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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전제조건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4월의 첫 번째 날이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믿음이 없다면, 부활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저는 예수님을 바르고 깊게 믿고 싶었습니다.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 하나님과 일종의 내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제게도 환상을 허락하옵소서. 그게 아니면 음성이라도 허락하옵소서. 아니면 깊은 감정적 격정을 허락하셔서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옵소서. 그래야 주님만 평생 믿고 따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또 대학교 1학년 때 대학생 선교회인 CCC라는 선교단체에 참여해 활동을 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500여 명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신앙수련회로 모였습니다. 그때 함께 참여했던 친구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바르게 믿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눈과 귀와 가슴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다가오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만약 그런 경험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는 예수님을 믿지 말자.” 그러면서 4박 5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특별한 경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당시 CCC 책임자였던 김준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며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오늘 처음 예수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그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계속해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다 다시 열심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도 일어서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또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149장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아주 간절하고 호소력 있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반복해 부르며, 일어선 사람 모두에게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누가 나가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눈과 귀와 가슴으로 보고 느끼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말자’고 했던 그 친구가 벌써 일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 이럴 수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역시 계속 찬송을 부르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모인 친구들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앞뒤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승리자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깊은 패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마치 나만 버려진 것 같은 씁쓸함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 왜 저만 제외시켰습니까?’ 다른 친구들은 서로 모여 간증하며 기쁨으로 찬양을 했습니다. 저 홀로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또 너무 슬퍼서 예배당에서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운데 제가 얻은 신앙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말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환청이라도 들어야 믿는 걸까? 가슴이 뜨거워져야만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도마는 솔직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내용을 새롭게 보도록 요청합니다. 보면서 예수님을 믿기 원했던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른 제자 도마입니다. 그는 도무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도마가 의심이 많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직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묻던 제자입니다.
성경에서 도마 이야기는 3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경계하며 배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향하자고 하셨고, 제자들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 8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말립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11:8 중)
그런데 그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들린 집이 있었는데, 베다니에 위치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집입니다. 그 자매에게 오라버니 나사로가 있는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단 소식이 들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절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앞장서 다음과 같이 용기 있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16)
도마는 아주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뒤따르자고 선언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제자들 역시 시간이 갈수록 그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꾸었던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꾸만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1절과 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4)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동시에 무슨 말씀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 도마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4:5)
“주님, 잘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님이 이제 곧 죽겠다는 말씀인지 살겠다는 말씀인지,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건지 버리시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자기표현을 명백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인 사람입니다. 떠오르는 질문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질문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그의 질문이 있었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위대한 대답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도마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이틀 동안 무덤에 갇혀 계셨습니다. 하지만 안식 후 첫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닌지,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하진 않을지, 로마 병정들이 잡아 가두진 않을지, 의기소침하며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얼마나 그들이 두렵고 불안에 떨었으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을까요? 그러나 그 현장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을 직접 만지지 않고는 믿을 수 없어.” 오늘 본문의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요구하는 도마입니다. 이후 여드레가 지난 후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이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봤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더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의 안에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그가 바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그러자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며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을까? 정말 다시 살아난 걸까?’라고 질문하는 오늘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복되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찬양이 전제된 의심은 믿음을 견고히 합니다.
이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친구에게 저는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그 전날까지 예수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냐? 그런데 왜 혼자 앞으로 나갔어?” 그러자 친구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자기도 믿음이 없어서 고민했다고, 그런데 사영리를 다시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바뀌어졌다고….
CCC에서 나오는 사영리 책자에는 마지막 부분에 작은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 기관차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석탄차가 있는데, 우리의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객차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타는 객차는 우리의 감성과 정서와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그 친구는 이 그림을 가리키며, 자기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나면 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객차가 없어도, 감정이 없어도, 말씀을 믿으면 열차는 굴러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믿음으로 결단하며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고백을 드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그 친구 역시 다른 교단에서 신학을 했고, 좋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과 잘 어울리는 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인데, 이 아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영상 시청>
https://www.youtube.com/watch?v=g2ss0kI1cMs
우리의 의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믿음을 거부하려는 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므로 빨리 버릴수록 좋습니다. 또한 정말 바르게 믿기 위해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의심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중간에 멈춰서면 안 됩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의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의심이 있습니다. 믿으면서 동시에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말씀을 읽어 보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의심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의심했습니다. 모세도 의심했고, 욥도 예레미야도 의심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의심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믿음의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기도하는 의심이란 더 큰 믿음을 위한 디딤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신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심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대신 그 자리에 믿음이 들어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믿음의 경주를 이어 갑시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입니다. 그럼 의심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불신 사이에 놓인 우리의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을 통해 불신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신앙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의심할 것이다. 기도하면서 의심할 것이다. 그러면서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늘 전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이렇게 믿으면서 예수님이 가짜라고 판명되면 언제든지 믿음을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무신론자의 대변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때 ‘아, 예수님이 참으로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예수님을 더 신뢰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도마의 고백이 저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이란 근본적으로 신비하고 기이한 사건입니다. 이 부활의 대척점에 뭐가 있습니까?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 이후는 알지 못해도 죽음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정지입니다. 더는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상대방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추억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추억을 기억할 뿐이지 추억을 만들어 갈 그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죽음보다 더 큰 세계, 신비의 세계, 죽음을 꿰뚫는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를 알려 줍니다. “네가 슬픔을 이기려면 더 큰 슬픔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라. 절망을 이기려면 더 큰 절망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라. 그러면 너의 모든 슬픔과 절망이 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슬픔, 외로움, 절망을 껴안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더 큰 슬픔과 절망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기쁨, 곧 부활의 생명으로 슬픔과 절망, 죽음을 이겨내는 방식입니다. 이제 그 어떤 아픔과 고통, 심지어 죽음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란 신앙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 부활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더는 죽음의 권세에 갇혀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는 절망 속에 자신을 묶어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는 사탄의 세력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품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0: 24 ~ 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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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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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믿음의 전제조건은 무엇입니까?
오늘은 4월의 첫 번째 날이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믿음이 없다면, 부활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입니다.
대학교에 다닐 때 저는 예수님을 바르고 깊게 믿고 싶었습니다.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신앙에서 나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엔 하나님과 일종의 내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제게도 환상을 허락하옵소서. 그게 아니면 음성이라도 허락하옵소서. 아니면 깊은 감정적 격정을 허락하셔서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옵소서. 그래야 주님만 평생 믿고 따라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또 대학교 1학년 때 대학생 선교회인 CCC라는 선교단체에 참여해 활동을 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500여 명이나 되는 대학생들이 신앙수련회로 모였습니다. 그때 함께 참여했던 친구와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바르게 믿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눈과 귀와 가슴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다가오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자. 만약 그런 경험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는 예수님을 믿지 말자.” 그러면서 4박 5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특별한 경험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이 되었습니다. 당시 CCC 책임자였던 김준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며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오늘 처음 예수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 그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계속해서 “그동안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다 다시 열심히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들도 일어서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또 많은 사람들이 일어섰습니다.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149장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아주 간절하고 호소력 있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반복해 부르며, 일어선 사람 모두에게 강단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누가 나가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눈과 귀와 가슴으로 보고 느끼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말자’고 했던 그 친구가 벌써 일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 이럴 수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 역시 계속 찬송을 부르며 앞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모인 친구들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앞뒤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승리자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깊은 패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마치 나만 버려진 것 같은 씁쓸함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 왜 저만 제외시켰습니까?’ 다른 친구들은 서로 모여 간증하며 기쁨으로 찬양을 했습니다. 저 홀로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또 너무 슬퍼서 예배당에서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운데 제가 얻은 신앙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말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환청이라도 들어야 믿는 걸까? 가슴이 뜨거워져야만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도마는 솔직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에 대한 내용을 새롭게 보도록 요청합니다. 보면서 예수님을 믿기 원했던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른 제자 도마입니다. 그는 도무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도마가 의심이 많은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직선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묻던 제자입니다.
성경에서 도마 이야기는 3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경계하며 배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향하자고 하셨고, 제자들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요한복음 11장 8절에 보면, 제자들이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말립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한복음 11:8 중)
그런데 그때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들린 집이 있었는데, 베다니에 위치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집입니다. 그 자매에게 오라버니 나사로가 있는데,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단 소식이 들립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절대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마가 앞장서 다음과 같이 용기 있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1:16)
도마는 아주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뒤따르자고 선언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셨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제자들 역시 시간이 갈수록 그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꾸었던 꿈과 희망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꾸만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1절과 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1,4)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동시에 무슨 말씀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때 도마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요한복음 14:5)
“주님, 잘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님이 이제 곧 죽겠다는 말씀인지 살겠다는 말씀인지, 우리를 보호하겠다는 건지 버리시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자기표현을 명백히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도직입적인 사람입니다. 떠오르는 질문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질문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그의 질문이 있었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위대한 대답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도마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이틀 동안 무덤에 갇혀 계셨습니다. 하지만 안식 후 첫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 고난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닌지, 유대 지도자들이 고발하진 않을지, 로마 병정들이 잡아 가두진 않을지, 의기소침하며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얼마나 그들이 두렵고 불안에 떨었으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을까요? 그러나 그 현장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을 직접 만지지 않고는 믿을 수 없어.” 오늘 본문의 2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요구하는 도마입니다. 이후 여드레가 지난 후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을 때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 20:27)
이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도마가 정말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봤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는 더는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의 안에 신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그가 바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그러자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9)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며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을까? 정말 다시 살아난 걸까?’라고 질문하는 오늘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참으로 복되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믿음’을 통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말씀, 찬양이 전제된 의심은 믿음을 견고히 합니다.
이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친구에게 저는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그 전날까지 예수 믿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냐? 그런데 왜 혼자 앞으로 나갔어?” 그러자 친구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자기도 믿음이 없어서 고민했다고, 그런데 사영리를 다시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 바뀌어졌다고….
CCC에서 나오는 사영리 책자에는 마지막 부분에 작은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옛날 기관차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석탄차가 있는데, 우리의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객차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타는 객차는 우리의 감성과 정서와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그 친구는 이 그림을 가리키며, 자기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나면 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객차가 없어도, 감정이 없어도, 말씀을 믿으면 열차는 굴러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믿음으로 결단하며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고백을 드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그 친구 역시 다른 교단에서 신학을 했고, 좋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과 잘 어울리는 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인데, 이 아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영상 시청>
https://www.youtube.com/watch?v=g2ss0kI1cMs
우리의 의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믿음을 거부하려는 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므로 빨리 버릴수록 좋습니다. 또한 정말 바르게 믿기 위해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의심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중간에 멈춰서면 안 됩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의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의심이 있습니다. 믿으면서 동시에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해 의심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말씀을 읽어 보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의심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의심했습니다. 모세도 의심했고, 욥도 예레미야도 의심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의심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믿음의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기도하는 의심이란 더 큰 믿음을 위한 디딤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신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심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대신 그 자리에 믿음이 들어서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믿음의 경주를 이어 갑시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입니다. 그럼 의심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불신 사이에 놓인 우리의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음을 통해 불신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신앙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저는 결심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의심할 것이다. 기도하면서 의심할 것이다. 그러면서 참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늘 전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이렇게 믿으면서 예수님이 가짜라고 판명되면 언제든지 믿음을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무신론자의 대변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읽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그때 ‘아, 예수님이 참으로 이런 분이시구나.’ 하고 예수님을 더 신뢰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도마의 고백이 저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활이란 근본적으로 신비하고 기이한 사건입니다. 이 부활의 대척점에 뭐가 있습니까?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 이후는 알지 못해도 죽음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정지입니다. 더는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상대방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추억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추억을 기억할 뿐이지 추억을 만들어 갈 그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우리 인생에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죽음보다 더 큰 세계, 신비의 세계, 죽음을 꿰뚫는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를 알려 줍니다. “네가 슬픔을 이기려면 더 큰 슬픔인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라. 절망을 이기려면 더 큰 절망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라. 그러면 너의 모든 슬픔과 절망이 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슬픔, 외로움, 절망을 껴안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더 큰 슬픔과 절망으로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기쁨, 곧 부활의 생명으로 슬픔과 절망, 죽음을 이겨내는 방식입니다. 이제 그 어떤 아픔과 고통, 심지어 죽음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란 신앙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 부활이 임했습니다. 우리가 이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더는 죽음의 권세에 갇혀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더는 절망 속에 자신을 묶어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는 사탄의 세력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품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4월 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본 고로 믿느냐?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1장, 16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20:24~2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도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믿음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부활은 믿음이 없으면 도무지 받아드릴 수 없는 사건입니다. 오늘 보고 믿기를 원했던 한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뒤따른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정말 못 믿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누구일까? 바로 도마입니다.
설교의 요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제자들은 의기소침하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 저녁에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요20:19). 그러나 도마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심하였습니다(25절). 의심이 해결되어야 믿음으로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27~29절).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아셨습니다. 자기의 생각, 의심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도마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결국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시다(28절)”고 고백합니다. 말씀만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고 알았습니다.
우리의 의심에는 3종류가 있습니다. ① 믿음을 거부하려는 의심입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버려야만 합니다. ② 정말 바르게 믿기 위해서 하는 의심입니다. 이런 의심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멈춰서면 어제 했던 의심을 오늘 또 다시 반복할 뿐입니다. ③ 믿으면서 동시에 더 큰 믿음을 얻기 위한 의심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의심하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아브라함, 모세, 욥, 예레미야, 시편의 저자들, 베드로,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의심하면서 믿었습니다. 기도하는 의심이란 더 큰 믿음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심하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의심하면서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신뢰는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심이 점점 사라지고 믿음의 자리에 들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란 신비하고 기이한 사건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정지입니다. 상대방의 손을 잡을 수도,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추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다만 추억을 기억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란 지금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더 큰 세계, 신비의 세계,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슬픔과 절망을 이기려면 더 큰 슬픔과 절망을 보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더 큰 슬픔, 외로움, 절망을 껴안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슬픔을 이기는 방식은 슬픔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아침이 있다는 소식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 생명의 신앙의 갖고 죄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세상을 향해 담대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의 발목을 붙잡는 의심의 요소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도마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주님에 대하여 어떻게 고백합니까?
3.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가족, 이웃들이 있습니까?
의심을 떨쳐버리고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갖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의심의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담대히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