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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교황 – 예수님의 제자들 3 –

마태복음 16: 15 ~ 18

김지철 목사

2014.08.10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번 주 14일부터 18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머뭅니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어느 교황 때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단순한 교황 방문의 기대를 넘어서는 분위기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 이 인물 때문입니다. 특별히 광복절을 맞이한 때에 교황의 방문은 대한민국에서 종교적인 축제가 될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환호하는 것일까요? 전임자 베네딕토 16세는 어느 날 자진해서 사임을 했습니다. 교황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현 교황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교황을 뽑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사임은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후 약 1273년 만에 남미 아르헨티나의 비유럽출신이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천년 동안 가톨릭 교회에는 266명의 교황이 등장했습니다. 이 중에 교황청 개혁을 제대로 시도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중 세 번째로 본격적인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교황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도 조금 특별합니다. 교황들은 옛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교황 명칭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은 처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청빈과 겸손을 상징하여 ‘작은 예수’로 불리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교황에게는 걸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황도 프란치스코를 이름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교황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개혁적인 수도회인 예수회 출신의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아주 좋습니다. 그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서민적인 이미지와 개혁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개혁의지와 자의식이 분명한 교황입니다.

콘클라베는 로마 시스틴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입니다. 그곳에서 팔십 세 미만인 추기경들이 모여서 투표를 합니다. 삼분의 이가 동의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던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표가 삼분의 이쯤 진행되었을 때 새 교황이 결정되었다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우메스 추기경은 나에게 키스를 하며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곧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마음에 떠오르더군요. 개표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나는 지난 세월 일어났던 많은 전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평화를 말한 분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그분은 가난, 평화,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대변자입니다.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어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독일의 한 유력지는 그를 이렇게 설명하며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존중받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논란 많은 남자 수도회 소속의 교황이 ‘작은 형제회’ 설립자인 프란치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선택한 것은 교황의 놀라운 자의식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는 2014년 3월 14일 교황으로서 첫 번째 미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강론했습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는 사제요, 주교요, 추기경이요,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또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상처를 고쳐주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야 하고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는 교회를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으로 봅니다. 교회는 자기 안에서 나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영적 병듦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탈이 납니다. 교회가 거리로 나아가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여러 사건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자신을 가두고 있으면 고립된 의식으로 늙어갑니다. 거리로 나가서 사건과 조우하는 교회와 자신을 확신하는 병에 걸린 교회 중에 저는 분명 앞의 교회를 선호합니다.”
그가 한 말과 행동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개혁을 다시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도덕성을 재고시키고, 그동안 위축되었던 가톨릭 선교를 강화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은 그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가톨릭 이천년의 역사 속에 가장 강력한 개혁의지를 가진 자로 가톨릭 교회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개혁을 향한 교황의 마인드만으로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들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황이 거주하고 있는 바티칸은 하나의 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그 국가의 수장과도 같습니다. 마치 대통령과 같은 위치입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 행정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일종의 군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황의 뿌리를 베드로에서 찾습니다. 즉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교황이 그 뒤를 잇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교황의 수장권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무오성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것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시다가 같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때 대답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매우 기쁘셨습니다. 이 대답을 오랫동안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베드로’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기초를 이 베드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인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의 수장권을 받아들여서 지금까지 그것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톨릭의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큉도 교황 수장권의 정당성을 확정지을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이 수장권은 3, 4세기가 되어서야 확립되는 교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의 수장권은 어떤 문제를 만들어낼까요? 교황이 속해 있는 사제 계층과 신도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게 만듭니다. 맨 밑에 신도가 있고, 그 위에 주교가 있고, 그 위에 대주교가 있고, 그 위에 추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맨 정상에 교황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라미드적인 하이라키 구조로써 신도와 사제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구조입니다.
또한 교황을 향해서 절대순명이라는 순종의 명령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오류가 없는 존재라는 평가 때문입니다. 오랜 가톨릭 역사상 교황은 늘 권력과 지배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시대 한때는 교황이 황제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암흑시대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을 통해 등장한 개신교, 기독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성서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베드로적인’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적인’ 교회가 되어야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사제 앞에 나와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교황 수장권의 틀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칠대 성사 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사제 앞에 나와 고해성사를 하면 심리적으로 상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죄악과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를 받는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 내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을 하면 내가 네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러 가지 차이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교회와 성서와의 관계입니다. 가톨릭은 교회가 성서를 규정합니다. 교회가 성서 해석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성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서 탄생한 피조물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올바르게 규정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을 때, 고린도 교회라는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통해 생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분파와 분쟁이 생겼습니다. 지도자들, 사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즉 베드로파, 아볼라파,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나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듣고 누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로 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고 있구나. 그리스도의 몸이 이렇게 나뉘어져서 되겠느냐. 너희는 바울파라고 하는데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너희가 갖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놀랍게도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훼파하고 망각해 버리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공동체가 나누어지고 깨지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21)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해서 그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희의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 사람은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린도전서 3:22)

“만물 전체가 다 너희의 것이다. 나 바울이 너희의 것이다. 너희가 내 것이 되어 내가 너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도 너희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이 가톨릭 신앙보다 더 올바르게 서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는 누구의 것일까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3:23)

너희와 그리스도 사이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유이고,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개신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모든 삶을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개혁을 통하여 성숙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정체성을 찾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젖을 먹는 어린 아이의 신앙을 갖고 있냐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 자율성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이 보다 더 구약적이라고 한다면 개신교는 신약적인 개방성을 갖고 있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를 택한 우리의 자부심이고 축복입니다.
15, 16세기 존 후스, 마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불의와 부패를 보면서 분연히 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당대의 가톨릭 교회도 자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열린 것이 트렌트회의입니다.

자신 안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합시다.

이제 우리는 걸출한 가톨릭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더 성숙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도하며 도와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아주 성숙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펼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그 중심에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넘어지고 실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때로는 마치 교황권처럼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잘못된 경향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악이고 허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들을 고쳐나가야 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시고, 장로와 권사, 집사를 세우고, 성도님들의 사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한 것은 이미 개신교 전통 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새롭게 개혁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장로교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reformed church(개혁교회)입니다. 개혁이 멈추면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의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이 교회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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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 15 ~ 18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번 주 14일부터 18일까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머뭅니다.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어느 교황 때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단순한 교황 방문의 기대를 넘어서는 분위기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 이 인물 때문입니다. 특별히 광복절을 맞이한 때에 교황의 방문은 대한민국에서 종교적인 축제가 될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환호하는 것일까요? 전임자 베네딕토 16세는 어느 날 자진해서 사임을 했습니다. 교황은 종신직이기 때문에 현 교황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다음 교황을 뽑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사임은 특이한 현상이었습니다. 그 후 약 1273년 만에 남미 아르헨티나의 비유럽출신이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천년 동안 가톨릭 교회에는 266명의 교황이 등장했습니다. 이 중에 교황청 개혁을 제대로 시도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중 세 번째로 본격적인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교황입니다.
또한 그의 이름도 조금 특별합니다. 교황들은 옛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교황 명칭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은 처음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청빈과 겸손을 상징하여 ‘작은 예수’로 불리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교황에게는 걸맞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황도 프란치스코를 이름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교황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개혁적인 수도회인 예수회 출신의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아주 좋습니다. 그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 서민적인 이미지와 개혁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개혁의지와 자의식이 분명한 교황입니다.

콘클라베는 로마 시스틴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입니다. 그곳에서 팔십 세 미만인 추기경들이 모여서 투표를 합니다. 삼분의 이가 동의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던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표가 삼분의 이쯤 진행되었을 때 새 교황이 결정되었다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우메스 추기경은 나에게 키스를 하며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내게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곧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마음에 떠오르더군요. 개표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나는 지난 세월 일어났던 많은 전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평화를 말한 분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그분은 가난, 평화,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대변자입니다.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 어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독일의 한 유력지는 그를 이렇게 설명하며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존중받고 엘리트주의적이고 논란 많은 남자 수도회 소속의 교황이 ‘작은 형제회’ 설립자인 프란치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선택한 것은 교황의 놀라운 자의식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는 2014년 3월 14일 교황으로서 첫 번째 미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강론했습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는 사제요, 주교요, 추기경이요, 교황일 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또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상처를 고쳐주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깝게 다가서야 하고 접근이 필요합니다. 나는 교회를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으로 봅니다. 교회는 자기 안에서 나와 변두리로 가야 합니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영적 병듦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탈이 납니다. 교회가 거리로 나아가면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여러 사건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자신을 가두고 있으면 고립된 의식으로 늙어갑니다. 거리로 나가서 사건과 조우하는 교회와 자신을 확신하는 병에 걸린 교회 중에 저는 분명 앞의 교회를 선호합니다.”
그가 한 말과 행동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개혁을 다시 시작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의 도덕성을 재고시키고, 그동안 위축되었던 가톨릭 선교를 강화할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것은 그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는 가톨릭 이천년의 역사 속에 가장 강력한 개혁의지를 가진 자로 가톨릭 교회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됩니다. 개혁을 향한 교황의 마인드만으로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들은 사라지는 것일까요?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교황이 거주하고 있는 바티칸은 하나의 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그 국가의 수장과도 같습니다. 마치 대통령과 같은 위치입니다. 그래서 돈과 재물, 행정과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일종의 군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황의 뿌리를 베드로에서 찾습니다. 즉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이고 지금까지의 모든 교황이 그 뒤를 잇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교황의 수장권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무오성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것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시다가 같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때 대답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예수님은 매우 기쁘셨습니다. 이 대답을 오랫동안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베드로’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기초를 이 베드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교황인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의 수장권을 받아들여서 지금까지 그것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가톨릭의 유명한 신학자인 한스큉도 교황 수장권의 정당성을 확정지을 성서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이 수장권은 3, 4세기가 되어서야 확립되는 교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의 수장권은 어떤 문제를 만들어낼까요? 교황이 속해 있는 사제 계층과 신도 계층을 엄격하게 구분하게 만듭니다. 맨 밑에 신도가 있고, 그 위에 주교가 있고, 그 위에 대주교가 있고, 그 위에 추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맨 정상에 교황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라미드적인 하이라키 구조로써 신도와 사제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이분법적인 구조입니다.
또한 교황을 향해서 절대순명이라는 순종의 명령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오류가 없는 존재라는 평가 때문입니다. 오랜 가톨릭 역사상 교황은 늘 권력과 지배의 대명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시대 한때는 교황이 황제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암흑시대를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을 통해 등장한 개신교, 기독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의 신앙 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성서학을 공부하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베드로적인’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적인’ 교회가 되어야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사제 앞에 나와서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교황 수장권의 틀에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의 칠대 성사 중 하나입니다. 분명히 사제 앞에 나와 고해성사를 하면 심리적으로 상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떤 교회여야 하는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기독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만이 나와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죄악과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를 받는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 내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백을 하면 내가 네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여러 가지 차이 중 중요한 한 가지는 교회와 성서와의 관계입니다. 가톨릭은 교회가 성서를 규정합니다. 교회가 성서 해석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성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서 탄생한 피조물입니다. 교회가 말씀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올바르게 규정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을 때, 고린도 교회라는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을 통해 생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분파와 분쟁이 생겼습니다. 지도자들, 사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즉 베드로파, 아볼라파, 심지어 자신을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겼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나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듣고 누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로 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고 있구나. 그리스도의 몸이 이렇게 나뉘어져서 되겠느냐. 너희는 바울파라고 하는데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너희가 갖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놀랍게도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은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사건을 훼파하고 망각해 버리는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공동체가 나누어지고 깨지는 것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21)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해서 그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너희의 중보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그 사람은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린도전서 3:22)

“만물 전체가 다 너희의 것이다. 나 바울이 너희의 것이다. 너희가 내 것이 되어 내가 너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도 너희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이 가톨릭 신앙보다 더 올바르게 서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는 누구의 것일까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3:23)

너희와 그리스도 사이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의 자유이고,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개신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모든 삶을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개혁을 통하여 성숙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에 의해 정체성을 찾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젖을 먹는 어린 아이의 신앙을 갖고 있냐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 자율성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가톨릭이 보다 더 구약적이라고 한다면 개신교는 신약적인 개방성을 갖고 있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를 택한 우리의 자부심이고 축복입니다.
15, 16세기 존 후스, 마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불의와 부패를 보면서 분연히 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당대의 가톨릭 교회도 자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열린 것이 트렌트회의입니다.

자신 안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합시다.

이제 우리는 걸출한 가톨릭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가 더 성숙한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도하며 도와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은 아주 성숙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펼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그 중심에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넘어지고 실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때로는 마치 교황권처럼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잘못된 경향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악이고 허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들을 고쳐나가야 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를 주시고, 장로와 권사, 집사를 세우고, 성도님들의 사역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한 것은 이미 개신교 전통 속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일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새롭게 개혁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장로교회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reformed church(개혁교회)입니다. 개혁이 멈추면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개혁의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이 교회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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