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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 – 예수님의 제자들 1 –

마가복음 3: 13 ~ 19

김지철 목사

2014.07.27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본 적 있습니까?

러시아의 문호였던 톨스토이가 삶의 실존적 고뇌를 겪으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내 삶에 얹어 놓았던 어떤 것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버티게 해주던 것이 무너져 버렸으며 내 정신적인 삶이 이제는 끝나버렸음을 알았다.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삶에는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의 세력을 쳐부술 수 있는 목적이 있는 것인가?”
자기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삶의 모든 업적들이 어느 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안전판이라고 여겼던 삶 전체가 마구 요동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질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심한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자살충동에도 자주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톨스토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크든 작든 자기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잘나가고 인기 많은 연예인들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황홀감을 한 번 맛보게 되면, 그것에 중독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박수 소리가 사라지면 너무 허무하고 공허해서 울며 탄식하고 싶은 심정이 듭니다.”
정치인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갑자기 국회의원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한 사람처럼 뻣뻣해집니다. 마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도도해집니다. 때로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박수를 치고 있는 이들이 돈과 권력으로 동원된 유권자라 할지라도, 그 허상의 바다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중독이 됩니다. 그때마다 집도 팔고, 재산도 모두 내놓습니다. 때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임인데도 선거철만 되면 거기에 자기 인생을 올인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로 즐거운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예외일까요? 신앙인에게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남의 칭찬과 박수를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아주 위험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일종의 업적이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지가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박수처럼 느껴지고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신앙생활도 어느 순간 똑같은 허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신앙생활이 물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자체로 삶이 평안한 것입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예배 자체가 기쁨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새벽 기도에 나오고, 봉사와 전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용하시다니…’ 감격하며 그 자체로 기쁨이 충만해야 신앙이 오래 갑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나를 억누르는 족쇄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에게 박수를 쳐 줄 단 한 사람이 없어도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위로하시는 분이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신 삶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인 저는 이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해 봅니다. 제가 제일 기쁜 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예배가 끝나 단에서 내려갈 때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증거하고 목회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구나.’ 때로는 빈 예배당에서 성도님들의 자리를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인생 전체를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은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할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부르신 이들에게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명의 가장 모범적인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셨을까요?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인기와 명예를 단절하시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을 떠나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예수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셨습니다. 그래야 용기가 생기고, 그래야 결단할 수 있고, 그래야 고난의 길도 당당하게 갈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열두 명을 선택하시는데, 이 ‘열둘’이란 이스라엘에 흩어졌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또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을 뽑으셨지만, 마지막 모든 날에 그 열둘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가셨을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태복음 28:19)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전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성경은 이 열두 명을 세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마가복음 3:13)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더니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소가 ‘산’입니다. 오늘날 산은 세속화되어 성경이 말하는 산의 느낌이 깨졌지만, 성경에 나온 산은 세속과 단절된 곳입니다. 삶에서부터 떠나온 곳입니다.

제자로의 부름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산이란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장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소로 성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름 받게 됩니다. 또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사백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 전투를 벌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불꽃을 받으며 승리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란 기도하는 장소,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장소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하신 설교의 내용이 담겨 있어 ‘산상설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예수님이 산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셔서 하나님과 교제하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산에 오르셨을 때 옷이 천사처럼 하얗게 변하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신 장면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랍비들은 제자가 선생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를 선택한 것이기에 훨씬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전통과 하나님의 행동을 잇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단어를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같은 맥락 속에서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부름이란, 부르는 분이 없으면 곧 부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을 때도 그리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이사야 43장 1절 말씀입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아주 강력한 부름입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니 당당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의 특권을 누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름 앞에서 제자들은 나아왔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강제로 오신 분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 예배에 동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천재도, 영향력 있는 사람도, 학벌이 좋은 지식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은 어떤 눈으로 사람을 선발하시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오늘날 대기업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과는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 기업들이 인재를 뽑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치열합니다. 더 좋은 인재가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찾습니다. 그래서 필답고사를 시행합니다. 면접도 다각적으로 봅니다. 여러 방면으로 연구하여 그 사람의 본 모습을 파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애플이라는 회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인물을 뽑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한 사람, 창의력이 있는 사람, 도전성을 지닌 사람,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매진할 사람을 뽑는다고 광고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어떤 사람을 뽑는지 조사를 해봤습니다. 다 비슷비슷했습니다. 생각할 줄 알고 창의성을 지닌 사람, 도전할 줄 아는 사람, 글로벌 정신을 가진 사람, 신뢰성이 있는 사람, 열정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기 전문성을 가진 사람 등이었습니다.
여기에 맞추려면 보통의 실력으로는 어렵습니다. 인품도 갖춰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전문 분야에 탁월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열두 명을 살펴보면, 이런 느낌이 전혀 다가오지 않습니다. 창의성, 도전 정신, 전문성 등을 갖추었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투박하고 욕심이 많고, 다투고, 비전문성을 지닌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택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도 어떻게 사람을 택하실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말씀을 읽으며 알게 된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다림을 아는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당시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결핍증이 있었습니다. 무슨 결핍증일까요? 기다림 결핍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잘 돌아가기 때문에, 이미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기득권 속에 매몰되어 침몰하고 있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뽑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의 직업을 한 번 보십시오. 조롱받고 멸시받던 직업들입니다.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매국노로 조롱하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붙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변화해야 한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기다림을 갖고 있었습니다.
꿈이 있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기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힘 있게 만듭니까? 우리가 나이가 들고, 가진 것이 많으면 그 기다림을 자꾸만 차단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는 바로 이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름에 마치 강력한 자석에 끌려가듯 이끌려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라 했을 때, 다 따라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따라오라는 말에 “나는 못 갑니다. 나는 할 일이 많습니다. 내가 지금 바쁩니다.” 핑계를 대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새로운 자리에 응답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자원하여 결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 전체를 걸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용기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져도 용기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가졌어도 용기가 없으면 그 돈을 지혜롭게 쓰지 못하며 인생을 보냅니다. 용기는, 옳은 것을 향해서 삶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결단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수많은 것들이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맡기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용기가 생기지 않지만, 예수님께 한 번 내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예수님은 뽑으셨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찬란한 보석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원석을 택하셨습니다. 보석상에 진열되어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쓰신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묻혀 있어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원석과도 같은 사람들을 끄집어내서 갈고 닦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가진 사람을 예수님은 뽑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열매가 아닌 신앙의 씨앗, 사랑의 씨앗, 영성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라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내 인생이 얼마나 잘났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떠드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을 따라갑니까? 예수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니 창조성이 가득한 분이고, 예수님 속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 있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예수님만한 전문가가 없고,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끌어안는 글로벌한 정신을 가진 분입니다. 이런 분이 도대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선생님이 되셔서 예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님들이 예수님과의 사건을 끊임없이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알도록,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인격적으로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진 것을 아무리 자랑해 봐도 사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교회라고 다르겠습니까? 교회에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고민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늘 시험에 들게 됩니다. 문제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하나 소개 좀 해주시지요.” 목사님은 그 요청에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네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내게 소개 좀 해주게! 내가 그 교회의 교인이 되고 싶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만약 그런 교회를 찾게 되면 자네는 그 교회에 가지 말게나. 자네가 가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되지 않을 걸세.”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디에든 문제가 있습니다. 완벽한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성도, 예수님을 닮은 목사, 예수님을 닮은 장로, 권사, 집사가 있는 교회가 축복받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고, “이제 예수님께 배우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배우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가르침으로 열두 명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이렇게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모두 이 부름에 순전하게 순종하며 응답하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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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 13 ~ 19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본 적 있습니까?

러시아의 문호였던 톨스토이가 삶의 실존적 고뇌를 겪으면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동안 내 삶에 얹어 놓았던 어떤 것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버티게 해주던 것이 무너져 버렸으며 내 정신적인 삶이 이제는 끝나버렸음을 알았다.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삶에는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의 세력을 쳐부술 수 있는 목적이 있는 것인가?”
자기가 그동안 쌓아놓았던 삶의 모든 업적들이 어느 날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안전판이라고 여겼던 삶 전체가 마구 요동치는 것을 경험하면서,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계속해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질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심한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자살충동에도 자주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톨스토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크든 작든 자기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잘나가고 인기 많은 연예인들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황홀감을 한 번 맛보게 되면, 그것에 중독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박수 소리가 사라지면 너무 허무하고 공허해서 울며 탄식하고 싶은 심정이 듭니다.”
정치인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갑자기 국회의원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차지한 사람처럼 뻣뻣해집니다. 마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도도해집니다. 때로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박수를 치고 있는 이들이 돈과 권력으로 동원된 유권자라 할지라도, 그 허상의 바다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리고 거기에 중독이 됩니다. 그때마다 집도 팔고, 재산도 모두 내놓습니다. 때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임인데도 선거철만 되면 거기에 자기 인생을 올인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로 즐거운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예외일까요? 신앙인에게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남의 칭찬과 박수를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아주 위험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일종의 업적이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지가 나를 향한 다른 사람의 박수처럼 느껴지고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될 때, 신앙생활도 어느 순간 똑같은 허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신앙생활이 물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만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자체로 삶이 평안한 것입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예배 자체가 기쁨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새벽 기도에 나오고, 봉사와 전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용하시다니…’ 감격하며 그 자체로 기쁨이 충만해야 신앙이 오래 갑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나를 억누르는 족쇄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사실입니다.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에게 박수를 쳐 줄 단 한 사람이 없어도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위로하시는 분이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신 삶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인 저는 이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해 봅니다. 제가 제일 기쁜 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예배가 끝나 단에서 내려갈 때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증거하고 목회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구나.’ 때로는 빈 예배당에서 성도님들의 자리를 쳐다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 인생 전체를 드려도 결코 아깝지 않은 사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할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부르신 이들에게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명의 가장 모범적인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셨을까요?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인기와 명예를 단절하시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들을 떠나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예수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셨습니다. 그래야 용기가 생기고, 그래야 결단할 수 있고, 그래야 고난의 길도 당당하게 갈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열두 명을 선택하시는데, 이 ‘열둘’이란 이스라엘에 흩어졌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또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을 뽑으셨지만, 마지막 모든 날에 그 열둘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제자들에게 남기고 가셨을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태복음 28:19)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전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성경은 이 열두 명을 세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마가복음 3:13)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더니 제자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소가 ‘산’입니다. 오늘날 산은 세속화되어 성경이 말하는 산의 느낌이 깨졌지만, 성경에 나온 산은 세속과 단절된 곳입니다. 삶에서부터 떠나온 곳입니다.

제자로의 부름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산이란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장소,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소로 성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로 부름 받게 됩니다. 또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사백오십 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 전투를 벌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불꽃을 받으며 승리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란 기도하는 장소,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장소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셔서 하신 설교의 내용이 담겨 있어 ‘산상설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예수님이 산의 한적한 곳을 찾아가셔서 하나님과 교제하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산에 오르셨을 때 옷이 천사처럼 하얗게 변하면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신 장면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산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랍비들은 제자가 선생님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선생이 제자를 선택한 것이기에 훨씬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전통과 하나님의 행동을 잇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단어를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같은 맥락 속에서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부름이란, 부르는 분이 없으면 곧 부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을 때도 그리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이사야 43장 1절 말씀입니다.

…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아주 강력한 부름입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너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니 당당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의 특권을 누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름 앞에서 제자들은 나아왔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주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강제로 오신 분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 예배에 동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천재도, 영향력 있는 사람도, 학벌이 좋은 지식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은 어떤 눈으로 사람을 선발하시는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오늘날 대기업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과는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 기업들이 인재를 뽑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치열합니다. 더 좋은 인재가 어디에 있는지 열심히 찾습니다. 그래서 필답고사를 시행합니다. 면접도 다각적으로 봅니다. 여러 방면으로 연구하여 그 사람의 본 모습을 파악하려고 애를 씁니다.
애플이라는 회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최고의 인물을 뽑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마트한 사람, 창의력이 있는 사람, 도전성을 지닌 사람,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매진할 사람을 뽑는다고 광고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어떤 사람을 뽑는지 조사를 해봤습니다. 다 비슷비슷했습니다. 생각할 줄 알고 창의성을 지닌 사람, 도전할 줄 아는 사람, 글로벌 정신을 가진 사람, 신뢰성이 있는 사람, 열정을 가진 사람 그리고 자기 전문성을 가진 사람 등이었습니다.
여기에 맞추려면 보통의 실력으로는 어렵습니다. 인품도 갖춰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전문 분야에 탁월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열두 명을 살펴보면, 이런 느낌이 전혀 다가오지 않습니다. 창의성, 도전 정신, 전문성 등을 갖추었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투박하고 욕심이 많고, 다투고, 비전문성을 지닌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택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도 어떻게 사람을 택하실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말씀을 읽으며 알게 된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기다림을 아는 사람을 뽑으셨습니다. 당시 잘나가는 사람들에게는 결핍증이 있었습니다. 무슨 결핍증일까요? 기다림 결핍증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잘 돌아가기 때문에, 이미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기득권 속에 매몰되어 침몰하고 있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뽑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의 직업을 한 번 보십시오. 조롱받고 멸시받던 직업들입니다. 어부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매국노로 조롱하는 세리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별 볼일 없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붙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변화해야 한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꿈꾸며 기다림을 갖고 있었습니다.
꿈이 있다는 건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기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힘 있게 만듭니까? 우리가 나이가 들고, 가진 것이 많으면 그 기다림을 자꾸만 차단해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는 바로 이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름에 마치 강력한 자석에 끌려가듯 이끌려 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라 했을 때, 다 따라간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따라오라는 말에 “나는 못 갑니다. 나는 할 일이 많습니다. 내가 지금 바쁩니다.” 핑계를 대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기다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새로운 자리에 응답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자원하여 결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명 전체를 걸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용기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져도 용기가 없으면 무너집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가졌어도 용기가 없으면 그 돈을 지혜롭게 쓰지 못하며 인생을 보냅니다. 용기는, 옳은 것을 향해서 삶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결단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수많은 것들이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는 그런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맡기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용기가 생기지 않지만, 예수님께 한 번 내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예수님은 뽑으셨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찬란한 보석을 택하신 것이 아니라 원석을 택하셨습니다. 보석상에 진열되어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을 쓰신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묻혀 있어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원석과도 같은 사람들을 끄집어내서 갈고 닦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가진 사람을 예수님은 뽑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열매가 아닌 신앙의 씨앗, 사랑의 씨앗, 영성의 씨앗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라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의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내 인생이 얼마나 잘났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지 떠드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을 따라갑니까? 예수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니 창조성이 가득한 분이고, 예수님 속에는 지혜가 가득 들어 있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예수님만한 전문가가 없고,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 도전하는 분이시고, 예수님은 온 인류를 끌어안는 글로벌한 정신을 가진 분입니다. 이런 분이 도대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선생님이 되셔서 예수님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님들이 예수님과의 사건을 끊임없이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알도록,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스스로 내 삶을 돌아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인격적으로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진 것을 아무리 자랑해 봐도 사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교회라고 다르겠습니까? 교회에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기의 고민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늘 시험에 들게 됩니다. 문제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교회가 있으면 하나 소개 좀 해주시지요.” 목사님은 그 요청에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네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내게 소개 좀 해주게! 내가 그 교회의 교인이 되고 싶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만약 그런 교회를 찾게 되면 자네는 그 교회에 가지 말게나. 자네가 가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되지 않을 걸세.”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어디에든 문제가 있습니다. 완벽한 분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성도, 예수님을 닮은 목사, 예수님을 닮은 장로, 권사, 집사가 있는 교회가 축복받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부족함을 주님께 아뢰고, “이제 예수님께 배우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배우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가르침으로 열두 명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이렇게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모두 이 부름에 순전하게 순종하며 응답하는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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