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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에 필요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저는 지난 주간 성도님들과 함께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나라,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란이 일어났던 나라이기에 어둡고 삭막한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밝은 표정의 사람들과 도시를 보며 자유와 평화가 정착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캄보디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캄보디아 땅을 축복해주세요 캄보디아 백성들을 축복해주세요. 이 땅에 진정한 축복을 내려주셔서 죽음과 저주의 땅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주세요.”
백성을 죽음의 현장 속에 가두었던 크메르 루즈 공산정권의 지도자였던 폴 포튼은 1975-1979년 4년 동안 자기 민족을 이백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그것도 강제노예, 고문, 처형 등으로 희생시켰습니다. 당시 두 부류의 적대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폴 포튼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이고, 또 하나는 크메르 루즈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자유 진영의 국가였는데, 여기에 연계되었던 모든 사람들을 목 잘라 죽이고, 머리통을 때려 부수고, 총칼로 쏘아 죽였습니다. 사유재산을 빼앗았고, 시장경제를 폐지시켰습니다. 수도 프놈펜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다 농촌으로 강제 이동시켰습니다. 화폐제도가 사라졌고 프놈펜 중앙은행도 폭파되었습니다. 곳곳에 집단 농장만이 세워졌는데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대상이었습니다. 농민들 중에도 안경을 낀 사람들은 식자층에 속한다고해서 잡아 죽였습니다.
캄보디아 백성들은 이런 잔인하고 참혹한 역사를 가진 백성들입니다. 폴 포튼은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잔인한 방법들을 통해서 자기 민족들을 학살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는 머릿속으로 완전한 공산주의를 꿈꾸면서 자기 민족사에 암울한 암흑시대를 남긴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데올로기의 악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불과 50여 년 전 하나님 없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행하고도 참혹한 전쟁의 아픔을 겪은 백성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은 다시 주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을 옭아매는 이데올로기가 곳곳에 있습니다. 때로는 달콤한 목소리로, 때로는 위협적인 메시지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처세술이나 심리학적인 자기위안으로 행복이 여기 있다, 낙원이 저기 있다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도 합니다. 집단적으로는 문화적인 프로그램으로, 과학 기술이라는 명목으로, 정치,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화려한 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많은 화려한 꿈들이 거꾸로 인간에게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언젠가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가장 잘 아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축복해 주실 수 있고 행복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서 우리가 묵상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묵상하면서 참혹한 죄악을 저지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묵상과 생각이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가게 할 수도 있고, 저주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묵상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때문에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그의 삶을 기쁨이 붙잡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시편을 쓰면서 감탄사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 감탄하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릅니다. 이 시편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감탄사인 ‘복되도다!’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복 받은 자가 갖고 있는 축복을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복 받을 수 있는지 부러움과 찬탄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복 받은 인간과 복 받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시편 일편의 시작은 ‘복되도다!’로 시작하고, 맨 마지막은 ‘망하리로다!’로 끝맺고 있습니다. 복으로 시작했다가 멸망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들어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잃어버리면 악의 꾀와 악한자의 이데올로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줍니다.
시편기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규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복 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이라고 예정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결단하고 책임질 때입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복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과 야망과 이기적인 생각에 붙들리면 망하게 됩니다. 시편 1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2)
세상에서 복된 사람은 권력을 축적하는 사람, 재물을 많이 쌓아둔 사람이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주어진 명예와 세상의 권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그것보다 앞선 복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법,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복입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9:10)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뻐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묵상은 소리 내는 짐승이나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는다, 읊조린다는 뜻입니다. 묵상은 마치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쪼아 먹으면서 ‘구구구’라고 소리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비둘기가 먹이를 먹으면서 ‘구구구’하는 모습은 ‘이것은 내 것이니 다른 자가 차지하지 마세요. 나는 이 먹이를 즐기고 있어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그 앞에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묵상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내가 소유하며 즐기는 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이 밝아지고 괜히 흥얼거리는 즐거운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진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 보통 때는 막 웃고 즐기다가도 사진기만 가져다대면 얼굴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얼굴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들은 얼굴이 굳어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 가장 맛있는 음식을 연상하세요.” 그러면 굳어졌던 얼굴표정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할 때보다 먹을 때 더 밝고 즐거워하지 않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도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쓴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다.”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칼싹두기’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사전에 ‘칼싹두기’는 음식이름으로 밀가루나 메밀 같은 것을 반죽해서 굵고 조각내어 썰어서 멸치국물에 끓인 음식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보통 수제비라고 말하는 음식입니다. 그는 이것을 먹을 때면 우리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도 포근해진다고 하면서 이렇게 재미있게 썼습니다.
“땀 흘려 이걸 한 그릇 먹고 나면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이렇게 화목한 집에서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여러분의 얼굴을 스스로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 표정이 바뀝니다. 한식, 일식, 양식을 생각하면 표정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면 이제 거꾸로 바꿔서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얼굴이 밝아지는 분들은 굉장히 복된 분들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이 밝아지고 기쁨이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먹는 일에 마음이 밝아지고 기쁨이 생긴다면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해도 짜증이 나고, 하나님을 사랑해도 실감이 안 나고, 말씀을 놓고 읽고 묵상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소화불량 상태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씀묵상에 우선권을 둘 때 삶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시편 1:1)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로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권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힘, 인생에서 나를 이끄는 모든 힘이 말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간의 우선권을 말씀을 즐거워하는 일에 두었습니다.
시간은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질적으로 압축된 시간입니다.
시간이라고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선권에 따라서 바뀝니다.
양의 시간이 질의 시간으로 바뀝니다.
시간은 우리 삶의 기적을 만듭니다.
시간은 새로운 삶의 축복을 가동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내놓으면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본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내 인생을 다시 보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를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살아있는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양의 시간에서 질을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말씀을 읽을 때 얻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말씀을 묵상하면 결코 시간의 낭비나 소비가 아니라 말씀을 묵상함으로 인생의 풍요로움이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말씀묵상을 시작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억지로 예수 믿고,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때로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끌려 나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가 나가자고 하니까 올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내 평생소원은 당신이 교회 나오는 거야.”라고 말해서 시간을 끌고 끌다가 억지로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끌려 나오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계속해서 한달, 일년 동안 억지로 나온다면 그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입니다.
한번 나오기로 결단했으면 이제 말씀을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한번 내속에서 자발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무슨 생명과 진리의 즐거움이 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드리려고 하는지 마음속에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읽은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시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곧 내게 주신 말씀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갔던 길이 곧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의 삼천 년 전, 이천 년 전의 사건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간 길을 우리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님의 삶과 성령의 역사 속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탄 시간여행의 우주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거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상처 난 곳, 아픈 곳을 만지시고 치유 받는 역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삶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 속에 뛰어드는 것이 바로 말씀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의 모든 계시가 들어있습니다. 생명과 진리와 지혜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적자와 박해자가 있다면 바로 소음과 시끄러움, 분주함과 서두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두름은 마귀의 것이 아니다. 서두름은 바로 마귀 자신이다.”
분주함 때문에 인생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분주함으로 우리 삶 전체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내면세계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행하며 모험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면서 인생의 모험을 하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시편 63:6-7)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1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받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말씀으로 묵상하십시오. 사자가 먹이를 움켜 쥔 것처럼 말씀을 가슴으로 움켜쥐면서 묵상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삶 전체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고 말씀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나를 이끌어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축복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시편 1: 1 ~ 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행복에 필요한 것을 알려주십니다.
저는 지난 주간 성도님들과 함께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킬링필드(Killing field)의 나라,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란이 일어났던 나라이기에 어둡고 삭막한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밝은 표정의 사람들과 도시를 보며 자유와 평화가 정착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캄보디아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캄보디아 땅을 축복해주세요 캄보디아 백성들을 축복해주세요. 이 땅에 진정한 축복을 내려주셔서 죽음과 저주의 땅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역사를 일으켜주세요.”
백성을 죽음의 현장 속에 가두었던 크메르 루즈 공산정권의 지도자였던 폴 포튼은 1975-1979년 4년 동안 자기 민족을 이백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그것도 강제노예, 고문, 처형 등으로 희생시켰습니다. 당시 두 부류의 적대자가 있었는데 하나는 폴 포튼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이고, 또 하나는 크메르 루즈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자유 진영의 국가였는데, 여기에 연계되었던 모든 사람들을 목 잘라 죽이고, 머리통을 때려 부수고, 총칼로 쏘아 죽였습니다. 사유재산을 빼앗았고, 시장경제를 폐지시켰습니다. 수도 프놈펜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다 농촌으로 강제 이동시켰습니다. 화폐제도가 사라졌고 프놈펜 중앙은행도 폭파되었습니다. 곳곳에 집단 농장만이 세워졌는데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대상이었습니다. 농민들 중에도 안경을 낀 사람들은 식자층에 속한다고해서 잡아 죽였습니다.
캄보디아 백성들은 이런 잔인하고 참혹한 역사를 가진 백성들입니다. 폴 포튼은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잔인한 방법들을 통해서 자기 민족들을 학살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살육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는 머릿속으로 완전한 공산주의를 꿈꾸면서 자기 민족사에 암울한 암흑시대를 남긴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데올로기의 악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불과 50여 년 전 하나님 없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행하고도 참혹한 전쟁의 아픔을 겪은 백성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은 다시 주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을 옭아매는 이데올로기가 곳곳에 있습니다. 때로는 달콤한 목소리로, 때로는 위협적인 메시지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처세술이나 심리학적인 자기위안으로 행복이 여기 있다, 낙원이 저기 있다고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도 합니다. 집단적으로는 문화적인 프로그램으로, 과학 기술이라는 명목으로, 정치, 경제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화려한 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러한 많은 화려한 꿈들이 거꾸로 인간에게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분명히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언젠가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가장 잘 아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축복해 주실 수 있고 행복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서 우리가 묵상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묵상하면서 참혹한 죄악을 저지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가 묵상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묵상과 생각이 우리의 삶을 축복으로 가게 할 수도 있고, 저주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묵상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때문에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그의 삶을 기쁨이 붙잡고 있는 것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시편을 쓰면서 감탄사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 감탄하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릅니다. 이 시편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감탄사인 ‘복되도다!’로 시작합니다. 시인은 복 받은 자가 갖고 있는 축복을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복 받은 사람이 누구이며, 어떻게 복 받을 수 있는지 부러움과 찬탄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생각하는 인간은 복 받은 인간과 복 받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시편 일편의 시작은 ‘복되도다!’로 시작하고, 맨 마지막은 ‘망하리로다!’로 끝맺고 있습니다. 복으로 시작했다가 멸망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 들어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잃어버리면 악의 꾀와 악한자의 이데올로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줍니다.
시편기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규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복 받을 사람과 멸망당할 사람이라고 예정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복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결단하고 책임질 때입니다.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 복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과 야망과 이기적인 생각에 붙들리면 망하게 됩니다. 시편 1편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2)
세상에서 복된 사람은 권력을 축적하는 사람, 재물을 많이 쌓아둔 사람이라고 시작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 주어진 명예와 세상의 권력을 갖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시편기자는 그것보다 앞선 복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법,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복입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시편 19:10)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뻐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묵상은 소리 내는 짐승이나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는다, 읊조린다는 뜻입니다. 묵상은 마치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쪼아 먹으면서 ‘구구구’라고 소리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비둘기가 먹이를 먹으면서 ‘구구구’하는 모습은 ‘이것은 내 것이니 다른 자가 차지하지 마세요. 나는 이 먹이를 즐기고 있어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그 앞에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묵상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내가 소유하며 즐기는 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이 밝아지고 괜히 흥얼거리는 즐거운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진전문가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은 사진을 찍을 때 보통 때는 막 웃고 즐기다가도 사진기만 가져다대면 얼굴이 굳어진다고 합니다. 얼굴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들은 얼굴이 굳어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 가장 맛있는 음식을 연상하세요.” 그러면 굳어졌던 얼굴표정이 부드러워진다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할 때보다 먹을 때 더 밝고 즐거워하지 않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도 느끼게 됩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쓴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다.”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칼싹두기’에 대한 예찬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사전에 ‘칼싹두기’는 음식이름으로 밀가루나 메밀 같은 것을 반죽해서 굵고 조각내어 썰어서 멸치국물에 끓인 음식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보통 수제비라고 말하는 음식입니다. 그는 이것을 먹을 때면 우리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도 포근해진다고 하면서 이렇게 재미있게 썼습니다.
“땀 흘려 이걸 한 그릇 먹고 나면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이렇게 화목한 집에서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여러분의 얼굴을 스스로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 표정이 바뀝니다. 한식, 일식, 양식을 생각하면 표정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면 이제 거꾸로 바꿔서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신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얼굴이 밝아지는 분들은 굉장히 복된 분들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이 밝아지고 기쁨이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먹는 일에 마음이 밝아지고 기쁨이 생긴다면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생각해도 짜증이 나고, 하나님을 사랑해도 실감이 안 나고, 말씀을 놓고 읽고 묵상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소화불량 상태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씀묵상에 우선권을 둘 때 삶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시편 1:1)
‘오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강조의 의미로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권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힘, 인생에서 나를 이끄는 모든 힘이 말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간의 우선권을 말씀을 즐거워하는 일에 두었습니다.
시간은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질적으로 압축된 시간입니다.
시간이라고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선권에 따라서 바뀝니다.
양의 시간이 질의 시간으로 바뀝니다.
시간은 우리 삶의 기적을 만듭니다.
시간은 새로운 삶의 축복을 가동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내놓으면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본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내 인생을 다시 보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를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살아있는 시간에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양의 시간에서 질을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말씀을 읽을 때 얻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말씀을 묵상하면 결코 시간의 낭비나 소비가 아니라 말씀을 묵상함으로 인생의 풍요로움이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고백합니다.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말씀묵상을 시작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억지로 예수 믿고,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때로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끌려 나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가 나가자고 하니까 올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내 평생소원은 당신이 교회 나오는 거야.”라고 말해서 시간을 끌고 끌다가 억지로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끌려 나오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계속해서 한달, 일년 동안 억지로 나온다면 그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입니다.
한번 나오기로 결단했으면 이제 말씀을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한번 내속에서 자발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무슨 생명과 진리의 즐거움이 있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드리려고 하는지 마음속에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읽은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이 시인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말씀이 곧 내게 주신 말씀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갔던 길이 곧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의 삼천 년 전, 이천 년 전의 사건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간 길을 우리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님의 삶과 성령의 역사 속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탄 시간여행의 우주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 우리 자신을 맡기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거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상처 난 곳, 아픈 곳을 만지시고 치유 받는 역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인격과 성품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삶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 속에 뛰어드는 것이 바로 말씀 속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의 모든 계시가 들어있습니다. 생명과 진리와 지혜로 가득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적자와 박해자가 있다면 바로 소음과 시끄러움, 분주함과 서두름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두름은 마귀의 것이 아니다. 서두름은 바로 마귀 자신이다.”
분주함 때문에 인생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지 못하는 것은 마귀가 분주함으로 우리 삶 전체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내면세계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여행하며 모험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면서 인생의 모험을 하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시편 63:6-7)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119:14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받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말씀으로 묵상하십시오. 사자가 먹이를 움켜 쥔 것처럼 말씀을 가슴으로 움켜쥐면서 묵상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삶 전체를 내려놓고 주님 앞에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고 말씀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나를 이끌어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축복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