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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태도가 신앙의 척도이다

마가복음 12: 38

김지철 목사

2009.11.08

태도가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한마디씩 합니다. 감상적 동정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다가 거기에 떨어지셨습니까? 당신의 처지를 보니 내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연민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어려운 처지를 안다면 그 웅덩이는 별것이 아닙니다.” 현실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냥 잘 견뎌내십시오.” 낙천주의자가 말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 될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에 다행입니다.” 비관주의자가 말합니다. “당신이 거기 빠진 것을 보니 앞으로 당신 인생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말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떨어진 것을 보니 당신은 죄를 많이 지었나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렁텅이에 내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내십니다.
우리 주위에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태도란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의 어조와 말투, 손과 발의 행동은 나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존 맥스웰은 「태도」라는 책에서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태도는 자신의 가장 큰 밑천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억누르는 빚이 될 수도 있다. 태도는 당신을 성공시킬 수도 있고, 당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태도는 당신을 하늘 위로 훨훨 날게 만들 수도 있고, 당신을 추락시킬 수도 있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태도로 임했을 때보다는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태도가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현재의 삶은 지금까지의 당신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부터 내가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나의 미래 또한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멋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내일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오늘부터 내가 갖고 있는 삶의 태도를 바꿔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표적 인물로 서기관을 꼽으셨습니다. 서기관이란 당시의 지성인이자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두 가지로 축약합니다. 첫째, 겉모양은 경건인데 속은 전혀 경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휘황찬란합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위세를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에만 관심이 있고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포용이다.”
서기관들은 종교적 행사를 위하여 긴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옷을 입고 곳곳을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문안인사를 받으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인지를 과시했습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감추어주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옷이 자기 자랑이 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외양으로 남 앞에서 길게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길게 할 수도 있고 짧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많으면 기도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표기도는 짧은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공기도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하면 30초, 길게 하면 1분입니다. 그러나 개인 기도를 할 때는 철야를 해도 좋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동지가 있을 때에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도,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는 잘못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향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거짓된 종교인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럽기까지 하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난한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과부는 당시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누가 돈을 대주는 이도 없어 경제적으로도 궁핍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쌍한 자들의 적은 재산까지도 빼앗아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선생이라고 부르고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향해서 한마디로 속물근성에 붙잡혀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명예, 자기 이익만을 쫒는 저급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꾸중하십니다. 이들은 겉만 꾸미고 속은 내실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주기보다는 자기 혼자만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참된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교만한 사람은 그래도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교만한 사람들은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게 다가가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겉모양만 그럴듯한 종교인들을 향해서는 엄중하고 가차 없이 꾸짖으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헌금하는 자들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하십니다. 바로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돈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돈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의 피와 땀과 수고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을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질투하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돈입니다. 당신과 견주어서 그만큼 강력한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향해서는 대적하고 무너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은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돈은 예수님과 경쟁상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 속에서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만큼 인간의 마음을 미혹케 하고 붙잡는 것이 돈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그 척도를 잴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돈을 내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정성과 소원이 있습니다. 돈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많은 돈을 내는 것을 귀하게 보시면서 그들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마가복음 12:4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돈을 내는 부자보다 더 칭찬받을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는 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도 지켜보셨지만 가난한 과부 또한 지켜보셨습니다. 이 과부는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버려진 여성입니다. 그녀는 자랑할 것 없는 불쌍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털터리의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랬던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돈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 렙돈입니다. 두 렙돈은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하루의 노동임금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두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하루 일당이 10만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천오백 원이 조금 넘는 돈입니다. 하루 일당이 5만원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700~800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과부는 이 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과부는 어떤 마음으로 이 돈을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이 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인데 어떻게 다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죽기로 작정한 것일까요? 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인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돈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부터 진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여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두 렙돈 속에서 그녀의 하나님을 향한 100%, 아니 120%의 신뢰와 사랑을 보셨습니다.
여기 이 여인이 보여준 행위에는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인이 헌금함에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이 여인이 살고자 하는 의욕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제까지 실패하고 좌절했어도, 내가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일지라도 주님,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서. 내가 주님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내 인생을 이끌어 주옵소서.’ 이 여인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 행위 속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신뢰와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보셨고 그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헌신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2:43~44)

이것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사방팔방을 보아도 모두가 막혀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내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인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전혀 관심 없어 하는 버려진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내 인생을 하나님의 것으로 살기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릴 때 잘못을 해서 아버지에게 야단맞을까봐 숨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나를 찾으면 그 앞에 나아가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소원했을 것입니다. “얘야 괜찮아.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야.” 그리고 내 등을 두들기시면서 나를 안아주시는 나의 아버지.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이 사랑하는 딸을 껴안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내 것을 드릴 때 우리에게도 망설임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말은 갑자기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쉬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망설이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그 망설임과 주저함을 인생 내내 지니고 사는 것은 복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분투하시고 하나님과 씨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내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쌓아놓은 재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남은 인생을 이제는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싶습니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주님께 모두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사랑과 신뢰를 온전히 하나님께 두십시오

우리의 인생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가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내 것을 다 주님 앞에 드리겠다고, 아니 내가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하셔야 합니다. 저 스스로도 종종 그런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앙을 제게 주세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해주세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함으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관심도 없었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인정하시고 귀히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안의 사랑과 신뢰를 온전히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서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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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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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태도가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한마디씩 합니다. 감상적 동정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쩌다가 거기에 떨어지셨습니까? 당신의 처지를 보니 내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연민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어려운 처지를 안다면 그 웅덩이는 별것이 아닙니다.” 현실주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냥 잘 견뎌내십시오.” 낙천주의자가 말합니다. “상황이 더 악화 될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에 다행입니다.” 비관주의자가 말합니다. “당신이 거기 빠진 것을 보니 앞으로 당신 인생이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말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떨어진 것을 보니 당신은 죄를 많이 지었나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구렁텅이에 내려가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내십니다.
우리 주위에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태도란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말의 어조와 말투, 손과 발의 행동은 나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존 맥스웰은 「태도」라는 책에서 태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태도는 자신의 가장 큰 밑천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을 억누르는 빚이 될 수도 있다. 태도는 당신을 성공시킬 수도 있고, 당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태도는 당신을 하늘 위로 훨훨 날게 만들 수도 있고, 당신을 추락시킬 수도 있다.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하더라도 부정적인 태도로 임했을 때보다는 더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
태도가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현재의 삶은 지금까지의 당신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부터 내가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나의 미래 또한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멋지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내일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오늘부터 내가 갖고 있는 삶의 태도를 바꿔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태도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자랑하며 뽐내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대표적 인물로 서기관을 꼽으셨습니다. 서기관이란 당시의 지성인이자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두 가지로 축약합니다. 첫째, 겉모양은 경건인데 속은 전혀 경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휘황찬란합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위세를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가에만 관심이 있고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포용이다.”
서기관들은 종교적 행사를 위하여 긴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옷을 입고 곳곳을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문안인사를 받으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인지를 과시했습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감추어주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옷이 자기 자랑이 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은 외양으로 남 앞에서 길게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기도는 길게 할 수도 있고 짧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이 많으면 기도가 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표기도는 짧은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공기도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빨리하면 30초, 길게 하면 1분입니다. 그러나 개인 기도를 할 때는 철야를 해도 좋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동지가 있을 때에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기도, 자신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도는 잘못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향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거짓된 종교인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럽기까지 하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난한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과부는 당시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누가 돈을 대주는 이도 없어 경제적으로도 궁핍합니다. 그런데 이런 불쌍한 자들의 적은 재산까지도 빼앗아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선생이라고 부르고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이들을 향해서 한마디로 속물근성에 붙잡혀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명예, 자기 이익만을 쫒는 저급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꾸중하십니다. 이들은 겉만 꾸미고 속은 내실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세워주기보다는 자기 혼자만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만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참된 경건의 모습이 아니라고 지적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교만한 사람은 그래도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교만한 사람들은 회개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내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게 다가가셨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겉모양만 그럴듯한 종교인들을 향해서는 엄중하고 가차 없이 꾸짖으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헌금하는 자들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사람을 소개하십니다. 바로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돈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돈이 무가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나의 피와 땀과 수고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부자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을 살면서 거의 유일하게 질투하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돈입니다. 당신과 견주어서 그만큼 강력한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을 붙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향해서는 대적하고 무너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은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돈은 예수님과 경쟁상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 속에서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만큼 인간의 마음을 미혹케 하고 붙잡는 것이 돈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그 척도를 잴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돈을 내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정성과 소원이 있습니다. 돈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자신의 많은 돈을 내는 것을 귀하게 보시면서 그들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마가복음 12:4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돈을 내는 부자보다 더 칭찬받을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는 한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도 지켜보셨지만 가난한 과부 또한 지켜보셨습니다. 이 과부는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버려진 여성입니다. 그녀는 자랑할 것 없는 불쌍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털터리의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랬던 이 여인이 가지고 있던 돈이 있었습니다.
바로 두 렙돈입니다. 두 렙돈은 얼마나 되는 돈일까요? 하루의 노동임금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두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1/64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하루 일당이 10만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천오백 원이 조금 넘는 돈입니다. 하루 일당이 5만원이라고 한다면, 두 렙돈은 700~800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과부는 이 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과부는 어떤 마음으로 이 돈을 하나님께 드렸을까요? 이 돈은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인데 어떻게 다 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죽기로 작정한 것일까요? 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인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살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돈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부터 진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여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두 렙돈 속에서 그녀의 하나님을 향한 100%, 아니 120%의 신뢰와 사랑을 보셨습니다.
여기 이 여인이 보여준 행위에는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인이 헌금함에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이 여인이 살고자 하는 의욕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제까지 실패하고 좌절했어도, 내가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일지라도 주님,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나를 받아 주옵소서. 내가 주님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내 인생을 이끌어 주옵소서.’ 이 여인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 행위 속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신뢰와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보셨고 그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헌신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2:43~44)

이것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마 이 여인은 그랬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사방팔방을 보아도 모두가 막혀있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내 소망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인간의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전혀 관심 없어 하는 버려진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 인생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내 인생을 하나님의 것으로 살기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릴 때 잘못을 해서 아버지에게 야단맞을까봐 숨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나를 찾으면 그 앞에 나아가면서 아버지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소원했을 것입니다. “얘야 괜찮아.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야.” 그리고 내 등을 두들기시면서 나를 안아주시는 나의 아버지.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이 사랑하는 딸을 껴안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내 것을 드릴 때 우리에게도 망설임의 시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말은 갑자기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재물을 드리는 것이 쉬운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누구나 망설이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그 망설임과 주저함을 인생 내내 지니고 사는 것은 복된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분투하시고 하나님과 씨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내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쌓아놓은 재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남은 인생을 이제는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싶습니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주님께 모두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사랑과 신뢰를 온전히 하나님께 두십시오

우리의 인생에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가야 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 내 것을 다 주님 앞에 드리겠다고, 아니 내가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겠다고 마음속에 작정하셔야 합니다. 저 스스로도 종종 그런 고백을 하나님께 드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신앙을 제게 주세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해주세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함으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이 여인에게 관심도 없었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인정하시고 귀히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안의 사랑과 신뢰를 온전히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다시 하나님을 위해서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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