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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생명력을 갖게 하소서!

마태복음 13: 31 ~ 33

김지철 목사

2014.01.26

우리에게는 창조적 영성이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 1박2일로 교역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남이섬 근처에 있는 수양관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그날 눈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나 모두 위험한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우리에게는 눈이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산하를 보며 감탄사를 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감탄사를 발하셨던 모습이 떠오르며, “좋구나! 정말 좋구나!” 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마음 속으로 멋지다, 아름답다 찬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 덮힌 자연도 나를 향해서 “우리가 보니 너도 좋구나!” 하고 응답하는 것 같은 상호 기쁨을 느꼈습니다.
창조의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그 창조적인 자리에 들어오도록, 창조의 영성을 갖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 하나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자연의 섭리와 창조의 섭리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셨습니다. 특별히 시인들이 이런 창조의 영성에 가까이 있습니다. 다음은 구상이 쓴 ‘한 알의 사과 속에는’이라는 시입니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한 알의 사과 속에 창조의 비밀이 들어있는 것을 보며 경탄하는 시입니다. 또 다른 시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타고르가 쓴 시입니다.

나무에게 부탁했네
하나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그러자 나무는 꽃을 피웠네

나무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야? 네가 말해 줄 수 있니?” 하고 물으니 예쁜 꽃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사과 속에서 우주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나무와 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는 이 창조적 영성을 갖게 되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집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 산과 나무, 식물과 동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만드신 피조물들입니다. 우리가 이 피조물에게 가까이 다가가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야” 하고 불러보면, 자연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로마서 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 새들을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신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영광보다 크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보는 눈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자연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담겨 있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읽다보면, 예수님은 일상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만들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만물의 현상을 보시며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동물과 식물을 이용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겨자씨를 예로 든 오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천국 비유를 들으며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웅장하지 않을까? 거대한 것이 아닐까?’ 거대한 로마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역사의 전환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땅이 흔들릴 만큼의 굉음과 엄청난 변화, 그로 인한 충격을 꿈꾸면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 보이지 않을 만큼 숨겨진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2)

여기서 ‘작은 것’은 겨자씨를 말합니다. 즉 이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유대 랍비 문서를 보면, 작은 것을 표현할 때 보통 겨자씨를 예로 듭니다. 겨자씨란 직경이 1mm도 안됩니다. 또한 무게는 1mg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을 내면 정원 식물 가운데 가장 크게 자랍니다. 1m, 2m, 3m까지 자라납니다. 그래서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쉬기도 하고, 사람이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하기 위해 찾는 그늘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 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작은 것은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작은 것을 경험할 때 실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주어지면 의기소침해집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기보다 그냥 주저앉으려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드러나는 사건이 구약에도 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 온 이들 중 열 명이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작습니다. 저들은 장군처럼 거대한 백성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나 자신을 보니 마치 메뚜기와 같습니다. 벌레 같습니다.” 자존감이 결여된 말들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묶이니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약속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작은 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자들, 연약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보면서 저가 무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냐고, 미쳤다, 돌았다, 무슨 선한 것이 나사렛 같은 데서 나오느냐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 작은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일까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작은 꿈, 작은 노력, 작은 정성, 작은 사랑, 작은 헌신이 위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생명이 있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보다 큰 ‘모래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어떤 것입니까? 변화하는 것입니다. 정지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성장하고, 성숙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정말 볼품없이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자라니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만큼 커집니다. 이 자라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 아들과 딸을 키울 때 제일 큰 걱정이 무엇입니까? 자라지 않을 때, 먹지 않고 성장하지 않을 때 부모의 고통은 너무나 큽니다. 다섯 살짜리는 다섯 살다워야 하지 않습니까? 열 살짜리는 열 살답게, 열다섯 살짜리는 청소년답게, 청년은 늠름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는 걱정과 근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하나님의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연륜이 오래 되면 성장하고 성숙해야 되는데, 그저 처음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바뀌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높은 방어막을 부수어야 합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이, 변화가 시작됩니다.
생명의 씨앗은 큰 바위도 부서뜨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내 고정관념과 나의 옛 자리의 모든 것을 부수는 능력이 말씀 안에서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말씀이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사건 중 하나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입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청년 다윗은 한없이 작았습니다. 다윗은 아마 겁먹었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골리앗보다 더 큰 하나님, 골리앗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 앞에 그의 무서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은 실재하는 힘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습니까? 겨자씨 같은 믿음의 생명력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까? 내 안에 생명력이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생명력이 있는 믿음, 겨자씨와 같은 믿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힘입니다. 죽은 것은 바위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낙엽도 떨어집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꽃도 시들면 떨어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랑할 것 많은 삶이라 해도 숨이 멈추면 땅 속으로 묻히고 맙니다. 그래서 죽은 것은 리셋이 안 됩니다. 슬프고 가슴 아파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울고 또 울어도 되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리셋이 됩니다. 그리고 성장합니다.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리셋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리셋이 되어야 회복이 되고, 그래야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덮힌 흙을 겨자씨가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었을까요?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저항하는 힘이고 도전하는 힘입니다. 모험하는 힘입니다. 역동적인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말씀을 향해서 솟구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 기다리고 인내하는 힘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거대한 나무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인고하며 지냈을까요? 작은 씨가 땅 속에서 꿈틀거리며 흙을 제치고 나올 때까지, 하늘을 향해서 줄기가 뻗어나갈 때까지, 가지가 펼쳐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그 사이 비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내렸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지나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월을 보면 얼마나 잦은 비바람과 눈보라, 폭풍우가 우리를 스쳐 지나갔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곧 내게 인내의 힘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게 기다림의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력이란, 버티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님을,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것임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 남은 위한 축복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겨자씨가 나무처럼 2m, 3m 크게 줄기를 뻗어 거기에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 커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위한 축복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위해 섬길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룩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좋은 전염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전염력, 사랑의 전염력, 나눔의 전염력이 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마음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정해도 남을 향해서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얼굴이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력을 갖고 다시 일어서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씨더냐? 그러나 내가 예수의 생명력을 네게 보여줬다.”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 리셋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생명의 씨앗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의 씨앗, 믿음의 씨앗을 마음 속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내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게 하시옵소서.’ 기도하며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갖고, 이 땅 위에서 생명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사람들이구나.”하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그러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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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 31 ~ 33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우리에게는 창조적 영성이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 1박2일로 교역자들과 함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남이섬 근처에 있는 수양관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그날 눈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나 모두 위험한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우리에게는 눈이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산하를 보며 감탄사를 발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후에 감탄사를 발하셨던 모습이 떠오르며, “좋구나! 정말 좋구나!” 하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마음 속으로 멋지다, 아름답다 찬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 덮힌 자연도 나를 향해서 “우리가 보니 너도 좋구나!” 하고 응답하는 것 같은 상호 기쁨을 느꼈습니다.
창조의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후 그 창조적인 자리에 들어오도록, 창조의 영성을 갖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 하나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자연의 섭리와 창조의 섭리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주셨습니다. 특별히 시인들이 이런 창조의 영성에 가까이 있습니다. 다음은 구상이 쓴 ‘한 알의 사과 속에는’이라는 시입니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의 땀과 사랑이 영생(永生)한다.

한 알의 사과 속에 창조의 비밀이 들어있는 것을 보며 경탄하는 시입니다. 또 다른 시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타고르가 쓴 시입니다.

나무에게 부탁했네
하나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그러자 나무는 꽃을 피웠네

나무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야? 네가 말해 줄 수 있니?” 하고 물으니 예쁜 꽃을 피웠다는 것입니다.
사과 속에서 우주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나무와 꽃을 보면서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는 이 창조적 영성을 갖게 되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집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 산과 나무, 식물과 동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만드신 피조물들입니다. 우리가 이 피조물에게 가까이 다가가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야” 하고 불러보면, 자연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로마서 8:19)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지 않습니까?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 새들을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신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영광보다 크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을 보는 눈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자연이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담겨 있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초청하는 삶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읽다보면, 예수님은 일상의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만들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연만물의 현상을 보시며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동물과 식물을 이용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겨자씨를 예로 든 오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고 거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천국 비유를 들으며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웅장하지 않을까? 거대한 것이 아닐까?’ 거대한 로마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역사의 전환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땅이 흔들릴 만큼의 굉음과 엄청난 변화, 그로 인한 충격을 꿈꾸면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것, 보이지 않을 만큼 숨겨진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32)

여기서 ‘작은 것’은 겨자씨를 말합니다. 즉 이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성경과 유대 랍비 문서를 보면, 작은 것을 표현할 때 보통 겨자씨를 예로 듭니다. 겨자씨란 직경이 1mm도 안됩니다. 또한 무게는 1mg도 안됩니다. 그런데 이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을 내면 정원 식물 가운데 가장 크게 자랍니다. 1m, 2m, 3m까지 자라납니다. 그래서 그 가지에 새들이 와서 쉬기도 하고, 사람이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하기 위해 찾는 그늘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 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작은 것은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작은 것을 경험할 때 실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향해 달려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주어지면 의기소침해집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기보다 그냥 주저앉으려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드러나는 사건이 구약에도 있습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 온 이들 중 열 명이 이렇게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작습니다. 저들은 장군처럼 거대한 백성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나 자신을 보니 마치 메뚜기와 같습니다. 벌레 같습니다.” 자존감이 결여된 말들이었습니다. 작은 것에 묶이니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약속이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도 작은 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자들, 연약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을 보면서 저가 무슨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냐고, 미쳤다, 돌았다, 무슨 선한 것이 나사렛 같은 데서 나오느냐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것들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 작은 것 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일까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작은 꿈, 작은 노력, 작은 정성, 작은 사랑, 작은 헌신이 위대한 역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과 생명이 있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보다 큰 ‘모래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지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있으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어떤 것입니까? 변화하는 것입니다. 정지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성장하고, 성숙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정말 볼품없이 작은 것이지만, 이것이 자라니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만큼 커집니다. 이 자라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 아들과 딸을 키울 때 제일 큰 걱정이 무엇입니까? 자라지 않을 때, 먹지 않고 성장하지 않을 때 부모의 고통은 너무나 큽니다. 다섯 살짜리는 다섯 살다워야 하지 않습니까? 열 살짜리는 열 살답게, 열다섯 살짜리는 청소년답게, 청년은 늠름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기쁨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는 걱정과 근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하나님의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연륜이 오래 되면 성장하고 성숙해야 되는데, 그저 처음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바뀌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높은 방어막을 부수어야 합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이, 변화가 시작됩니다.
생명의 씨앗은 큰 바위도 부서뜨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을 때, 내 고정관념과 나의 옛 자리의 모든 것을 부수는 능력이 말씀 안에서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명은 죽은 것입니다. 말씀이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사건 중 하나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입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청년 다윗은 한없이 작았습니다. 다윗은 아마 겁먹었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골리앗보다 더 큰 하나님, 골리앗을 만드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 앞에 그의 무서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은 실재하는 힘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이 있습니까? 겨자씨 같은 믿음의 생명력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까? 내 안에 생명력이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생명력이 있는 믿음, 겨자씨와 같은 믿음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힘입니다. 죽은 것은 바위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낙엽도 떨어집니다. 아름답게 피었던 꽃도 시들면 떨어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자랑할 것 많은 삶이라 해도 숨이 멈추면 땅 속으로 묻히고 맙니다. 그래서 죽은 것은 리셋이 안 됩니다. 슬프고 가슴 아파도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울고 또 울어도 되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은 리셋이 됩니다. 그리고 성장합니다.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 넘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리셋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리셋이 되어야 회복이 되고, 그래야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덮힌 흙을 겨자씨가 어떻게 뚫고 나올 수 있었을까요?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저항하는 힘이고 도전하는 힘입니다. 모험하는 힘입니다. 역동적인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말씀을 향해서 솟구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 기다리고 인내하는 힘입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거대한 나무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인고하며 지냈을까요? 작은 씨가 땅 속에서 꿈틀거리며 흙을 제치고 나올 때까지, 하늘을 향해서 줄기가 뻗어나갈 때까지, 가지가 펼쳐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요? 그 사이 비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내렸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지나갔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의 세월을 보면 얼마나 잦은 비바람과 눈보라, 폭풍우가 우리를 스쳐 지나갔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곧 내게 인내의 힘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게 기다림의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생명력이란, 버티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님을,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것임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 남은 위한 축복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겨자씨가 나무처럼 2m, 3m 크게 줄기를 뻗어 거기에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 커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위한 축복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위해 섬길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 수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룩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력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좋은 전염력이 있습니다. 생명의 전염력, 사랑의 전염력, 나눔의 전염력이 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마음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정해도 남을 향해서는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얼굴이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력을 갖고 다시 일어서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가장 작은 씨더냐? 그러나 내가 예수의 생명력을 네게 보여줬다.”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 리셋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생명의 씨앗을 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의 씨앗, 믿음의 씨앗을 마음 속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내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자라나게 하시옵소서.’ 기도하며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갖고, 이 땅 위에서 생명의 씨앗을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사람들이구나.”하는 인정과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그러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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