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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믿음의 사건

마가복음 16: 9 ~ 15

김지철 목사

2017.04.16

믿음이 없다면 부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찬란한 아침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도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하고 부활절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 소식을 네 복음서도 한결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셨으나, 이로써 예수님의 이야기가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다른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현실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 이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이는 어떤 종교에도 없고, 어떤 철학자의 글이나 사상에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신앙만 부활을 가르치며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후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첫 반응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복 구절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절) “두 사람이 …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3절) 더욱이 예수님이 열한 제자가 함께 식사하던 날 그들 가운데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반복됩니다.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절)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제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상할 수도 없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렇듯 부활은 놀람을 넘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종종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는 제자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말했을 때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증언했을 때도 믿지 못했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당시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까요? 일반적인 사고와 인식으로는 부활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부활을 빼고 모든 것을 믿는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활을 빼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참 믿음일까요? 그런 이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은 거짓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아마 도굴꾼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는 게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을 때, 누구나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과정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습니다. 또, 군병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죽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자신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10장 40~41절입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0:40~41)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선전하신 게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났다고,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보라고 광고하거나 자신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떨고 있던 믿음의 친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어라. 너희도 나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을 얻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다가서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부정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 무덤을 보며 ‘그것은 제자들이 꾸민 사건이 아니냐’고, ‘시신을 도난당한 것 아니냐’고 비아냥댑니다. 또, ‘몹시도 부활을 기다리던 한 여인, 즉 미치광이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냐’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부활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아편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말씀을 읽어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조차 하나님의 감추어진 영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군인들과 대자사장, 율법학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믿음의 비밀스런 사건으로 이 부활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강제로 하나님을 믿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직접 모든 이들에게 나타났다면, 그 순간 인간들은 끝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은 질식할 수밖에 없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영광의 주님을 목격하는 것 자체가 재앙인 까닭입니다.
구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조차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요, 인간의 종말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끝까지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종말을 미루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영광 중에 오실 때까지 그날을 미뤄두고 계십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겐 부활 신앙 전파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고, 지금은 믿음의 시기며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가장 낮은 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미약한 데서부터 부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를 아는 자들이 낮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증인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여인, 변두리로 내몰렸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가장 먼저 부활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이자 가장 소외되었던 여인이 가장 먼저 부활 사건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전적으로 믿음의 사건입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죄 많은 여인에게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이렇게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 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6:14 중)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이리 마음이 딱딱해졌느냐?”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던 슬픔이나 절망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지함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심이 부활 신앙을 가로막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편견을 깨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향해 내 마음의 눈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우리의 경험과 사고, 이해의 폭을 깨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지금 내가 탄식하는 것, 지금 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내가 절망하고 있는 것, 그 모든 게 최종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부활이 이 경험을 우리에게 열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 어둡고 무거울지라도, 그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면서 새 희망을 선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하시며, 이 부활의 복음을 세상에 증언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6:15)

부활 신앙으로 삶을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부활의 생명을 내 삶의 자리에 어떻게 끌어당길 수 있는 걸까요?
먼저 이 세상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모든 삶의 순간을 우연성으로 내몹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를 용인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혼이 핍절해집니다. 영혼의 경탄도 사라집니다. 이 세상이 신비한 생명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지식과 능력이라고. 또, 기술과 정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생명의 신비, 부활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망각하며 사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 이런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시리던 추위도 조금씩 누그러들고 찬란한 봄이 다가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자 어느새 새싹이 돋아납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도 만발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 만물의 소생 속에 생명의 신비함을 경험합니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자연 속에서도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를 드립니다. 1년이면 52주입니다.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곧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서히 주일로 예배드리는 시간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안식일을 귀히 여기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그날이 구원의 정점이자 인류의 새 희망의 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용서 받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의 의로운 선물을 받는 그날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인 오늘,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까? 혹은 아픔이 있습니까? 몸이 아프십니까? 그 모든 것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 아뢰십시오.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절망스럽다면, 그 절망마저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써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듣고 배우고 깨닫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축복의 자리이자 새 출발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다가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와 부활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얻으며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마지막을 확실히 붙들고 계시다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그날을 고대하며, 또 그날을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내 인생이 척박하더라도, 지금 내가 패배자처럼 보일지라도, 슬픔과 탄식이 내게 몰려와 나를 억압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고난에 굴복하지 마라. 결코 네 인생을 포기하지 마라. 지금 그 자리가 결코 마지막 자리가 아니다. 부활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순간을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동시에 희망의 사건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 우리의 모든 삶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써야할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혹여 오늘 내가 병들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간다 해도, 결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님,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로운 새 생명의 이야기를 다시 쓰게 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매일매일 새롭게 삶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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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 9 ~ 15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음이 없다면 부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찬란한 아침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부활절 아침입니다. 우리 옆에 계신 분들과도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하고 부활절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 놀라운 부활 소식을 네 복음서도 한결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셨으나, 이로써 예수님의 이야기가 종결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다른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이란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서 있는 현실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 이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이는 어떤 종교에도 없고, 어떤 철학자의 글이나 사상에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신앙만 부활을 가르치며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후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첫 반응은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복 구절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11절) “두 사람이 …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13절) 더욱이 예수님이 열한 제자가 함께 식사하던 날 그들 가운데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반복됩니다.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14절)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제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예상할 수도 없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렇듯 부활은 놀람을 넘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종종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는 제자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말했을 때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증언했을 때도 믿지 못했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당시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까요? 일반적인 사고와 인식으로는 부활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부활을 빼고 모든 것을 믿는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활을 빼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이 참 믿음일까요? 그런 이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 증언은 거짓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아마 도굴꾼이 시신을 훔쳐갔다고 말하는 게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셨을 때, 누구나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과정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습니다. 또, 군병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죽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자신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10장 40~41절입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10:40~41)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선전하신 게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났다고, 그러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보라고 광고하거나 자신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워 떨고 있던 믿음의 친구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믿어라. 너희도 나의 부활을 통해 새 생명을 얻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에게 다가서셨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부정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 무덤을 보며 ‘그것은 제자들이 꾸민 사건이 아니냐’고, ‘시신을 도난당한 것 아니냐’고 비아냥댑니다. 또, ‘몹시도 부활을 기다리던 한 여인, 즉 미치광이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냐’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부활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아편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말씀을 읽어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조차 하나님의 감추어진 영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군인들과 대자사장, 율법학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믿음의 비밀스런 사건으로 이 부활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강제로 하나님을 믿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직접 모든 이들에게 나타났다면, 그 순간 인간들은 끝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인간은 질식할 수밖에 없고 멸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영광의 주님을 목격하는 것 자체가 재앙인 까닭입니다.
구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종 모세조차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요, 인간의 종말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 끝까지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종말을 미루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영광 중에 오실 때까지 그날을 미뤄두고 계십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겐 부활 신앙 전파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고, 지금은 믿음의 시기며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 진리를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가장 낮은 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미약한 데서부터 부활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를 아는 자들이 낮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증인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던 여인, 변두리로 내몰렸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가장 먼저 부활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이자 가장 소외되었던 여인이 가장 먼저 부활 사건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전적으로 믿음의 사건입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나와 같은 죄인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다는 믿음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연약하고 죄 많은 여인에게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자 이렇게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 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6:14 중)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이리 마음이 딱딱해졌느냐?” 어쩌면 제자들에게 있던 슬픔이나 절망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지함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심이 부활 신앙을 가로막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편견을 깨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향해 내 마음의 눈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우리의 경험과 사고, 이해의 폭을 깨는 역할을 합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 지금 내가 탄식하는 것, 지금 내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내가 절망하고 있는 것, 그 모든 게 최종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부활이 이 경험을 우리에게 열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하는 현실이 어둡고 무거울지라도, 그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란 사실을 알려주면서 새 희망을 선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하시며, 이 부활의 복음을 세상에 증언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행전 16:15)

부활 신앙으로 삶을 새롭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부활의 생명을 내 삶의 자리에 어떻게 끌어당길 수 있는 걸까요?
먼저 이 세상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모든 삶의 순간을 우연성으로 내몹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를 용인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혼이 핍절해집니다. 영혼의 경탄도 사라집니다. 이 세상이 신비한 생명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지식과 능력이라고. 또, 기술과 정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생명의 신비, 부활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망각하며 사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 이런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뼛속까지 시리던 추위도 조금씩 누그러들고 찬란한 봄이 다가옵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자 어느새 새싹이 돋아납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도 만발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 만물의 소생 속에 생명의 신비함을 경험합니다.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을 보며,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자연 속에서도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를 드립니다. 1년이면 52주입니다. 주일은 어떤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이 곧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 곧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서히 주일로 예배드리는 시간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안식일을 귀히 여기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 그날이 구원의 정점이자 인류의 새 희망의 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용서 받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하나님의 의로운 선물을 받는 그날이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인 오늘,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십시오. 마음에 슬픔이 있습니까? 혹은 아픔이 있습니까? 몸이 아프십니까? 그 모든 것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 아뢰십시오. 지금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절망스럽다면, 그 절망마저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써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듣고 배우고 깨닫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이 자리가 축복의 자리이자 새 출발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다가도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와 부활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얻으며 용기를 얻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마지막을 확실히 붙들고 계시다는 징표입니다. 우리는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그날을 고대하며, 또 그날을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내 인생이 척박하더라도, 지금 내가 패배자처럼 보일지라도, 슬픔과 탄식이 내게 몰려와 나를 억압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고난에 굴복하지 마라. 결코 네 인생을 포기하지 마라. 지금 그 자리가 결코 마지막 자리가 아니다. 부활 생명으로 다시 일어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순간을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은 믿음의 사건입니다. 동시에 희망의 사건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사건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 우리의 모든 삶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써야할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혹여 오늘 내가 병들어 죽음의 자리에 들어간다 해도, 결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님,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로운 새 생명의 이야기를 다시 쓰게 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매일매일 새롭게 삶을 열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4월 1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부활믿음의 사건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⑵ 찬송가 164, 16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⑷ 막 16:9-15 을 읽고 나눕니다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종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다음 이야기가 있습니다부활입니다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지금 서 있는 현실이 마지막이 아님을우리의 현실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표증입니다.

설교의 요약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그리고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제자들이 처음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10, 13, 14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충격적이었습니다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었지만실제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그래서 부활은 단순한 놀람을 넘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제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부활의 소식이란 정상적인 인식과는 너무 머리가 먼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다른 것은 다 믿어도 부활만큼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부활을 빼고 예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이 참 믿음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던 사건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공개적인 사건입니다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고 보여졌습니다.(10: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사셨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거나 광고하지 않으셨습니다부활한 예수님을 인정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믿음의 비밀스러운 사건으로 남겨두셨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직접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면그 순간 그 거룩함으로 인해 죄인인 인간은 질식하고 멸망할 것입니다그것은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요인간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마지막 때까지 연장하셨습니다그리고 부활을 본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은 가장 낮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했습니다관심 밖의 여인변두리에 내몰렸던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에게서부터 부활의 소식이 시작되었습니다부활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사건은혜의 사건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믿음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을 꾸짖었습니다절망이분노가무지함이의심하는 마음이 눈을 가리고 있었습니다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눈을 열고그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그리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지금 처해있는 무섭고 어두운 현실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희망을 가르쳐줍니다예수님이 희망입니다이 놀라운 사실을 온 세계에 전파하라 말씀하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며 어떻게 부활의 생명을 내 삶의 자리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요자연만물의 소생 속에서 생명의 신기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매 주일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며 생명의 주님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확실히 붙들고 계시다는 증표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이미 승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부활의 소망을 주신 주님과 함께 다시 써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부활의 소망을 안고 새로운 삶을 열어 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가져다 준 은혜와 감격이 있었다면 서로에게 이야기해봅시다.

2.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신 예수님이미 승리를 주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지금 내가 인생 속에서 감당하고 이겨내야 할 일들이 있다면 무엇일지 나눠봅시다.

3.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해줘야 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과 승리를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오늘이 마지막이 아님을 기억하며부활의 생명과 소망을 누리며 지금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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