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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가로막는 편견

마가복음 6: 1 ~ 6

김지철 목사

2012.04.29

편견으로 나누어진 분단국가,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5월 초에 개봉되는 한국영화, “코리아”의 시사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코리아”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렸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한반도가 분단된 후 처음으로 구성된 남북 단일팀이 탁구 복식경기에서 우승했던 실재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분단 40여년 만에 단일팀으로 모이게 된 남북의 선수들은, 그동안 서로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이념과 삶의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릅니다. 공통점이라면 국가를 대표하는 탁구선수라는 점뿐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40여 일 동안 합숙훈련을 하면서, 다른 사고방식과 서로를 향한 편견들을 극복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한국말을 하고 있기에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마음이 열리지도, 통한다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갈등 속에서 다투기도 합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은, 서로를 가로막는 편견들이 많고 삶의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인간적으로 진솔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안의 스포츠 정신은 서로 다른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갑니다. 결국 마지막에 마음과 힘을 합하여 세계 최강인 중국팀을 꺾고 우승한 남북의 선수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감격해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경기를 모두 마친 선수들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 앞에서 슬퍼합니다. 특히 현정화와 이분희가 눈물을 흘리며 나누는 이야기는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전화도, 편지도 못 쓰잖아…” 도대체 이런 이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주소 알려줘. 편지 쓸게.” 할 수도 없고, “전화번호 알려줘.”라고도 할 수 없는 이별. ‘아직도 편견을 갖고 이념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분단국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습니다.

편견이란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편견이란 무엇입니까? 한 방향만을 향해서 생각들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사고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하나의 생각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열리지 않고, 과거 속에 머무르려 하는 사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갖게 되면 변화를 싫어합니다. 아니 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앞뒤로 꽉 막혔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폐쇄적이 됩니다. 또한 핵심을 놓치고 주변적인 것들에 매달리게 됩니다. 내용보다는 외형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중심사상을 망각하고 주변적인 것에 집착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안식일법 논쟁은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법을 만드셨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작은 법조항 하나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에게 쉼을 주고 평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을, 오히려 ‘안식일 법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때로 과감하게 법을 어기셨습니다. 율법의 중심을 망각하고 주변적인 것을 중심처럼 부각시키는 바리새인들을 공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편견으로 마음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될까요? 남이 나보다 못났으면 조롱하고, 나보다 잘났으면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와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고, 그것들은 끊어버리고 제거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갖는 그 순간부터,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제한되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편견이 다른 모든 소통의 창구를 닫아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진실을 보는 눈을 닫아버립니다.

본문에도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 들르셔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예전의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가 잘 아는 청년이 맞는데,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이지? 옛날에는 조용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들을 할 수 있지?’ 그들은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마가복음 6:2)

놀란 나사렛 사람들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며 질문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놀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과거 그들이 보았던 것, 그들이 경험한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 그들에게 익숙했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찬사로 예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놀랄 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감탄과 감동입니다. 감동을 하게 되면, 곧 호기심과 관심이 생깁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타지 않는 덤불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게 뭘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떨기나무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경험으로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생각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에이, 별 것 아닐 거야. 허상이거나 거짓말일 거야.’하며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가복음 6:3)

그들은 놀랐지만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놀랐지만 그것 때문에 감격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기이하게 여겼으나 관심가질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식과 앎이 깊지 않으면서, 마치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건방져지면 더욱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삐뚤어진 모습으로 진실을 왜곡하게 되거나 아예 진실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따라온 반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를 배척했다는 말은, 곧 꺼려하고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심지어 깎아내리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때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예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편견은 성숙을 방해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편견 자체도 무섭지만, 편견에 감정이 섞이면 더욱 위험해집니다. 감정적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고, 밉게 보입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 마음에 안 듭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치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에게 “너 참 많이 컸다”라고 말하듯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적대시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적대적인 모습을 보시면서 실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씁쓸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마가복음 6:4)

어설픈 친숙함과 어설픈 지식은, 더 깊고 바르게 아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성할 이유와 기회를 없애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에 태도입니다. 편견은 성숙의 방해물이자 변화의 적입니다.
예수님은, 편견을 갖고 적대하는 나사렛 사람에게 능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보면서도 믿지 않고, 들으면서도 경청하지 않으니 참 이상하다. 어떻게 저렇게 마음이 완악한가’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6:5~6)

예수님께로 마음을 열 때,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시대에는 수많은 편견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때로는 올바른 사람을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편견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에 대한 편견, 탈북자에 대한 편견, 학력이나 외모에 대한 편견, 여성에 대한 편견 등 이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부모와 자녀간의 편견이 심각해지면서 대화가 단절되는 가정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념적인 편견들도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들이 우리의 마음을 좀먹어 사나운 인간관계를 만들고, 크게는 이 사회를 냉소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으면 편견을 버릴 수 있습니까? 어쩌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큰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도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낳은 내 아들과 딸도 부모인 나와 다릅니다. 먼저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배워야 할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선입관, 나의 고정관념, 나의 가치관만을 끌어안으려고 합니다. 열린 마음 없이 나의 것을 고집하면, 그때부터 편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을 결단하는 용기, 새 것을 향해서 열려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기갱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자기갱신, 다시 말하면 자기 변화입니다. 나의 것은 가장 밑바닥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지혜와 지식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 그래서 새로운 지혜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편견을 갖기 시작하면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감정적 분노를 멈추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옛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婦無可短 踵如鷄卵)’는 말이 있습니다. 흠잡을 것이 없는데, 밉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억지로 잘못을 지어낸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생각에 악한 감정, 미운 감정이 깊게 들어가면 분노가 우리를 붙잡게 되고, 그것은 삶의 모든 인간관계들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편견은 반드시 거짓을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부추기는 선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나은 이유는, 의견을 맞추는 과정에서 설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다릅니다. 이념에 맞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리고, 자신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선동합니다. 잘못된 감정적 편견이 사람들을 이끌면 엄청난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세 번째,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보다 핵심과 본질을 살피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도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변덕스러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와 생명이신 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우리의 삶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나의 생각과 판단력의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의 판단력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향해서 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편견들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편견들을 깨뜨리고 본질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 받은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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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 1 ~ 6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편견으로 나누어진 분단국가,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5월 초에 개봉되는 한국영화, “코리아”의 시사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코리아”는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렸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한반도가 분단된 후 처음으로 구성된 남북 단일팀이 탁구 복식경기에서 우승했던 실재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분단 40여년 만에 단일팀으로 모이게 된 남북의 선수들은, 그동안 서로의 삶의 자리가 얼마나 달랐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같은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이념과 삶의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릅니다. 공통점이라면 국가를 대표하는 탁구선수라는 점뿐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40여 일 동안 합숙훈련을 하면서, 다른 사고방식과 서로를 향한 편견들을 극복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됩니다. 모두가 한국말을 하고 있기에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마음이 열리지도, 통한다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갈등 속에서 다투기도 합니다. 이해하고 싶어도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은, 서로를 가로막는 편견들이 많고 삶의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인간적으로 진솔한 모습을 서로에게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안의 스포츠 정신은 서로 다른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갑니다. 결국 마지막에 마음과 힘을 합하여 세계 최강인 중국팀을 꺾고 우승한 남북의 선수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감격해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경기를 모두 마친 선수들이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 앞에서 슬퍼합니다. 특히 현정화와 이분희가 눈물을 흘리며 나누는 이야기는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전화도, 편지도 못 쓰잖아…” 도대체 이런 이별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주소 알려줘. 편지 쓸게.” 할 수도 없고, “전화번호 알려줘.”라고도 할 수 없는 이별. ‘아직도 편견을 갖고 이념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분단국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습니다.

편견이란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편견이란 무엇입니까? 한 방향만을 향해서 생각들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사고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하나의 생각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 열리지 않고, 과거 속에 머무르려 하는 사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갖게 되면 변화를 싫어합니다. 아니 변화 자체를 거부합니다. ‘앞뒤로 꽉 막혔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폐쇄적이 됩니다. 또한 핵심을 놓치고 주변적인 것들에 매달리게 됩니다. 내용보다는 외형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중심사상을 망각하고 주변적인 것에 집착했습니다. 예수님과의 안식일법 논쟁은 편견에 사로잡힌 그들의 모습을 확연히 보여줍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법을 만드셨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작은 법조항 하나에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사람에게 쉼을 주고 평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안식일을, 오히려 ‘안식일 법을 위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예수님은 때로 과감하게 법을 어기셨습니다. 율법의 중심을 망각하고 주변적인 것을 중심처럼 부각시키는 바리새인들을 공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편견으로 마음이 가득 차면 어떻게 될까요? 남이 나보다 못났으면 조롱하고, 나보다 잘났으면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와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고, 그것들은 끊어버리고 제거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갖는 그 순간부터,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제한되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마음으로부터 깨닫는 것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편견이 다른 모든 소통의 창구를 닫아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진실을 보는 눈을 닫아버립니다.

본문에도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 들르셔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예전의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가 잘 아는 청년이 맞는데,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이지? 옛날에는 조용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들을 할 수 있지?’ 그들은 기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마가복음 6:2)

놀란 나사렛 사람들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며 질문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놀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과거 그들이 보았던 것, 그들이 경험한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 그들에게 익숙했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찬사로 예수님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놀랄 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감탄과 감동입니다. 감동을 하게 되면, 곧 호기심과 관심이 생깁니다.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타지 않는 덤불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저게 뭘까?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떨기나무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경험으로 놀란 마음을 억누르고 생각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에이, 별 것 아닐 거야. 허상이거나 거짓말일 거야.’하며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마가복음 6:3)

그들은 놀랐지만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놀랐지만 그것 때문에 감격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기이하게 여겼으나 관심가질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식과 앎이 깊지 않으면서, 마치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건방져지면 더욱 위험합니다. 그렇게 되면, 삐뚤어진 모습으로 진실을 왜곡하게 되거나 아예 진실을 전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나사렛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따라온 반응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를 배척했다는 말은, 곧 꺼려하고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심지어 깎아내리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그때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고, 예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편견은 성숙을 방해하고 변화를 거부합니다.

편견 자체도 무섭지만, 편견에 감정이 섞이면 더욱 위험해집니다. 감정적 편견을 가지고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싫고, 밉게 보입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 마음에 안 듭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치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에게 “너 참 많이 컸다”라고 말하듯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적대시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의 적대적인 모습을 보시면서 실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씁쓸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마가복음 6:4)

어설픈 친숙함과 어설픈 지식은, 더 깊고 바르게 아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성할 이유와 기회를 없애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에 태도입니다. 편견은 성숙의 방해물이자 변화의 적입니다.
예수님은, 편견을 갖고 적대하는 나사렛 사람에게 능력을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보면서도 믿지 않고, 들으면서도 경청하지 않으니 참 이상하다. 어떻게 저렇게 마음이 완악한가’ 하고 탄식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6:5~6)

예수님께로 마음을 열 때,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시대에는 수많은 편견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때로는 올바른 사람을 매장시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편견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에 대한 편견, 탈북자에 대한 편견, 학력이나 외모에 대한 편견, 여성에 대한 편견 등 이외에도 많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부모와 자녀간의 편견이 심각해지면서 대화가 단절되는 가정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념적인 편견들도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들이 우리의 마음을 좀먹어 사나운 인간관계를 만들고, 크게는 이 사회를 냉소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뛰어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믿으면 편견을 버릴 수 있습니까? 어쩌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큰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편견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도 나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낳은 내 아들과 딸도 부모인 나와 다릅니다. 먼저는,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 배워야 할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히려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선입관, 나의 고정관념, 나의 가치관만을 끌어안으려고 합니다. 열린 마음 없이 나의 것을 고집하면, 그때부터 편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음을 결단하는 용기, 새 것을 향해서 열려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기갱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자기갱신, 다시 말하면 자기 변화입니다. 나의 것은 가장 밑바닥에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지혜와 지식을 향해서 마음을 여는 것, 그래서 새로운 지혜로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편견을 갖기 시작하면 세상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두 번째, 감정적 분노를 멈추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옛말에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婦無可短 踵如鷄卵)’는 말이 있습니다. 흠잡을 것이 없는데, 밉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억지로 잘못을 지어낸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생각에 악한 감정, 미운 감정이 깊게 들어가면 분노가 우리를 붙잡게 되고, 그것은 삶의 모든 인간관계들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편견은 반드시 거짓을 만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부추기는 선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나은 이유는, 의견을 맞추는 과정에서 설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다릅니다. 이념에 맞지 않는 것은 제거해버리고, 자신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선동합니다. 잘못된 감정적 편견이 사람들을 이끌면 엄청난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세 번째,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보다 핵심과 본질을 살피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도 본질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변덕스러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와 생명이신 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우리의 삶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나의 생각과 판단력의 중심에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의 판단력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 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의 진리와 생명을 향해서 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시대의 편견들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들인 것입니다. 편견들을 깨뜨리고 본질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 받은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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