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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

요한복음 3: 16

김지철 목사

2018.01.14

사랑에는 에로스와 아가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음,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성경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믿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면서 그 사랑에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보여주는 믿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에서 ‘사랑’이란 헬라어로 ‘아가페’입니다. 또 이 아가페와 대조되는 ‘에로스’라는 사랑의 개념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에로스는 남녀 간의 정욕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에로스는 고대 헬라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열정과 위대한 사상으로의 인간의 집념을 나타날 때도 에로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꿈을 성취하기 위한 혹은 야망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열정적인 모습이 에로스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로스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한편 에로스와 대비되는 것이 아가페입니다. 어쩌면 이만큼 인간 사회가 발전해 온 것도 그 밑바탕에 에로스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에로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랑이 있는데,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 인간이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전할 때 에로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가페라는 단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아가페의 구체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유 자체가 다릅니다. 에로스는 사랑의 대상이 멋지기 때문에, 아름다우므로 사랑을 시작합니다. 잘나가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명예와 권력이 높기 때문에, 즉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에로스의 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가페는 전혀 다릅니다. 사랑의 대상이 별 볼 일 없어도, 볼품없어도, 사랑스럽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가페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장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8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는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고, 심지어 원수 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도 아가페였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셨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즉 누구도 찾지 않고 만나지 않던 죄인과 세리들, 당대 가장 비난 받고 조롱 받던 사람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안에 있던 아가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버려진 자들을 만나길 즐거워하셨습니다. 이 땅의 죄인들, 연약한 사람들, 원수 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예수님이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에로스를 넘어 아가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가페는 내 이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추구합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고통과 어려움의 자리에 있을 때 동참하려고 합니다. 내 만족보다는 상대방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이런 사랑을 찾아본다면 아마 어머니의 사랑이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반면 에로스는 끊임없이 자기애에 기초합니다. 자기만족, 자기실현을 위한 갈망과 욕구가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본심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란 사랑의 대상을 끊임없이 소유하고 독점하려는 특징을 보입니다. 때로는 향락적으로, 또 때로는 탐닉하는 모습으로 그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인격인 사람을 비인격화 시켜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보고 이용하는 것이 에로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도 이 에로스가 들어와 있습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복을 위해 이용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면 하나님이 존재할 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진 것 같으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기복주의 신앙의 천박함입니다. 신앙에서 우리가 이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예배드리면서도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기쁘지가 않습니다. 감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시기와 분노가 잦아지며, 심지어 다툼으로 번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직장에서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기업의 CEO입니까? 소위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에로스적 탐욕을 버리지 못하면, 나 때문에 공동체가 흔들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무엇일까요? 영적 지도자들이 예배도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교회를 바라보니 거기서 내 것을 챙깁니다. 인간적인 탐욕을 거기서 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가 흔들릴 뿐만 아니라 무너지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와 은총을 받으면서 먼저 드려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르게 믿음 생활을 행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반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중)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믿음이 아닌 것부터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미신이 아닙니다. 미신이란 무엇입니까? 믿지 말아야 할 것,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우리 삶에 이 미신이 알게 모르게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4’라는 숫자를 싫어합니다. ‘13’이란 숫자도 불길하게 느낍니다. 병원에 가도 엘리베이터에 ‘4’라는 숫자는 없습니다. 죽을 사(死)와 음가가 같아 불길하다고 여겨 삭제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가 미신에 붙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이 깨지면 오늘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날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낙방한다는 말도 합니다. 꿈에 돼지가 보이면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묶여 버립니다. 왜곡된 생각에 자기 삶을 맞춰 나가는 것,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미신적 행태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우상들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는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이성을 초월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요구됩니다.
유대 전승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한 후 돌아와 보니, 그 많던 신상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가장 큰 우상 손에는 큰 방망이도 쥐어져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이 광경을 보며 너무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줄 알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상들이 서로 배고프다고 싸우면서, 제일 큰 우상이 다른 작은 우상들을 몽둥이로 때려 부셨습니다.” 이때 아버지 데라가 “야, 이놈아 네가 날 놀리느냐?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다른 우상을 부순단 말이냐?”라고 했더니, 아들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우리를, 우리 인간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우상이 있습니까? 거짓되고 잡된 미신들이 우리를 얼마나 겁먹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겁박하는 이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더는 보이는 세계가 우리를 협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앎과 믿음의 순환관계를 통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미신적인 우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신념입니다. 때로는 이 신념이 집단적으로 포장돼 이데올로기로 나타납니다. 이데올로기는 당파성을 지닙니다. 자기 신념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들어가면, 그와 동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적대자가 됩니다. 여기에 신념의 위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고 거기에 고착되면, 새로운 정보나 사상에 폐쇄적이게 됩니다. 자신을 신념에 가두고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자기 생각에만 머무는 신념은 독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비하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희생하는 존재로 세워두는 여성 차별적인 관념도 있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지능에 차이가 난다는 인종차별적인 구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집단적인 사고로 나타나는 것이 왜곡된 이데올로기입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기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때로 진영논리에 따라 사람을 가릅니다. 그러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좌파와 우파 등으로 구별하는 순간 동지가 될 수 없습니다. 적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개방성을 잃어버린 고정관념은 아주 위험하며,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왜곡된 신념과 고정관념, 편견을 깨뜨립니다. 우리의 사상, 신념, 생각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해체시키라는 것입니다. 나의 신념, 왜곡된 생각, 내가 가진 거짓과 악, 부정적인 사고, 독선적인 방식 등을 해체시켜야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나아갈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비이성적인 맹신이 아닙니다. 헛된 것을 믿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인 물음에 자신을 개방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첫 번째 단계인 분별력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지성과 동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독일 대학의 시작 단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 의학, 법학이 시작입니다. 신학은 이성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성을 넘어서는 계시를 다룹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라는 사실, 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의미, 인생의 참다운 목표가 무엇인지를 기독교 신학이 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인문학 중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반 지성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히브리 전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론을 제공합니다. 믿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더 알게 되고, 더 믿으면 더 알게 된다는 순환적인 인식론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내 생각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목표가 있는 믿음입니다. 약속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지혜와 진리, 평안, 인간의 모든 문제와 심지어 죽음에 대한 대답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일단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길을 가게 하시며 부활의 자리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생명의 축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믿음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으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에로스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가페를 바라보며 그 사랑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사랑의 여정을 향해 결단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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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 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에는 에로스와 아가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믿음,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성경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믿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면서 그 사랑에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보여주는 믿음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에서 ‘사랑’이란 헬라어로 ‘아가페’입니다. 또 이 아가페와 대조되는 ‘에로스’라는 사랑의 개념도 알고 있습니다. 보통 에로스는 남녀 간의 정욕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에로스는 고대 헬라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열정과 위대한 사상으로의 인간의 집념을 나타날 때도 에로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꿈을 성취하기 위한 혹은 야망을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열정적인 모습이 에로스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에로스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한편 에로스와 대비되는 것이 아가페입니다. 어쩌면 이만큼 인간 사회가 발전해 온 것도 그 밑바탕에 에로스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에로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랑이 있는데,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사랑, 인간이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전할 때 에로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가페라는 단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아가페의 구체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유 자체가 다릅니다. 에로스는 사랑의 대상이 멋지기 때문에, 아름다우므로 사랑을 시작합니다. 잘나가기 때문에,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명예와 권력이 높기 때문에, 즉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에로스의 본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가페는 전혀 다릅니다. 사랑의 대상이 별 볼 일 없어도, 볼품없어도, 사랑스럽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이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가페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장 6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6)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8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는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고, 심지어 원수 된 우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도 아가페였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셨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즉 누구도 찾지 않고 만나지 않던 죄인과 세리들, 당대 가장 비난 받고 조롱 받던 사람들을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안에 있던 아가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버려진 자들을 만나길 즐거워하셨습니다. 이 땅의 죄인들, 연약한 사람들, 원수 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마음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는 것을 예수님이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에로스를 넘어 아가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가페는 내 이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추구합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고통과 어려움의 자리에 있을 때 동참하려고 합니다. 내 만족보다는 상대방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이런 사랑을 찾아본다면 아마 어머니의 사랑이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반면 에로스는 끊임없이 자기애에 기초합니다. 자기만족, 자기실현을 위한 갈망과 욕구가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본심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란 사랑의 대상을 끊임없이 소유하고 독점하려는 특징을 보입니다. 때로는 향락적으로, 또 때로는 탐닉하는 모습으로 그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인격인 사람을 비인격화 시켜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보고 이용하는 것이 에로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도 이 에로스가 들어와 있습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그 예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복을 위해 이용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면 하나님이 존재할 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진 것 같으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기복주의 신앙의 천박함입니다. 신앙에서 우리가 이 에로스적 사랑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예배드리면서도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기쁘지가 않습니다. 감사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시기와 분노가 잦아지며, 심지어 다툼으로 번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직장에서는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기업의 CEO입니까? 소위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조심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에로스적 탐욕을 버리지 못하면, 나 때문에 공동체가 흔들리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무엇일까요? 영적 지도자들이 예배도 드립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교회를 바라보니 거기서 내 것을 챙깁니다. 인간적인 탐욕을 거기서 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 공동체가 흔들릴 뿐만 아니라 무너지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와 은총을 받으면서 먼저 드려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르게 믿음 생활을 행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반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중)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 곧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입니까? 믿음이 아닌 것부터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미신이 아닙니다. 미신이란 무엇입니까? 믿지 말아야 할 것,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우리 삶에 이 미신이 알게 모르게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4’라는 숫자를 싫어합니다. ‘13’이란 숫자도 불길하게 느낍니다. 병원에 가도 엘리베이터에 ‘4’라는 숫자는 없습니다. 죽을 사(死)와 음가가 같아 불길하다고 여겨 삭제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가 미신에 붙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침에 설거지를 하다가 그릇이 깨지면 오늘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합니다. 시험 날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낙방한다는 말도 합니다. 꿈에 돼지가 보이면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묶여 버립니다. 왜곡된 생각에 자기 삶을 맞춰 나가는 것,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미신적 행태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우상들을 살펴보면 ‘보이는’ 것들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는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이성을 초월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요구됩니다.
유대 전승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나무로 우상을 만들어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한 후 돌아와 보니, 그 많던 신상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가장 큰 우상 손에는 큰 방망이도 쥐어져 있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이 광경을 보며 너무 놀랐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줄 알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상들이 서로 배고프다고 싸우면서, 제일 큰 우상이 다른 작은 우상들을 몽둥이로 때려 부셨습니다.” 이때 아버지 데라가 “야, 이놈아 네가 날 놀리느냐?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다른 우상을 부순단 말이냐?”라고 했더니, 아들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습니다. 생명도 없는 우상이 어떻게 우리를, 우리 인간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우상이 있습니까? 거짓되고 잡된 미신들이 우리를 얼마나 겁먹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겁박하는 이 모든 것을 때려 부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더는 보이는 세계가 우리를 협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태도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앎과 믿음의 순환관계를 통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미신적인 우상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신념입니다. 때로는 이 신념이 집단적으로 포장돼 이데올로기로 나타납니다. 이데올로기는 당파성을 지닙니다. 자기 신념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에 들어가면, 그와 동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적대자가 됩니다. 여기에 신념의 위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확신하고 거기에 고착되면, 새로운 정보나 사상에 폐쇄적이게 됩니다. 자신을 신념에 가두고 편견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이 고정관념입니다. 자기 생각에만 머무는 신념은 독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습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을 비하하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희생하는 존재로 세워두는 여성 차별적인 관념도 있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지능에 차이가 난다는 인종차별적인 구별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집단적인 사고로 나타나는 것이 왜곡된 이데올로기입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사고에 기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때로 진영논리에 따라 사람을 가릅니다. 그러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좌파와 우파 등으로 구별하는 순간 동지가 될 수 없습니다. 적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개방성을 잃어버린 고정관념은 아주 위험하며,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왜곡된 신념과 고정관념, 편견을 깨뜨립니다. 우리의 사상, 신념, 생각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해체하고 재정립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기독교에서 회개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요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해체시키라는 것입니다. 나의 신념, 왜곡된 생각, 내가 가진 거짓과 악, 부정적인 사고, 독선적인 방식 등을 해체시켜야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나아갈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비이성적인 맹신이 아닙니다. 헛된 것을 믿거나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인 물음에 자신을 개방합니다. 그래서 이성의 첫 번째 단계인 분별력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지성과 동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독일 대학의 시작 단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 의학, 법학이 시작입니다. 신학은 이성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성을 넘어서는 계시를 다룹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라는 사실, 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의미, 인생의 참다운 목표가 무엇인지를 기독교 신학이 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인문학 중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반 지성을 표방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히브리 전통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론을 제공합니다. 믿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더 알게 되고, 더 믿으면 더 알게 된다는 순환적인 인식론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에 우리의 믿음은 내 생각이나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목표가 있는 믿음입니다. 약속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지혜와 진리, 평안, 인간의 모든 문제와 심지어 죽음에 대한 대답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바로 그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일단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 길을 가게 하시며 부활의 자리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생명의 축복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믿음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으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에로스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가페를 바라보며 그 사랑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사랑의 여정을 향해 결단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하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사랑은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에로스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만으로 이해하지만사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아가페적인 사랑은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을 의미합니다그렇다면 에로스와 아가페 사랑의 구체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설교의 요약

사랑하는 이유가 다릅니다에로스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과 목표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아가페적인 사랑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사랑스럽지 않을 때도 사랑합니다아가페적인 사랑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5:6; 8; 10). 우리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할만한 곳이 없었습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죄인과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나의 이익보다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의 자리에 동참하며내 만족보다 상대방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그러나 에로스의 사랑은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을 위한 갈망과 욕구로 상대방의 인격이 아니라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문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에로스적인 사랑의 모습이 너무 많다는데 있습니다기독교신앙을 표방하면서 속은 에로스적 사랑으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가기 전에 에로스적이라도 주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그러나 에로스의 사랑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3;16 후반부). 미음이 중요합니다믿음이란 무엇일까먼저 믿음이 아닌 것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1. 우리의 믿음은 미신이 아닙니다미신이란 믿지 말아야 할 것 또는 잘못된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이처럼 자기 속에 자신을 묶어 두려는 생각(미신)을 버려야 합니다. 2. 미신적인 우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 바로 신념입니다신념과 신앙은 다릅니다신념이란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확신하는 것입니다신념이 고착화되면 편견이 되고고정관념에서 점차 독선에 이르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차별이 있다는 가부장제도는 엄청난 사회적 고정관념입니다잘못된 관념이 떼를 지어 집단을 이루면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3. 신앙은 반이성적 맹신이 아닙니다기독교 신앙은 이성적 물음을 하고 대답을 합니다기독교 신앙은 반지성을 표방하지 않습니다히브리 전통의 인식론의 위대한 점은 믿느냐아느냐?’의 대립이 아니라, ‘믿으면 더 알게 되고알게 되면 더 믿는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지식이라 말하지 않고 지혜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그래서 믿음이란 어디에 근거하는 것입니까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자기 생각이 아니라자기 신념이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으로부터 사랑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누기

1.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입니까아가페적인 사랑입니까?

2.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어떤 모습입니까?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미신신념반이성적 맹신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3. 나를 향한 주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깨닫고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에로스적인 사랑마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용서하여 주옵소서이제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 앞에 믿음으로 응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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