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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오늘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친구의 권유로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내가 하도 가자고 하니 아내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온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제 믿음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썩 괜찮아 보이기는 했어도, 막상 믿음을 처음 갖게 될 때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예수님이 정말 생명과 진리이신가? 내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하면, 그때부터 예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어떤 성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의 오랜 기도와 초청으로 남편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교회는 나가보겠다. 설득이 되면 예수님도 믿기는 믿겠다. 하지만 내게 이것저것 요구하지는 말라. 집에서 나더러 기도하라고 말하지 말라. 매주일 예배에 참여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다른 사람들도 다 하니까 나도 헌금을 드리기는 드릴 텐데 십의 일조를 내라고 말하지 말라. 다른 날도 교회에 나와서 이것저것 봉사하라고 말하지 말라. 또 전도하라고, 선교 여행을 함께 가자고 강요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인 것은 압니다. 좋은 분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깊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다가 내가 예수쟁이가 되는 건 아닐까?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의 자리를 떠날 준비, 변화될 준비와 용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라는 생활 터전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 세관에서의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뒤따랐다는 것은 그들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리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단숨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여러 과정과 굴곡을 거치면서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명을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복주의적인 신앙에서 출발했습니다. 기복주의적인 신앙과 기복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실 때에도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너를 통해서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복, 육체적인 복, 정신과 영혼의 복을 다 포괄한 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아니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이어오면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결해 주세요. 내 몸이 연약합니다. 강하게 해주세요. 내 아들, 내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하는 일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이러한 기도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복신앙이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복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육체의 복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순간 기복신앙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사모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을까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정작 예수님의 인격은 잘 모르면서 선물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이런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말씀하시고 그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풍성하게 먹이셨습니다. 아프고 병 걸린 자들을 만져서 고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것들에만 집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시작하시되 그들의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하나하나 깨뜨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업 기간이 약 3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의 이기적인 탐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이 기복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지 못하고 탐욕적인 신앙, 거짓 신앙으로 멈춰서게 됩니다.
지난 주일, 이야기 나눈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도 처음에는 기복주의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비를 경험하면서 그의 기복주의 신앙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 앞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이 언제 생깁니까? 사랑할 때 생깁니다. 사랑 없이 인간적인 욕망만이 있을 때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줄 알아야 사람을 살리는 사명감을 느끼고,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사명감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 같은 자에게도 믿음을 주시고 내게도 해야 할 사명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격스럽습니다.” 기복주의적인 제자들을 붙잡으시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들로 세우게 된 것은 3년의 훈련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 선교의 비전을 주시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려 하십니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제도가 필요합니다.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환경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자본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세워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관심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하실 때, 지식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비판이나 조롱은 잘해도 헌신과 섬김에는 약했습니다. 종교인들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갖고 있는 종교적인 가치관과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기득권을 가졌기에 지금의 삶과 현재의 모든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버려진 사람들을 부르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공동체는 다릅니다. 부활의 공동체에서는 지식인도, 종교인도, 부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가든지 못나가든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감동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잘나간다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뻐길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존중과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믿음이 있는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은 의심이 있는 사람들도 택하셨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교차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17)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을 몇 차례 봤음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심은 순간적인 것이었을까요? 오래 지속되었을까요?
저는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신앙이 온전해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의심하면서도 예수님을 전해야 했습니다. 언제가 되어야 내가 온전히 예수님을 알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의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의심이 있습니다. 젊을 때에는 젊음의 의심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이 든 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것이 정말일까?’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는 의심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의심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의심보다 더 큰 믿음을 키우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신앙의 지도자였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의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끄집어내라.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모세는 의심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걱정하면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버거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의심이 들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순종입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하라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라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연약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믿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됨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 털어놓고 질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고 당신은 누구신가요?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바르게 나가야 될까요?” 믿음이 있을 때, 성령 충만하여 가슴이 벅찰 때 주님께 물어보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심이 50 있고, 믿음이 50 있습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흔들흔들 거립니다. 주일날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는 믿음이 90이 되고 의심이 10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나가서 주차장에 갔더니 앞에 차가 가로막고 있어 차를 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순간 믿음이 10으로 떨어지고 의심과 분노가 90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삶의 순간마다 우리의 믿음과 의심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믿음과 의심이 50 대 50일 때, 의심에 지지 않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의심의 50에서 딱 하나만 빼는 것입니다. 50을 다 믿음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게 못합니다. 하나만 빼는 것입니다. 하나만 빼서 믿음으로 보내면, 믿음이 51이 되고 의심이 49가 됩니다. 그때 생각하고 그때 결정하고 그때 말하고 그때 행동하는 것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삶은 이런 일들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면 의심의 돌덩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그러면 그것이 내 삶의 좋은 습관이 되어서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돕고,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나를 뒤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 공동체에 사명을 주십니다.
다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셨습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도 부활의 공동체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자신의 형임에도 불구하고 미친 것이 아니냐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던 동생 야고보도 부활 공동체에 들어오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공동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특권 계급층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인격에 접근하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이 부활의 공동체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심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명을 주실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여기에서 큰 동사는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를 만들라고 하십니까? 세 가지 분사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첫째는 가라는 것이고 둘째는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의 주거지역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세상을 향해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기본적인 삶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한마디로 베이스캠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와서 예배드리고,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러고 나서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서 나갈 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란 무엇일까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잠겨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셔서 익명의 사람이던 나를 예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시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교회를 수년 동안 나오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이 있다면 세례를 받으실 것을 권합니다. “나는 더 이상 익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 치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배우는 종교입니다.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을 배우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예수님과 함께한 사랑의 이야기를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 이름을 내가 붙잡겠다”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그분이 생명이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신 것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경험했던 그 예수님을 이제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믿은 예수님, 내 실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주님, 죄악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불러주신 그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고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건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전도나 선교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곧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곧 부활의 증인입니다.
내 속에 예수님과의 이 사랑의 사건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이 감격스러운 사건을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8: 16 ~ 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쟁이’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오늘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친구의 권유로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내가 하도 가자고 하니 아내의 체면을 생각해서 나온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제 믿음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썩 괜찮아 보이기는 했어도, 막상 믿음을 처음 갖게 될 때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예수님이 정말 생명과 진리이신가? 내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하면, 그때부터 예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어떤 성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의 오랜 기도와 초청으로 남편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교회는 나가보겠다. 설득이 되면 예수님도 믿기는 믿겠다. 하지만 내게 이것저것 요구하지는 말라. 집에서 나더러 기도하라고 말하지 말라. 매주일 예배에 참여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다른 사람들도 다 하니까 나도 헌금을 드리기는 드릴 텐데 십의 일조를 내라고 말하지 말라. 다른 날도 교회에 나와서 이것저것 봉사하라고 말하지 말라. 또 전도하라고, 선교 여행을 함께 가자고 강요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위대한 인물인 것은 압니다. 좋은 분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깊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다가 내가 예수쟁이가 되는 건 아닐까?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삶의 자리를 떠날 준비, 변화될 준비와 용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라는 생활 터전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 세관에서의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뒤따랐다는 것은 그들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리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단숨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여러 과정과 굴곡을 거치면서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명을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복주의적인 신앙에서 출발했습니다. 기복주의적인 신앙과 기복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실 때에도 “아브라함아, 네가 복이다. 너를 통해서 세상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복, 육체적인 복, 정신과 영혼의 복을 다 포괄한 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아니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이어오면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가정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결해 주세요. 내 몸이 연약합니다. 강하게 해주세요. 내 아들, 내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제가 하는 일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이러한 기도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복신앙이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복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육체의 복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그 순간 기복신앙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사모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을까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정작 예수님의 인격은 잘 모르면서 선물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이런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십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 말씀하시고 그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풍성하게 먹이셨습니다. 아프고 병 걸린 자들을 만져서 고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것들에만 집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인격을 알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시작하시되 그들의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하나하나 깨뜨리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업 기간이 약 3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신들의 이기적인 탐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과정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이 기복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까? 예수님을 믿고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지지 못하고 탐욕적인 신앙, 거짓 신앙으로 멈춰서게 됩니다.
지난 주일, 이야기 나눈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도 처음에는 기복주의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고비를 경험하면서 그의 기복주의 신앙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의 질문 앞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명이 언제 생깁니까? 사랑할 때 생깁니다. 사랑 없이 인간적인 욕망만이 있을 때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줄 알아야 사람을 살리는 사명감을 느끼고,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사명감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 같은 자에게도 믿음을 주시고 내게도 해야 할 사명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감격스럽습니다.” 기복주의적인 제자들을 붙잡으시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들로 세우게 된 것은 3년의 훈련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의 사명, 선교의 비전을 주시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려 하십니까?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제도가 필요합니다.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환경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자본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세워야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관심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하실 때, 지식인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비판이나 조롱은 잘해도 헌신과 섬김에는 약했습니다. 종교인들로부터 시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갖고 있는 종교적인 가치관과 판단으로 남을 정죄하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부자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기득권을 가졌기에 지금의 삶과 현재의 모든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버려진 사람들을 부르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공동체는 다릅니다. 부활의 공동체에서는 지식인도, 종교인도, 부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잘나가든지 못나가든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에 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인격에 감동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잘나간다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뻐길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존중과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믿음이 있는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지금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은 의심이 있는 사람들도 택하셨습니다. 의심과 믿음이 교차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일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복음 28:17)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을 몇 차례 봤음에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의심은 순간적인 것이었을까요? 오래 지속되었을까요?
저는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신앙이 온전해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의심하면서도 예수님을 전해야 했습니다. 언제가 되어야 내가 온전히 예수님을 알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누구에게나 의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의심이 있습니다. 젊을 때에는 젊음의 의심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나이 든 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것이 정말일까?’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는 의심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의심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의심보다 더 큰 믿음을 키우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지혜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신앙의 지도자였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의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끄집어내라.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모세는 의심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걱정하면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버거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의심이 들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 순종입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하라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라 말씀하셨으니 의심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연약한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믿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됨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 털어놓고 질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이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누구고 당신은 누구신가요?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바르게 나가야 될까요?” 믿음이 있을 때, 성령 충만하여 가슴이 벅찰 때 주님께 물어보셔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의심이 50 있고, 믿음이 50 있습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흔들흔들 거립니다. 주일날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는 믿음이 90이 되고 의심이 10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을 나가서 주차장에 갔더니 앞에 차가 가로막고 있어 차를 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순간 믿음이 10으로 떨어지고 의심과 분노가 90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삶의 순간마다 우리의 믿음과 의심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믿음과 의심이 50 대 50일 때, 의심에 지지 않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의심의 50에서 딱 하나만 빼는 것입니다. 50을 다 믿음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게 못합니다. 하나만 빼는 것입니다. 하나만 빼서 믿음으로 보내면, 믿음이 51이 되고 의심이 49가 됩니다. 그때 생각하고 그때 결정하고 그때 말하고 그때 행동하는 것들은 믿음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삶은 이런 일들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한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면 의심의 돌덩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그러면 그것이 내 삶의 좋은 습관이 되어서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돕고, 모든 일들을 결정할 때 나를 뒤따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 공동체에 사명을 주십니다.
다시 성경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셨습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도 부활의 공동체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자신의 형임에도 불구하고 미친 것이 아니냐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던 동생 야고보도 부활 공동체에 들어오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공동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특권 계급층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인격에 접근하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이 부활의 공동체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심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사명을 주실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여기에서 큰 동사는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를 만들라고 하십니까? 세 가지 분사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첫째는 가라는 것이고 둘째는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의 주거지역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세상을 향해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기본적인 삶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한마디로 베이스캠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통해 믿음, 소망,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와서 예배드리고, 와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러고 나서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향해서 나갈 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란 무엇일까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잠겨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고 세우셔서 익명의 사람이던 나를 예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시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교회를 수년 동안 나오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은 분이 있다면 세례를 받으실 것을 권합니다. “나는 더 이상 익명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 치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배우는 종교입니다.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하신 말씀을 배우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예수님과 함께한 사랑의 이야기를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우리에게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으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 이름을 내가 붙잡겠다”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신앙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그분이 생명이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신 것을 삶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경험했던 그 예수님을 이제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믿은 예수님, 내 실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주님, 죄악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불러주신 그 사랑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고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활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건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전도나 선교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곧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곧 부활의 증인입니다.
내 속에 예수님과의 이 사랑의 사건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가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의 이 감격스러운 사건을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