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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적극적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님의 복이 임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관련된 네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열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베드로와의 만남과 사건이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의 적극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지만,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압도적으로 받은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베드로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가장 먼저 대답하는 이가 다윗이었고, 주님이 요청하시면 가장 빠른 응답을 했던 이가 베드로였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어떤 자녀가 가깝게 느껴집니까? 다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녀들이지만,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부를 때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아들과 딸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좋아요. 엄마와 아빠의 자녀인 게 자랑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자녀들의 이야기에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적극적인 대답과 고백을 했던 인물이 다윗과 베드로였고, 그들의 적극적이고 친밀한 성품이 사랑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또 하나,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하는 마음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베드로는 큰 죄악을 저지른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저질렀습니다.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사악하고 교활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며 참회했습니다. 그 참회의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다윗은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악을 범했지만 진정으로 돌이켜 무릎 꿇고 통회하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그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그가 세 번이나 연달아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일삼으며 예수님과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가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그분의 눈빛과 마주합니다. 누가복음 22장 61~62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1~62)
예수님의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구나. 내 결단과 헌신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통곡에 이릅니다.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존재의 실존을 철저히 깨닫게 된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회개하는 눈물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통곡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출발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가 가장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아든 이가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만찬 자리에서도 베드로는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1절에는 당시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결의에 찬 응답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의 열정이 담긴 진심어린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 그는 매우 비겁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반석’이란 칭호까지 받았던 그가 마치 흙먼지처럼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무엇보다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은 갑자기 찾아와 우리 삶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에 붙잡히면,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비겁하게 됩니다. 때로는 거짓말과 변명까지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자 그는 두려워졌고, 그 두려움에 붙잡혀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베드로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러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마태, 마가, 누가가 당시 베드로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동일하게 덧붙이는 부사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5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누가복음 22:54)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긴 했습니다. 그런데 세 복음서가 동일하게 기록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멀찍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당시 베드로가 가진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암시합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엔 두렵습니다. “너도 도당이지? 예수와 함께한 자지?” 하는 적대자들의 조롱도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놔두고 그냥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숨어서 그분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그렇게 그는 ‘익명’의 존재가 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나서면 자기 이름이 드러날 테고, 너무 멀리 가면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테니, 익명자로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이 아닌 구경꾼들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자로 남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자로 머물렀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통 받는 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남았습니다. 베드로가 선택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한 발자국을 들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발은 여차하면 세상을 향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발은 주님께, 한 발은 세상에 디디고 있습니다. 중간 자리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리를 말합니다. 이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중심’에 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주님의 교회에 나올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열정을 가지고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도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 삶 전체를 주님께 걸고 나아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주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한편 베드로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인가’를 늘 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두려움이 발생된 것입니다. 그저 한 어린 여종이 지나가며 “당신, 저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인데….”라고 던진 말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 “당신, 그와 한패인데….”라는 말에 정색합니다. 이후 또 한 사람이 “내가 보니 당신은 저 사람과 함께 있던 동료야.”라고 말하자 아연실색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당시 그가 저주했다는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바로 여기서 베드로의 자아 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니 자신의 정체성이 증발된 것입니다.
그는 이후 탄식하며 괴로워합니다. ‘왜 나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여 있었을까? 왜 다른 사람이 비난할까 봐 두려워 떨었을까? 그 두려움이 나의 나 됨을 빼앗아 간 것은 아닌가?’ 순식간에 찾아온 공포가 그의 모든 용기를 앗아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아, 내 결단도 별 게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 결심해도 철저하게 무너지는구나. 내 작정이 고작 하루도 못 가는구나.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이렇게 버리고 말았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봅니다. 철저하게 자기 실존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신의 믿음조차 헛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에게만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모습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 예수 믿지?”라고 물으면 도망가려고 합니다. “당신, 교회 다니지?”라고 물어오면 부담을 느낍니다. 하물며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컬어졌습니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강도로 여겼습니다. 민란을 일으키는 반역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로 일컫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말하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비판 받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는 사람들의 말이 자주 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입니다. 교회가 소망인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기대, 소망을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놓쳐서는 안 됩니다.
참회의 눈물이 베드로의 삶과 신앙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얼굴을 맞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굴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맞아. 내가 그렇게 호언장담했지. 그런데 예수님 말처럼 되었구나.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구나.’ 그러니 베드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도 그가 ‘밖으로 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는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곤 심히 통곡하며 눈물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못남에 대한 분노, 후회와 안타까움, 슬픔이 교차하면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바로 이 고통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갈라집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뒤 눈물을 흘리지 않고 후회와 분노만 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하게 되면 먼저 내가 공격을 당하고 망가지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그 분노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처음엔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눈물어린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요, 은총의 주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삶에 다시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그는 숨 막히는 수렁과 같은 깊은 심연을 통과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물 없는 자기 분노는 자신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주범이 되는 반면, 눈물어린 회개는 치유와 회복,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존귀한 눈물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앞에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이제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도움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바로 이 참회의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눈물과 울음에 친밀하지 않습니다. 특히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분노와 아픔을 쌓아두면서도 깊이 울지를 않습니다. 울지 않고 마음속에만 쌓아두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질병이 되고 맙니다. 정신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고통에 빠집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남자니까 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랍니다. 웬만해서는 울어서는 안 된다고 배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살다 어느 순간 무너지면, 도리어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성이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 있다면, 바로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야 합니다. 내 실존의 한계성을 느낄 땐 그저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면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 볼 일 없다고, 내가 해 봐도 잘 안 된다고,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없다고, 용기를 가지려고 해도 용기가 없다고, 나는 비겁하다고, 도망가려고 한다고, 거짓말하려고 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백하면서 울면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분 앞에 다시 나올 때, 우리가 사랑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을 흘려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비통의 눈물을 흘려본 적 있습니까? 내 부끄러움, 죄악, 못난 모습을 처절하게 고백한 적 있습니까?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을 무장해체한 적 있습니까? 내 모든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발가벗은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눈물이 있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면, 우리에게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 자유의 기쁨, 치유의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가 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렇듯 나 자신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내가 치유됩니다. 내 가족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내 가족이 치유됩니다. 내 교회를 위해 울기 시작하면 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이 나라와 민족이 치유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자 사명입니다. 바로 이 경험을 통해 베드로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될 수 있었고, 복음을 증언하는 주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서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토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속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 체면, 교만, 완악함, 미움, 분노, 이 모든 것을 주님께 아룁니다. 다 쏟아내겠습니다. 주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할 때, 주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이 도우실 때,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우리의 삶이 새롭게 열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2: 54 ~ 62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님께 적극적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님의 복이 임합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관련된 네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베드로를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게 열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베드로와의 만남과 사건이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의 적극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구약의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지만,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압도적으로 받은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베드로가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가장 먼저 대답하는 이가 다윗이었고, 주님이 요청하시면 가장 빠른 응답을 했던 이가 베드로였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도 어떤 자녀가 가깝게 느껴집니까? 다 사랑스럽고 존귀한 자녀들이지만,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부를 때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오는 아들과 딸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좋아요. 엄마와 아빠의 자녀인 게 자랑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자녀들의 이야기에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적극적인 대답과 고백을 했던 인물이 다윗과 베드로였고, 그들의 적극적이고 친밀한 성품이 사랑 받는 비결이었습니다.
또 하나,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회개하는 마음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베드로는 큰 죄악을 저지른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저질렀습니다.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사악하고 교활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눈물로 회개하며 참회했습니다. 그 참회의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다윗은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죄악을 범했지만 진정으로 돌이켜 무릎 꿇고 통회하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그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결코 주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그가 세 번이나 연달아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일삼으며 예수님과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그가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그분의 눈빛과 마주합니다. 누가복음 22장 61~62절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누가복음 22:61~62)
예수님의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 내가 별 볼 일 없는 존재구나. 내 결단과 헌신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통곡에 이릅니다. 주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기 존재의 실존을 철저히 깨닫게 된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회개하는 눈물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통곡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다시 출발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가 가장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에도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아든 이가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과의 만찬 자리에서도 베드로는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내가 생명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할지라도 나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1절에는 당시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결의에 찬 응답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그의 열정이 담긴 진심어린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그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후, 그는 매우 비겁해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반석’이란 칭호까지 받았던 그가 마치 흙먼지처럼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베드로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무엇보다 그에게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은 갑자기 찾아와 우리 삶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에 붙잡히면,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비겁하게 됩니다. 때로는 거짓말과 변명까지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자 그는 두려워졌고, 그 두려움에 붙잡혀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베드로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몇 가지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러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마태, 마가, 누가가 당시 베드로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동일하게 덧붙이는 부사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5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누가복음 22:54)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긴 했습니다. 그런데 세 복음서가 동일하게 기록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멀찍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당시 베드로가 가진 두려움과 근심, 걱정을 암시합니다.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엔 두렵습니다. “너도 도당이지? 예수와 함께한 자지?” 하는 적대자들의 조롱도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놔두고 그냥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숨어서 그분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그렇게 그는 ‘익명’의 존재가 되길 원했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나서면 자기 이름이 드러날 테고, 너무 멀리 가면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테니, 익명자로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곁이 아닌 구경꾼들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자로 남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자로 머물렀습니다. 주님과 함께 고통 받는 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남았습니다. 베드로가 선택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한 발자국을 들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발은 여차하면 세상을 향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 발은 주님께, 한 발은 세상에 디디고 있습니다. 중간 자리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리를 말합니다. 이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중심’에 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주님의 교회에 나올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열정을 가지고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도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 삶 전체를 주님께 걸고 나아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주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한편 베드로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내가 누구인가’를 늘 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두려움이 발생된 것입니다. 그저 한 어린 여종이 지나가며 “당신, 저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인데….”라고 던진 말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 “당신, 그와 한패인데….”라는 말에 정색합니다. 이후 또 한 사람이 “내가 보니 당신은 저 사람과 함께 있던 동료야.”라고 말하자 아연실색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당시 그가 저주했다는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바로 여기서 베드로의 자아 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니 자신의 정체성이 증발된 것입니다.
그는 이후 탄식하며 괴로워합니다. ‘왜 나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여 있었을까? 왜 다른 사람이 비난할까 봐 두려워 떨었을까? 그 두려움이 나의 나 됨을 빼앗아 간 것은 아닌가?’ 순식간에 찾아온 공포가 그의 모든 용기를 앗아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아, 내 결단도 별 게 아니구나. 내가 이렇게 결심해도 철저하게 무너지는구나. 내 작정이 고작 하루도 못 가는구나.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이렇게 버리고 말았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바라봅니다. 철저하게 자기 실존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신의 믿음조차 헛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에게만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모습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 예수 믿지?”라고 물으면 도망가려고 합니다. “당신, 교회 다니지?”라고 물어오면 부담을 느낍니다. 하물며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컬어졌습니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강도로 여겼습니다. 민란을 일으키는 반역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로 일컫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말하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교회가 비판 받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는 사람들의 말이 자주 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문제가 있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입니다. 교회가 소망인 이유는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기대, 소망을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놓쳐서는 안 됩니다.
참회의 눈물이 베드로의 삶과 신앙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얼굴을 맞대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얼굴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맞아. 내가 그렇게 호언장담했지. 그런데 예수님 말처럼 되었구나.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구나.’ 그러니 베드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도 그가 ‘밖으로 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는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곤 심히 통곡하며 눈물을 쏟아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못남에 대한 분노, 후회와 안타까움, 슬픔이 교차하면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바로 이 고통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갈라집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뒤 눈물을 흘리지 않고 후회와 분노만 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하게 되면 먼저 내가 공격을 당하고 망가지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그 분노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처음엔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눈물어린 회개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와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 삶의 주인이요, 은총의 주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의 삶에 다시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그는 숨 막히는 수렁과 같은 깊은 심연을 통과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눈물 없는 자기 분노는 자신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주범이 되는 반면, 눈물어린 회개는 치유와 회복,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존귀한 눈물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 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 앞에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이제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도움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바로 이 참회의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눈물과 울음에 친밀하지 않습니다. 특히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자기 마음속에 분노와 아픔을 쌓아두면서도 깊이 울지를 않습니다. 울지 않고 마음속에만 쌓아두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질병이 되고 맙니다. 정신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면서 고통에 빠집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남자니까 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랍니다. 웬만해서는 울어서는 안 된다고 배웁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살다 어느 순간 무너지면, 도리어 다른 사람을 향한 공격성이 심화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 있다면, 바로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고 싶을 땐 그냥 울어야 합니다. 내 실존의 한계성을 느낄 땐 그저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면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 볼 일 없다고, 내가 해 봐도 잘 안 된다고,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이 없다고, 용기를 가지려고 해도 용기가 없다고, 나는 비겁하다고, 도망가려고 한다고, 거짓말하려고 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백하면서 울면 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분 앞에 다시 나올 때, 우리가 사랑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을 흘려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비통의 눈물을 흘려본 적 있습니까? 내 부끄러움, 죄악, 못난 모습을 처절하게 고백한 적 있습니까?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나 자신을 무장해체한 적 있습니까? 내 모든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발가벗은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눈물이 있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면, 우리에게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 자유의 기쁨, 치유의 은총을 허락하십니다.
베드로가 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이렇듯 나 자신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내가 치유됩니다. 내 가족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내 가족이 치유됩니다. 내 교회를 위해 울기 시작하면 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기 시작하면 이 나라와 민족이 치유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자 사명입니다. 바로 이 경험을 통해 베드로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았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될 수 있었고, 복음을 증언하는 주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서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토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내 속에서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 체면, 교만, 완악함, 미움, 분노, 이 모든 것을 주님께 아룁니다. 다 쏟아내겠습니다. 주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할 때, 주님의 은총이 임합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이 도우실 때,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우리의 삶이 새롭게 열립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첨부파일 : [20181209] 2018년 12월 9일 주일말씀 구역(가정)예배 교안.hwp
2018년 12월 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베드로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1장, 26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22:54~6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시는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믿음의 선배들 중에 단연 다윗이 압도적입니다. 그렇다면 신야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누구일가?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인 베드로입니다.
설교의 요약
다윗과 베드로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가장 빠른 응답을 하였지만, 동시에 ② 둘 다 큰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그 분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는 통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눅22:61).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쓴 고백입니다. 베드로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할 때에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홀로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만찬 자리에서 “내가 생명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막14:31). 그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베드로는 비겁해졌습니다. 반석이라는 칭호를 받던 베드로가 반석이 아니라, 마치 흙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일까? 복음서는 동일하게 “멀찍이(54)”라는 단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난 두려움과 도피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중간을 택했습니다. 중간은 늘 위험합니다. 중심에 서야만 합니다. 중간은 결코 강력한 곳이 아닙니다. 중심에 서야 힘을 얻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후에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눈물 때문입니다(눅22:61). 왜 그렇게 슬피 울었을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결심과 약속, 헌신이 너무도 쉽게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있었습니다. 3년이나 뒤따랐던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청산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 우리는 콘 소리쳤던 용기마저 사라져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이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울음은 못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하기에는 자기 모습이 너무 안타깝고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받은 자기 자아에 대한 치유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두 제자 ?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스승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후에 초대교회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목매달아 그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과 베드로는 통곡했지만, 사울과 가룟 유다는 화가 나서 울분을 토할 뿐 결코 울어야 할 때에 울질 못했습니다. ‘운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회개이면서, 마음의 정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습니까? 그것도 비통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앞에서 내 부끄러움과 죄악을 기억하며 통회자복한 적이 있습니까? 눈물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으며, 생명이 싹트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울면 내가 치유가 됩니다. 가정을 위해 울면 가정이, 교회를 위해 울면 교회가, 나라를 위해 울면 나라가 치유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울음을 가진 진정한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가장 최근에 눈물 흘린 경험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렸는지 함께 나눠보세요.
2.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의 마음은 이중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나와 예수님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옵소서. 가정을 위해서 교회와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무엇보도 나의 부끄러움과 죄 악된 모습을 철저하게 내려놓는 통회의 눈물이 사라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