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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로마서 강해 14

로마서 4: 17 ~ 22

김지철 목사

2015.09.13

공자는 신뢰를 첫 번째 덕목으로 두었습니다.

공자의 논어(论语) 안연(颜渊)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묻습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실히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다.” 첫째가 식량, 둘째가 군대, 셋째가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질문을 합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리시겠습니까?” “군비를 버릴 것이다.”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남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려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답합니다. “먼저 먹을 것을 버릴 것이다. 예로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다.”
국가 경영에서 군대와 식량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입니까? 그러나 공자는 경제적인 안정이나 군대의 육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유대관계라고 주장합니다. 정신적 신뢰가 없으면, 물질적 토대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국가 경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신뢰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쉬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사귀시겠습니까? 신뢰할 수 없는 친구와 계속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신뢰는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M. R. Covey)는 자신의 책,『신뢰의 속도(The Speed of Trust)』에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바로 신뢰다”라고 주장합니다. 바른 인간관계의 첫 번째 덕목이 있다면 신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뢰가 지속되기 위한 두 가지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역량입니다. 성품에는 성실성, 동기, 의도가 포함되고 역량에는 능력과 기술, 성과, 업적이 포함됩니다.
신뢰는,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경험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 첫 번째 장소가 가정입니다. 부부관계이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가정을 꾸리고, 부부로 평생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뢰가 쌓이는 과정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품입니다. ‘믿을 만한,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활한 가족관계를 위해서는 성품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폭력적이 되거나 바람을 피우게 되면 부부관계는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을 꾸려나갈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중에 누가 돈을 잘못 관리하게 되면 부부관계의 신뢰는 깨져버리고 맙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신뢰에 관한 일이 많습니다. 딸들이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게 됩니다. 이때, 딸들이 자신의 자녀를 돌봐달라고 요청하는 대상은 거의 100% 동일합니다. 바로 친정어머니입니다. 왜 친정어머니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공짜로 맡길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매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키운 친정어머니가 내 아들과 딸도 잘 키워 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문제는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지역사회 등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날 때에도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뢰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로마서 4:18)

중간 부분을 빼면, 결국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믿은 것이 아닙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즉 소망에 거슬러서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모든 소망을 거슬러서, 소망 가운데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거슬러’와 ‘소망에 붙잡혀서’라는 대비적인 구절은 아브라함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위기를 뜻합니다. 현실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경험에 의하면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처럼 희망과 소망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단절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갖게 되는 소망입니다. 현실은 소망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에 내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것입니다.
의심과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의심이 커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두 가지가 일으키는 충돌 가운데 아브라함은 갈등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의심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지녔기에 우리가 그를 칭송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새로운 인간상의 모형입니다. 바로 믿음의 인간상, 신뢰의 인간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부름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75세였을 때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 중에 75세가 넘은 분이 계십니까?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요셉이 부름을 받은 때는 10대였습니다. 다윗이 부름을 받은 것도 10대 때였습니다. 즉 인생이 변화되는 것,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내 안에 들어오는가’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네가 지금까지 놓여 있었던 과거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곧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한걸음씩 주님과 함께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과거의 삶에 묶여 있습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현재의 삶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 번째 명령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현실은 그 약속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은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미래를 향해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5∼6)

하나님께서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의 아이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귀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 즉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인간이란 현실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현실에 묻혀 살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고 신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신 세 번째 명령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신실성을 붙들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아들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12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려운 순종의 길을 갑니다. 그런 그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심적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말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아끼는 아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통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사랑하는지 아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삶 전체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시는 하나님 사랑의 모형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의 삶의 내용을 로마서에서 다시 한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하나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드렸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17)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는 창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신념이란 자기 확신이 아닙니까? 내적인 생각, 사상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 신념입니다. 신념의 사람도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념의 사람은 독선적으로 될 위험성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내 생각과 사상을 끊임없이 갱신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신앙을 가지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끊임없이 바꿉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내 생각을 바꾸면서 더 큰 신앙으로 나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될까요?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 안에도 갈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의심이 있습니다. ‘내가 바랄 수가 없구나. 내 삶의 현장은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심을 이겨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심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을 뛰어넘는 신앙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만약 의심이 믿음을 이기게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회의론자가 됩니다. 회의론자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한 걸음 앞에도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의만으로 의심을 뛰어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심을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의심하는 삶의 해석학에서부터 믿음이라는 삶의 해석학으로 과감하게 한 걸음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믿고 또 바깥에 나가서는 의심하기를 반복하면 신앙은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해석학은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신앙은 성숙하게 되고 더욱 역동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내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믿었다가 의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었다가 알았다가 사랑하시겠습니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믿음의 해석학을 내 삶의 해석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로마서 4:20∼21)

여기에 나타난 ‘의심하지 않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심이 다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줄 알아야 참된 믿음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의심해야 문제를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다’는 말에는 ‘의심한다’는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또 다른 의심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의심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으로 믿음을 붙잡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영어성경으로 보면 ‘I believe in God’입니다. ‘believe’와 ‘God’ 사이에 보통 전치사 ‘in’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에는 ‘into’라는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나를 던진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삶을 던져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니라 상대가 주체가 된 삶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아니라 내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그분은 내 안에 들어오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면서 ‘너’고 동시에 ‘너’면서 ‘나’라는 공동체성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단이 믿음과 신뢰입니다.
“나는 내 아내를, 남편을 믿는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대상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믿는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는데 어느 날 다투고 나서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당신을 정말로 믿어요.” 남편은 아내의 말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아내가 또 믿는다고 말합니다. 셋째 날에도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정말 믿어요.” 남편은 이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아내가 나를 안 믿는구나.’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가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믿습니다’에서 ‘주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주님을 알아갑니다’로, 그리고 ‘내가 이제 주님을 사랑합니다’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가 하나님을 믿어요”라는 한 마디에도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감동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로마서 4:22)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믿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이제 시작되었구나. 이제는 내가 너를 믿는다. 너를 신뢰한다. 너를 사랑한다. 이제 너도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가라” 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건입니다.

믿음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시다.

결혼한 지 몇 년 되셨습니까?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까? 부모님들은 내 자녀와의 믿음과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 이야기가 곧 가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나만의 믿음의 이야기들입니다. 믿는다면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10년, 20년, 30년, 50년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믿음의 이야기가 없다면, 어쩌면 그동안 나는 교회 뜰만 밟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기도합니까? 왜 봉사하라고, 전도해 보라고, 선교에 참여하자고 이야기할까요? 그 속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이야기, 믿음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받으면서 삶의 어려움을 뛰어넘는 신앙의 자리까지 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앙에 의심이 있습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더 크게 가지면 됩니다. 의심보다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그러한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나만의 신앙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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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 17 ~ 22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공자는 신뢰를 첫 번째 덕목으로 두었습니다.

공자의 논어(论语) 안연(颜渊)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방법을 묻습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합니다.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군비를 충실히 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위정자를 믿게 하는 것이다.” 첫째가 식량, 둘째가 군대, 셋째가 백성들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자공이 다시 질문을 합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리시겠습니까?” “군비를 버릴 것이다.” 자공이 다시 묻습니다. “만약 부득이하여 남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뭘 버려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답합니다. “먼저 먹을 것을 버릴 것이다. 예로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가 없다.”
국가 경영에서 군대와 식량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입니까? 그러나 공자는 경제적인 안정이나 군대의 육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 구성원 상호 간의 유대관계라고 주장합니다. 정신적 신뢰가 없으면, 물질적 토대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국가 경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신뢰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쉬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사귀시겠습니까? 신뢰할 수 없는 친구와 계속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신뢰는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스티븐 코비(Stephen M. R. Covey)는 자신의 책,『신뢰의 속도(The Speed of Trust)』에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바로 신뢰다”라고 주장합니다. 바른 인간관계의 첫 번째 덕목이 있다면 신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신뢰가 지속되기 위한 두 가지 요소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성품이고, 다른 하나는 역량입니다. 성품에는 성실성, 동기, 의도가 포함되고 역량에는 능력과 기술, 성과, 업적이 포함됩니다.
신뢰는, 우리가 삶의 곳곳에서 경험하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 첫 번째 장소가 가정입니다. 부부관계이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가정을 꾸리고, 부부로 평생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뢰가 쌓이는 과정을 지나게 되는데, 이때 두 가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성품입니다. ‘믿을 만한,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활한 가족관계를 위해서는 성품이 매우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폭력적이 되거나 바람을 피우게 되면 부부관계는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을 꾸려나갈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중에 누가 돈을 잘못 관리하게 되면 부부관계의 신뢰는 깨져버리고 맙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신뢰에 관한 일이 많습니다. 딸들이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게 됩니다. 이때, 딸들이 자신의 자녀를 돌봐달라고 요청하는 대상은 거의 100% 동일합니다. 바로 친정어머니입니다. 왜 친정어머니에게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공짜로 맡길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매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키운 친정어머니가 내 아들과 딸도 잘 키워 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문제는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 직장, 지역사회 등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날 때에도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뢰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인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신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전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로마서 4:18)

중간 부분을 빼면, 결국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냥 믿은 것이 아닙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즉 소망에 거슬러서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모든 소망을 거슬러서, 소망 가운데 붙잡혔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거슬러’와 ‘소망에 붙잡혀서’라는 대비적인 구절은 아브라함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위기를 뜻합니다. 현실을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경험에 의하면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이처럼 희망과 소망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단절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갖게 되는 소망입니다. 현실은 소망을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을 요청하기 때문에 내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것입니다.
의심과 믿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면 의심이 커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두 가지가 일으키는 충돌 가운데 아브라함은 갈등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의심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지녔기에 우리가 그를 칭송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새로운 인간상의 모형입니다. 바로 믿음의 인간상, 신뢰의 인간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된 부름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75세였을 때입니다. 여기 앉아계신 분 중에 75세가 넘은 분이 계십니까?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요셉이 부름을 받은 때는 10대였습니다. 다윗이 부름을 받은 것도 10대 때였습니다. 즉 인생이 변화되는 것,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내 안에 들어오는가’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네가 지금까지 놓여 있었던 과거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을 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자리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곧 변화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한걸음씩 주님과 함께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과거의 삶에 묶여 있습니까? 신앙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현재의 삶의 자리를 내려놓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 번째 명령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현실은 그 약속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은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미래를 향해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5∼6)

하나님께서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한 명의 아이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귀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 즉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입니다. 인간이란 현실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현실에 묻혀 살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고 신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신 세 번째 명령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신실성을 붙들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 아들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12살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어려운 순종의 길을 갑니다. 그런 그를 지켜보시던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성경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심적 상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했는지 말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12)

아끼는 아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통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고 사랑하는지 아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삶 전체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시는 하나님 사랑의 모형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그의 삶의 내용을 로마서에서 다시 한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하나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드렸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17)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을 만드시는 창조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신념이란 자기 확신이 아닙니까? 내적인 생각, 사상에 대한 철저한 확인이 신념입니다. 신념의 사람도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념의 사람은 독선적으로 될 위험성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다릅니다. 내 생각과 사상을 끊임없이 갱신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념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신앙을 가지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끊임없이 바꿉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늠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내 생각을 바꾸면서 더 큰 신앙으로 나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될까요?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 안에도 갈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의심이 있습니다. ‘내가 바랄 수가 없구나. 내 삶의 현장은 참으로 힘들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심을 이겨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의심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을 뛰어넘는 신앙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만약 의심이 믿음을 이기게 놔두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회의론자가 됩니다. 회의론자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한 걸음 앞에도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회의만으로 의심을 뛰어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심을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의심하는 삶의 해석학에서부터 믿음이라는 삶의 해석학으로 과감하게 한 걸음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믿고 또 바깥에 나가서는 의심하기를 반복하면 신앙은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해석학은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신앙은 성숙하게 되고 더욱 역동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내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믿었다가 의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었다가 알았다가 사랑하시겠습니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믿음의 해석학을 내 삶의 해석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바울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로마서 4:20∼21)

여기에 나타난 ‘의심하지 않고’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의심이 다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줄 알아야 참된 믿음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이라는 것은 소중한 것입니다. 의심해야 문제를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의심에서 믿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믿는다’는 말에는 ‘의심한다’는 뜻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믿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또 다른 의심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의심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으로 믿음을 붙잡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영어성경으로 보면 ‘I believe in God’입니다. ‘believe’와 ‘God’ 사이에 보통 전치사 ‘in’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어에는 ‘into’라는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나를 던진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삶을 던져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니라 상대가 주체가 된 삶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아니라 내가 그분 안에 들어가고 그분은 내 안에 들어오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면서 ‘너’고 동시에 ‘너’면서 ‘나’라는 공동체성을 만들어 보겠다는 결단이 믿음과 신뢰입니다.
“나는 내 아내를, 남편을 믿는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의 대상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믿는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는데 어느 날 다투고 나서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당신을 정말로 믿어요.” 남편은 아내의 말에 감격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도 아내가 또 믿는다고 말합니다. 셋째 날에도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정말 믿어요.” 남편은 이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아내가 나를 안 믿는구나.’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가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믿습니다’에서 ‘주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주님을 알아갑니다’로, 그리고 ‘내가 이제 주님을 사랑합니다’로 나아가는 것이 성숙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가 하나님을 믿어요”라는 한 마디에도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감동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로마서 4:22)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믿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이제 시작되었구나. 이제는 내가 너를 믿는다. 너를 신뢰한다. 너를 사랑한다. 이제 너도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알아가라” 하시며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사건입니다.

믿음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갑시다.

결혼한 지 몇 년 되셨습니까? 두 사람의 믿음과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까? 부모님들은 내 자녀와의 믿음과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까? 그 이야기가 곧 가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나만의 믿음의 이야기들입니다. 믿는다면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10년, 20년, 30년, 50년 예수를 믿었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믿음의 이야기가 없다면, 어쩌면 그동안 나는 교회 뜰만 밟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 기도합니까? 왜 봉사하라고, 전도해 보라고, 선교에 참여하자고 이야기할까요? 그 속에서 하나님과 나만의 이야기, 믿음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받으면서 삶의 어려움을 뛰어넘는 신앙의 자리까지 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신앙에 의심이 있습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더 크게 가지면 됩니다. 의심보다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그러한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과 나만의 신앙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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