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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를 찾은 기쁨

마태복음 13: 44 ~ 46

김지철 목사

2015.01.11

‘선택 장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요사이 젊은이들이 앓고 있는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선택 장애’입니다. 본래 선택이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가치관이 명백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합니다. 사실 옛날과 달리 선택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들은 선택하고 결정하기를 두려워하며, 그저 ‘글쎄…, 그럴 걸?’하며 정확한 판단을 유보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maybe 세대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선택의 장애는 일상적인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뭔가 결정하려고 하면, 사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압감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남에게 이끌려 살게 됩니다. 최근에는 선택을 돕기 위한 앱(application)도 등장했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공개하여 투표에 붙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옷을 살 때, 여러 가지 옷을 올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사는 것입니다. 가방 색깔을 택할 때도, 데이트를 위한 메뉴를 정할 때도 SNS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맨 위에 있는 사람이 “이것으로 하자!”하면 꼼짝없이 그렇게 해야 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싶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연애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 중에 ‘썸을 탄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로 오고 간 문자를 공개적으로 공개하며 묻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나요? 연애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면 여기서 멈출까요?”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결정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좋게 말하면 최적의 대답을 찾기 위한 ‘의견 청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타인의 말에 자기의 삶을 맡기는 현상입니다. 일종의 무책임이고, 무능력입니다.
점집이 사라지지 않고 흥하는 것은 왜일까요? 유약한 사람들,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니 묻는 것입니다. “이 연애가 잘 될까요?”, “어느 쪽으로 이사를 할까요?”, “어떤 직장을 택할까요?” 이것은 아주 위험한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선택이 아니라 남의 선택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기보다 남을 탓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 기쁨이 사라지고 우울증 같은 것이 엄습합니까? 마음이 여릴 때 그렇습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갈 때 그렇습니다. 남이 내 삶을 결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때 그렇습니다. 기쁨조차 남에 의해 지배가 되고, 뭔가 잘 안될 때는 모든 것이 우울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사귀다가 헤어질 때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제 너와 사귀지 않겠다.”고 말하면 될 텐데, 상대방이 이별통보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자꾸 사라지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결정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선택을 남에게 미루는 습관은, 결과를 책임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또, 나는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괜찮습니까? 음식을 하나 먹을 때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까? 옷 하나를 결정할 때도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습니까? 직업을 선택할 때도 주도적으로 선택합니까?
남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내가 내려야 합니다. 그에 따른 책임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택장애 증후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중한 삶을 그분에게 맡기겠다는 결단과 그로 인한 삶의 의욕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날입니까? 가야할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쉴 수 있는 시간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임을 선포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단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겠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포하겠다는 것, 가장 큰 기쁨을 향하여 내 인생을 예배드리는 삶으로 나타나겠다는 그 결정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별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나의 선택, 이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전적으로 나의 결단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주어졌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을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결단입니다.

인생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가진 ‘보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결단하며 살라고, 기뻐하며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가 아주 큰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이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사게 됩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이 기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기쁨입니다. 내 모든 소유와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보화를 찾은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보화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2000년 전, 보물을 보관하는 많은 방법들 중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는 땅 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유주가 죽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는지, 포로로 끌려갔는지, 또 다른 사건 사고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그 보화는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왜 주인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라는 도덕적인 질문은 이 비유의 초점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보화를 발견했을 때 결단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네 기득권과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내려놓고 더 큰 보화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저는 올해 들어서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도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우리는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보이는 것, 곧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쁨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 자체가 가지는 기쁨은 늘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로 보이는 보화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연결하셨습니다.
롤프 도벨리(Rolf Dobelli)라는 사람이 『스마트한 생각들』이라는 책에서 ‘쾌락의 쳇바퀴’라는 글을 씁니다. 육체적인 소유에 의해 생기는 쾌락은 단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잠깐 즐거웠다가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을 때 좋아합니까? 차를 사고 좋아합니다. 원하던 명품백을 사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좋아함의 시간이 얼마나 갈까요? 예를 들어서 백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칩시다. 얼마나 기쁠까요? 숨이 막힐 듯이, 뛸 듯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약 3개월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3개월이 안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불행해지거나 우울해지고, 그 전의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가 갖는 쾌락은 효력이 아주 짧기 때문에,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잠깐 행복감에 젖다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앞서 말한 즐거움의 쳇바퀴일까요, 아니면 내 삶 전체를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기쁨, 영원한 기쁨일까요? 분명한 것은 영원한 기쁨을 얻으려면, 소유적인 기쁨을 뛰어넘는 비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공자는 『논어』를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는 ‘배우는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學而詩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배우는 기쁨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도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시며, 배우는 기쁨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배우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나이가 50이 되고, 70이 되고, 90이 되어도 나는 배울 것이다.’라는 생각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배움은 이 배움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찾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는 아무리 다가가고 다가가도 더 발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기쁨입니다.
배우는 것과 발견하는 것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단계, 2단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발견하는 것은 깨달음에 비약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삶 전체를 뒤흔들 참 진리와 보화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인생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진리와 생명이시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보화라는 것입니다.

구하며 찾는 자에게 ‘보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화를 깨닫는 이러한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면서 두 가지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도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밭을 일구면서 거기에서 보화가 나올지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예기치 않은 발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냥 어쩌다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 45절에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태복음 13:45)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하면서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이 등장합니다. 노력하는 사람, 열심히 찾고 또 찾는 상인입니다. 피동성이 능동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looking for’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찾는다는 것입니다.
보화를 찾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분별력과 목표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 것,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마음이 있어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진리를 찾았느냐. 네가 생명을 찾았느냐. 네가 평안을 찾았느냐. 네가 영원한 세계를 찾았느냐. 네가 참된 지혜를 찾았느냐.”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더 열심히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가만히 있지 말고 찾으라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가 우리 안에 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찾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진리, 진정한 생명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찾았지만, 그들은 멈춰 섰기 때문입니다.

‘보화’를 기억하며 추구할 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삶의 목표가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보화의 역사를 더욱 넓혀가는 우리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보화를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면,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의 우선권을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이 최고로 값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그것이 최고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항상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항상 내 인생에 우선권이 있고 그것을 먼저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나의 소유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먼저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먼저 먹고, 먼저 마시고, 먼저 입는 것을 구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우선권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선권을 가진 사람이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그동안 나를 얽어매었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게으름과 탐욕, 인간적인 욕심 속에서 나를 구속했던 것들을 내려놔야 합니다.

…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44)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최고의 것에 전체를 바쳤습니다. 우선권을 결정하고 나서는, 우선권이 아닌 것들을 내려놓는 포기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생에는 잡는 용기도 있지만, 내어놓는 용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데, 내 속이 꽉 차 있으면 집어넣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종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꽉 붙잡은 손을 이제 그만 놓아라. 네가 손을 펴야 내가 그곳에 무언가 선물을 주지 않겠니?”
여러분이 인생에서 꽉 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들입니까? 기업입니까? 돈과 재물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조차도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물으십니다. “네 인생의 우선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쓰겠느냐?”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기쁨이 영혼 속에서부터 솟구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그의 삶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 (빌립보서 3:7∼8)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인생 최고의 보화인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인생이 더 멋져졌습니다. 더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보화’임을 선언합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 안에는 진리, 생명, 지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화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맸던 것에서 탈출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됩니다. 돈이 소중하지만, 돈에서 해방되어야 자유자가 됩니다. 육체의 즐거움이 소중하지만, 육체의 쾌락에서 벗어나야 자유자가 됩니다. 권력만을 바라보고 달리던 마음과 걸음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은총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내 가슴으로,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지만 내 속에 보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화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면서 육체는 후폐하지만, 영혼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나이가 얼마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고백해 봅시다. 예배시간이란, 예수님이 내 인생의 보화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얽어맸던 예수님 아닌 것들을 내려놓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단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보화로 삼아 이 한 해를 기쁨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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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 44 ~ 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선택 장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요사이 젊은이들이 앓고 있는 장애가 있습니다. 세상 말로 하면 ‘선택 장애’입니다. 본래 선택이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가치관이 명백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올바른 선택이 가능합니다. 사실 옛날과 달리 선택할 것이 너무 많은 시대이기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들은 선택하고 결정하기를 두려워하며, 그저 ‘글쎄…, 그럴 걸?’하며 정확한 판단을 유보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maybe 세대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선택의 장애는 일상적인 삶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뭔가 결정하려고 하면, 사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압감을 느낍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남에게 이끌려 살게 됩니다. 최근에는 선택을 돕기 위한 앱(application)도 등장했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공개하여 투표에 붙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옷을 살 때, 여러 가지 옷을 올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사는 것입니다. 가방 색깔을 택할 때도, 데이트를 위한 메뉴를 정할 때도 SNS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맨 위에 있는 사람이 “이것으로 하자!”하면 꼼짝없이 그렇게 해야 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싶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연애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하는 말 중에 ‘썸을 탄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로 오고 간 문자를 공개적으로 공개하며 묻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나요? 연애로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면 여기서 멈출까요?”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결정을 두려워하고 겁을 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좋게 말하면 최적의 대답을 찾기 위한 ‘의견 청취’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타인의 말에 자기의 삶을 맡기는 현상입니다. 일종의 무책임이고, 무능력입니다.
점집이 사라지지 않고 흥하는 것은 왜일까요? 유약한 사람들, 우유부단한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하니 묻는 것입니다. “이 연애가 잘 될까요?”, “어느 쪽으로 이사를 할까요?”, “어떤 직장을 택할까요?” 이것은 아주 위험한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의존하는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선택이 아니라 남의 선택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니었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기보다 남을 탓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 기쁨이 사라지고 우울증 같은 것이 엄습합니까? 마음이 여릴 때 그렇습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끌려갈 때 그렇습니다. 남이 내 삶을 결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저 가만히 있을 때 그렇습니다. 기쁨조차 남에 의해 지배가 되고, 뭔가 잘 안될 때는 모든 것이 우울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사귀다가 헤어질 때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제 너와 사귀지 않겠다.”고 말하면 될 텐데, 상대방이 이별통보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자꾸 사라지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게 됩니다. 내 삶을 주도적으로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결정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삶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선택을 남에게 미루는 습관은, 결과를 책임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을 때 그렇습니다. 또, 나는 완벽한 선택을 하고 싶다는 강박관념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괜찮습니까? 음식을 하나 먹을 때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까? 옷 하나를 결정할 때도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습니까? 직업을 선택할 때도 주도적으로 선택합니까?
남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은 내가 내려야 합니다. 그에 따른 책임도 내가 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택장애 증후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택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중한 삶을 그분에게 맡기겠다는 결단과 그로 인한 삶의 의욕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날입니까? 가야할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쉴 수 있는 시간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임을 선포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단의 자리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겠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선포하겠다는 것, 가장 큰 기쁨을 향하여 내 인생을 예배드리는 삶으로 나타나겠다는 그 결정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별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나의 선택, 이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전적으로 나의 결단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주어졌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을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결단입니다.

인생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가진 ‘보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결단하며 살라고, 기뻐하며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농부가 밭에서 일하다가 아주 큰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너무 기뻐서 이것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사게 됩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이 기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기쁨입니다. 내 모든 소유와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보화를 찾은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보화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증거하신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2000년 전, 보물을 보관하는 많은 방법들 중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는 땅 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유주가 죽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는지, 포로로 끌려갔는지, 또 다른 사건 사고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그 보화는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왜 주인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라는 도덕적인 질문은 이 비유의 초점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보화를 발견했을 때 결단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네 기득권과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내려놓고 더 큰 보화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느냐?”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저는 올해 들어서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도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우리는 사탄에게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보이는 것, 곧 물질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쁨이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물질 자체가 가지는 기쁨은 늘 한시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로 보이는 보화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연결하셨습니다.
롤프 도벨리(Rolf Dobelli)라는 사람이 『스마트한 생각들』이라는 책에서 ‘쾌락의 쳇바퀴’라는 글을 씁니다. 육체적인 소유에 의해 생기는 쾌락은 단기간이라는 것입니다. 잠깐 즐거웠다가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을 때 좋아합니까? 차를 사고 좋아합니다. 원하던 명품백을 사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좋아함의 시간이 얼마나 갈까요? 예를 들어서 백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되었다고 칩시다. 얼마나 기쁠까요? 숨이 막힐 듯이, 뛸 듯이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쁨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약 3개월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3개월이 안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예전처럼 불행해지거나 우울해지고, 그 전의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가 갖는 쾌락은 효력이 아주 짧기 때문에, ‘쾌락의 쳇바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잠깐 행복감에 젖다가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앞서 말한 즐거움의 쳇바퀴일까요, 아니면 내 삶 전체를 내놓아도 아깝지 않은 기쁨, 영원한 기쁨일까요? 분명한 것은 영원한 기쁨을 얻으려면, 소유적인 기쁨을 뛰어넘는 비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공자는 『논어』를 시작하면서, 인간에게는 ‘배우는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學而詩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즉,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배우는 기쁨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도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시며, 배우는 기쁨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배우는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나이가 50이 되고, 70이 되고, 90이 되어도 나는 배울 것이다.’라는 생각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배움은 이 배움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갑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발견하는 기쁨입니다. 찾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는 아무리 다가가고 다가가도 더 발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기쁨입니다.
배우는 것과 발견하는 것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은 기본적으로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단계, 2단계 차근차근 올라갑니다. 예측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발견하는 것은 깨달음에 비약이 있습니다. 예기치 않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너의 삶 전체를 뒤흔들 참 진리와 보화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인생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궁극적 기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진리와 생명이시며,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보화라는 것입니다.

구하며 찾는 자에게 ‘보화’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화를 깨닫는 이러한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면서 두 가지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44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도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밭을 일구면서 거기에서 보화가 나올지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야말로 예기치 않은 발견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냥 어쩌다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 45절에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마태복음 13:45)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하면서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값진 진주를 찾는 상인이 등장합니다. 노력하는 사람, 열심히 찾고 또 찾는 상인입니다. 피동성이 능동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looking for’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목표를 가지고 찾는다는 것입니다.
보화를 찾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분별력과 목표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 더 가치 있는 것,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마음이 있어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네가 진리를 찾았느냐. 네가 생명을 찾았느냐. 네가 평안을 찾았느냐. 네가 영원한 세계를 찾았느냐. 네가 참된 지혜를 찾았느냐.”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더 열심히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가만히 있지 말고 찾으라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가 우리 안에 열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찾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진리, 진정한 생명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찾았지만, 그들은 멈춰 섰기 때문입니다.

‘보화’를 기억하며 추구할 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삶의 목표가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과 보화의 역사를 더욱 넓혀가는 우리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보화를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면,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의 우선권을 결정해야 합니다. 무엇이 최고로 값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그것이 최고로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여기에서 ‘먼저’라는 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항상 먼저 해야 될 것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결단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항상 내 인생에 우선권이 있고 그것을 먼저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나의 소유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을 먼저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먼저 먹고, 먼저 마시고, 먼저 입는 것을 구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우선권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선권을 가진 사람이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그동안 나를 얽어매었던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게으름과 탐욕, 인간적인 욕심 속에서 나를 구속했던 것들을 내려놔야 합니다.

…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44)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최고의 것에 전체를 바쳤습니다. 우선권을 결정하고 나서는, 우선권이 아닌 것들을 내려놓는 포기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인생에는 잡는 용기도 있지만, 내어놓는 용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데, 내 속이 꽉 차 있으면 집어넣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종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꽉 붙잡은 손을 이제 그만 놓아라. 네가 손을 펴야 내가 그곳에 무언가 선물을 주지 않겠니?”
여러분이 인생에서 꽉 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입니까? 남편입니까? 자식들입니까? 기업입니까? 돈과 재물입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조차도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물으십니다. “네 인생의 우선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쓰겠느냐?”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기쁨이 영혼 속에서부터 솟구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그의 삶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 (빌립보서 3:7∼8)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인생 최고의 보화인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삶의 축복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인생이 더 멋져졌습니다. 더 충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인생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보화’임을 선언합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 안에는 진리, 생명, 지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화이신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맸던 것에서 탈출해야 진정한 자유자가 됩니다. 돈이 소중하지만, 돈에서 해방되어야 자유자가 됩니다. 육체의 즐거움이 소중하지만, 육체의 쾌락에서 벗어나야 자유자가 됩니다. 권력만을 바라보고 달리던 마음과 걸음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은총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을 내 가슴으로,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비록 질그릇 같지만 내 속에 보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화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면서 육체는 후폐하지만, 영혼에는 새로운 기쁨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나이가 얼마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고백해 봅시다. 예배시간이란, 예수님이 내 인생의 보화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얽어맸던 예수님 아닌 것들을 내려놓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단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보화로 삼아 이 한 해를 기쁨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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