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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고린도전서 15: 19 ~ 26

김지철 목사

2010.04.04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부활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기쁜 날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서해 천안함 폭발사고로 인해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고소식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살신성인한 한주호 준위의 영웅적인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국군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슬픔을 지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에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좌절시킵니다. 죽음은 인간을 탄식하게 하고 신음하게 만듭니다. 때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태연한척할 때도 있습니다.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시하며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심한 척한들 우리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든 수도승에게 질문합니다. “죽음의 길이 위험하고 험난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수도승이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승길은 아주 평탄하답니다. 누구든 두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눈을 감고 떠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편안히 갈 수 있는 길일까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나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라도 가슴이 떨리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옆에 누가 죽든, 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있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상실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의 자리로부터 이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픈 것입니다. 또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 할 수 없고 누군가와 함께 죽음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외된 아픔이 있습니다. 버림받는다는 고통이 있습니다. 영적인 두려움도 있습니다. 죽게 되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생전에 지었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두려워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임종환자 수천 명을 지켜보면서 도왔던 호스피스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그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에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위로를 받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이란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것을 승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 받을 만한 귀한 존재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응어리졌던 것들을 풀고 삶을 행복하게 마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둔 삶의 현실 속에서 다시금 부활을 선포해야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약속,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부활을 믿을 수 없을까요? 충격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놓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순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도 의심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면서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을 때 당황했다고 기록합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8)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1)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3)

그만큼 부활은 파격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생소한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을 나의 삶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파격적인 변화를 보면 확실해집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부활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만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났다면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죄용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달려갔던 믿음의 순교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심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에 자신의 전체를 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책임지기 싫어하고 남에게 핑계를 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세상을 향해서 거리낌 없이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사신 것에 대한 증인이다! 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며 조롱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남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없다면 부활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생명을 걸고 전도를 했습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배를 불리려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들이 사람에게 뽐내려고 했습니까? 자신들의 모자란 것들을 채우려고 했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전한 이유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이 축복받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거짓된 바탕에 세워진 종교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부활이 없는 종교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셨구나! 나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리라!’ 이것이 복음이요 부활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사랑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꿈을 꾸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전을 상실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온 세계를 가슴에 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리라!’ 그들에게 인생의 꿈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이 축복받는 모습을 보기 원했던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모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인간을 피폐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를 깨닫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죽음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담대하게 죽을 수 있도록,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감사하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을 기대하며 죽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낯선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이시요 부활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영어로 “Good bye!”라고 인사합니다. ‘Good bye’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God be with you.”라고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과 함께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나와는 헤어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켜줄 거야.”, “내가 너와 동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너와 동행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기를 축복하는 인사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임마누엘의 역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서 생명의 기쁨을 알고 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합니다. “차 한 잔 너무 감사합니다. 내 얼굴에 닿는 햇살 한 줌, 아이들의 조잘대는 말소리, 그동안 들어도 듣지 못했던, 보아도 보지 못했던 아주 작은 기쁨들조차도 너무 경이롭습니다.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의 따듯한 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죽음을 이해할 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인생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선물임을 찬탄하면서 사는 것이 부활의 역사요, 부활의 축복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에 모든 것을 내던진 주의 사도로 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굶기도 했고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수많은 풍파를 견뎠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가슴속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찌든 저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저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랴!’ 바울은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이 축복이요, 호흡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달려갔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14)

바울에게는 내가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삶이 소중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사건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폭풍이 치고 있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침이 되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부활이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상황과 여건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네게 새 생명을 주었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세상 만방에 선포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의 어두운 역사를 빛의 역사로, 이 땅의 절망과 탄식의 자리를 소망의 자리로, 이 땅의 신음소리를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꿔나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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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 19 ~ 26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부활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기쁜 날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서해 천안함 폭발사고로 인해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사고소식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살신성인한 한주호 준위의 영웅적인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국군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가슴 아픈 슬픔을 지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시리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죽음은 인간에게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을 좌절시킵니다. 죽음은 인간을 탄식하게 하고 신음하게 만듭니다. 때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 태연한척할 때도 있습니다.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시하며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심한 척한들 우리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든 수도승에게 질문합니다. “죽음의 길이 위험하고 험난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수도승이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승길은 아주 평탄하답니다. 누구든 두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눈을 감고 떠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편안히 갈 수 있는 길일까요?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나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라도 가슴이 떨리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 옆에 누가 죽든, 내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있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설 때마다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이 상실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삶의 자리로부터 이별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픈 것입니다. 또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혼자 죽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 할 수 없고 누군가와 함께 죽음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소외된 아픔이 있습니다. 버림받는다는 고통이 있습니다. 영적인 두려움도 있습니다. 죽게 되면 어떻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내가 생전에 지었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두려워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임종환자 수천 명을 지켜보면서 도왔던 호스피스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그가 쓴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에서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위로를 받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죽음이란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것을 승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 받을 만한 귀한 존재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응어리졌던 것들을 풀고 삶을 행복하게 마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둔 삶의 현실 속에서 다시금 부활을 선포해야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약속,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 부활을 믿을 수 없을까요? 충격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되돌려 놓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순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활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면서도 의심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면서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목격했을 때 당황했다고 기록합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가복음 16:8)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1)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마가복음 16:13)

그만큼 부활은 파격적인 것입니다. 부활은 생소한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을 나의 삶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파격적인 변화를 보면 확실해집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일까요? 부활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만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났다면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죄용서가 없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면서 달려갔던 믿음의 순교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만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면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의심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확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에 자신의 전체를 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책임지기 싫어하고 남에게 핑계를 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세상을 향해서 거리낌 없이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었다가 사신 것에 대한 증인이다! 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다!” 그들은 남을 비난하며 조롱하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남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없다면 부활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고 생명을 걸고 전도를 했습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배를 불리려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들이 사람에게 뽐내려고 했습니까? 자신들의 모자란 것들을 채우려고 했습니까?
그들이 복음을 전한 이유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보다 다른 사람이 축복받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거짓된 바탕에 세워진 종교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부활이 없는 종교가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구나! 나 같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시고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셨구나! 나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리라!’ 이것이 복음이요 부활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사랑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를 감당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꿈을 꾸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전을 상실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과 사랑을 경험하면서 온 세계를 가슴에 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리라!’ 그들에게 인생의 꿈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이 축복받는 모습을 보기 원했던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모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인간을 피폐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를 깨닫는 사람들만이 부활의 생명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죽음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담대하게 죽을 수 있도록, 아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감사하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을 기대하며 죽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낯선 것이지만, 영원한 생명이시요 부활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영어로 “Good bye!”라고 인사합니다. ‘Good bye’의 어원은 무엇일까요? “God be with you.”라고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과 함께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신이 나와는 헤어지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켜줄 거야.”, “내가 너와 동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너와 동행하실 거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기를 축복하는 인사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임마누엘의 역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 부활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서 생명의 기쁨을 알고 난 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합니다. “차 한 잔 너무 감사합니다. 내 얼굴에 닿는 햇살 한 줌, 아이들의 조잘대는 말소리, 그동안 들어도 듣지 못했던, 보아도 보지 못했던 아주 작은 기쁨들조차도 너무 경이롭습니다.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의 따듯한 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죽음을 이해할 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인생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선물임을 찬탄하면서 사는 것이 부활의 역사요, 부활의 축복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에 모든 것을 내던진 주의 사도로 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굶기도 했고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수많은 풍파를 견뎠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가슴속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에 찌든 저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저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랴!’ 바울은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이 축복이요, 호흡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그의 전 생애를 달려갔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14)

바울에게는 내가 주님과 함께 더불어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삶이 소중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사건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폭풍이 치고 있습니까? 어두움 가운데 있습니까?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아침이 되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부활이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상황과 여건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네게 새 생명을 주었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세상 만방에 선포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의 어두운 역사를 빛의 역사로, 이 땅의 절망과 탄식의 자리를 소망의 자리로, 이 땅의 신음소리를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꿔나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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