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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19

김경진 목사

2024.04.14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왕자님이 마침내 모든 악당들을 물리치고 공주님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늘 이렇게 끝나는 동화책들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런 동화를 읽으면 참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공주님과 왕자님이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나도 이런 공주님,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동화 속 주인공들이 과연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재물이 많아서, 큰 성에 살 수 있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가 있기에, 매일 아름다운 공주님·왕자님과 아침마다 키스를 할 수 있었기에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또는 두 사람이 건강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들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아이들이 효자·효녀로 잘 자라나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물론 이런 조건들이 어느 정도의 행복의 조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행복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왕자님과 공주님이 서로 화목하게 지낸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편과 아내가 화목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한 것 같아도 행복할 수 없지요.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가정은 냉랭하고 살기가 도는 곳이 되고 아이들과 가족의 구성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마다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인 동시에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이겠습니다.

재산도 있습니다. 멋진 집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도움을 주는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자랑하듯 타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나름 건강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늘 불안하고 위태롭고 절망스러운 곳이 가정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선 이미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가족만이 아니지요. 우리의 직장도 그렇습니다. 직장의 상사, 혹은 동료와 화목하지 않다면 그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늘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것을 힘들어 합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반목하고 서로 싸울 때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희망을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큰 고통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을 보게 되는데, 불화하고 반목하는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아 왔습니다.

<우리의 죄는 끊임없이 화목을 이루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분열과 반목, 불화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죄로부터 왔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계의 깨어짐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관계가 되었고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라고 외쳤던 감탄사는 도리어 원수가 되는 변질된 목소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자연은 인간이 노동을 해야만 소산물을 내어놓는 관계로 바뀌고 변질되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또한 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이라고 하는 아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결국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역사는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고, 끊임없는 전쟁과 살육, 그리고 반목과 배반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생각하고 꿈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그곳에서 모든 자연의 피조물들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관계의 모습을 꿈꾸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하시면서 영원히 거하시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이루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그와 같은 세상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꿈꾸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꿈꾸시고 또 앞으로도 꿈꾸고 계시는 그 세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6~8)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꿈꾸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은 이렇듯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함께 화목하게 화해하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이런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우선되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본다면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 에덴동산에 있을 때조차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입니다.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죄악으로 양심마저 엉클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화해를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에 이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모든 이유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주님 앞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내가 결혼의 의무를 저 버리고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 남편을 배신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 죄를 지은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화해와 화목의 주도권은 죄를 지은 여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피해를 입은 남편이 화해의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시도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과의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말씀합니다. 그럴 의지가 있으셨고 끊임없이 인간과 화해하기 원하셨음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사 65:1~2,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팔을 벌리고 계셨고, 반역하고 또 반역하는 그들을 향해서 마음과 팔을 열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요한1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이것이 요한1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와 화목의 프로젝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 일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후 5:18a)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a)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게 되는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화목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 ‘화목’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화목’입니까? 화목이라는 말의 뜻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헬라어 본문 말씀에서 특히 이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화목’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말 중에 동사로 ‘καταλλάσσω’(katallassó 카탈라소: to reconcil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명사 표현으로는 ‘καταλλαγή’(katallagé 카탈라게: reconciliation)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탈라게’라는 표현은 주로 돈을 환전할 때 서로 같은 가치로 환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화폐 교환을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화폐를 교환할 때 서로 다른 화폐의 가치를 서로 적절하게 대체해서 차이를 조율하여 잘 맞추어 내는 것을 ‘카탈라소’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단어가 합성으로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앞부분에 있는 ‘카타’(κατά: down from, i.e. from a higher to a lower plane)라는 단어는 ‘아래로 내려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다른 뜻이 있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렇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뒤에 붙는 ‘알라소’(ἀλλάσσω: to change, exchange)라는 단어는 ‘교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화목’이라는 단어는 ‘누군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가치를 교환할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어에서 ‘understand’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 말도 두 단어가 합해져 있지요? ‘이해하다’는 말로 주로 변역되는데, 이 말에는 ‘under’(아래에)라는 단어와 ‘stand’(서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래에 서다’라는 말이죠. 다시 말하면 ‘아래에 섰을 때, 아래에 서서 이해하다’라는 말과 같은 이치이겠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되다’라는 말은 ‘위에 있는 존재가 내려와서 가치를 서로 맞출 수 있을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하신 일이 이러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죠. 성육신하십니다. 십자가에까지 내려오셔서 죽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제적 화목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큽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죄인으로 바닥에 처해 있는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낮은 자와 함께하시고 겸비해지셨습니다. 더하여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의 살인 형으로 죽어 가는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죄를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시고 내려오셔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극을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목의 사건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욱더 분명하게 말씀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이 진리임을 우리에게 확증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음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진화나 나아짐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우리를 만들어 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존재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과 우리는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차원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축복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제부터 계속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첫 번째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건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장차 죽음 이후 어느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살아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죠. 그런데 부활신앙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모두 죽은 것 같았던 정의와 진리를 사탄은 완전히 다 망가트린 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여전히 진리와 정의는 살아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마지막 날에 정의가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부활의 신앙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사건이며,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알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화목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이미 선언했는데, 왜 바울 사도는 다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아직 화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어야 될 무엇인가 있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목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화목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때 화목이라고 말을 합니다.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화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화목합니다. 지금까지는 분쟁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화목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이제부터는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시겠습니까? 잠시 분쟁이 줄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상태를 화목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목은 어떤 것입니까?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아침을 먹을 때도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하며, 함께 있는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하고, 저녁에 잠에 들 때에도 함께 있음에 늘 좋고 행복한 상태가 화목 아니겠습니까? 가정의 화목이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친구와 아버지로 삼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의 삶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루나 어떤 순간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새 것이 되었으니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이 말씀에 다른 뜻이 있다면, 이제 “우리로 하여금 화목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어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19)

화목을 이루는 직분을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화목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계속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부활의 신앙은 이렇게 ‘화목하라’는 직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따라서 화목하게 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사회와 친구 관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면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화목은 절대로 ‘전쟁’이나 ‘정복’을 통해서 이룰 수 없습니다. ‘카타’, ‘알라소’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높이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교환을 나눌 때, 그때에 진정한 화목이 일어납니다. 낮은 곳으로 누군가가 내려가서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치를 양보하고 나누어 줄 때 그곳에 화목이 일어납니다.
공정하게 모든 것을 한다고 화목이 일어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육아를 공정하게 한다고 해서, 12시간 공정하게 나눠서 아이를 돌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화목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화목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려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려가서 같이 나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곳에 화목과 화평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화목을 만들기를 원하신다면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먼저 행하시면 됩니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양보할 때, 우리 가정에 화목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좀 다르게 태어났어.’라는 마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마음으로 양보하고 내려갈 때 가정에 화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 나라도 또한 그렇습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팎에서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위한 사역을 소개하고 동참할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땅에 외국인으로 정착하고 살아가며 낮은 위치에 있는 이주민들을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는 캠페인입니다. 우리가 내려갈 때 이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고, 그들과 화목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화목을 이루면 우리의 가정과 대한민국은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은 평화의 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부활 절기를 기쁨으로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The New Has Come!

 

2 Corinthians 5:17-19

 

 

We remember the fairy tales we read as a child. They always ended with these words:“…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Fairy tales warmed our hearts and made us dream of living such a happy life one day.

 

But with age and experience, we come to wonder how the princesses and princes in the stories became so happy. What made them happy? Was it the big castles and riches? Was it the superb cooks and the delicious foods they cooked for them? Was it the kisses that the princess got each morning from her Prince Charming?

 

Were they happy because they had good health? Or because there were no wars in their lifetime? Or because they had beautiful children who adored and respected them?

 

Of course, such conditions may have given them a certain level of happiness, but I think the most important condition of their happiness was a good husbandand wife relationship. When a married couple’s relationship suffers, you can never be happy—no matter how great your success.

 

The home of an unhappy familywill be cold and bitter. If the husband and wife do not have a harmonious relationship, the whole family,including the children, suffers.

 

I talk to ourassociate pastorsoften. They say that when they first came to Somang Church, they were curious—since this church is located in Gangnam with many of its congregation living in rich neighborhoods such as Apgujeong-dong, Cheongdam-dong, and Sinsa-dong. They thought perhapssuch people would not havemany concerns and hardships. Wouldn’t such people lead enviable lives?

 

But after a year of ministry, they realize that our church is no different from other churches. It is full of strugglingpeople, people going through difficulties.

 

The greatest crisis and pain of each family is thattheir homes are not happy and harmonious. They may be well-off and live in a grand house. They also have a lot ofhelpers. They can eat all the delicious foods they want. They even have cool cars. They are considerably healthy. But one thing they lack—a happy, harmonious family. This makes their homes a living hell. At home they are constantly anxious, on edge, and dejected.

 

Therefore, God tells us in Proverbs:

 

“Better a dry crust with peace and quiet than a house full of feasting, with strife.”(Proverbs 17:1)

 

We know the importance of harmony in life. It is critical not just in the home. If you don’t have a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your boss and colleagues at work, life becomes hell.

 

What is this nation’s greatest crisis? It is that politics has no harmony and only has conflict and opposition,which makes thepeople suffer. We cannot but be concerned for our country’s future.

 

When the church is not harmonious and its members fight and quarrel, not only does it fail to give hope to society but its members become unhappy and suffer.

 

Where do these divisions, strife, and quarrels come from? The Bible states that they are the consequences of sin. Most importantly, the Bible teaches us man’s broken relationship with God is at the root of all these unfortunate consequences.

 

After eating the fruit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at God had forbidden, Adam and Eve’s relationship with God breaksdown. After this incident, they criticize each other before God. The husband blames his wife, passing his sin on to her, and vice versa.

 

The woman that Adam had formerly called“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became his most hated enemy. Nature also produced thorns and thistles, making it difficult for man to work the land.

 

Relationships became exploitive and oppressive. Cain, Adam and Eve’s son, stoned his brother to death over a grudge regarding sacrifices to God.

 

After man’s relationship with God was broken, man’s history has always been, and continues to be, full of strife, endless wars, killings, oppositions, and betrayal.

 

What was the world that God dreamed of when He created Adam and Eve? When God created them in His image, He wanted to enjoy a beautiful and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them forever in the Garden of Eden. He also envisioned man living in harmony with all creation and nature. But this dream was shattered by man’s rebellion.

 

Yet God did not abandon His dream. He tries to create such a world in the end. Isaiah describes the world God dreams of and wishes to restore with these words:

 

“The wolf will live with the lamb, the leopard will lie down with the goat, the calf and the lion and the yearling together; and a little child will lead them.The cow will feed with the bear, their young will lie down together, and the lion will eat straw like the ox.The infant will play near the hole of the cobra, and the young child put his hand into the viper’s nest.”(Isaiah 11:6-8)

 

As such, in the world God envisions creatures whose coexistence seems impossible live togetherin harmony and peace. Of course, there is a precondition to it: being reconciled with God.

 

Then how can we reconcile ourselves with God? Can we really be reconciled with Him?

 

Humanly speaking, it seems possible. It seems impossible because even when Adam and Eve lived in the Garden of Eden, they chose hostility against God after eating the forbidden fruit. Considering that man abandoned God even in the best possible environment, how can we today, who are living in a far more hostile and painful reality and whose consciences have been utterly distorted by sin, possibly reconcile ourselves with God?

 

Moreover, Satan continues to attack us to prevent us from drawing near to God, worsening our already hostile relationship with God. Therefore, reconcilingourselvesto God with our own strength or power is impossible.

 

Yet the most critical and fundamental reason we cannot approach God on our own is that we are sinners. Let’s say a wife has been unfaithful to her husband and betrayed him. She has sinned against him. When this happens, the wife does not have the initiative to make peace and reconciliation with her husband. It is the husband, the one who has been wronged, who has the initiative to seek reconciliation.

 

This goes for ourrelationship with God too. Since we havesinned and abandoned Him, we cannot reconcile ourselves with Him with our own strength. We cannot be reconciled with Him by our doing.

 

So the Bible tells us that God took the initiative to make man reconciled with Him: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To a nation that did not call on my name, I said, ‘Here am I, here am I.’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n obstinate people, who walk in ways not good, pursuing their own imaginations-”(Isaiah 65:1-2)

 

Furthermore 1 John states:

 

“This is love: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n atoning sacrifice for our sins.”(1 John 4:10)

 

It was God who started the peacemaking project between man and God. And to execute that project God sacrificed His Son, Jesus Christ. This is what today’s Scripture tells us: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 (2 Corinthians 5:18a)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2 Corinthians 5:19a)

 

It is of utmost importance that we remember what God did for us to reconcile ourselves to Him.

 

The word “reconciliation” in today’s text appears in two forms: first, as a verb “to reconcile,”which in Hebrew is “καταλλάσσω (katallassó)”; and second, as a noun “reconciliation,”which in Hebrew is “καταλλαγή (katallagé).”

 

The noun “katallagé” was usually used whenJews exchanged money. In other words, its meaning has to do with currencyexchange. When people exchangedcurrencies, their differences had to be settled appropriately, which was called “katallagé.”

 

However an interesting precondition is attached to this word. “κατά (kata)” means to “go down from, i.e. from a higher to a lower plane, while“ἀλλάσσω (allassó)” means “to change, exchange.”In other words,the word “katallagé”means that reconciliation is gained when a person of a higher position comes down to a person of a lower positionto exchange values.

 

This is exactly what God did for man.

 

Christ’s incarnation and His death on the Cross were God’s preemptive acts of reconciliation. Therefore the Bible says:

 

“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things on earth or things in heaven, by making peace through his blood, shed on the cross.Once you were alienated from God and were enemies in your minds because of your evil behavior.But now he has reconciled you by Christ’s physical body through death to present you holy in his sight, without blemish and free from accusation–”(Colossians 1:20-22)

 

Furthermore, Christ’s resurrection further clarified God’s reconciliation with man:

 

“For if, when we were God’s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him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how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through his life!” (Romans 5:10)

 

To deliver us sinners, Jesus who was without sin came down to man and exchanged values—by dying on the Cross and being resurrected. His precious blood reconciled us to God. This is the mystery of our faith.

 

Therefore,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our Lord point to one fact: that we have been reconciled to God. Today’s Scripture tells us this fact with these words: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2 Corinthians 5:17)

 

In short, we are born as a new creation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We are a new creation now. The one who is in Christ is a new creation. Now we are reconciled with God. A new world, a new dimension will open up.

 

But today’s passage also includes an interesting verse:

 

“We are therefore Christ’s ambassadors, as though God were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implore you on Christ’s behalf: Be reconciled to God.”(2 Corinthians 5:20)

 

Does this mean that we are not reconciled with God yet? What does the command to “be reconciled to God” mean?

 

We have already been saved through the Cross and the resurrection of Christ; we have been made righteous already. Through an exchange of values, we have been reconciled to God.

 

However, this reconciliation does not pertain to a certain, single moment. Reconciliation is a continuing concept. In other words, it is marked by endurance. When we say we have a happy family, it doesn’t mean that our family is happy for a moment; it refers to a family whose day-to-day living is happy and harmonious.

 

Likewise, Paul’s advice to “be reconciled to God” means that from now on, we mustlive as beings who have been reconciled to God. It means we should live as people who have been reconciled with God, enjoying true freedom.

 

Our existence has changed. Now we can call God “Father.”

 

Furthermore, “be reconciled to God”is also a command to build reconciliation. This is what the Lord says to us through Paul:

 

“All this is from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that God was reconciling the world to himself in Christ, not counting men’s sins against them. And he has committed to us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2 Corinthians 5:18-19)

 

God has given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and He wants us to be reconciled to Him through this ministry.

 

Dear Church, what is the “resurrection faith”? It is a faith that believes not only in Christ’s resurrection but in the fact that we have been born as new beings who buildreconciliationin the world. Furthermore, it is to believethat we have become a new creation, a new being, with Christ’s resurrection.

 

We are God’s people who do theministry of reconciliation, following in Jesus’footsteps. How can we foster reconciliation? How can we do the work of reconciliation at home, in society, and in church and finally become reconciled to God? We must come down—just as Jesus did. We muststick to the meaning of “kata,” that is, “to go down from from a higher to a lower plane,” and give what is ours inexchanging values. This is the path to reconciliation.

 

Reconciliation is not gained by wars and conquest. True reconciliation is created when someone comes down from a higher position and gives up what is his/hers, when he humbles himself, when he surrenders himself as if sacrificing his life.

 

Dear Church, today is the third Sunday since Easter.

 

We are a new creation. We are people who do the work of reconciliation; we have been given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We are beings who have been born again. Now let’s do this precious ministry of reconciliation that our Lord has entrusted to us in our homes, at work, in society, in church, and in this nation.

 

Furthermore, we need people who will take part in the ministry and evangelizingmission towardmigrants in Korea. Let’s pray together for these immigrants who have come to live and settle in a foreign land. Let’s find a way to live in harmony with them and put those ways into practice.

 

When we create reconciliation, our homes and the Republic of Korea will become happy and harmonious.

 

This land will finally become a land of peace, and the Kingdom of God will be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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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7~19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놓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왕자님이 마침내 모든 악당들을 물리치고 공주님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늘 이렇게 끝나는 동화책들을 아마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런 동화를 읽으면 참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공주님과 왕자님이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나도 이런 공주님,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책을 읽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이런저런 경험이 쌓이면서 ‘동화 속 주인공들이 과연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됩니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재물이 많아서, 큰 성에 살 수 있어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가 있기에, 매일 아름다운 공주님·왕자님과 아침마다 키스를 할 수 있었기에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또는 두 사람이 건강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그들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아이들이 효자·효녀로 잘 자라나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물론 이런 조건들이 어느 정도의 행복의 조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행복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왕자님과 공주님이 서로 화목하게 지낸 것이 아니었을까요? 남편과 아내가 화목하지 못하면 아무리 성공한 것 같아도 행복할 수 없지요.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가정은 냉랭하고 살기가 도는 곳이 되고 아이들과 가족의 구성원들은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마다 겪고 있는 가장 큰 위기인 동시에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이겠습니다.

재산도 있습니다. 멋진 집에 살고 있기도 합니다. 도움을 주는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자랑하듯 타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나름 건강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늘 불안하고 위태롭고 절망스러운 곳이 가정이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선 이미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가족만이 아니지요. 우리의 직장도 그렇습니다. 직장의 상사, 혹은 동료와 화목하지 않다면 그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이 화목하지 못하고 늘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것을 힘들어 합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반목하고 서로 싸울 때 교회는 사회를 향하여 희망을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큰 고통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행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을 보게 되는데, 불화하고 반목하는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보아 왔습니다.

<우리의 죄는 끊임없이 화목을 이루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분열과 반목, 불화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죄로부터 왔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계의 깨어짐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관계가 되었고 살 중에 살, 뼈 중에 뼈라고 외쳤던 감탄사는 도리어 원수가 되는 변질된 목소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자연은 인간이 노동을 해야만 소산물을 내어놓는 관계로 바뀌고 변질되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또한 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이라고 하는 아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결국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역사는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고, 끊임없는 전쟁과 살육, 그리고 반목과 배반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생각하고 꿈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그곳에서 모든 자연의 피조물들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관계의 모습을 꿈꾸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하시면서 영원히 거하시는 그야말로 “오랫동안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를 이루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그와 같은 세상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서 노력하시고 꿈꾸셨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특별히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꿈꾸시고 또 앞으로도 꿈꾸고 계시는 그 세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6~8)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꿈꾸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은 이렇듯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함께 화목하게 화해하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물론 이런 세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우선되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떻게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본다면 불가능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 에덴동산에 있을 때조차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스스로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과 같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입니다.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죄악으로 양심마저 엉클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화해를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에 이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먼저 오셨습니다.>

모든 이유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주님 앞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내가 결혼의 의무를 저 버리고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서 남편을 배신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 죄를 지은 것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화해와 화목의 주도권은 죄를 지은 여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피해를 입은 남편이 화해의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기에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시도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과의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말씀합니다. 그럴 의지가 있으셨고 끊임없이 인간과 화해하기 원하셨음을 이렇게 알려 줍니다.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사 65:1~2,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팔을 벌리고 계셨고, 반역하고 또 반역하는 그들을 향해서 마음과 팔을 열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요한1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이것이 요한1서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와 화목의 프로젝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주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 일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후 5:18a)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후 5:19a)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하게 되는 일을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화목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 ‘화목’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화목’입니까? 화목이라는 말의 뜻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헬라어 본문 말씀에서 특히 이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화목’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말 중에 동사로 ‘καταλλάσσω’(katallassó 카탈라소: to reconcil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명사 표현으로는 ‘καταλλαγή’(katallagé 카탈라게: reconciliation)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탈라게’라는 표현은 주로 돈을 환전할 때 서로 같은 가치로 환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화폐 교환을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화폐를 교환할 때 서로 다른 화폐의 가치를 서로 적절하게 대체해서 차이를 조율하여 잘 맞추어 내는 것을 ‘카탈라소’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단어가 합성으로 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앞부분에 있는 ‘카타’(κατά: down from, i.e. from a higher to a lower plane)라는 단어는 ‘아래로 내려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다’라는 뜻입니다. 여러 다른 뜻이 있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렇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뒤에 붙는 ‘알라소’(ἀλλάσσω: to change, exchange)라는 단어는 ‘교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화목’이라는 단어는 ‘누군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서 가치를 교환할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어에서 ‘understand’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 말도 두 단어가 합해져 있지요? ‘이해하다’는 말로 주로 변역되는데, 이 말에는 ‘under’(아래에)라는 단어와 ‘stand’(서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래에 서다’라는 말이죠. 다시 말하면 ‘아래에 섰을 때, 아래에 서서 이해하다’라는 말과 같은 이치이겠습니다. 그러므로 ‘화목하게 되다’라는 말은 ‘위에 있는 존재가 내려와서 가치를 서로 맞출 수 있을 때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하신 일이 이러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죠. 성육신하십니다. 십자가에까지 내려오셔서 죽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제적 화목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큽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죄인으로 바닥에 처해 있는 운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낮은 자와 함께하시고 겸비해지셨습니다. 더하여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의 살인 형으로 죽어 가는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죄를 함께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오시고 내려오셔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간극을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목의 사건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욱더 분명하게 말씀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이 진리임을 우리에게 확증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음이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탄생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진화나 나아짐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우리를 만들어 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존재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과 우리는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차원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축복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제부터 계속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첫 번째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건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장차 죽음 이후 어느 마지막 날에 주님과 함께 살아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죠. 그런데 부활신앙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모두 죽은 것 같았던 정의와 진리를 사탄은 완전히 다 망가트린 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여전히 진리와 정의는 살아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마지막 날에 정의가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른 부활의 신앙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이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사건이며, 우리가 새롭게 태어났음을 알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화목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이미 선언했는데, 왜 바울 사도는 다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아직 화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어야 될 무엇인가 있다는 말씀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목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화목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될 때 화목이라고 말을 합니다.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화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화목합니다. 지금까지는 분쟁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화목합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새로운 계약서에 사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이제부터는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 계시겠습니까? 잠시 분쟁이 줄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상태를 화목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화목은 어떤 것입니까?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나서 서로 격려하고, 함께 아침을 먹을 때도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하며, 함께 있는 것이 늘 즐겁고 행복하고, 저녁에 잠에 들 때에도 함께 있음에 늘 좋고 행복한 상태가 화목 아니겠습니까? 가정의 화목이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부터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친구와 아버지로 삼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의 삶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루나 어떤 순간이 아니라 이제부터 계속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새 것이 되었으니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수행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이 말씀에 다른 뜻이 있다면, 이제 “우리로 하여금 화목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어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울을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8~19)

화목을 이루는 직분을 주시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화목의 사역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계속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부활의 신앙은 이렇게 ‘화목하라’는 직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을 따라서 화목하게 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사회와 친구 관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목을 이룰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다면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화목은 절대로 ‘전쟁’이나 ‘정복’을 통해서 이룰 수 없습니다. ‘카타’, ‘알라소’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높이 있는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교환을 나눌 때, 그때에 진정한 화목이 일어납니다. 낮은 곳으로 누군가가 내려가서 자신의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치를 양보하고 나누어 줄 때 그곳에 화목이 일어납니다.
공정하게 모든 것을 한다고 화목이 일어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육아를 공정하게 한다고 해서, 12시간 공정하게 나눠서 아이를 돌보기 때문에 우리에게 화목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화목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려가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려가서 같이 나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곳에 화목과 화평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서 화목을 만들기를 원하신다면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먼저 행하시면 됩니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양보할 때, 우리 가정에 화목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좀 다르게 태어났어.’라는 마음으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앙의 마음으로 양보하고 내려갈 때 가정에 화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 나라도 또한 그렇습니다.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팎에서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위한 사역을 소개하고 동참할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 땅에 외국인으로 정착하고 살아가며 낮은 위치에 있는 이주민들을 어떻게 도울까 생각하는 캠페인입니다. 우리가 내려갈 때 이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고, 그들과 화목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화목을 이루면 우리의 가정과 대한민국은 행복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땅은 평화의 땅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곳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부활 절기를 기쁨으로 보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4년 4월 14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장 17~19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61장, 515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고후 5장 17~19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4월 1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을 보면 늘 이야기의 끝이 행복입니다. 동화 속의 주인공은 어떻게 행복을 얻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하나님 앞에서 비난했습니다. 한 몸을 이룬 아내와 남편이 “잘못한 것은 바로 저 사람이다”라고 죄를 전가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과 화목이 깨어진 인간의 역사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고, 끊임없는 전쟁과 살육, 그리고 반목과 배반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과 불화한 상황 속에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더 크고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주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과의 화목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서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화목 프로젝트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존재합니다. 화목은 누군가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하나님의 선제적인 화목의 행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화목은 어떤 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권면은 이제 하나님과 화목한 존재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며, 화목을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내려오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내려와서 나의 것을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화해를 이루는 길이고, 화목을 만드는 길입니다.

 

 

나누기

 

  1. 동화속의 주인공, 예를 들어 “공주님과 왕자님이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주변에 부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걱정도 없고, 힘든 일도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는 과연 부러움만 있는 것인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기쁨의 50일을 보내며, 부활의 기쁨이 가득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그 안에서 평강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그 화목의 사역을 우리 또한 감당하며 따라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화목의 길에서 참된 행복과 평강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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