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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 이기적 사랑

창세기 11: 1 ~ 9

김지철 목사

2018.04.22

누구나 성공하길 원합니다.

지난 2월,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개최한 첫 번째 동계올림픽입니다. ‘평창’이란 두 글자의 영어 이니셜 P와 C를 Passion, Connected로 전환해 ‘하나 된 열정’이란 슬로건도 내걸었습니다. 세계인들에게 풍성한 스포츠 잔치가 된 것을 우리도 보고 경험했습니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는 마음의 소원들이 있습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입니다. 스키나 스케이팅, 봅슬레이, 스켈레톤 같은 종목은 0.0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립니다. 스키점프는 누가 더 높이 뛰어 멀리 날아오르는지에 관심이 쏠립니다. 이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를 표방하는 올림픽 정신은 인류의 진보와 성장, 성숙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기도 합니다.
누가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 각 분야에서도 이러한 최고와 최대를 향한 목표가 추구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발전해 온 배경에도 최고를 향한 경쟁적인 목표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성공’이란 말로 대치합니다. 돈과 재물을 많이 벌어들인 사람을 향해 “당신 참 성공했네.”라고 말하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명망을 얻게 된 사람에게도 “당신의 삶도 참 성공이네.”라고 하며, 또 자신의 분야에서 으뜸이 되는 전문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혹은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사람에게도 “당신은 성공한 인생이오.”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될 때 스스로도 ‘아, 내가 성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때문에 누구나 성공한 삶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품습니다. 더욱이 성공하면 돈과 명예, 권력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공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추구와 도전이 바벨탑의 무너짐처럼 무의미하고 가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 해야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과연 성공과 관련이 없는 것일까요? 신앙인들도 사회 속에 들어가 치열한 경쟁을 겪습니다. 최고를 향한 추구를 목표로 삼습니다. 혹시 이러한 추구를 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과 신학, 예술과 문학, 기술과 과학 문명을 만드는 데 그동안 기독교가 엄청난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멋지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자연 만물 속에 질서와 조화를 창조해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철학자입니다. 멋진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과학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사야 40장 26절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우주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사야 40:26)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가장 능력이 많은 분이시며,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은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강력한 것을 따라가며, 지혜를 쌓기 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보시며 섭섭해 하셨고 분노까지 느끼신 것일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대용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들이 쌓은 바벨탑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즉 그들의 우상으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의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나아가 그 작품을 하나님 대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꾸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돈’과 ‘재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 대용품으로 돈과 재물을 삼는 것입니다. 또한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또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을 충분히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회 복지적 혜택과 경제적인 풍요만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까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히려 풍요로운 복지국가일수록 수많은 자살자들이 나타나는 현상을 목도합니다. 잠깐의 찰나적 쾌락과 편의성은 증진될 수 있으나, 영혼의 기쁨, 마음의 평안,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바벨탑의 목표를 다시 살펴봅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탑을 쌓아서 하늘 꼭대기에 닿게 하자.’ 이는 피조물이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한 채 내린 결정입니다. 그들은 욕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전 세계에 뽐내 보자. 세상에 흩어지는 것을 모면해 보자.” 업적주의와 성공주의가 동반된 소영웅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번성하고 충만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늘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자신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업적과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집단을 형성합니다. 본문에서도 그들이 모든 마음을 합했다고 하는데, 이처럼 집단을 이루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려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성을 지향합니다.

인간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착합니다. 그런데 집단으로 형성되면 때로는 참 가혹한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악을 행하고, 그 가운데서도 뻔뻔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합니다. 사람이 홀로 악마가 되려면 엄청난 결단과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단 속에 들어가면 악한 마음이란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그 집단 속에서 거짓과 미움, 분노를 퍼붓는 사탄의 종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단결이 강조될 때마다, 일치가 요구될 때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다양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획일적인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 그 안에서 혼자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폐쇄적인 집단이 됩니다.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마음의 문을 닫아 겁니다. 그것이 만약 돈의 힘, 권력이 힘이 될 때는 더더욱 위험해집니다.
20세기에 발발했던 독일의 나치 정권이 그렇습니다.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그를 영웅이라 칭했습니다. 메시아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의 가장 악한 지도자가 그라는 것을 압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라는 것도 압니다. 막스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지만, 이는 더 심한 계급사회를 만들었고, 수많은 이들을 배척하고 숙청한 공산주의 운동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억압적인 획일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와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독재자들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일종의 세속적인 소영웅주의를 지향했습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소영웅주의는 무언가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업적주의에 붙잡힙니다. 이러한 성공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눈앞에 일밖에 안 보였다. 그것을 성취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낸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고,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면서 그 인기에만 매몰돼 있었다.” 소영웅주의에 빠져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고 있는지도 몰랐다는 고백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취며, 무엇을 향한 목적인지를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소영웅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주의, 업적주의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종교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까? 소영웅주의, 거대주의가 교회 가치관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교회를 향해 달려가려 합니다. 더 멋진 건물을 지어 예배당에 모이라고 부추깁니다. 더 많은 헌금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매몰된 이기적인 사랑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지, 얼마나 멋진 교회를 가졌는지,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모이면 무엇을 하는지를 자랑하는 데 멈춥니다.
우리의 바벨탑이 이런 것입니다. 그런 바벨탑을 하나님이 허무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흩어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외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체성을 찾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주어진 축복은 세상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너희들끼리 모여서 향유하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섹트(sect)지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웃과 세상을 섬깁시다.

기독교 정신은 무엇을 지향합니까? 더 높이 날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한다면,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경계합니다. 엘리트주의는 엘리트에게만 특권의식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사유화로 넘어갑니다. 권력을 독점화 하게 됩니다. 자신을 바르게 세우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위로 올라가려 했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뒤흔드셨습니다. “너희끼리 모여 자랑하고 만족하고, 내가 없이도 하늘까지 올라가려 하는 그 교만을 더는 봐줄 수가 없다!” 오늘 본문 중 9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9 중)

우리가 명심해야 할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함께 나누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정치가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는 경제인이 기업가가 되면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경영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군사 및 경제적 대국이 세계를 함부로 지배하려 하면, 더 많은 테러와 전쟁 역사가 일어나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란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뒤엎으실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여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이자, 이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소망교회는 우리 모두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수행할 때 이 자부심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힘 받고, 하나님 사랑이 내 기쁨이 되며, 주님만을 자랑하며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섬김에 앞장설 때 우리 교회가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목적을 놓치면 대형교회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위로, 또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려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낮고 천한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크고자 하느냐? 그러면 다른 사람을 섬겨라. 네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그러면 연약하고 고통 받는 자의 아픔 속에 들어가라. 네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 하느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연약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면 고통 받는 낮은 사람을 도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라는 뜻입니다.
바벨탑은 하나의 망상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망상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건강, 생명, 소유물, 달란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겸손히 깨달을 때, 우리가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가슴으로 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라. 네 자랑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라. 너의 삶을 이 세상의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나누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삶을 흩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자랑,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선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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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 1 ~ 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누구나 성공하길 원합니다.

지난 2월,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개최한 첫 번째 동계올림픽입니다. ‘평창’이란 두 글자의 영어 이니셜 P와 C를 Passion, Connected로 전환해 ‘하나 된 열정’이란 슬로건도 내걸었습니다. 세계인들에게 풍성한 스포츠 잔치가 된 것을 우리도 보고 경험했습니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에게는 마음의 소원들이 있습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입니다. 스키나 스케이팅, 봅슬레이, 스켈레톤 같은 종목은 0.001초 차이로 승부가 갈립니다. 스키점프는 누가 더 높이 뛰어 멀리 날아오르는지에 관심이 쏠립니다. 이처럼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를 표방하는 올림픽 정신은 인류의 진보와 성장, 성숙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 정신이기도 합니다.
누가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 각 분야에서도 이러한 최고와 최대를 향한 목표가 추구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발전해 온 배경에도 최고를 향한 경쟁적인 목표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성공’이란 말로 대치합니다. 돈과 재물을 많이 벌어들인 사람을 향해 “당신 참 성공했네.”라고 말하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명망을 얻게 된 사람에게도 “당신의 삶도 참 성공이네.”라고 하며, 또 자신의 분야에서 으뜸이 되는 전문성을 획득한 사람에게 혹은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사람에게도 “당신은 성공한 인생이오.”라고 평가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될 때 스스로도 ‘아, 내가 성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때문에 누구나 성공한 삶에 대한 희망과 소망을 품습니다. 더욱이 성공하면 돈과 명예, 권력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공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추구와 도전이 바벨탑의 무너짐처럼 무의미하고 가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 해야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 신앙은 과연 성공과 관련이 없는 것일까요? 신앙인들도 사회 속에 들어가 치열한 경쟁을 겪습니다. 최고를 향한 추구를 목표로 삼습니다. 혹시 이러한 추구를 다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과 신학, 예술과 문학, 기술과 과학 문명을 만드는 데 그동안 기독교가 엄청난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멋지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의 자연 만물 속에 질서와 조화를 창조해 주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철학자입니다. 멋진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과학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사야 40장 26절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과 우주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이사야 40:26)

하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가장 능력이 많은 분이시며, 가장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은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강력한 것을 따라가며, 지혜를 쌓기 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는 인간을 보시며 섭섭해 하셨고 분노까지 느끼신 것일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대용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자신들이 쌓은 바벨탑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즉 그들의 우상으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 4절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의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세기 11:4)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나아가 그 작품을 하나님 대신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꾸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돈’과 ‘재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나님 대용품으로 돈과 재물을 삼는 것입니다. 또한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또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면서 그것으로 인간을 충분히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회 복지적 혜택과 경제적인 풍요만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까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히려 풍요로운 복지국가일수록 수많은 자살자들이 나타나는 현상을 목도합니다. 잠깐의 찰나적 쾌락과 편의성은 증진될 수 있으나, 영혼의 기쁨, 마음의 평안,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까닭입니다.
바벨탑의 목표를 다시 살펴봅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탑을 쌓아서 하늘 꼭대기에 닿게 하자.’ 이는 피조물이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한 채 내린 결정입니다. 그들은 욕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전 세계에 뽐내 보자. 세상에 흩어지는 것을 모면해 보자.” 업적주의와 성공주의가 동반된 소영웅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번성하고 충만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인간은 창조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늘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일 무엇이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자신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업적과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를 위해 때로는 집단을 형성합니다. 본문에서도 그들이 모든 마음을 합했다고 하는데, 이처럼 집단을 이루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려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성을 지향합니다.

인간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착합니다. 그런데 집단으로 형성되면 때로는 참 가혹한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악을 행하고, 그 가운데서도 뻔뻔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합니다. 사람이 홀로 악마가 되려면 엄청난 결단과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단 속에 들어가면 악한 마음이란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그 집단 속에서 거짓과 미움, 분노를 퍼붓는 사탄의 종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단결이 강조될 때마다, 일치가 요구될 때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다양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획일적인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 그 안에서 혼자 권력을 독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폐쇄적인 집단이 됩니다.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모든 마음의 문을 닫아 겁니다. 그것이 만약 돈의 힘, 권력이 힘이 될 때는 더더욱 위험해집니다.
20세기에 발발했던 독일의 나치 정권이 그렇습니다. 히틀러가 등장했을 때 그를 영웅이라 칭했습니다. 메시아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20세기의 가장 악한 지도자가 그라는 것을 압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 그라는 것도 압니다. 막스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창하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지만, 이는 더 심한 계급사회를 만들었고, 수많은 이들을 배척하고 숙청한 공산주의 운동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억압적인 획일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와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독재자들입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일종의 세속적인 소영웅주의를 지향했습니다.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소영웅주의는 무언가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업적주의에 붙잡힙니다. 이러한 성공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눈앞에 일밖에 안 보였다. 그것을 성취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낸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고, 사람들의 칭찬을 갈망하면서 그 인기에만 매몰돼 있었다.” 소영웅주의에 빠져 자신의 인생이 추락하고 있는지도 몰랐다는 고백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취며, 무엇을 향한 목적인지를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소영웅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주의, 업적주의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종교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까? 소영웅주의, 거대주의가 교회 가치관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교회를 향해 달려가려 합니다. 더 멋진 건물을 지어 예배당에 모이라고 부추깁니다. 더 많은 헌금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매몰된 이기적인 사랑입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지, 얼마나 멋진 교회를 가졌는지, 얼마나 많이 모이는지, 모이면 무엇을 하는지를 자랑하는 데 멈춥니다.
우리의 바벨탑이 이런 것입니다. 그런 바벨탑을 하나님이 허무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흩어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외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체성을 찾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주어진 축복은 세상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너희들끼리 모여서 향유하라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섹트(sect)지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이웃과 세상을 섬깁시다.

기독교 정신은 무엇을 지향합니까? 더 높이 날고 더 많이 가지고자 한다면, 그 목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엘리티즘을 경계합니다. 엘리트주의는 엘리트에게만 특권의식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사유화로 넘어갑니다. 권력을 독점화 하게 됩니다. 자신을 바르게 세우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파괴시킬 뿐입니다. 때문에 불의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위로 올라가려 했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뒤흔드셨습니다. “너희끼리 모여 자랑하고 만족하고, 내가 없이도 하늘까지 올라가려 하는 그 교만을 더는 봐줄 수가 없다!” 오늘 본문 중 9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9 중)

우리가 명심해야 할 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아가 함께 나누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정치가가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그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는 경제인이 기업가가 되면 부정과 부패로 점철된 경영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군사 및 경제적 대국이 세계를 함부로 지배하려 하면, 더 많은 테러와 전쟁 역사가 일어나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형교회란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뒤엎으실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여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이자, 이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소망교회는 우리 모두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수행할 때 이 자부심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힘 받고, 하나님 사랑이 내 기쁨이 되며, 주님만을 자랑하며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섬김에 앞장설 때 우리 교회가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목적을 놓치면 대형교회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위로, 또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려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애썼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낮고 천한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말 크고자 하느냐? 그러면 다른 사람을 섬겨라. 네가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그러면 연약하고 고통 받는 자의 아픔 속에 들어가라. 네가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 하느냐?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해 본 적이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면 그것은 연약한 이웃을 돌보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면 고통 받는 낮은 사람을 도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라는 뜻입니다.
바벨탑은 하나의 망상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망상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있습니다. 그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건강, 생명, 소유물, 달란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사실을 겸손히 깨달을 때, 우리가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열고 가슴으로 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라. 네 자랑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랑하라. 너의 삶을 이 세상의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나누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삶을 흩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자랑,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선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결단을 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길 축원합니다.

2018년 4월 2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바벨탑 : 이기적 사랑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5장, 13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11:1~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2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난 2월에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렸습니다올림픽의 슬로건은 더 빨리더 높이더 멀리입니다. “더 빨리더 높이더 멀리를 표방하는 올림픽의 이념은 인간의 끝없는 도전정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인간 사회가 발전해 온 뒷면에는 이러한 최고를 향한 경쟁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

그렇다면 바벨탑의 문제는 무엇일까새로운 세계에 대한 추구와 도전으로 여겨지는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을 보시며왜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셨을까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 대용품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4). 하나님 없이도 인간은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여전히 돈과 재물이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대용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왜냐하면 1)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했던 헛된 욕망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이름을 전 세계에 나타내고자 하는 업적주의와 성공주의 때문입니다. 3)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인간은 두려운 마음과 자신을 뽐내고픈 마음이 있습니다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심리가 그러했습니다더 큰 것을 향하였고무엇인가 자신들을 과시하고픈 업적주의에 사로잡혀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안타까운 사실은 오늘의 정치경제교육과 문화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한국교회가 흔들리며 지탄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을 때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9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고 기록합니다하나님께서는 머물러 있지 않고세상을 향해 나아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그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끼리 모여우리끼리 잔치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뒤엎으실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욕망과 반대 방향으로 가셨습니다인간은 끊임없이 위로 또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려 하셨습니다그래서 신앙은 높이가 아니라깊이입니다.

여전히 나만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지 않습니까계속해서 바벨탑을 쌓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놓고흩어버리실 것입니다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거하며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내가 쌓아 올렸던 바벨탑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인생을 돌아보며 회개와 은혜를 고백합시다.

2. 나의 삶은 어느 곳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나의 삶이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함께 나눠봅시다.

3.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 위한 나의 결단을 나눠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바벨탑처럼 내 자신만을 위해서 더 높이 탑을 쌓아올리며 살아왔습니다이제는 예수님 믿는 것이 내 자랑이며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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