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도마 – 예수님의 제자들 11 –

요한복음 20: 24 ~ 29

김지철 목사

2014.10.12

한국교회의 어른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큰 어른이셨던 방지일 목사님께서 10월 10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1911년생이시니 올해로 104세가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교회 목사님과 대화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오후 4시 경에 갑자기 혼수상태가 되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 다음날 새벽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셨습니다.
믿음의 스승이자 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아쉽고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주님 위해 살다 가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복된 분, 참으로 멋지게 인생을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신이 초롱초롱하셨고 총명을 잃지 않으셨던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방목사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아.” 새삼 그 말씀이 가슴 찡하게 다가옵니다. 인생이 녹슬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다 소진하여 닳아 없어지게 사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멋진 일입니까. 쉼을 가질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수고하고 땀 흘릴 때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녹슬지 않고 충성스럽게 사는 비결일 것입니다.
재작년 제직회 수련회에 오셔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씀을 증거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시간 동안 말씀을 증거해 달라고 하니 딱 한 시간 동안 말씀하시고 끝마치셨습니다. 그분은 5분을 부탁드리면 5분, 10분을 부탁드리면 10분을 지키셨습니다.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그렇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2주일 전에 있었던 총회에서 뵈었을 때, “김목사, 잘 있나?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하게.”라고 부탁하신 말씀이 다시금 새롭습니다.
방목사님은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로 나서셨습니다. 1937년에 목사안수를 받으셨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셨습니다. 중일전쟁 바로 뒤에 일제가 중국을 다스리고 문화·종교 정책의 모든 일들을 간섭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거기에 쉽게 따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이번에는 공산당의 억압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꿋꿋이 견디셨습니다. 공산당에 의해 중국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다 축출을 당했을 때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교사가 방목사님이셨습니다.
그렇게 1957년까지 중국에 머무르시다가 결국 쫓겨서 서울까지 오게 되십니다. 그리고 1979년까지 22년 동안 영등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은퇴하셨습니다. 그 후 어디든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가 되면 그분은 마다하지 않고 노구를 이끌고 지구촌 곳곳을 다니시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또 한국에 와서는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씩 후배 목회자들과 성경공부를 하셨는데, 구약에서 신약을 다 떼시고 그것을 책으로 내기까지 하셨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으셔서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으로 쓰시던 설교를 컴퓨터를 사용해서 쓰시고, 이메일에 응답하기도 하시는 등 그렇게 젊게 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바르게 걷지 못하고 있는 후배 목회자를 만나면 엄하게 꾸짖던 분이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우리 곁에 계셨던 것이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동시에 모든 믿음의 후배들에게는 기쁨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도마는 의심과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방목사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충성과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신 분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교회를 위해서 쏟으셨습니다. 오늘 그분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선배인 예수님의 제자, 도마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제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주님 앞에 충성된 제자입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세 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들을 보며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의심하면서 믿었고, 믿으면서 의심했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교차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끊임없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열두 명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결단력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의심도 했고 질문도 자주 했습니다.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려면, 먼저 열심히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의심과 질문이 생긴다는 것은, 열심히 했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도마는 의심을 품고 많은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나쁘게 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싫어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반응을 통해서입니다. 도마가 질문할 때마다 예수님은 거침없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도마가 질문하지 않았으면 이야기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 말씀까지도 하셨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본질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 고난의 자리에 들어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가 가야할 곳을 예비하러 하나님 앞에 간다.” 제자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적으로 도마가 묻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4:5)

“주님, 도대체 어디 가서 예비하신다는 겁니까? 주님이 가신다는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갑니까? 우리가 도대체 뭘 알고 있습니까?” 도마는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앞서 읽은 6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 앞에 가는 그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내가 곧 길이다. 내가 곧 진리다. 내가 곧 생명이다. 나를 통해서 너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질문이 중요합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며 하나님 앞에 질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혼자 공상하며 의심하지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의심하고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할 준비도 하셨고, 또 질문을 받을 준비도 하시며 사람들을 만나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불신을 위한 의심은 파괴의 힘을 갖습니다.

도마와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또 하나의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만나 하신 이야기로,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불신앙에 붙잡혀 있는 도마를 향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랐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던 그때, 도마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마음은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찼는데, 도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마음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왜 나는 그런 기회를 놓쳤지. 나는 재수가 없는가봐…’ 제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질투가 났습니다. 어쩌면 투정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에 직접 손을 넣어 봐야 믿겠어!”
의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심해야 할 때,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심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이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자폐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꾸만 자기 앞에 장벽을 쌓아 올립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열어놓지 않습니다. 폐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의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을 추구하는 의심이 있고, 불신을 추구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더 믿기 위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접근하는 것은 좋은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스스로 듣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의심하는 것은 나쁜 의심입니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되면, 의심에 의심이 더해지게 됩니다. 때로는 의심하는 스스로를 보며 ‘나는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야’ 하고 위로해 보지만, 의심의 해석학 안에 멈춰 서게 되면, 스스로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의심의 해석학을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요? 신뢰의 해석학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의심이 삶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특별히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되면, 자기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불신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열등감을 가진 의심이 커지기 시작하면, 대상에 따라서 얼마나 큰 문제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배우자를 향해 의심의 해석학이 커지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부관계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고, 결국 가정이 파괴됩니다.
가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우리의 국회를 보십시오. 세월호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세월호 특별법을 제대로 만들지 않고 서로 네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자가 국민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독재정치가 됩니다. 토치카를 쌓고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숙청하는 저 북한사회를 보십시오. 의심의 해석학에 붙잡힌 자가 권력자가 되면 그 공동체가 망하는 것입니다.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는 권력자는 저절로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뢰의 해석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믿으라는 것입니다. 곧 신뢰의 해석학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주셨습니다. 언어의 자존감, 생각의 자존감, 인격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믿음과 신뢰’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014년 9월에 동아일보가 국가대혁신의 타이틀을 걸고 여러 가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중, “한국 사회를 신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서울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매우 신뢰한다(2.3%), 신뢰하는 편이다(10.1%), 보통이다(25.6%), 불신하는 편이다(49.6%), 매우 불신한다(12.4%). 즉 보통을 제외하면, 불신한다가 62%이고 신뢰한다가 12.4%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불신하는지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첫 번째가 정치인, 두 번째가 검찰 및 경찰, 세 번째가 기업인, 네 번째가 공무원이었습니다. 어떤 순서입니까? 한국사회의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의 순서입니다.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해 보니, 노르웨이가 1위, 미국이 9위, 일본이 23위, 그리고 한국이 66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입니다.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요란하고 곳곳에 갈등이 많습니까? 의심만 하려 하고,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를 막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사회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해석학, 의심의 해석학에서 신뢰의 해석학, 믿음의 해석학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진정한 믿음을 위해 예수님은 도마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도마야, 내 손바닥을 만져 봐라. 내 옆구리를 만져 봐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기본적으로 믿는 자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신뢰를 주면서 시작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 사기꾼이고, 모두 나를 속이는 자라고 여기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또 속임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과의 관계는 신뢰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신뢰의 정점, 믿음의 정점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시 믿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네가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느냐? 도대체 네가 봐서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몇 개나 되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속된 말씀을 읽고 믿는 것,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는 것, 그리고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며 믿는 것.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도마의 입에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도마는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적인 고백을 드릴 수 있게 승화되었습니다.
의심과 질문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고뇌해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는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의심과 질문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 믿음의 정점에 있는 예수님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믿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인생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을 받게 되었을 때, 여기에서 결정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냥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시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여.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기철 목사님의 하나님,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 방지일 목사님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면 믿음의 역사가 나에게 개별화가 됩니다. 인격화가 되고 체득화가 되는 것입니다.

신뢰의 해석학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에 기쁨이 있으랴.” 그렇습니다. 건강한 믿음이란, 의심의 시험을 통과한 믿음입니다. 의심의 바다를 건너간 믿음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내 믿음을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심이란 무엇일까요?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으로 갈 수도 있고 믿음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믿음 쪽으로 모든 것을 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이 있지만 그것이 더 큰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될 때, 그 의심은 내가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의심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뢰의 해석학으로 돌려야 합니다. 신뢰의 해석학까지 경험한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경험합니까? 찬양의 해석학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주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찬양과 사랑의 해석학까지 나오게 될 때, 그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승화되고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축복의 역사를 내 것으로 삼고, 이 땅에서 마음껏 감사하면서 사시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요한복음 20: 24 ~ 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한국교회의 어른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큰 어른이셨던 방지일 목사님께서 10월 10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1911년생이시니 올해로 104세가 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교회 목사님과 대화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오후 4시 경에 갑자기 혼수상태가 되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 다음날 새벽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셨습니다.
믿음의 스승이자 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 아쉽고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주님 위해 살다 가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복된 분, 참으로 멋지게 인생을 사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신이 초롱초롱하셨고 총명을 잃지 않으셨던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방목사님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아.” 새삼 그 말씀이 가슴 찡하게 다가옵니다. 인생이 녹슬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가진 모든 것을 다 소진하여 닳아 없어지게 사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멋진 일입니까. 쉼을 가질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수고하고 땀 흘릴 때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녹슬지 않고 충성스럽게 사는 비결일 것입니다.
재작년 제직회 수련회에 오셔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씀을 증거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시간 동안 말씀을 증거해 달라고 하니 딱 한 시간 동안 말씀하시고 끝마치셨습니다. 그분은 5분을 부탁드리면 5분, 10분을 부탁드리면 10분을 지키셨습니다.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그렇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2주일 전에 있었던 총회에서 뵈었을 때, “김목사, 잘 있나? 교회를 사랑하며 충성하게.”라고 부탁하신 말씀이 다시금 새롭습니다.
방목사님은 사도 바울처럼 선교사로 나서셨습니다. 1937년에 목사안수를 받으셨고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셨습니다. 중일전쟁 바로 뒤에 일제가 중국을 다스리고 문화·종교 정책의 모든 일들을 간섭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거기에 쉽게 따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이번에는 공산당의 억압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꿋꿋이 견디셨습니다. 공산당에 의해 중국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다 축출을 당했을 때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교사가 방목사님이셨습니다.
그렇게 1957년까지 중국에 머무르시다가 결국 쫓겨서 서울까지 오게 되십니다. 그리고 1979년까지 22년 동안 영등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은퇴하셨습니다. 그 후 어디든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가 되면 그분은 마다하지 않고 노구를 이끌고 지구촌 곳곳을 다니시며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또 한국에 와서는 일주일에 한 번 내지 두 번씩 후배 목회자들과 성경공부를 하셨는데, 구약에서 신약을 다 떼시고 그것을 책으로 내기까지 하셨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으셔서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으로 쓰시던 설교를 컴퓨터를 사용해서 쓰시고, 이메일에 응답하기도 하시는 등 그렇게 젊게 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바르게 걷지 못하고 있는 후배 목회자를 만나면 엄하게 꾸짖던 분이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우리 곁에 계셨던 것이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동시에 모든 믿음의 후배들에게는 기쁨이자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고, 행복했습니다.

도마는 의심과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방목사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주님의 교회에 대한 충성과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하신 분입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교회를 위해서 쏟으셨습니다. 오늘 그분을 생각하면서 믿음의 선배인 예수님의 제자, 도마에 대해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제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각인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주님 앞에 충성된 제자입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세 번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건들을 보며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의심하면서 믿었고, 믿으면서 의심했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교차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끊임없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열두 명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결단력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의심도 했고 질문도 자주 했습니다. 의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려면, 먼저 열심히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의심과 질문이 생긴다는 것은, 열심히 했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도마는 의심을 품고 많은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모습을 나쁘게 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싫어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반응을 통해서입니다. 도마가 질문할 때마다 예수님은 거침없이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도마가 질문하지 않았으면 이야기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 말씀까지도 하셨습니다. 그중에는 아주 본질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 고난의 자리에 들어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가 가야할 곳을 예비하러 하나님 앞에 간다.” 제자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적으로 도마가 묻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4:5)

“주님, 도대체 어디 가서 예비하신다는 겁니까? 주님이 가신다는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갑니까? 우리가 도대체 뭘 알고 있습니까?” 도마는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앞서 읽은 6절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 아버지 앞에 가는 그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내가 곧 길이다. 내가 곧 진리다. 내가 곧 생명이다. 나를 통해서 너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질문이 중요합니다. 모르는 것을 의심하며 하나님 앞에 질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혼자 공상하며 의심하지 말고, 성경을 읽으면서 의심하고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할 준비도 하셨고, 또 질문을 받을 준비도 하시며 사람들을 만나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불신을 위한 의심은 파괴의 힘을 갖습니다.

도마와의 사건에서 예수님은 또 하나의 중요한 대답을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만나 하신 이야기로,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불신앙에 붙잡혀 있는 도마를 향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랐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던 그때, 도마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마음은 기쁨과 평강으로 가득 찼는데, 도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마음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왜 나는 그런 기회를 놓쳤지. 나는 재수가 없는가봐…’ 제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질투가 났습니다. 어쩌면 투정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에 직접 손을 넣어 봐야 믿겠어!”
의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의심해야 할 때,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심이 해결되지 않고 지속이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자폐적인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꾸만 자기 앞에 장벽을 쌓아 올립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열어놓지 않습니다. 폐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의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믿음을 추구하는 의심이 있고, 불신을 추구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더 믿기 위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 접근하는 것은 좋은 의심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스스로 듣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의심하는 것은 나쁜 의심입니다. 이런 의심을 하게 되면, 의심에 의심이 더해지게 됩니다. 때로는 의심하는 스스로를 보며 ‘나는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야’ 하고 위로해 보지만, 의심의 해석학 안에 멈춰 서게 되면, 스스로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의심의 해석학을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요? 신뢰의 해석학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의심이 삶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특별히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존감에 상처를 입게 되면, 자기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불신을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열등감을 가진 의심이 커지기 시작하면, 대상에 따라서 얼마나 큰 문제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배우자를 향해 의심의 해석학이 커지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부관계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고, 결국 가정이 파괴됩니다.
가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우리의 국회를 보십시오. 세월호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하지만 아직도 세월호 특별법을 제대로 만들지 않고 서로 네 탓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자가 국민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독재정치가 됩니다. 토치카를 쌓고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숙청하는 저 북한사회를 보십시오. 의심의 해석학에 붙잡힌 자가 권력자가 되면 그 공동체가 망하는 것입니다.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의 소리를 듣지 않는 권력자는 저절로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뢰의 해석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믿으라는 것입니다. 곧 신뢰의 해석학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 주셨습니다. 언어의 자존감, 생각의 자존감, 인격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믿음과 신뢰’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2014년 9월에 동아일보가 국가대혁신의 타이틀을 걸고 여러 가지를 조사했습니다. 그 중, “한국 사회를 신뢰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서울 시내에 있는 중·고등학생들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매우 신뢰한다(2.3%), 신뢰하는 편이다(10.1%), 보통이다(25.6%), 불신하는 편이다(49.6%), 매우 불신한다(12.4%). 즉 보통을 제외하면, 불신한다가 62%이고 신뢰한다가 12.4%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불신하는지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첫 번째가 정치인, 두 번째가 검찰 및 경찰, 세 번째가 기업인, 네 번째가 공무원이었습니다. 어떤 순서입니까? 한국사회의 소위 힘 있는 사람들의 순서입니다.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해 보니, 노르웨이가 1위, 미국이 9위, 일본이 23위, 그리고 한국이 66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입니다. 이 사회가 왜 이렇게 요란하고 곳곳에 갈등이 많습니까? 의심만 하려 하고,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를 막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사회는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불신의 해석학, 의심의 해석학에서 신뢰의 해석학, 믿음의 해석학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진정한 믿음을 위해 예수님은 도마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도마야, 내 손바닥을 만져 봐라. 내 옆구리를 만져 봐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기본적으로 믿는 자로부터 시작해야 됩니다. 신뢰를 주면서 시작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 사기꾼이고, 모두 나를 속이는 자라고 여기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또 속임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과의 관계는 신뢰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신뢰의 정점, 믿음의 정점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주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시 믿고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네가 보았기 때문에 나를 믿느냐? 도대체 네가 봐서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몇 개나 되느냐?”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속된 말씀을 읽고 믿는 것,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는 것, 그리고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며 믿는 것.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도마의 입에서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도마는 예수님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주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적인 고백을 드릴 수 있게 승화되었습니다.
의심과 질문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고뇌해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서는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의심과 질문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 믿음의 정점에 있는 예수님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믿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인생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을 받게 되었을 때, 여기에서 결정적인 대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냥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시고,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여. 베드로의 하나님, 바울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기철 목사님의 하나님,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 방지일 목사님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여. 이 신앙의 자리에 들어가면 믿음의 역사가 나에게 개별화가 됩니다. 인격화가 되고 체득화가 되는 것입니다.

신뢰의 해석학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에 기쁨이 있으랴.” 그렇습니다. 건강한 믿음이란, 의심의 시험을 통과한 믿음입니다. 의심의 바다를 건너간 믿음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내 믿음을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심이란 무엇일까요?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으로 갈 수도 있고 믿음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믿음 쪽으로 모든 것을 튼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닙니다. 의심이 있지만 그것이 더 큰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될 때, 그 의심은 내가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의심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뢰의 해석학으로 돌려야 합니다. 신뢰의 해석학까지 경험한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경험합니까? 찬양의 해석학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주님이시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찬양과 사랑의 해석학까지 나오게 될 때, 그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승화되고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이 놀라운 믿음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축복의 역사를 내 것으로 삼고, 이 땅에서 마음껏 감사하면서 사시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