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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통곡 – 예수의 고난 3 –

마가복음 14: 66 ~ 72

김지철 목사

2016.03.13

예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닭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통곡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이 장면을 잘 보여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바흐(J. S. Bach)의 마태수난곡입니다. 특히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마크 패드모어(Mark Padmore)의 애처롭고 처절한 목소리는 2천 년 전 베드로의 심정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난절을 맞아 마태수난곡의 가사를 되새기며 들어보는 것도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을 배반했던 두 제자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심지어 저주를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큰 죄악을 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의 끝은 매우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삶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초대교회의 훌륭하고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목을 매달아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실수와 실패는 동일했는데 무엇이 각자의 끝을 이처럼 다르게 만든 것일까요?
실수와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아 다시 회복하느냐 아니면 실수의 구렁텅이 속에 멈춰 있느냐 하는 차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와 함께 생각해 본다면, 그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눈물’로 인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눈물은 내면의 독소를 배출해 줍니다.

한 사람은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울분은 터뜨렸지만, 통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통곡하면서 깊은 심연에서부터 빠져 나왔지만 가룟 유다는 깊은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다가 그 안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 자신을 벌거벗은 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깊은 울음을 토해본 적이 있습니까?
독일 안과협회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는 일 년에 30번에서 64번 정도 우는 반면 남자는 일 년에 6번에서 17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여자의 약 1/4, 1/5밖에 남자는 울지 않는 것입니다. 횟수뿐만이 아니라 한 번 울 때의 시간도 차이가 납니다. 남자는 한 번 울 때 2∼4분 정도 우는 반면, 여자는 약 6분 정도 운다고 합니다. 또한 한 번 울 때, 남자가 통곡을 하는 경우는 약 6%에 불과한데 여자의 약 65%가 통곡을 한다고 합니다.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처음부터 눈물에 인색한 것은 아닙니다. 13살 정도까지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거의 없다가 그 이후부터 달라진다고 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이유를 이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그런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 울지 않기 때문에 내면에 독소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훈련을 받습니다. 한국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남자는 감정을 절제해야 된다, 남자는 누구 앞에서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남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등 일종의 세뇌처럼 ‘강한 남자’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여자들을 억누르는 것이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면, 남자를 억누르는 것은 바로 이 ‘강한 남자 콤플렉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뜰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목격하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놀라서 이렇게 답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가복음 14:68)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면서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부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며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가복음 14:71)

마지막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나는 저 사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부인을 하고 맙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베드로의 캐릭터는 매우 특별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신뢰하신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가장 많은 실수와 실패를 한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비겁한 사람일까요? 용기가 있다고 하기에는 비겁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그렇다고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어느 제자보다도 용감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도 나 베드로는 아닙니다. 죽게 되더라도 당신을 지키고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소리쳤던 인물도 베드로였고, 예수님이 밤중에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배 안에서 두려워 떨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 말씀 하세요” 하고 물 위로 걸음을 내딛었던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너무 화가 나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려친 것도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검과 몽치를 든 사람들이 다가올 때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될까? 나라도 뒤따라가야지’ 하고 따라갔다가 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며 베드로를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용기가 없었던 다른 제자들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눈물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후에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흘린 눈물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슬피 울었을까요?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며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 (누가복음 22:61)

베드로가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또 자신이 예수님께 한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폼 잡았는가. 내 목숨까지 걸 수 있다고, 나는 약속하면 끝까지 지키는 자라고, 내가 충성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뱉은 모든 말들이 순식간에 버려진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랬지? 재판을 받을까 겁이 나서? 내가 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게 될까봐? 나도 죽음으로 몰릴까봐?’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이 통곡 이후에는 더 큰 슬픔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이제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실수나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이 싫어지고 미워집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로 여겼던 마음이 무너지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집니다.
베드로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를 한 순간에 청산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고귀한 인간관계와 인격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아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베드로의 자아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베드로인데, 나는 예수님이 칭찬하셨던 제자인데,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것도 어린 여종의 “당신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잖아”라는 말 한마디에 놀라서 무너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것입니다. ‘왜 나는 나답게 살지 못할까. 왜 나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두려워 떨며 도망갔을까. 왜 나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얽매여 사는 자신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큰소리쳤던 그의 삶의 배경이 무너진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 속에는 없을까요? 나는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내게 자랑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충만합니까? 예수님에 관한 작은 질문 하나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 얼버무리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울어 보지 않았고, 나의 실존 때문에 울지 못했던 지난날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에게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바깥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울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못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놔두게 되면, 울지 않고 울분만 가지게 되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나를 미워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학대하고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자기 자신을 가두게 되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까지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슬플 때 슬퍼해야 합니다. 내 모습이 어리석게 보일 때,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토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베드로처럼 새 사람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의 유명한 사람, 어거스틴이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한 책이 『참회록』입니다. 그는 참회록 8권에서 자신이 변화된 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내 인생의 비참함이 그대로 내 눈앞에 드러났고 강한 폭풍이 내 영혼을 흔들더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홀로 조용히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렸고 내 눈에는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흘렸던 눈물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한 것은 은혜의 역사였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로 새 사람의 축복을 누립시다.

울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요? ‘강한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문제가 없어. 나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이러한 자기 방어기제를 깨뜨리는 힘이 우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비판에 대해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울음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나고 싶다는 울부짖음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겠다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은 나 자신에 대한 회개면서 마음의 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흘러나오는 눈물이 있으면 그대로 놔두세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울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찌꺼기를 배출합니다. 눈물은 나를 되찾는 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질병이 떠나고 영혼의 절망이 떠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울음에 있는 것입니다.
울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명자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서 울면 내가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가족을 위해서 울면 가족이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민족을 위해서 울면 민족이 치유를 받고 교회를 위해서 울면 교회가 치유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자들에게는 울음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 콤플렉스를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서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희망과 약속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토해 내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고 거듭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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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 66 ~ 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예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닭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 통곡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태복음 26:75)

이 장면을 잘 보여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바흐(J. S. Bach)의 마태수난곡입니다. 특히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마크 패드모어(Mark Padmore)의 애처롭고 처절한 목소리는 2천 년 전 베드로의 심정을 매우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수난절을 맞아 마태수난곡의 가사를 되새기며 들어보는 것도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을 배반했던 두 제자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심지어 저주를 퍼붓기까지 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큰 죄악을 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의 끝은 매우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삶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초대교회의 훌륭하고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목을 매달아 자신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요? 실수와 실패는 동일했는데 무엇이 각자의 끝을 이처럼 다르게 만든 것일까요?
실수와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아 다시 회복하느냐 아니면 실수의 구렁텅이 속에 멈춰 있느냐 하는 차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와 함께 생각해 본다면, 그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눈물’로 인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눈물은 내면의 독소를 배출해 줍니다.

한 사람은 통곡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울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울분은 터뜨렸지만, 통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통곡하면서 깊은 심연에서부터 빠져 나왔지만 가룟 유다는 깊은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다가 그 안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 자신을 벌거벗은 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깊은 울음을 토해본 적이 있습니까?
독일 안과협회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는 일 년에 30번에서 64번 정도 우는 반면 남자는 일 년에 6번에서 17번 정도 운다고 합니다. 여자의 약 1/4, 1/5밖에 남자는 울지 않는 것입니다. 횟수뿐만이 아니라 한 번 울 때의 시간도 차이가 납니다. 남자는 한 번 울 때 2∼4분 정도 우는 반면, 여자는 약 6분 정도 운다고 합니다. 또한 한 번 울 때, 남자가 통곡을 하는 경우는 약 6%에 불과한데 여자의 약 65%가 통곡을 한다고 합니다. 열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처음부터 눈물에 인색한 것은 아닙니다. 13살 정도까지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거의 없다가 그 이후부터 달라진다고 합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수명이 짧은 이유를 이것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그런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잘 울지 않기 때문에 내면에 독소가 쌓인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어릴 때부터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훈련을 받습니다. 한국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습니다. 남자는 감정을 절제해야 된다, 남자는 누구 앞에서도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남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등 일종의 세뇌처럼 ‘강한 남자’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여자들을 억누르는 것이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면, 남자를 억누르는 것은 바로 이 ‘강한 남자 콤플렉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뜰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베드로를 목격하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놀라서 이렇게 답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가복음 14:68)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면서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베드로는 부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여러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며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가복음 14:71)

마지막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나는 저 사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부인을 하고 맙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베드로의 캐릭터는 매우 특별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신뢰하신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가장 많은 실수와 실패를 한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용기 있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비겁한 사람일까요? 용기가 있다고 하기에는 비겁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그렇다고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어느 제자보다도 용감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도 나 베드로는 아닙니다. 죽게 되더라도 당신을 지키고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소리쳤던 인물도 베드로였고, 예수님이 밤중에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배 안에서 두려워 떨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 말씀 하세요” 하고 물 위로 걸음을 내딛었던 것도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너무 화가 나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려친 것도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검과 몽치를 든 사람들이 다가올 때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될까? 나라도 뒤따라가야지’ 하고 따라갔다가 본문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며 베드로를 쉽게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쩌면 그보다 더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용기가 없었던 다른 제자들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눈물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후에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흘린 눈물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슬피 울었을까요?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며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 (누가복음 22:61)

베드로가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또 자신이 예수님께 한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폼 잡았는가. 내 목숨까지 걸 수 있다고, 나는 약속하면 끝까지 지키는 자라고, 내가 충성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자신이 뱉은 모든 말들이 순식간에 버려진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랬지? 재판을 받을까 겁이 나서? 내가 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게 될까봐? 나도 죽음으로 몰릴까봐?’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이 통곡 이후에는 더 큰 슬픔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이제는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실수나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모습이 싫어지고 미워집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괜찮은 존재로 여겼던 마음이 무너지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집니다.
베드로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과의 모든 관계를 한 순간에 청산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고귀한 인간관계와 인격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큰소리를 치지 않았습니까. 아마 그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아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베드로의 자아정체성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베드로인데, 나는 예수님이 칭찬하셨던 제자인데,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규정받고 있다는 것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그것도 어린 여종의 “당신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잖아”라는 말 한마디에 놀라서 무너진 자신의 모습이 너무 어처구니없었습니다. 그래서 통곡한 것입니다. ‘왜 나는 나답게 살지 못할까. 왜 나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그렇게 두려워 떨며 도망갔을까. 왜 나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에 얽매여 사는 자신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큰소리쳤던 그의 삶의 배경이 무너진 것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2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 속에는 없을까요? 나는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내게 자랑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충만합니까? 예수님에 관한 작은 질문 하나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어 얼버무리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울어 보지 않았고, 나의 실존 때문에 울지 못했던 지난날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에게 이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바깥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울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못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놔두게 되면, 울지 않고 울분만 가지게 되면,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나를 미워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학대하고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처럼 절망과 좌절 가운데 자기 자신을 가두게 되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까지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울어야 할 때 울어야 합니다. 슬플 때 슬퍼해야 합니다. 내 모습이 어리석게 보일 때,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토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회복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베드로처럼 새 사람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회사의 유명한 사람, 어거스틴이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한 책이 『참회록』입니다. 그는 참회록 8권에서 자신이 변화된 것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내 인생의 비참함이 그대로 내 눈앞에 드러났고 강한 폭풍이 내 영혼을 흔들더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홀로 조용히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엎드렸고 내 눈에는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흘렸던 눈물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한 것은 은혜의 역사였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로 새 사람의 축복을 누립시다.

울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요? ‘강한 사람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문제가 없어. 나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이러한 자기 방어기제를 깨뜨리는 힘이 우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과 비판에 대해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울음입니다. 옛 자아를 벗어나고 싶다는 울부짖음이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겠다는 선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울음은 나 자신에 대한 회개면서 마음의 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시기 바랍니다. 흘러나오는 눈물이 있으면 그대로 놔두세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울음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눈물은 마음의 찌꺼기를 배출합니다. 눈물은 나를 되찾는 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질병이 떠나고 영혼의 절망이 떠납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울음에 있는 것입니다.
울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사명자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위해서 울면 내가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가족을 위해서 울면 가족이 치유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민족을 위해서 울면 민족이 치유를 받고 교회를 위해서 울면 교회가 치유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자들에게는 울음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 콤플렉스를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서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베드로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희망과 약속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토해 내면서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고 거듭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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