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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아니하는 분을 보는 것 같이 -성경주제 7 : 엑소더스-

히브리서 11: 23 ~ 27

김지철 목사

2013.10.20

엑소더스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엑소더스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을 원하는 사람들, 성숙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보이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엑소더스’를 대문자로 쓰면 구약성경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를 뜻합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종살이를 떠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나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우리는 출애굽 혹은 출애굽기라고 합니다. 요새는 흔히 자기가 누리던 삶을 떠나는 것을 엑소더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엑소더스는 떠나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탈출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부터 떠나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왜 떠나는지, 무엇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엑소더스, 참된 춥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해방이야기를 장소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종살이를 했던 출발지, 그리고 통과의 자리인 광야, 마지막으로 약속의 자리인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이란, 학대와 억압을 받고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장소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400년 이상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또 사십 여 년의 시간을 보냈던 광야는 외로움의 자리입니다. 때로는 저항하기도 하고, 실수와 실패로 인해 방황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어떻게 하든 엑소더스 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에 머물렀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물론 그곳에도 고난과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승리의 자리였으며,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두려움과 교만은 엑소더스를 방해합니다.

미국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무디 목사님은, 출애굽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의 삶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던 애굽에서의 40년의 세월입니다. 그때 그는 권력도 있었고, 재물도 있었고, 지식과 명예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기에 모세는 자기 자신을 ‘I am somebody.’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잘나가는 사람이야’ 하며 자랑하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왕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40년 동안 목동의 훈련을 받으면서 그의 자존감은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I am nobody.’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별거 아닌 존재야’ 하며 낙담하는 시기였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던 나머지 40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I am God`s body.’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고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했을 것입니다. 뭔가 괜찮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부름과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모세의 처음 80년의 세월동안 엑소더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모세가 엑소더스 할 만큼 성품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인간성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공을 들이십니다. 엄청난 정성을 쏟으십니다. 때로는 설득도 하시고, 때로는 회유도 하시고, 때로는 모세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시고 또 명령도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도대체 모세에게 있어서 엑소더스 하지 못할 만큼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과도한 자기방어였고 과도한 공격성이었습니다.
자기방어를 과민하게 하는 사람의 뒷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 약점을 이야기할까봐 먼저 방어막을 펴는 것입니다. 또 과도하게 남을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교만함이 있습니다.

모세의 삶에도 엑소더스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이제는 자기민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갑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마구 때리고 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자 모세의 가슴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숨겨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날 다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들끼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오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지도자인데…’ 하는 마음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동족이 돼서 치고받느냐? 너희들은 서로 잘 융화할 수 없느냐?” 그들에게 훈계를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이 모세에게 반발합니다. “너를 언제 우리의 지도자로 세웠느냐. 네가 재판관이 돼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우리 유대인들도 죽이려 하느냐?”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 도망자의 신세로 애굽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의 공격성과 열심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열정이 그가 죄를 짓도록 만들고 만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가 죽인 사람은 애굽의 감독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애굽의 권력다툼 자리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가 히브리인들을 선동하여 바로를 적대하는 반란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침소봉대하는 모함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 불같이 화를 냈던 모세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남이 나를 비방할 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공격하고 싶은 것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과민한 자기방어와 끊임없는 자기변명 그리고 남을 향한 불같은 화와 분노는 우리 뒷면에 있는 두려움과 교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과민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을 지도자를 쓰면 그 공동체가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지 못하고 지도자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기대 없이는 엑소더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타성의 법칙에 묶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퇴행적 경향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습관은 소중한 것입니다. 습관이 없다면 매일매일이 너무 피곤할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저절로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성경책을 들고 성전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만약 주일 아침마다 ‘오늘 예배를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단하여 나오게 되는 것이라면, 그 영적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좋은 습관이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이란 곧 익숙함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치 매일 입는 옷처럼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에 너무 매몰되면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바로 설렘입니다. 기대감입니다. 변화하려는 마음입니다. 성숙을 향해 도전하려는 마음이 익숙함과 습관에 빠져들게 되면, 그 자체가 기득권이 됩니다. 누군가 나의 습관과 익숙함에 침입해 오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방식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자기가 기도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안심이 됩니다. 마치 고향을 찾아온 것 같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청년이 찬양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잘 준비하여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사람아! 여기 내 자리야.”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자리? 여기 자리에 내 자리가 있었나…’ 그 청년은 다음 주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찬양대에 앉았을까요? 안 앉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나에게 귀한 자리라도 그것이 내 소유물이나 내 기득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예배당에 오면 가운데부터 앉는 분들이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물론 급한 일이 있거나 맡겨진 임무가 있어서 끝자리에 앉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무조건 끝자리를 고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될 때도 있는데 말입니다.
보통 늘 앉는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주일에 성도님들이 앉아계신 자리를 보며 ‘저분이 저기 앉아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간혹 그분이 거기에 앉아계시지 않으면, ‘어디 가셨지?’ 하는 물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시는 대로 늘 앉는 자리를 지키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뒤에 오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 가운데 자리부터 앉으면 어떻겠습니까? 가끔 중간에도 앉아 보고, 앞에도 한 번 앉아보세요. 은혜를 받는 강도가 달라집니다. 느낌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변화를 줘야 됩니다.
저도 아주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변화를 주려고 해도 잘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변화하기 위해서는 혼자 끙끙 앓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변화가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퇴행성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자기 자리 고수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광야에서 매일 반복되는 목동의 삶을 살면서 그는 깊은 열등감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가 너무나 힘드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함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얼떨결에 출애굽은 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퇴행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먹을 것과 마실 것, 편안한 잠자리가 있었다며 뒤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해서, 아니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그들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여기서 꼼짝 안 할 거야! 안 변할 거야! 그냥 이렇게 살 거야!’ 하는 과도한 자기방어와 과도한 공격의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전과 모험 없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품어야 엑소더스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모세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속에 있는 두려움과 대결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교만함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었던 퇴행적 경향과 격렬하게 투쟁합니다. 그를 이렇게 성숙한 엑소더스 인물로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아무 할 일 없이 그냥 두 손 놓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현장은 치열하고 살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딪혀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의 성품이 마지막에는 온유함으로 변화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구약에서 온유함의 대표를 모세로 든다면, 신약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함 중에 온유함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온유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것처럼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강인한 사람이고, 용기와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넉넉하게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조절할 줄 아는 사람 입니다. 그래서 온유함이란 다른 말로 겸손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이 지닌 약점과 한계를 잘 아는 것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내면의 분노와 화를 통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치열하고 살벌한 삶의 현장에서 때론 조용히 뒤로 물러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물러났을 때 그가 한 일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너무 흔들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강렬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 올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세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모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모세를 히브리서 11장 2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11:27)

애굽을 떠나고 바로 왕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가 강력했지만, 그때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서 기도했습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더 큰 하나님께 자기의 실존 전체를 맡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본다는 것은 내 환경보다 더 크신 분, 내 꿈과 비전보다 더 큰 약속을 주신 분에게 내 삶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고, 계시의 눈이고, 영적인 눈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불평도 하고 화도 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합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게 하신 무거운 짐을 하나님을 향해서 던져놓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을 때 갖게 되는 아픔과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민수기 11:11∼12)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왜 이 백성의 짐을 내게 주십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괴롭히십니까!” 한탄을 하며 하나님께 부딪히는 것입니다. 내가 화난 것, 불평하고 싶은 것들을 공동체에 터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터트렸습니다. “내게는 초조함이 있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마구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다 쏟아부으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러자 그 마음이 정화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한다는 것은 내게 맡겨진 엑소더스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켜도, 환경이 나를 거슬려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엑소더스를 할 때에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와 공격성들을 거룩한 분노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하는 분노,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분노를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는 쳐부수겠다. 내가 너로 인해서 새 백성을 만들겠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이 백성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셨을까요? “모세야, 네가 내 마음을 알기 시작하는구나. 기특하다. 네 이름이 생명책에 지워져도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받기를 원하는구나. 네가 이제 진짜 지도자가 되었구나.” 이런 마음 아니셨을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엑소더스를 위해서 그의 삶 전체를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삶에는 작은 엑소더스도 있고 큰 엑소더스도 있습니다. 작은 엑소더스에 성공을 해야 큰 엑소더스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고 가나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엑소더스 여정은 지금 애굽을 벗어나 광야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마이너스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홍해를 건너고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까지 왔으면서,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홍해만 건너서는 안됩니다. 요단강까지 건너야 합니다. 광야에 왔으면 가나안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미 애굽을 떠나오노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승리하면서 때로 고난도 받고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을 플러스가 되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힘들어도 기쁜 것이고 어려움을 당해도 감사할 줄 아는 신앙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광야에 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가야합니다. 때로는 흔들려도 다시 말씀 위에 서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지경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이 엑소더스의 기쁨과 승리감을 다 맛보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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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 23 ~ 27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엑소더스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엑소더스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성장을 원하는 사람들, 성숙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보이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엑소더스’를 대문자로 쓰면 구약성경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를 뜻합니다. 애굽을 탈출하고 종살이를 떠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나갔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우리는 출애굽 혹은 출애굽기라고 합니다. 요새는 흔히 자기가 누리던 삶을 떠나는 것을 엑소더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엑소더스는 떠나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탈출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으로부터 떠나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왜 떠나는지, 무엇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엑소더스, 참된 춥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의 해방이야기를 장소적인 측면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종살이를 했던 출발지, 그리고 통과의 자리인 광야, 마지막으로 약속의 자리인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이란, 학대와 억압을 받고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장소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400년 이상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또 사십 여 년의 시간을 보냈던 광야는 외로움의 자리입니다. 때로는 저항하기도 하고, 실수와 실패로 인해 방황하면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어떻게 하든 엑소더스 하기를 원했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에 머물렀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물론 그곳에도 고난과 투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승리의 자리였으며, 지경을 넓히는 새로운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두려움과 교만은 엑소더스를 방해합니다.

미국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무디 목사님은, 출애굽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의 삶도 세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던 애굽에서의 40년의 세월입니다. 그때 그는 권력도 있었고, 재물도 있었고, 지식과 명예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시기에 모세는 자기 자신을 ‘I am somebody.’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잘나가는 사람이야’ 하며 자랑하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왕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40년 동안 목동의 훈련을 받으면서 그의 자존감은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I am nobody.’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별거 아닌 존재야’ 하며 낙담하는 시기였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던 나머지 40년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I am God`s body.’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쓰임 받고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했을 것입니다. 뭔가 괜찮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부름과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모세의 처음 80년의 세월동안 엑소더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모세가 엑소더스 할 만큼 성품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의 인간성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처음부터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공을 들이십니다. 엄청난 정성을 쏟으십니다. 때로는 설득도 하시고, 때로는 회유도 하시고, 때로는 모세에게 간절하게 부탁하시고 또 명령도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도대체 모세에게 있어서 엑소더스 하지 못할 만큼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과도한 자기방어였고 과도한 공격성이었습니다.
자기방어를 과민하게 하는 사람의 뒷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 내 약점을 이야기할까봐 먼저 방어막을 펴는 것입니다. 또 과도하게 남을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교만함이 있습니다.

모세의 삶에도 엑소더스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이제는 자기민족인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갑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마구 때리고 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자 모세의 가슴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숨겨 버렸습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날 다시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들끼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오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지도자인데…’ 하는 마음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동족이 돼서 치고받느냐? 너희들은 서로 잘 융화할 수 없느냐?” 그들에게 훈계를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이 모세에게 반발합니다. “너를 언제 우리의 지도자로 세웠느냐. 네가 재판관이 돼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우리 유대인들도 죽이려 하느냐?”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났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져 도망자의 신세로 애굽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의 공격성과 열심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열정이 그가 죄를 짓도록 만들고 만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가 죽인 사람은 애굽의 감독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애굽의 권력다툼 자리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가 히브리인들을 선동하여 바로를 적대하는 반란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침소봉대하는 모함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 불같이 화를 냈던 모세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남이 나를 비방할 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습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공격하고 싶은 것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과민한 자기방어와 끊임없는 자기변명 그리고 남을 향한 불같은 화와 분노는 우리 뒷면에 있는 두려움과 교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쓰실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과민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을 지도자를 쓰면 그 공동체가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지 못하고 지도자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기대 없이는 엑소더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타성의 법칙에 묶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퇴행적 경향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습관은 소중한 것입니다. 습관이 없다면 매일매일이 너무 피곤할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저절로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성경책을 들고 성전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만약 주일 아침마다 ‘오늘 예배를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단하여 나오게 되는 것이라면, 그 영적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좋은 습관이란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이란 곧 익숙함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마치 매일 입는 옷처럼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에 너무 매몰되면 좋은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바로 설렘입니다. 기대감입니다. 변화하려는 마음입니다. 성숙을 향해 도전하려는 마음이 익숙함과 습관에 빠져들게 되면, 그 자체가 기득권이 됩니다. 누군가 나의 습관과 익숙함에 침입해 오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방식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자기가 기도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안심이 됩니다. 마치 고향을 찾아온 것 같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청년이 찬양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찬양을 잘 준비하여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사람아! 여기 내 자리야.” 청년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 자리? 여기 자리에 내 자리가 있었나…’ 그 청년은 다음 주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찬양대에 앉았을까요? 안 앉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조용히 교회를 떠났습니다.
나에게 귀한 자리라도 그것이 내 소유물이나 내 기득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예배당에 오면 가운데부터 앉는 분들이 참 고맙게 느껴집니다. 물론 급한 일이 있거나 맡겨진 임무가 있어서 끝자리에 앉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무조건 끝자리를 고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될 때도 있는데 말입니다.
보통 늘 앉는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주일에 성도님들이 앉아계신 자리를 보며 ‘저분이 저기 앉아계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간혹 그분이 거기에 앉아계시지 않으면, ‘어디 가셨지?’ 하는 물음이 들기도 합니다. 오시는 대로 늘 앉는 자리를 지키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뒤에 오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 가운데 자리부터 앉으면 어떻겠습니까? 가끔 중간에도 앉아 보고, 앞에도 한 번 앉아보세요. 은혜를 받는 강도가 달라집니다. 느낌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변화를 줘야 됩니다.
저도 아주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변화를 주려고 해도 잘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변화하기 위해서는 혼자 끙끙 앓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결심을 해야 합니다. 변화가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퇴행성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자기 자리 고수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애굽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다가 광야에서 매일 반복되는 목동의 삶을 살면서 그는 깊은 열등감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가 너무나 힘드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함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얼떨결에 출애굽은 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퇴행성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에서는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먹을 것과 마실 것, 편안한 잠자리가 있었다며 뒤로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향해서, 아니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그들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여기서 꼼짝 안 할 거야! 안 변할 거야! 그냥 이렇게 살 거야!’ 하는 과도한 자기방어와 과도한 공격의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전과 모험 없는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품어야 엑소더스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모세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속에 있는 두려움과 대결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교만함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있었던 퇴행적 경향과 격렬하게 투쟁합니다. 그를 이렇게 성숙한 엑소더스 인물로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아무 할 일 없이 그냥 두 손 놓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현장은 치열하고 살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딪혀 나갔습니다. 그 결과 그의 성품이 마지막에는 온유함으로 변화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민수기 12:3)

구약에서 온유함의 대표를 모세로 든다면, 신약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함 중에 온유함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온유란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걸린 것처럼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이란 강인한 사람이고, 용기와 분별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넉넉하게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며,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조절할 줄 아는 사람 입니다. 그래서 온유함이란 다른 말로 겸손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이 지닌 약점과 한계를 잘 아는 것입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내면의 분노와 화를 통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이렇게 변화되었을까요? 치열하고 살벌한 삶의 현장에서 때론 조용히 뒤로 물러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잠시 물러났을 때 그가 한 일은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너무 흔들릴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강렬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 올 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세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모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모세를 히브리서 11장 2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11:27)

애굽을 떠나고 바로 왕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가 강력했지만, 그때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서 기도했습니다. 보이는 세계보다 더 큰 하나님께 자기의 실존 전체를 맡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본다는 것은 내 환경보다 더 크신 분, 내 꿈과 비전보다 더 큰 약속을 주신 분에게 내 삶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고, 계시의 눈이고, 영적인 눈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불평도 하고 화도 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합니다.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게 하신 무거운 짐을 하나님을 향해서 던져놓는 것입니다.
모세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고, 한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을 때 갖게 되는 아픔과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민수기 11:11∼12)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왜 이 백성의 짐을 내게 주십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괴롭히십니까!” 한탄을 하며 하나님께 부딪히는 것입니다. 내가 화난 것, 불평하고 싶은 것들을 공동체에 터트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터트렸습니다. “내게는 초조함이 있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마구 솟구쳐 오르고 있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다 쏟아부으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러자 그 마음이 정화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한다는 것은 내게 맡겨진 엑소더스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켜도, 환경이 나를 거슬려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약속을 믿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엑소더스를 할 때에 하나님은 모세의 분노와 공격성들을 거룩한 분노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분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하는 분노,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분노를 가슴에 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는 쳐부수겠다. 내가 너로 인해서 새 백성을 만들겠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이 백성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셨을까요? “모세야, 네가 내 마음을 알기 시작하는구나. 기특하다. 네 이름이 생명책에 지워져도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받기를 원하는구나. 네가 이제 진짜 지도자가 되었구나.” 이런 마음 아니셨을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정한 엑소더스를 위해서 그의 삶 전체를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삶에는 작은 엑소더스도 있고 큰 엑소더스도 있습니다. 작은 엑소더스에 성공을 해야 큰 엑소더스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애굽이 있고 광야가 있고 가나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엑소더스 여정은 지금 애굽을 벗어나 광야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마이너스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홍해를 건너고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까지 왔으면서,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우리 신앙의 문제입니다.
홍해만 건너서는 안됩니다. 요단강까지 건너야 합니다. 광야에 왔으면 가나안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미 애굽을 떠나오노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승리하면서 때로 고난도 받고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을 플러스가 되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힘들어도 기쁜 것이고 어려움을 당해도 감사할 줄 아는 신앙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애굽에서 탈출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광야에 있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가야합니다. 때로는 흔들려도 다시 말씀 위에 서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지경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이 엑소더스의 기쁨과 승리감을 다 맛보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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