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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기에 좋았더라” : 사랑의 감탄사

창세기 1: 14 ~ 23

김지철 목사

2018.02.11

신앙은 감탄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감탄사’다. 그것도 ‘사랑의 감탄사’다.” 여러분, 사랑을 해 보셨지요? 사랑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모든 것이 신비로워지고, 우리 마음속에서 감탄사가 일어납니다. ‘아, 너무 멋지다! 너무 감사하다! 너무 좋구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감탄사를 말한다는 건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 감탄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감탄사이자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에 매우 만족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이 감탄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많은 감탄사를 표현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여러 시편을 남겼는데, 그 안에 수많은 감탄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감탄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감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탄입니다. 그 감탄의 내용은 늘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 즉 이 세상을 보며 감탄합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 곧 인간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그의 감탄이 잘 드러난 시편 8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1)

하늘과 땅, 이 세계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솜씨를 노래합니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자신을 지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역사를 깊이 깨달으며 다음과 같이 감탄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11:33)

어떻게 십자가가 구원의 문을 열었는지, 또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의 길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비롭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감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뒤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감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안에 감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탄사를 발한 적이 언제입니까? 혹시 꽤 오래전입니까? 예전에 연애했을 때입니까? 가족들과 함께 여행할 때였습니까?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입니까? 그때 우리의 가슴이 뛰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습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어땠습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뜁니까? 그분의 위대한 십자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은 언제입니까?
감탄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탄사를 잃어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삶이 지루해집니다. 따분해지기까지 합니다. 모든 것이 흘러가는 허무한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감동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연속이며 그만큼 시간도 낭비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감탄하셨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짧은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도 무려 7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좋으셨다는 뜻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창조의 사랑과 기쁨의 표지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에서 두드러집니다. 즉 감탄사 속에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와 따뜻한 손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조화’와 ‘질서’, ‘구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신 뒤 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을까요? 그 창조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첫째는 ‘카오스(chaos)’ 곧 무질서와 혼돈, 공허와 흑암이라는 카오스의 세계를 ‘코스모스(cosmos)’ 곧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바꾸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며 새로운 창조를 만드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자’, ‘행위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 속에서 그분의 성품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분, 그 사랑을 통해 창조 세계를 만드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에는 많은 단어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바라’와 ‘아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어일 때는 ‘바라’라는 히브리어만 쓴다는 사실입니다. ‘아싸’는 하나님이나 사람 주어일 때 모두 사용 가능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주어로 할 때는 ‘바라’만을 사용합니다. 즉 인간이 참여할 수 없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창조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 하나님을 닮아 이 세상에서 창조의 역사를 이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살피고 돌보고, 카오스의 세계를 코스모스의 세계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갈 때가 많습니다. 코스모스의 세계 속에서 혼돈과 무질서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카오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는 두 번째 모습, 곧 ‘구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바다와 육지도 나누셨습니다. 낮과 밤을 나누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구별과 구분, 분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을 구별하고, 육지와 바다를 구별하며, 동물과 식물,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의 짐승, 바다의 물고기를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오른편과 왼편을 구별해야 하며, 남자와 여자, 옳은 것과 그릇 것을 구별하고, 쓸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할 때 창조 질서가 세워지며 조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인간의 지혜와 분별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바로 ‘구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구별된 존재인 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분별하지 못했을 때 인간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존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창조에 나타난 세 번째 하나님의 모습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되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무려 5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나누고 구별하는 작업을 더욱 섬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생물을 식물과 동물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 물고기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각자의 역할과 개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해를 만들고, 달도 만드시며, 별들도 창조하셨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동물을 창조하셨고,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색을 존중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의 개성을 존중하시며 다양성을 귀히 여기십니다.
동물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습니까? 사슴과 사자, 표범, 하마 등 그 하나하나의 모습이 독특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물고기들도 그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을 자랑합니다. 인간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나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다.”라고 말입니다. 차별과 구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차별은 영어로 하면, ‘discrimination’입니다. 구별은 ‘differ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란 다름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반면 구별은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이나 강하게 보이는 것 모두 이 땅에서 자기 삶을 누리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장미도 꽃이지만 들에 핀 꽃들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들짐승도, 공중을 나는 새도, 개미와 같은 벌레들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얼굴색에 따라 누군가를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성별에 따라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직장을 잃었어도, 공부를 좀 못 해도, 학벌이 모자라도, 누구나 충분히 누리며 살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아도, 스스로가 못생겨 보여도 내 삶을 아름답게 꾸려갈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을 어느 순간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자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나답게 만드심에 감사합니다. 나는 내 삶의 모습대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다시, 지금부터 시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을 존중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 ‘축복’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의 기쁨과 번성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생명의 복, 건강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그 복이 허락되었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우리의 가정도 이 축복을 허락 받았습니다. 이 복을 받은 존재가 모든 피조물이며, 우리 자신이란 사실입니다.

사랑의 감탄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어 갑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은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우연성에 매몰시켜서는 안 됩니다. 진화 과정의 산물로 비하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가치가 없어집니다. 나의 나 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그분의 창조 계획 속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 역사를 마치신 뒤 그 역할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당신을 대신해 이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창조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피조물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거대한 우주와 하늘과 땅도 피조물입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 별들도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피조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피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동시에 창조의 대행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감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하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조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 삶에 끌어와야 합니다. 내 삶이 카오스 가운데 있다면 코스모스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사는 목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장로님들은 장로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권사님들, 집사님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적절히 수행할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적용은 모든 삶의 자리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단계가 있는데, 바로 ‘축복’입니다.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탄하는 마음을 자주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감탄사를 잃어버리면 우리 신앙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노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감탄, 이 세계에 대한 감탄, 내 삶에 대한 감탄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그러한 감탄이 내 삶을 아름답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감탄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탄은 ‘사랑’의 감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감탄사를 내 삶에 간직하면서 “하나님, 내 인생에 허락하신 모든 과정이 놀랍고 기이합니다. 하나님께 감탄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복된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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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 14 ~ 23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신앙은 감탄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정의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감탄사’다. 그것도 ‘사랑의 감탄사’다.” 여러분, 사랑을 해 보셨지요? 사랑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모든 것이 신비로워지고, 우리 마음속에서 감탄사가 일어납니다. ‘아, 너무 멋지다! 너무 감사하다! 너무 좋구나!’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감탄사를 말한다는 건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 감탄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감탄사이자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에 매우 만족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이 감탄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 가장 많은 감탄사를 표현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여러 시편을 남겼는데, 그 안에 수많은 감탄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감탄의 핵심은 하나님에 대한 감탄,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탄입니다. 그 감탄의 내용은 늘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만물, 즉 이 세상을 보며 감탄합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 곧 인간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그의 감탄이 잘 드러난 시편 8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편 8:1)

하늘과 땅, 이 세계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솜씨를 노래합니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가를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시편 139편 1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139:14)

자신을 지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의 역사를 깊이 깨달으며 다음과 같이 감탄했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11:33)

어떻게 십자가가 구원의 문을 열었는지, 또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의 길이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비롭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감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뒤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감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안에 감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다고 자부해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탄사를 발한 적이 언제입니까? 혹시 꽤 오래전입니까? 예전에 연애했을 때입니까? 가족들과 함께 여행할 때였습니까?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입니까? 그때 우리의 가슴이 뛰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습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어땠습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뜁니까? 그분의 위대한 십자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린 적은 언제입니까?
감탄은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탄사를 잃어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삶이 지루해집니다. 따분해지기까지 합니다. 모든 것이 흘러가는 허무한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감동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연속이며 그만큼 시간도 낭비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감탄하셨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짧은 말씀은 창세기 1장에서도 무려 7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좋으셨다는 뜻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창조의 사랑과 기쁨의 표지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에서 두드러집니다. 즉 감탄사 속에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와 따뜻한 손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연 환경의 아름다움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조화’와 ‘질서’, ‘구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신 뒤 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셨을까요? 그 창조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첫째는 ‘카오스(chaos)’ 곧 무질서와 혼돈, 공허와 흑암이라는 카오스의 세계를 ‘코스모스(cosmos)’ 곧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바꾸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며 새로운 창조를 만드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자’, ‘행위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 속에서 그분의 성품을 발견합니다. 사랑이 충만하신 분, 그 사랑을 통해 창조 세계를 만드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에는 많은 단어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바라’와 ‘아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도 차이가 있는데, 하나님이 주어일 때는 ‘바라’라는 히브리어만 쓴다는 사실입니다. ‘아싸’는 하나님이나 사람 주어일 때 모두 사용 가능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주어로 할 때는 ‘바라’만을 사용합니다. 즉 인간이 참여할 수 없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창조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 하나님을 닮아 이 세상에서 창조의 역사를 이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살피고 돌보고, 카오스의 세계를 코스모스의 세계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갈 때가 많습니다. 코스모스의 세계 속에서 혼돈과 무질서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카오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에는 두 번째 모습, 곧 ‘구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바다와 육지도 나누셨습니다. 낮과 밤을 나누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구별과 구분, 분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을 구별하고, 육지와 바다를 구별하며, 동물과 식물,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의 짐승, 바다의 물고기를 구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오른편과 왼편을 구별해야 하며, 남자와 여자, 옳은 것과 그릇 것을 구별하고, 쓸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할 때 창조 질서가 세워지며 조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인간의 지혜와 분별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될까요? 바로 ‘구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구별된 존재인 것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분별하지 못했을 때 인간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존중’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창조에 나타난 세 번째 하나님의 모습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시되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무려 5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나누고 구별하는 작업을 더욱 섬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생물을 식물과 동물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 물고기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각자의 역할과 개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해를 만들고, 달도 만드시며, 별들도 창조하셨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동물을 창조하셨고,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색을 존중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의 개성을 존중하시며 다양성을 귀히 여기십니다.
동물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습니까? 사슴과 사자, 표범, 하마 등 그 하나하나의 모습이 독특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물고기들도 그 크기와 모양이 다르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을 자랑합니다. 인간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나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다.”라고 말입니다. 차별과 구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차별은 영어로 하면, ‘discrimination’입니다. 구별은 ‘differe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란 다름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차별입니다. 반면 구별은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약하게 보이는 것이나 강하게 보이는 것 모두 이 땅에서 자기 삶을 누리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장미도 꽃이지만 들에 핀 꽃들도 아름다운 꽃입니다. 들짐승도, 공중을 나는 새도, 개미와 같은 벌레들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얼굴색에 따라 누군가를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성별에 따라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직장을 잃었어도, 공부를 좀 못 해도, 학벌이 모자라도, 누구나 충분히 누리며 살 권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작아도, 스스로가 못생겨 보여도 내 삶을 아름답게 꾸려갈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나는 살 가치가 없는 존재야.’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을 어느 순간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이자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나답게 만드심에 감사합니다. 나는 내 삶의 모습대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다시, 지금부터 시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을 존중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하나님은 모든 창조를 마치신 후 ‘축복’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의 기쁨과 번성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2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2)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향해 축복하셨습니다. 생명의 복, 건강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그 복이 허락되었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우리의 가정도 이 축복을 허락 받았습니다. 이 복을 받은 존재가 모든 피조물이며, 우리 자신이란 사실입니다.

사랑의 감탄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이어 갑시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은 어쩌다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우연성에 매몰시켜서는 안 됩니다. 진화 과정의 산물로 비하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가치가 없어집니다. 나의 나 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그분의 창조 계획 속에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 역사를 마치신 뒤 그 역할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당신을 대신해 이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창조주가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은 피조물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거대한 우주와 하늘과 땅도 피조물입니다. 하늘의 태양과 달, 별들도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피조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피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동시에 창조의 대행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을 감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하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창조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 삶에 끌어와야 합니다. 내 삶이 카오스 가운데 있다면 코스모스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목사는 목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장로님들은 장로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권사님들, 집사님들,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적절히 수행할 때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적용은 모든 삶의 자리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단계가 있는데, 바로 ‘축복’입니다. 무언가를, 또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탄하는 마음을 자주 잊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감탄사를 잃어버리면 우리 신앙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노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감탄, 이 세계에 대한 감탄, 내 삶에 대한 감탄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그러한 감탄이 내 삶을 아름답게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감탄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탄은 ‘사랑’의 감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감탄사를 내 삶에 간직하면서 “하나님, 내 인생에 허락하신 모든 과정이 놀랍고 기이합니다. 하나님께 감탄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복된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2월 1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보시기에 좋았더라!” : 사랑의 감탄사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6, 7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1:14~23절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1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신앙은 어떻게 정의할까신앙은 감탄사 ? 사랑의 감탄사입니다사랑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은 감탄사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만족함의 표현입니다그렇다면 성경 인물 중에서 이런 감탄사를 제일 많이 고백한 사람은 누구일까다윗입니다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만물과 인간에 대하여 감탄하였습니다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도 감탄하였습니다(11:33). 우리는 감탄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언제였습니까감탄사를 잃어버린 순간 우리의 삶은 지루하고 따분해집니다.

설교의 요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을 어떻게 하셨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7번 사용 하셨을까창조의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첫째 카오스(chaos)’, 무질서와 혼돈공허와 흑암이라고 하는 카오스’ 속에서 코스모스(casmos)’라고 하는 우주와 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 ‘창조하셨다만드셨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바라’ 혹은 아싸입니다그런데 아싸와 달라 바라는 하나님이 주어일 때만 사용합니다하나님의 창조는 카오스(혼돈과 어둠속에서 코스모스(질서와 광명)의 세계로 흐르고 있습니다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둘째로 나누다입니다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바다와 육지낮과 밤을 나누고 구분하셨습니다인간의 지혜와 분별력은 구별’ 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세 번째로 모든 것을 만드시되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5번 반복하십니다각자의 기능과 역할이 다르듯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각기 독특한 개성과 다양성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성경은 끊임없이 이를 말씀하시며 그것은 차별(discrimination)이 아니라구별(difference)이라고 말합니다차별은 다른 것을 서로 적대시하거나 무시하지만구별은 서로 존중하며 배려함을 의미합니다이것을 우리 인간들에게 적용한다면 인간을 차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나를 나답게 만드셨기에 감사하며내 삶의 모습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며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섭리의 내용입니다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이렇게 만드시고 축복하셨습니다복을 주신 것입니다모든 피조물들에게 이 땅에서 네 모습 그대로 멋지게 살면서 생명의 기쁨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22).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축복하셨으며생명의 복과 건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우연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우연으로 여길 때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속 속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모든 세계를 아름답게 멋지게 만들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도 창조주가 될 수 없습니다모든 것은 피조물에 불과합니다어느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동시에 창조의 대행자입니다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던 말씀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의 삶에 도입해야만 합니다내 삶이 카오스에 머물러 있다면 코스모스로질서와 조화의 세계로 바꿔가야만 합니다나눠야 할 것은 나누고나에게 주어진 섬세한 자기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때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처럼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처럼 보시기에 좋은 삶의 자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우리가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감탄하는 마음입니다그러므로 철학자였던 데카르트의 말을 나는 매일매일 감탄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재인용할 수 있습니다내 인생에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감탄의 노래를 불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오늘 우리는 감탄사를 발했던 적이 있습니까감탄사를 발하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마음은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셨고다양성을 귀하게 여기며 구별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별이 아니라 차별에 얽매여 살아가지 않습니까?

차별 없는 시선과 생각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 버려야할 모습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오늘 나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내가 축복해야할 대상을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감탄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그때마다 두려움과 외로움슬픔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이제는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신뢰함으로 다시 감탄하는 영혼이 되게 하옵소서그래서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충만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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