대 갈릴리에 등장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반응이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아, 너무 멋지다! 여태껏 듣지 못하던 말씀이다. 저분의 행위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모습이다. 저분이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라며 예수께 환호하며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도대체 누가 이런 궤변을 떠드는가? 저 친구 누구야? 정말 랍비 맞아? 율법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인가? 어떻게 저렇게 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가?”라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지켜 왔던 율법과 종교적 질서를 깨뜨리는 자로 예수님을 몰아가려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당대 종교와 정치 세계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 그분을 향한 적대자들의 공격은 절정에 이릅니다. ‘어떻게 올무에 걸리게 할까, 어떻게 지적해서 넘어뜨릴까’라고 수없이 기회를 엿보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들과 예수님의 몇 번의 대결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대결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합세해 예수께 던진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중 누구도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면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므로 억지로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기 상황에 몰아가려고, 즉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십니다. 동전 하나를 요청하시더니 동전에 그려진 가이사를 가리키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심으로 이 질문을 넘어가십니다.
두 번째 대결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과의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손에는 정치, 한 손에는 종교라는 두 권력을 동시에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서 그 후사를 세워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내를 그의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해서, 일곱이 다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마22:24~48) 하지만 그때도 예수님은 담대하면서도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마22:29~30,32 중) 이렇게 두 번째 난관도 넘어가셨습니다.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세 번째 대결은 바리새인들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에게 흠을 찾아내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본문 중 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태복음 22:35~36)

그때 예수님은 구약의 613개 계명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시며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율법의 수많은 조항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두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즉 “수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계명의 본뜻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 없는 종교적인 질문에만 매몰되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율법 수행에만 목매서는 안 된다. 사랑 없는 믿음, 그건 잘못된 길이다. 믿음에서 사랑을 빼면 그것은 종교일 뿐 참 된 신앙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대로 순종하며 살려 했던 바리새인들, 즉 유대교의 최고 종교 엘리트 집단입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율법 조항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곤 누가 그 조항에 걸려 넘어지는가를 살폈습니다. 오로지 의심의 해석학, 심판의 해석학, 미움의 해석학의 렌즈로 율법과 사람들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해석학, 사랑의 해석학으로 율법과 말씀을 이해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래야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순종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늘 부딪혔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약동하며 변화하는 생명의 믿음, 성숙의 믿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에서 사랑을 빼버리면 종교처럼 굳어집니다. 단지 의무 조항만 남을 뿐, 또 습관적인 종교 행태만 남을 뿐 생명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경계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1~12)

예배 형식도 잘 갖추었고, 살진 제물도 많고, 많은 것을 준비했지만, 과연 네 가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건 종교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죽은 신앙일 뿐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때, 사랑으로 온전한 믿음이 형성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그 위치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사랑이 빠지니 교만해집니다. 자꾸 오만한 자리로 들어갑니다. 스스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데만 힘을 쏟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내가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연약한 죄인의 모습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괜찮은 종교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헌금하고 열심히 예배드렸습니다.”라며 율법 조항 수행을 자부하며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잣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내 잘난 점을 드러내기 위해 옆 사람을 자꾸 끌어내리려는 모습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없는 흠도 찾아서 고발하려 합니다. 그래야 내 잘난 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너는 틀렸어.”라며 정죄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면서 교회 봉사의 주역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나의 ‘의’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내 안에 믿음이 가득한 만큼 사랑도 가득합니까? 혹시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종교 생활로 나의 믿음이 추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오래할 때 갖게 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의 모습이 보수적일 때 더욱 이 위험성이 커집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데 열중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믿음에서 사랑이 빠지는 것입니다. 혹은 그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머물 때, 우리의 믿음 또한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에로스에 머물게 되면 겁을 내면서 사랑합니다.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경외심이 공포와 무서움에만 멈춰지면, 신앙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착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해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며,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 구제하고 선한 생활을 하는 데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 같은데도 온전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의 믿음에 위기가 옵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침에도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께 내 것을 드립니다. 그런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이것까지 드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전 빈털터리가 됩니다. 이것만은 만지지 마세요. Don’t touch. 이건 내 것이에요.” 이렇게 온전히 내 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참 기쁨을 빼앗아 가는 방해물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상심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드린다고 하지만, 나도 대가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내 영광도 챙겨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가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쁨과 사랑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참 예배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사랑의 잔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 가슴이 기쁨으로 뛰놉니까? 주님께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를 때, 내 영혼이 기뻐 감사합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태복음 22:37~38)

사랑의 열정을 하나님께 쏟으라 하십니다. 사랑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곧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혹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헌신을 드리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느냐? 신앙은 바로 ‘Celebration’이다. 신앙은 축제다. 신앙은 사랑의 잔치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비유를 하시면서 보여주신 모습도 잔치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 곧 신앙이란 두려워 떠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율법에 매여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려움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에 예수님이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또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화석화 된 종교일 뿐이다.”
화석화 된 종교에는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도덕주의 혹은 윤리주의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잠깐의 기쁨은 있지만 그 기쁨마저 금방 앗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두려움의 장막을 훌훌 벗어버리면서 나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기쁘다’는 말과 ‘즐겁다’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 곧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믿음의 완성은 사랑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 그리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응답 곧 기쁨의 응답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중)

우리의 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곧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삼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기뻐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요, 하나님께도 큰 자랑이자 즐거움이 됩니다.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믿음이란 신앙의 목표까지 다 온 게 아닙니다. 이제 출발선에 선 상태입니다. 이제 내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가 올바른 믿음 생활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때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신앙에 의해 살지 말고, 내 신앙에 의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정성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다운 신앙의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랑을 하면서 나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이것만은 안 된다는 폐쇄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자세는 아직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마저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깨부수어야 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자존심, 그것마저도 깨뜨려야 하나님이 내 영혼 깊은 곳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인생을 이끌어가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믿음이 종교화 되지는 않았습니까?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주님, 내게 오시옵소서. 나를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고백을 올려 드리며 믿음 생활 하시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기쁨을 매일매일 느끼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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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 34 ~ 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원칙을, 예수님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유대 갈릴리에 등장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반응이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아, 너무 멋지다! 여태껏 듣지 못하던 말씀이다. 저분의 행위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모습이다. 저분이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라며 예수께 환호하며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도대체 누가 이런 궤변을 떠드는가? 저 친구 누구야? 정말 랍비 맞아? 율법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인가? 어떻게 저렇게 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가?”라며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지켜 왔던 율법과 종교적 질서를 깨뜨리는 자로 예수님을 몰아가려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당대 종교와 정치 세계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실 때, 그분을 향한 적대자들의 공격은 절정에 이릅니다. ‘어떻게 올무에 걸리게 할까, 어떻게 지적해서 넘어뜨릴까’라고 수없이 기회를 엿보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들과 예수님의 몇 번의 대결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대결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합세해 예수께 던진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질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중 누구도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면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므로 억지로 세금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매우 곤란한 질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기 상황에 몰아가려고, 즉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십니다. 동전 하나를 요청하시더니 동전에 그려진 가이사를 가리키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고 말씀하심으로 이 질문을 넘어가십니다.
두 번째 대결은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과의 논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손에는 정치, 한 손에는 종교라는 두 권력을 동시에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모세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서 그 후사를 세워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장가를 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으므로, 아내를 그의 동생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둘째도 셋째도 그렇게 해서, 일곱이 다 그렇게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맨 나중에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모두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마22:24~48) 하지만 그때도 예수님은 담대하면서도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하나님이시다.”(마22:29~30,32 중) 이렇게 두 번째 난관도 넘어가셨습니다.

믿음에 ‘사랑’을 더해야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세 번째 대결은 바리새인들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에게 흠을 찾아내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본문 중 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태복음 22:35~36)

그때 예수님은 구약의 613개 계명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시며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율법의 수많은 조항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란 두 계명으로 요약하십니다. 즉 “수많은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계명의 본뜻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 없는 종교적인 질문에만 매몰되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율법 수행에만 목매서는 안 된다. 사랑 없는 믿음, 그건 잘못된 길이다. 믿음에서 사랑을 빼면 그것은 종교일 뿐 참 된 신앙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대로 순종하며 살려 했던 바리새인들, 즉 유대교의 최고 종교 엘리트 집단입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율법 조항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곤 누가 그 조항에 걸려 넘어지는가를 살폈습니다. 오로지 의심의 해석학, 심판의 해석학, 미움의 해석학의 렌즈로 율법과 사람들을 들여다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해석학, 사랑의 해석학으로 율법과 말씀을 이해하셨습니다. 더욱이 그래야 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순종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늘 부딪혔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어야 약동하며 변화하는 생명의 믿음, 성숙의 믿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에서 사랑을 빼버리면 종교처럼 굳어집니다. 단지 의무 조항만 남을 뿐, 또 습관적인 종교 행태만 남을 뿐 생명 있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모습을 굉장히 경계하셨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사야 1:11~12)

예배 형식도 잘 갖추었고, 살진 제물도 많고, 많은 것을 준비했지만, 과연 네 가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건 종교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죽은 신앙일 뿐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때, 사랑으로 온전한 믿음이 형성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그 위치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사랑이 빠지니 교만해집니다. 자꾸 오만한 자리로 들어갑니다. 스스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지적하는 데만 힘을 쏟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내가 부족합니다. 연약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합니다.”라는 연약한 죄인의 모습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괜찮은 종교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헌금하고 열심히 예배드렸습니다.”라며 율법 조항 수행을 자부하며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잣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내 잘난 점을 드러내기 위해 옆 사람을 자꾸 끌어내리려는 모습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없는 흠도 찾아서 고발하려 합니다. 그래야 내 잘난 점이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있으면 “너는 틀렸어.”라며 정죄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면서 교회 봉사의 주역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나의 ‘의’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내 안에 믿음이 가득한 만큼 사랑도 가득합니까? 혹시 믿음만 있고 사랑은 없는 종교 생활로 나의 믿음이 추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오래할 때 갖게 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의 모습이 보수적일 때 더욱 이 위험성이 커집니다. 진리를 수호하는 데 열중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입니다. 믿음에서 사랑이 빠지는 것입니다. 혹은 그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사랑에 머물 때, 우리의 믿음 또한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에로스에 머물게 되면 겁을 내면서 사랑합니다.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경외심이 공포와 무서움에만 멈춰지면, 신앙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착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해서 예배드리고 헌금하며,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 구제하고 선한 생활을 하는 데 멈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 같은데도 온전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순간 우리의 믿음에 위기가 옵니까?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침에도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합니다. 하나님께 내 것을 드립니다. 그런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습니다. 내 마음을 완전히 열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이것까지 드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전 빈털터리가 됩니다. 이것만은 만지지 마세요. Don’t touch. 이건 내 것이에요.” 이렇게 온전히 내 놓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참 기쁨을 빼앗아 가는 방해물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상심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려드린다고 하지만, 나도 대가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내 영광도 챙겨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가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쁨과 사랑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참 예배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사랑의 잔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 가슴이 기쁨으로 뛰놉니까? 주님께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를 때, 내 영혼이 기뻐 감사합니까?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태복음 22:37~38)

사랑의 열정을 하나님께 쏟으라 하십니다. 사랑이 첫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곧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혹은 심판이 두려워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헌신을 드리라고 말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느냐? 신앙은 바로 ‘Celebration’이다. 신앙은 축제다. 신앙은 사랑의 잔치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비유를 하시면서 보여주신 모습도 잔치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 곧 신앙이란 두려워 떠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율법에 매여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려움에 갇혀 살아갑니다. 그런 모습에 예수님이 너무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또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화석화 된 종교일 뿐이다.”
화석화 된 종교에는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도덕주의 혹은 윤리주의로 사람을 몰아갑니다. 잠깐의 기쁨은 있지만 그 기쁨마저 금방 앗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두려움의 장막을 훌훌 벗어버리면서 나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기쁘다’는 말과 ‘즐겁다’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 곧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믿음의 완성은 사랑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 그리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의 응답 곧 기쁨의 응답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느헤미야 8:10 중)

우리의 힘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곧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삼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기뻐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기쁨이요, 하나님께도 큰 자랑이자 즐거움이 됩니다.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믿음이란 신앙의 목표까지 다 온 게 아닙니다. 이제 출발선에 선 상태입니다. 이제 내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자세가 올바른 믿음 생활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때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신앙에 의해 살지 말고, 내 신앙에 의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정성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다운 신앙의 기쁨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랑을 하면서 나 자신을 개방해야 합니다. 이것만은 안 된다는 폐쇄성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자세는 아직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마저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깨부수어야 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자존심, 그것마저도 깨뜨려야 하나님이 내 영혼 깊은 곳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인생을 이끌어가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믿음이 종교화 되지는 않았습니까? 믿음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주님, 내게 오시옵소서. 나를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고백을 올려 드리며 믿음 생활 하시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기쁨을 매일매일 느끼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1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믿음에서 사랑으로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9, 29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마 22:34~40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예수님께서 유대 갈릴리에 등장하셨을 때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두 가지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씀에 환호하는 반응과 궤변을 떠든다며 무시하는 반응입니다당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자신들이 지키고 있었던 삶의 영역과 질서를 깨트리는 범죄자로 예수님을 몰아가려 했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종교/정치의 중심지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적대자들과의 몇 번의 대결이 등장합니다(22). 첫째 대결 바리새인들헤롯 당원들이 합한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가?’에 관한 질문입니다(15~22). 둘째 대결 부활을 믿지 아니했던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입니다(23~33).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라고 질문합니다예수님께서는 구약의 613개의 계명으로 두 마디로 요약(하나님 사랑이웃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입니다그들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믿음의 방식이 달랐습니다그들은 율법을 의심과 심판미움으로 보았지만예수님께서는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셨습니다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은데 왜 달라지는 것일까그들도 믿음에서 출발했지만 결과는 종교가 되었습니다믿음에서 사랑이 빠지면 종교가 됩니다믿음이 종교가 되면 의무가 부과되고결국 종교적인 습관만 남습니다(1:11).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사랑을 잃어버리자 교만해졌고오만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문제점과 연약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잃어버렸습니다하지만 율법 조항들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자부하였고자신들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주 공격적이었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의롭다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우리들의 신앙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없습니까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하는 것이면 축복이요 은총인데이것을 나의 의로 생각하여 종교적 하나의 틀로 여기지 않았습니까우리의 믿음 생활이 오래될 때 갖게 되는 위험성입니다그 핵심적인 이유는 한 가지 ? 믿음에서 사랑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아가페의 신앙이 아니라예로스의 신앙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사랑하면서 자기가 겁을 내면서 사랑을 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경험이 없을 때 마음속에 기쁨까지 빼앗기는 위기를 맞이합니다자녀에게 부모는 어렵지만그분들과 함께 있으며 즐겁고 기쁘다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겼을 때 그런 기쁨이 있는가예배하러 올 때 가슴 설렘이 있는가?(37~38). 무서워서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자원함으로 사랑의 열정을 드리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축제잔치입니다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하지만 종교에는 기쁨이 없고의무만 있습니다사랑하라사랑은 기뻐하는 것이며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우리를 보고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3:17).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응답은 기뻐하는 것입니다(8:10).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한다면 믿음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믿음 위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두 번째는 이 사랑을 하게 되면 나를 열어야만 합니다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나를 개방해야만 합니다나의 자존감자존심을 깨트리고내 영혼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모셔야만 합니다그 때의 우리 믿음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됩니다.

나누기

1. 오늘 내가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2. 믿음에서 사랑이 빠지면 종교로 전락하며믿음이 종교가 되면 의무만 부과되고 습관만 남습니다.

     오늘 나의 믿음에는 사랑이 남겨져 있습니까나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종교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에 사랑을 더하고주님 주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종교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에 사랑을 더하게 하시고그 사랑 안에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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