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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부름받은 사람

로마서 1: 1 ~ 7

김지철 목사

2015.05.31

바울은 매우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띕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고,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그의 라틴어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요즘에도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 한국 이름과 미국식 이름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사울이었고, 또 바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유대 바리새인으로서 사울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단순히 거절한 것을 넘어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교회를 핍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의 전 생애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로 변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처음 등장하는 바울은 사도행전 맨 마지막 장인 28장에서도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향해 쓴 서신이 13개에 이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사복음서와 초대교회에 관한 사도행전을 지나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까지 신약성경 전체 분량의 약 1/3에 육박하는 글을 사도 바울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바울의 이런 모습이 제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쓴 글을 읽으며 바울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저 같은 사람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강인한 의지력과 철저한 실천력은 정말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도 누구보다 탁월했습니다.

바울의 장점 중 하나는 삶의 ‘일관성’입니다.

사실 바울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비난과 조롱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서신이 네 개나 됩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바로 고통과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옥중에서 쓴 서신들입니다. 또 선교 여행 중 파선을 경험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부탁했던 것을 성경은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의 태도가 가능했을까요? 본래부터 바울은 그런 성품이었던 것일까요?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일관성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 장점입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있는 특성이 바로 일관성입니다. 그는 일관성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대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과 정성과 때로 생명까지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하신 이유를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이러한 일관적인 자세를 하나님은 기특하게 여기고 사용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그 성품은 유지하게 하시고 방향만 싹 바꿔 놓으셨으니 말입니다.
과거에 그는 율법에 지극히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열정과 열심을 쏟아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묶여 있었던 그는 율법 조항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분노하며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변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고집했던 사람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남의 처지를 눈여겨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뽐내던 인물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자랑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예수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제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볼 로마서의 서문에서,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몇 가지 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로마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려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쓴 편지 중에 가장 긴 편지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서신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이미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과는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없었지만, 로마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면서 바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들고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져 있던 스페인, 서바나까지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데 로마 교회가 자신을 파송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로마서를 쓰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과의 관계로 소개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사람을 채용할 때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받습니다. 어떤 포부와 목표를 가지고 이 기업에 지원했는지 듣고 싶은 것입니다. 소망교회도 부목사님을 청빙할 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받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섬길 것인지, 목회의 포부와 꿈은 무엇인지 등을 기록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에게 세 개의 단순한 문장으로 나를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저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저는 소망교회 담임 목사인 김지철입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저의 소개법입니다. 목사라는 것과 소망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직장을 소개합니까? 내가 하는 사업의 내용이나 전문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까? 어디서 공부를 얼마만큼 했다는 것을 소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이 얼마나 큰 실적을 가졌는지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의 명예로 자신을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 보는 나를 알기 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조금 다르게 자기 자신을 소개합니다. 헬라 철학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학문의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이고, 얼마나 율법에 철저한 선생이었는지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에 의해서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환경적인 것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임시적인 것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그는 ‘바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둘째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셋째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즉 선택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을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한 자기표현인 동시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자랑스러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표현할 때 이 두 가지는 참 중요합니다. 겸손히 자신을 표현해야 사람들이 호감을 갖습니다. 동시에 자긍심과 자부심이 있는 표현이 들어갈 때 사람들의 관심이 커집니다.
바울에게 있어 겸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나는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순종해야 할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갖고 있던 겸손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 어떻게 자랑과 자부심도 되었을까요?
구약의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붙였던 존귀한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자신에게도 자랑스럽게 대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전통의 계승자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처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자부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영적인 수동태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의 자기소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를 좋아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수동태는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아주 탁월한 표현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를 부르신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선택한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명 의식이 점점 약해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calling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땅에 왜 왔는지, 왜 사는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calling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법칙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수동태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시고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수동태를 깨닫는 것이 은혜의 비밀이고 은혜의 법칙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간구할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내가 잘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의 손을 꽉 붙잡아야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까? 혹시라도 놓칠까봐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빠, 엄마가 내 손을 꽉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릴 때 경험한 ‘안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손을 놓을 때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모세 이야기를 매우 잘 압니다. 그는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자기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calling이 있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내가 너를 부르겠다.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부르고 싶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까지 그는 진정한 지도자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나도 생명을 바쳐서 당신을 따를 것”이라며 “나만한 제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라는 자신감에 취해있을 때, 그는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초청하셨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곧 영적인 수동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나를 불러주셨다는,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영적 수동태임을 알게 되면 그에게는 넘치는 사명이 생길 수 있습니다.
소명(calling)과 사명, 즉 보냄(sending)은 늘 함께 갑니다. calling이 없는 sending은 위험한 것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떤 욕심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그저 이기적인 욕망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소명을 받았다고 여겼는데 사명감이 생기지 않으면, 그 소명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도 그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함께 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수동태에 붙잡혀야 하나님이 주신 삶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고 말입니다.

‘부름받음’의 영적인 수동태를 확인합시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대에 상당히 위험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주님’이라는 헬라말 ‘퀴리우스’는 전적으로 황제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님이 된다는 소식을 증거 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초대 교회는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시절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은 매우 위대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여기에 삶을 걸어야 합니다. 진정한 영적 수동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나는 나 자신을 누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나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게 무엇입니까? 사람 앞에서야 학벌이나 직업이나 가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그러면 너는 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 이제 너는 죄악에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 영적인 수동태입니다. 이 영적인 수동태를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은혜의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것을 믿고 알기에 오늘도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잠시 두고 먼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 영적인 수동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사는 것, 복음에 따라 말하고 복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직장을 포함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 귀한 역사를 감당하는 부름 받은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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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1 ~ 7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매우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띕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고,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그의 라틴어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요즘에도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 한국 이름과 미국식 이름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사울이었고, 또 바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었습니다. 유대 바리새인으로서 사울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단순히 거절한 것을 넘어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교회를 핍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의 전 생애가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로 변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처음 등장하는 바울은 사도행전 맨 마지막 장인 28장에서도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향해 쓴 서신이 13개에 이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사복음서와 초대교회에 관한 사도행전을 지나면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까지 신약성경 전체 분량의 약 1/3에 육박하는 글을 사도 바울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바울의 이런 모습이 제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그가 쓴 글을 읽으며 바울이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저 같은 사람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강인한 의지력과 철저한 실천력은 정말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도 누구보다 탁월했습니다.

바울의 장점 중 하나는 삶의 ‘일관성’입니다.

사실 바울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비난과 조롱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서신이 네 개나 됩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가 바로 고통과 고난 속에 있으면서도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옥중에서 쓴 서신들입니다. 또 선교 여행 중 파선을 경험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연민이 아니라 영혼의 기쁨과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부탁했던 것을 성경은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의 태도가 가능했을까요? 본래부터 바울은 그런 성품이었던 것일까요?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일관성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분명 장점입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에게 있는 특성이 바로 일관성입니다. 그는 일관성을 가지고 그의 생애를 대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과 정성과 때로 생명까지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사랑하신 이유를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이러한 일관적인 자세를 하나님은 기특하게 여기고 사용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그 성품은 유지하게 하시고 방향만 싹 바꿔 놓으셨으니 말입니다.
과거에 그는 율법에 지극히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열정과 열심을 쏟아붓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율법에 묶여 있었던 그는 율법 조항에 근거하여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분노하며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변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람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만 강하게 고집했던 사람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남의 처지를 눈여겨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를 뽐내던 인물이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자랑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예수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던 사람이 이제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서 살펴볼 로마서의 서문에서,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몇 가지 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로마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려 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쓴 편지 중에 가장 긴 편지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서신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이미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과는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없었지만, 로마 교회가 성장한 것을 보면서 바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들고 당시 땅 끝이라고 알려져 있던 스페인, 서바나까지 복음을 증거 하러 가는 데 로마 교회가 자신을 파송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로마서를 쓰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님과의 관계로 소개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업은 사람을 채용할 때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받습니다. 어떤 포부와 목표를 가지고 이 기업에 지원했는지 듣고 싶은 것입니다. 소망교회도 부목사님을 청빙할 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받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섬길 것인지, 목회의 포부와 꿈은 무엇인지 등을 기록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나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에게 세 개의 단순한 문장으로 나를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이야기하겠습니까? 저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저는 소망교회 담임 목사인 김지철입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저의 소개법입니다. 목사라는 것과 소망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직장을 소개합니까? 내가 하는 사업의 내용이나 전문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까? 어디서 공부를 얼마만큼 했다는 것을 소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기업이 얼마나 큰 실적을 가졌는지 설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문의 명예로 자신을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 보는 나를 알기 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바울은 조금 다르게 자기 자신을 소개합니다. 헬라 철학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학문의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이고, 얼마나 율법에 철저한 선생이었는지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에 의해서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환경적인 것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임시적인 것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1)

그는 ‘바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둘째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셋째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즉 선택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을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 겸손한 자기표현인 동시에 자부심을 갖게 하는 자랑스러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표현할 때 이 두 가지는 참 중요합니다. 겸손히 자신을 표현해야 사람들이 호감을 갖습니다. 동시에 자긍심과 자부심이 있는 표현이 들어갈 때 사람들의 관심이 커집니다.
바울에게 있어 겸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나는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순종해야 할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갖고 있던 겸손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 어떻게 자랑과 자부심도 되었을까요?
구약의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붙였던 존귀한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자신에게도 자랑스럽게 대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전통의 계승자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와 여호수아와 다윗처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이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자부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영적인 수동태를 경험했습니다.

바울의 자기소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를 좋아합니다. 보다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수동태는 하나님의 생명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아주 탁월한 표현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를 부르신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를 선택한 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명 의식이 점점 약해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calling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이 땅에 왜 왔는지, 왜 사는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calling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법칙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수동태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시고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수동태를 깨닫는 것이 은혜의 비밀이고 은혜의 법칙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9)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간구할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내가 잘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나타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엄마, 아빠의 손을 꽉 붙잡아야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까? 혹시라도 놓칠까봐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빠, 엄마가 내 손을 꽉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릴 때 경험한 ‘안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꽉 붙잡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손을 놓을 때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모세 이야기를 매우 잘 압니다. 그는 사십 세가 되었을 때 자기 민족의 지도자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calling이 있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내가 너를 부르겠다.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부르고 싶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까지 그는 진정한 지도자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나도 생명을 바쳐서 당신을 따를 것”이라며 “나만한 제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라는 자신감에 취해있을 때, 그는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초청하셨을 때, 그는 비로소 예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곧 영적인 수동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고 나를 불러주셨다는, 다시 말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영적 수동태임을 알게 되면 그에게는 넘치는 사명이 생길 수 있습니다.
소명(calling)과 사명, 즉 보냄(sending)은 늘 함께 갑니다. calling이 없는 sending은 위험한 것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떤 욕심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그저 이기적인 욕망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소명을 받았다고 여겼는데 사명감이 생기지 않으면, 그 소명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도 그것입니다. 소명과 사명은 함께 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수동태에 붙잡혀야 하나님이 주신 삶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고 말입니다.

‘부름받음’의 영적인 수동태를 확인합시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당대에 상당히 위험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주님’이라는 헬라말 ‘퀴리우스’는 전적으로 황제에게 해당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님이 된다는 소식을 증거 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초대 교회는 위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시절만의 이야기일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아닐까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은 매우 위대한 소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여기에 삶을 걸어야 합니다. 진정한 영적 수동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나는 나 자신을 누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나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게 무엇입니까? 사람 앞에서야 학벌이나 직업이나 가문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그러면 너는 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 이제 너는 죄악에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 영적인 수동태입니다. 이 영적인 수동태를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은혜의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부르신 것을 믿고 알기에 오늘도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잠시 두고 먼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 영적인 수동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사는 것, 복음에 따라 말하고 복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첫 번째 할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직장을 포함한 삶의 모든 현장에서 이 귀한 역사를 감당하는 부름 받은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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